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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耽古樓主 2023. 5. 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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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홍순혁(洪淳赫)

 

1. 유적

 

신라 고도(古都) 경주 채 못 미처에 서악리(西岳里)라는 촌락이 있어 학자들과 탐승객(探勝客)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고 있다. 그곳에 있는 무수한 고분구적(古墳舊蹟) 중에 제일로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신(碑身) 없는 한 개의 귀부(龜趺)와 이수이다.

 

귀부라 함은 비석을 앉히기 위하여 만든, 도사려 앉은 거북 모양의 기석(基石)이요, 이수라 함은 비석 위에 놓는 것으로 소위 뿔(角) 없는 용(龍;이시미)의 머리를 새긴 돌이다. 경주 부근에만 보이는 귀부가 한둘이 아니지만 크기로나 조각으로나 이만한 것이 없으니 폭이 8척 4촌, 길이가 11척, 높이가 2척 8촌 6푼이나 되는 거대한 거북으로 화강암에 정치(精緻)를 다하여 새겨 있어 두부(頭部)로부터 사지(四趾)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으로 웅려한 기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더욱 턱 아래(頷下)에 있는 보상화문(寶相花文)이라든가 갑(甲)의 연변(蓮邊)에 새겨 있는 비운문(飛雲文)에서는 반도 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의 미를 넉넉히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갑에 보이는 귀갑문(龜甲文), 비신을 세우는 碑座의 연판(蓮瓣), 연판의 내면에 새겨 있는 당초문양(唐草文樣)들은 모두가 곡선과 직선이 유감없이 조화되어 미와 힘(力)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귀부 위에 비신이 남아 있다 하면 역사상 자료로는 물론, 고고학상 미술사상 얼마나 진귀하였으랴. 다만 비신 위에 놓여 있던 이수가 귀부 위에 놓여 있을 뿐, 이것 역시 희귀한 것으로 폭이 4척 8촌, 후(厚)가 1척 1촌, 고(高)가 3척 6촌 5푼, 여섯 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등을 지고 얽혀서 윤곽을 이루고 있는데 안팎의 용이 각각 후지(後趾)를 들어 보주(寶珠)를 받들고 있는 구도는 도저히 후인의 추수(追隨)를 불허하는 바로, 형상이든지 선이든지가 모두 복잡하고도 섬세한 기교로 되어 있으되 역강(强)함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미술공예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고(故) 관야정(關野貞)박사는 그의 저서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에

“여(余)는 지나에서 종래 다수의 당비(唐碑)를 보았지만 이에 비적(比敵)할 만한 것을 발견치 못하였다. (중략) 그 비신을 잃은 것은 아깝지만 이수의 웅혼(雄渾)하고 귀부의 정려(精麗)함은 조선 비석 중의 최고(最古) 최우(最優)한 표본이다.”(같은 책 112면)

라고 절찬하고 있다.

 

그러면 이 무신(武身)의 비는 누구의 것인가. 이수 중앙에 세로 1척 6촌, 가로 1척 1촌이나 되는 두 줄로 쓴 전액(篆額)이 있어 양각으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그 주인공이 누구임을 밝히고 있다.

전액(篆額):전자(篆字)로 쓴 비갈이나 현판의 제액(題額).

 

서(西)에 그 주(周) 57간, 고(高) 6간여나 되는 고분군 중 특별히 큰 동왕의 능과 아울러 무열왕의 위업을 무언중에 여실히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우리는 가지는 것이다.

 

 

2. 위업

 

태종무열왕의 유적이 고고미술학상 절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영주(英主)로서의 위업은 신라 반도 통일운동의 성공―정직하게 말하면 백제를 멸하여 그 기초를 닦은 데 있다.

 

그러면 당시 신라의 국제적 위치·환경은 어떠하였던가.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이 반도와 만주를 중심삼아 전후하여 정족(鼎足)의 세로 건국되자 고구려는 현금의 만주와 노령 연해주를 합한 큰 판도를 가진 외에 점차 남하하면서 북선(北鮮) 지방을 차지하여 조선사상 유일의 대국가를 형성하였었고, 백제는 서남지방에 반거(蟠據)하여 또한 일방(一方)의 웅(雄)을 이루고 있었는데 작은 강토로 동남 一隅에 고립한 형세로 또한 지나와의 거리도 멀어 비교적 문화의 발전이 더디었던 나라가 곧 신라였다.

반거(蟠據):넓고 튼튼한 토지를 차지하여 의거함.

