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이여성(李如星) 1901∼?. 화가. 호 청정(淸汀), 경북 생. 대구 청년을 중심으로 혜성단(慧星團)을 조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 복역. 닛교(立敎) 대학 경제학부 중퇴.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조사부장, 편집차장 역임. 좌익활동하다가 월북.저서에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이녕은 고려 인종(1123~1146), 의종(1147~1170) 때 전주인(全州人)으로서 고려 때 가장 널리 알려진 국제적 대화가이다. 그의 천재적 화기(畫技)는 어려서부터도 놀라운 바 있어 화명이 곧 경향(京鄕)을 떨치게 되자 당시 추밀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은 그를 발탁하여 입송 사절단 수행원의 일인으로 삼았다. 당시의 송나라는 국내 화평, 역대 제왕은 문치주의로써 문화를 숭상하며 예술을 애장(愛獎)하여 감상..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 · 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묘청은 고금을 통하여 반역계의 한 이채(異彩)이다. 고려 일대에 대반역이 여러 번 있었으나 묘청의 반역처럼 사상(思想上) 깊은 근거를 가진 것은 없다. 그는 왕건 태조 이래 아주 신성시하던 서경(西京) 그것의 역사적 배경에 당시 유행이던 음양 비술(祕術)이란 사회적 미신을 결합하여 자겸(資謙)의 난 이후를 타서 일어난 것이다. 자겸의 난리에 개성 왕궁이 불에..
노정희(盧鼎熙) 생몰 연대 미상. 조선사 연구가. 1. 김부식의 가정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김부식은 김부일의 아우라 하였다. 그것만을 보더라도 그 인물이 명문의 출생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형 김부일을 찾음으로 인하여 김부식의 일반을 알 수 있다. 김부일은 김근(金覲)의 차자(次子)이고 김근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출발되었고 경주에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김부식은 2형 1아우를 둔 4형제 중의 3남이었으며 형제 4인이 다 같이 등제(登第)하였고 예종은 부일, 부식, 부철(富轍;일명 富儀)형제 3인에게 다같이 문한시종(文翰侍從)의 관(官)을 주고 세 아들의 어미에게 세사(歲賜)를 내린 일까지 있다. 2. 조정에 입(立)하여 부식의 등제는 고려 숙종년간이었고 처음에는 안서대도호부 사록참..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약력 사의 명은 탄연이요 속성(姓)은 최씨이며, 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으로 교위(校尉)가 되었고 모는 안씨라 한다. 사가 나오면서 이질(異質)이 있어 지기(志氣)가 비상하였으며 나이 겨우 8, 9세에 시문(詩文)에 능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또 서법(書法)에 능통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大義)를 통하고 15세에 명경생(明經生)으로 뽑혀서 명성이 일세에 울렸으므로 노유(老儒)도 그를 추중(推重)치 않는 이가 없게 되었었다. 그러..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고려 500년간에 제일류의 시인이요 건악1) 한 諍臣2)이요 또는 열렬한 국수주의자인 사간(司諫) 정지상(鄭知常)은 당시에 성망(聲望)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로에 비참한 화를 당하여 비명에 횡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1)건악: 거리낌없이 곧은 말을 함. 2) 쟁신(諍臣):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바른 말로 극력 간하는 신하. 금일에 전하는 고려사는 다 사대주의자의 손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국수주의를 잡은 자에게는 사실을 전연 매몰시킬 뿐 아니라 도리어 기사(記事)를 무재(誣載)하여 그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일이 적지 않다. 지상과 동시에 김부식이 있었다. 그는 유일의 사대주의자이므로 지상과 근본적 견지가 다르..
권상로(權相老) 1879∼1965. 승려, 불교학자. 호 퇴경(退耕). 경북 문경 생. 문경 금룡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불교전문강원을 수료. 동국대 초대 총장 등을 역임. 사망 후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에 오름. 저서에 「조선문학사」, 「퇴경역시집(退耕譯詩集)」,「고사성어사전」,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등이 있음. 1. 서언 조선의 불교 1,500여 년의 역사를 3기에 나누어 신라, 고려 및 이조에 평균적 500년씩 되나니 이것을 이렇게 갈라놓고 비교하여 관찰하건대, 신라 불교는 오직 향상(向上)으로 되어 있고 이조 불교는 그와 정반대로 오직 전락(轉落)의 일도(一道)뿐인즉 전의 향상과 후의 전락의 중간에 있는 고려 일대의 불교는 ..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고려에 있어 구강회복(舊疆回復)의 사상은 초기부터 국인(國人)의 일부에 흐르고 있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는 예종시대의 윤관이었다. 원래 만주의 동남 일대에 웅거하던 여진족(말갈)은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에 예속하여 국민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발해시대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태조)가 발해를 멸한 뒤로부터 발해의 동남고지(東南故地)에 ..
현상윤(玄相允) 1893~ ?. 신소설가, 사학자, 교육자. 호 기당(堂). 평북 정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3·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 광복 후 서울대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6·25 남침 중에 납북됨. 신소설, 「한(恨)의 일생」, 「박명(薄命)」과 저서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등이 있음. 1. 정치 문종의 휘(諱)는 휘(徽)니 현종의 제3자라 어려서부터 총철(聰哲)하고 자라서 학문을 좋아하며 활을 잘 쏘고 뜻과 모략이 굉원(宏遠)하며 또한 성품이 관인(寬仁)하여 뭇사람을 용납하였다. 즉위 초로부터 몸소 절검(節儉)을 힘쓰며 유사에게 명하여 선조(先朝)의 용어(用御)하던 의상(倚床) 등속이 금은으로 장식되었다 하여 동철로 바꾸..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있음. 고려 제11대 문종의 치세(1047~1082)는 가위 고려 문화의 황금시대라고 할 만한 때이거니와, 이때 정계의 원로요 또 학계의 기숙(耆宿)l)으로 당대 문운(文運)에 익찬(翼贊)2)함이 많았던 이는 즉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칭을 듣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그이었다. 1)기숙(耆宿):노성(老成)한 사람. 2) 익찬(翼贊):바른 방향으로 잘 인도함. 충은 누조(4조)에 역임하여 특히 문종 초에는 수..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강감찬(舊名은 殷川)은 삼한벽상(三韓壁上) 공신인 (고려 태조시) 궁진(弓珍)의 아들로서 정종(제3대) 3년(948)에 금산(山; 시흥)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체구가 왜추(矮醜)하여 외모가 자못 초초(草草)1)하였으나 문무의 자질을 갖추어 어려서부터 학(學)을 좋아하고 특히 지략이 탁월하였다. 1)초초(草草):추함. 성종(제6대) 조에 갑과 제일에 발탁되어 문관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