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20.발해-발해태조 고왕(渤海太祖 高王) 본문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발해는 실로 고구려의 후신으로서 신라와 병립하여 남북조를 이룬 국가이니 그의 건국 시조는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에는 보장왕 말년에 내홍(內訌)이 일어나매 전부터 연횡(連衡)의 자세를 취하고 그를 엿보고 있던 신라와 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장왕 27년(668)에 고구려는 드디어 나·당 연합군으로 말미암아 멸망되고 말았다.
▶ 내홍(內訂): 안에서의 어지러움. 내란.
그러나 나·당 특히 당군이 경략한 곳은 겨우 요동 일부로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의 연로(沿路) 일대에 불과하였고 고구려 영역에 있어서도 압록강 상류역으로부터 동북만주의 오지에는 당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고구려인이 의연히 지키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말갈족(여진)은 옛기반(羈絆)2)을 벗어나 부락적 자치생활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 기반(羈絆): 굴레. 나라의 경계 안.
이와 같이 고구려의 중추세력이 거꾸러짐에 따라 그의 역내는 무정부적 혼란상태에 빠졌었다. 발해는 실로 이러한 기회에 성립된 것으로서 대조영 일족의 활동이 효(效)를 주(奏)하여 고구려의 구강(舊疆)이 수복되고 그를 중심으로 통일적 국가가 재건케 된 것이다.
당은 앞서 평양을 공함(攻陷)하여 고구려의 중심세력을 거꾸러뜨린 다음에 고구려인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그의 유민을 당의 국내로 많이 옮겼었다. 대조영도 그의 父 걸걸중상(乞乞仲象 ; 근래에는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동인이명이라는 설도 있으나)과 같이 당의 영주(營州)에 천사(遷徙)되어 있더니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그곳에 옮겨져 있던 거란인 이진충(李盡忠)이 분연히 일어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매, 불평을 풀고 있던 걸걸중상이 드디어 고구려인을 거느리고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같이 동으로 고토를 향하여 요수를 건너 백두산 동북지방에 귀거(歸據)게 되었다.
▶ 천사(遷徙): 움직여 옮김. 천동(遷動).
이에 대하여 당의 무후는 장군 이해고(李楷固)를 시켜 추격케 하여 먼저 걸사비우를 베었다. 그 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병사하고 그의 아들 조영이 계승하여 동모산(東牟山 : 길림성 敦化 부근)에 견고히 성을 쌓고 세력을 굳게 하던 터이다. 이해고는 다시 천문령(天門嶺 : 봉천성 長嶺子인 듯)을 넘어 동으로 진격해 오매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을 거느리고 이해고를 요격하여 당군을 섬멸하였다(그때 이해고는 겨우 몸을 빼어 도주하였음). 이에 대조영의 위세는 고구려의 구역(舊域)에 떨치게 되어 드디어 동모산(中京)을 수도로 하여 위(位)에 오르고 국호를 진(震 : 또는 震旦)이라 하였으니 (699) 이분이 곧 진국(발해) 태조 고왕이다.
원래 대조영은 驍勇이 절륜(絶倫)하고 용병이 신묘하여 민중의 敬慕를 받아오던 터로서, 그의 즉위한 뒤로부터 국세가 더욱더욱 앙양되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의 속족(屬族)을 統御하여 고구려의 구강(舊疆)을 대개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동방성국(東方盛國)의 기초가 일찍부터 잡히게 되었으며,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서북으로 돌궐과 통하여 당의 세력을 견제하였으므로 당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이 무위책(撫慰策)을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 이르러 시어사 장행급(張行岌)을 보내어 초위(招尉)에 힘썼으며 예종 선천(先天) 2년(712)에 낭장(郎將) 최소(崔訴)를 보내어 책봉하였다(지나의 여러 외국에 대하여 국왕의 책봉을 행한 것은 왕위 승인의 한 가지 형식에 불과한 것임).
이와 같이 양국의 국교는 처음부터 열림에 따라 발해에서는 유학생을 계속적으로 파견하여 당의 문물 채입(採入)에 노력한 결과 그 문화도 대개 태조시대에 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당인은 진국(震國)을 발해라고 불렀으므로 진이라는 본명보다도 발해라는 이름이 여러 인국(隣國)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후세까지 발해라는 이름으로 널리 전해지게 된 것이다.