 

그중 북방의 대국(大國)인 고구려의 세위(勢威)는 나·제 양국을 합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양국은 연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서기 433년 이래 약 120년간 이 형세는 계속되었었다. 신라는 이 연맹을 이용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니 먼저 지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지증왕(500~514) 시대에는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모든 제도를 일신하였으며, 그 다음 왕 법흥왕(514~540) 시대에는 일방으로 더욱 지나 문화를 수입하는 동시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영토 확장에 착수하여 남으로 금관국(金官國;金海)을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 왕인 진흥왕(540~576)은 비교적 오래 재위한 분이거니와,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공주(公州)의 왕도(王都)에서 부여로 옮겼음에 반하여, 진흥왕은 혹은 고구려를 친정(親征)하여 현금의 광주(廣州), 경성(京城) 방면을 약취하기도 하였고, 혹은 백제와 협력하여 전기(前記) 지방 이외의 한강 유역을 회복하자 백제와의 연맹의 숙약(宿約)을 취소하고 이 지방을 독점하니 이는 오로지 지나와의 직접 교통상 절대 필요를 느꼈음이다.

 

실로 진흥왕은 신라를 강성케 한 영주로서 한강 유역을 점령한 결과는, 고구려·백제의 접경을 분리시켰고, 신라는 비로소 지나에의 교통로를 얻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남으로는 변한(卞韓) 고지(故地) 곧 가야 제국(諸國)을 완전히 병합하였고, 북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여 방금 학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그의 순수비가 북한산성 외에 함흥 황초령, 이원 마운령에 있어 당시의 북경(北境)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궁금하게 여기게 하고 있다.

 

전기(前記) 나•제 연맹 파열 이후 신라의 반도 통일운동을 일으킨 태종무열왕의 즉위까지의 백 년간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전기 50년간을 휴전기(休戰期), 후기 50년간을 교전기(交戰期)로 볼 수 있다. 휴전기에 있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황해 방면의 항해권을 얻은 신라는 당시 지나 남북조시대의 왕조인 북제(北齊)에 사신을 통하였으니 이것이 신라가 직접 지나와 교통한 처음이다.

 

이와 전후하여 여·제도 북제와 통빙(通聘)하였고 이어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자 반도의 삼국은 쟁선(爭先)하여 사(使)를 보내니 외교에 의하여 얼마동안 평화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통빙(通聘):주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내어 교제함.

 

기술한 바와 같이 삼국 중 제일 강성한 나라는 북방의 웅(雄)인 고구려였으니 이와 흔단(釁端)을 일으켜 교전 수차에 이(利)를 얻지 못한 수나라는 그만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당나라에게 멸한 바 되었었다.

흔단:싸움의 실마리. 爭端

 

그런데 수나라가 처음 고구려를 치려고 할 적에 백제가 자진하여 향도(嚮導)를 청한 바가반도 삼국간의 평화기를 교전기로 바꾸게 하였다.

 

고구려는 일찍이 잃어버린 한강 유역을 회복코자 북한산성을 침범하였으나 그만 실패하였다. 이때 불안을 느낀 신라는 멀리 당나라와 친밀한 외교 공작을 시작하여 그의 고립적 지위를 튼튼하게 하고 한 걸음 나아가 반도 통일의 대업을 꿈꾸게 되었으니 빼앗긴 40여 성을 회복코자 먼저 예봉(銳鋒)을 서린(西隣)인 백제에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나라는 반도 삼국과 별반 차별적 외교 관념이 없으련만 일찍기 수나라가 역강토광(力强土廣)한 세위(勢威)로도 고구려에게 패하여 웃음을 산 부끄러움의 雪恥를 하려고 수차 고구려를 치다가 또한 逢辱한지라. 중화(中華)대국의 체면 유지상 신라와 긴밀한 연락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있어 친당책(親唐策)을 세워 가지고 그 교섭을 맡아 한 이가 곧 김춘추 즉 후일의 태종무열왕이다. 그가 더욱 백제를 미워함에는 국가적 관계도 있었겠지만 일찌기 그의 女壻 김품석의 가족이 대야성(大耶城) 함락과 동시에 백제군의 손에 죽은 뒤로 일층 더하였었다. 그는 일본과도 가까이할 필요를 느꼈으니 당시 일본은 백제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어 가지고 있었음이다. 그리하여 효덕천황(孝德天皇) 대화(大化) 3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647)에 그는 스스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의 인물을 칭찬하여 있음을 보면(3. 인물 참조) 그의 외교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일본에 유(留)한 지 1년 만에 다른 사신과 교대하여 귀국하자, 곧 그의 아들과 한가지로 당나라에 갔었다. 당 태종황제가 춘추공의 영위(英偉)함을 보고 후우(厚遇)를 다하였다. 이때 그는 백제의 침박(侵迫)이 심함을 말하고 협력 토평(協力討平)을 구하였다. 그는 그의 아들을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귀국하니 때는 당 태종의 몰하기 전해(진덕여왕 2년)로 고구려는 당의 정토(征討)를 입던 무렵이다.