태조는 드디어 즉위한 지 21년 후에 (719) 붕거하였으나 그의 국세와 문물제도는 그의 아들 무왕시대에 더욱 발전되었다. 그의 판도는 5천 리에 달하였으니 동은 일본해에 달하여 연해주 일대로부터 함남의 동안에 이르렀으며 서는 요하 중류역에서 거란과 접하고 북은 흑룡강이요, 남은 함남의 南境으로부터 압록강 하·중류를 연결하는 선으로써 남조(南朝) 신라와 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광대한 영역을 통어하기 위하여 국내 요지에 5경 즉 중경현덕부(中京 顯德府 : 동모산이 중심이니 지금의 돈화 부근),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 : 지금 영고탑 서남 동경지방이니 忽汗城의 명칭이 있음. 제3대 문왕시대로부터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근래 학술적 발굴에 의하여 당시의 설계와 시설의 이 자못 명료하게 되었으니 그의 플랜은 당의 首府 長安과 유사한 것으로서 동서 10리 强, 남북이 10리 弱의 장방형의 성곽이 둘러 있고 중앙에는 40간의 대로가 통하고 그 북에는 왕성이 있고 대로의 양측에는 좌우 양경의 條坊의 跡이 있으며 좌우 대칭의 8개 사원의 적이 남아 있다. 기타 苑池樓臺의 적과 琉璃瓦, 각종 와당, 각종 전, 치미벽화 편(片), 石獅頭, 塑造佛, 금동불, 석탑, 각종 佩飾, 鐵鏃, 각종 器什 등의 유물이 출현되어 당시 문화의 片影이 구현케 되었음), 동경 용원부(東京 龍原府;지금의 혼춘 부근, 혹은 니코리스크 부근?), 서경 압록부(西京 鴨綠府;압록강 우안, 지금의 임강현 부근), 남경 남해부(南京 南海府;지금의 경성 부근인 듯) 등을 두고 다시 15부 즉 이상 5부 외에 장령부(長嶺府;지금의 길주 등지인 듯), 부여부(夫餘府;지금의 만주 개원 부근인 듯), 동평부(東平府), 철리부(鐵利府;모두 지금의 영고탑 동북 흑룡강 지방?), 회원부(懷遠府), 안원부(安遠府;모두 흑룡강 지방 西界), 정리부(定理府), 안변부(安邊府;모두 영고탑 부근? ), 솔빈부(率賓府 ; 삼수 부근인 듯), 막길부(미상) 등에 나누고 그 아래에 62주를 두어 전국을 관할케 하였으며, 또 여러 외국과의 교통이 성행함을 따라 남해부는 신라도(新羅道)로, 용천부는 일본도(日本道)로, 압록부는 조공도(朝貢道;唐)로, 장령부는 거란도(契丹道)로 하여 각국과의 교통을 분관(分管)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관제는 대개 고구려의 제도와 당제를 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니 선조성(宣詔省)에는 좌상(左相), 좌평장사(左平章事), 시중(侍中), 좌상시(左常侍), 간의(諫議)가 있으며, 중대성(中臺省)에는 우상(右相), 우평장사(右平章事), 내사조고사인(內史詔誥舍人)이 있고, 정당성(政堂省)에는 대내상(大內相; 좌우 兩相의 上位), 좌우사정(左右司政), 좌우윤(左右允)이 있으며 다시 충(忠;爵), 인(仁;倉), 의(義;膳)의 좌6사(左六司)와 지(智;戎), 예(禮;計), 신(信;水)의 우6사가 있어 실제의 행정에 당하고, 중정대(中正臺)에는 대중정(中正)과 소정(少正)을 두었으며, 다시 전중시(殿中寺), 종속시(宗屬寺), 문적원(文籍院),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 주자감(冑子監), 항백국(巷伯局) 등 기관이 비치되었고 무직(武職)으로는 좌우맹분(左右猛賁), 웅위(熊衛), 비위(羆衛)와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가 있어 각 위의 대장군과 장군이 총괄하였다. 그리고 문무관직을 품위에 따라 각각 복색과 홀(笏)을 달리하던 것이다.
▶ 홀(笏):홀은 수판(手版)으로, 조회시에 신하가 임금을 알현할 때 드는 물건이다. 아뢸 일이 있으면 여기에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메모하던 기구가 되었다.
이상으로써 발해의 국세와 문물의 일반을 천명하였거니와 이는 대개 그의 초기로부터 발전된 것으로서 남조 신라에 비하여 손색이 없던 것을 오인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끝으로 발해의 세력과 문화가 그와 같이 초기부터 발전된 원인을 몇 가지 들어 보면
① 고구려가 멸망된 후에 만주 일대는 무정부상태에 빠져 통일할 만한 중심세력의 출현이 필요케 되었으며 중심세력이 나타나면 바로 재통일될 형세에 있던 것,
② 대조영의 웅재대략(雄材大略)은 고구려의 구업(舊業)을 회복하기에 족하던 것,
③ 발해의 건국 당시부터 동부 내몽고의 거란족이 남하하여 요서지방에 진출하였으므로 강적 당과의 충돌이 적게 된 것,
④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자이니만큼 문화 수준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고도의 발전을 보았던 것으로서 발해의 문물제도는 대개 고구려의 그것을 답습케 된 것들을 들 수가 있으니 이와 같이 고찰해 보면 발해의 발전이 그다지도 신속하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는 바이다.
요컨대 발해는 고구려 대국의 재흥(再興)된 것으로서 그의 건국 초기로부터 남으로 신라와 통하고 서북으로 거란족을 누르며 서로는 당과 교섭을 열어 그의 문물을 성(盛)히 채입(採入)하고, 동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과 교통을 열어 (제2대 무왕 仁安 8년부터)동아에서 웅시(雄視)케 되었다. 당시 당인도 발해를 가리켜 해동성국이라 하여 칭선(稱羨)하였으며 신흥 국민(발해의 국민은 고구려인이 치자계급이었고 말갈족이 피치자계급이었음)으로서의 진취적 기력은 실로 탁월하여 ‘삼인발해당일호(三人渤海當一虎)’즉 발해의 세 사람이면 한 범을 당한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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