 

춘추공의 이 길이야말로 국제적 정세를 이용하여 자국의 고립적 지위를 일약 대활(大活) 무대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며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발달된 문물제도를 힘써 수입하여 문화 향상을 꾀하여 그 수준을 높였던 것이다. 한번 당과의 친밀을 도모하자 진덕여왕의 在世 중에 해마다 사신- 춘추공의 아들들 중에서의 왕복이 그치지 않았다. 진덕왕 8년에여왕이 돌아가자 춘추공이 공(功)으로써 국인(國人)의 추앙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왕의 7년에 드디어 나·당은 힘을 아울러 숙적인 백제를 멸하기에 이르렀다.

 

반도의 동남 一隅에 위치하여 지나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불편하였고 강토가 狹小하여 다른 두 나라에 대항하기 어렵던 신라로서 후일 반도 통일을 하기에까지 이른 데에는 여러 각도로 고구(考究)할 제재가 있다. 여·제 2국에 비하여 개화가 더딘 반면에 지나 문화의 과식에 빠질 위험이 적었던 때문에 한편으로 신라 독특의 씨족사회적 공고한 기초가 작성되었으며 신라혼(新羅魂)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사도 정신이 함양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계승 전속하여 오는 중에 진흥왕과 같은 영주가 있어 그 근저를 만들었으니, 지나와의 직접 교통로를 얻게 한 것이 고립적 지위에서 국제적 활무대에 나서게 한 큰 氣運의 작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대진출을 직접 자신이 나서서 일생의 정력을 다하여, 더구나 성의 있는 외교로써 한 이가 춘추공이었으며 영년(永年)의 고립적 지위와 약소국으로서의 울분에서 헤매던 신라를 반도 통일의 성공의 길에 그 지위를 높이고 그 울분에서 벗어나게 한 이가 태종무열왕이다.

영년(永年): 오랜 세월.

 

그의 영위(英偉)야말로 신라사상에 빛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뜻을 계속한 이가 그의 아들 문무왕으로 당과 아울러 고구려를 토평한 것은 오직 부지(父志)를 이었음이니, 반도 통일의 수훈을 거의 태종무열왕에게 돌림이 誇大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여기에 왕을 도와 대사업을 이룬 유명 무명의 장졸(將卒)의 공을 沒할 수 없으니 신라혼의 발로야말로 다른 반도사(半島史)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도 왕을 도와 성공한 김유신은 신라의 원훈 주석(元勳柱石)이다. 더욱 왕과는 이중의 친족관계를 가졌음에랴. 그의 인물전은 따로 기술하는 이 있기로 여기에는 생략한다.

 

 

3. 인물

 

태종무열왕의 위업은 왕으로 영주(英主)라는 부름을 받게 하고도 남음이 있겠거니와 왕의 인물에 대한 고찰을 약간 사료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먼저 왕의 계보를 「삼국사기」권 제5 신라본기에 의하여 엮어 보면 뒷표와 같다(괄호 안의 숫자는 몇대 왕임을 표시, 괄호 밖의 숫자는 재위년수).

왕의 휘(諱)는 춘추, 진지왕자(眞智王子) 이찬 용춘(龍春;追封 文興大王)의 아들로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 진평왕의 따님이다. 왕의 인물과 이력을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직역).

 

“왕의 의표(儀表)가 영위하시어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이 있으셨고 진덕왕을 섬기어 위(位)는 이찬을 지냈다. 당제(唐帝) 수(授)하기를 특진으로써 하다. 진(왕)이 훙(薨)하심에 군신(群臣)이 알천(閼川)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니 알천이 굳이 사양하여 가로되 ‘신이 늙었고 덕행이 일컬을 바 없는지라. 이제 덕망 숭중(崇重)으로는 춘추공 같은 이가 없어 실로 가히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이를지로다'하여 드디어 받들어 왕을 삼으니 춘추 세 번 사양하고 부득이 위(位)에 나가니라.”

 

라고 되어 있다. 다소의 과장이 없지 않을까 하나 즉위 전 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기록에

“춘추 姿顔이 아름답고 담소〔談咲(笑)]를 선(善)히 한다.” (「일본서기」권 25 孝德天皇 大化 3년)

라고 있음과 또한 당나라에 갔었을 때의 기사에 '우례심칭’(優禮甚稱; 「구당서」권 199 상 열전 제 149 東夷新羅), ‘우례심비’(優禮甚備; 册府元舅 권 109 제왕부 宴享1)라고 있어 특히 우대받았음을 보아 왕은 심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족히 추측하겠다. 왕에 대한 일화로 전하는 「삼국유사(권 1 太宗春秋公)의 기록을 보면 더욱 재미스럽다(의역).

 

“왕의 잡숫는 것이 일일에 飯米 3두, 웅치(雄雉) 9수(首), 경신년 백제를 멸한 이후부터 주찬(書饌)을 그만 제(除)하시고 조석만 잡수셨는데 그러나 하루에 미(米) 6두, 주(酒) 6두, 치(雉) 10수였었다.”

라고 있어 왕의 식량이 크셨음을 전하고 있고 계속하여

“동궁에 계실 때 고구려를 치고자 청병키 위하여 당에 들어가시다. 당제(唐帝)가 그 풍채를 칭상(稱賞)하여 이르시되 ‘신성지인(神聖之人)’이라 하시고 굳이 머물러 시위(侍衛)케 하시매 힘써 청하여 이에 귀국하시다.”

라고 있다.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왕을 도와 반도 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계매(季妹)로서 여기에 한 토막의 로맨스가 전하여 있으니 「삼국사기」(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와 「삼국유사」(권 1 태종 춘추공)에 기재되어있다. 전자가 사실적인 것 같고 후자가 윤색된 로맨틱한 것이다. 독자의 흥미를 돕고자 후자를 의역한다.

 

“(태종대왕의) 비(妃)는 문명왕후 문희(文姬)로서 유신공의 계매이다. 처음 문희의 자(姊)인 보희(寶姫)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어 서울에 가득하였던 것을 아우에게 말하니 문희는 이를 듣고 말하기를 ‘내가 이 꿈을 사오리다' 언니 가로되 ‘무슨 물건을 주려는가' 가로되 ‘비단치마로 팔겠는가' 언니 가로되 '그러자’ 아우는 옷가슴을 풀어 이를 받으니 언니는 '지난 밤의 꿈을 아우에게 전하노라' 하매 아우는 비단치마로써 이를 갚았다.

 

후 순일(旬日)에 유신은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 짐짓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을 떨어뜨리고 청컨대 '내 집에 들어가 이를 꾸어매 입세다' 하니 공이 이에 좇았다.

축국(蹴鞠):옛날에 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던 놀이. 공은 가죽 주머니로 만들어 겨나 공기를 넣고 그 위에 꿩의 깃을 꽂았음.

 

유신이 보희에게 명하여 꾸어매이게 하니 가로되 '어찌 조그만 일로 가벼이 귀공자에게 가까이하리오' 하고 굳이 사양하는지라. 이에 문희에게 명하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이를 사랑하여 자후로 자주 내왕하였다. 유신이 그 아이 배인 것을 알고 이에 책망하여 가로되 '네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아이를 배임은 무슨 까닭인고'하고 이에 국중(國中)에 선언하여 그 누이를 불에 태우려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유행(遊幸)하심을 기다려 나무를 정중(庭中)에 쌓고 불을 질러 연기를 일으키니 왕이 '웬 연기냐'고 물으시니 좌우가 여쭈어 가로되 '인제 유신의 누이를 태워 죽이려는 것이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신대, 가로되 '그 누이가 지아비 없이 아이 배임으로써외이다’ 왕이 가라사대 '이것이 누구의 소위(所爲)인고' 때에 공이 가까이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니 왕이 가라사대 '이것이 네 소위로구나 속히 가서 구하라' 하시니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玆後로 혼례를 행하니라.”

라고 있다. 반도 통일의 큰 공을 세운 왕과 김유신 두 분이 손을 마주 잡고자 그 누이로 비를 삼아 밀접한 관계를 맺은 一幕의 로맨스로 해석할 수 있으니 왕의 즉위는 유신의 힘이 컸음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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