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2.신라-진흥대왕(眞興大王)

구글서생 2023. 4. 2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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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 있음.

 

 

1

 

新羅史上의 진흥대왕의 지위는 마치 백제사상의 근초고왕, 고구려사상의 영락대왕(광개토왕)과 같아 나는 매양 이들 3왕을 아울러 삼국사상의 3걸주(傑主)라고 부르나니 3왕은 비록 때와 곳을 달리하였지만 각기 중흥의 위업을 이룬 점으로 보아 특히 통일국가, 권력국가를 현출한 점에서 서로 방불한 느낌을 주거니와, 삼국은 이 3왕의 웅략(雄略)에 의하여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즉 대방(帶方)의 남(南) 진마(辰馬)의 일우(一隅)에 나라를 세운 백제는 근초고왕 때 이르러 대대적으로 남북을 경략하여 비로소 '완전히 마한 및 대방의 땅을 통일하고'(「진단학보」 제6권 졸문 〈삼한고〉 참조), 오히려 무보(武步)를 낙랑의 땅에 내키어 자주 그곳에서 고구려와 충돌하였고, 고구려는 처음 동방 한사군(고조선 및 예맥땅)의 하나인 현도(압록·동가 양강 유역)에서 일어난 나라로 영락대왕 때에 백제의 북경(北境) 및 동예(東濊)를 토략(討略)하고 요동에서 연인(燕人)의 세력을 구축하여 또한 '완전히 고조선의 땅을 회복 통일' 하였을뿐더러 그 세력이 거의 만주 전토에 미쳤으며(고구려 영락대왕 참조), 신라는 변진(弁辰)의 일족인 사로(斯盧)에서 발전한 후진국가이지만 주위의 여러 소국을 차제(次第) 잠식하여 제23대 법흥왕 때는 낙동강 서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다음 진흥대왕 때 '비로소 변진 전토를 통일'하고 동왕은 오히려 (이에 앞서) 북으로 한강 유역 및 그 동북의 땅을 거두는 대훈업을 세웠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로 더불어 뚜렷한 정립의 세를 나타내게 된 것도 이 변진 통일과 남북한강 유역의 점거가 있은 후의 일이거니와, 어떻든 진흥대왕은 신라의 지위를 일약 웅비케 한 중흥의 주(主)로 백제의 근초고왕, 고구려의 영락대왕과 병칭(稱)할 위인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에도 진흥·영락 두 대왕은 그 기념비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내외 학계에 著聞된 임금이지만 특히 진흥대왕에 있어서는 그 순수관경(巡狩管境)의 기념비가 4개소에 현출되어 그중의 2개는 오인의 상상 부도처(不到處)에 있는 만치 현금 학계의 일대 연구의 대상으로 되었다.

著聞: 유명한 이야기

 

다음에 다시 대왕의 훈업에 대하여 좀 자세히 소개하려 한다.

 

 

2

 

진흥대왕은 지증·법흥 두 왕의 뒤를 이어 선 신라 제24대 주(主)니 성은 김씨, 휘는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쓴다. ‘삼맥’과 '심맥'은 거의 동음이요 '종’과 ‘부’도 같은 말의 표현일 것은 당시의 명인 이사부(異斯夫)를 혹 태종(苔宗), 거칠부를 혹 황종(荒宗)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거니와, 언젠가 황의돈(黃義敦)씨는 이러한 예에 의하여 종(宗)을 ‘보(樑)'라고 훈독할 것이라 하여 종과 부와의 일치를 말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 찬종(贊從)한다. 아버지는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이니 입종은 즉 지증왕의 아들이요, 법흥왕의 아우이며 대왕이 즉위하였을 때는 나이 겨우 7세라, 왕태후가 섭정하고 이사부, 거칠부 등의 명신(名臣)들이 보도(輔導)의 임(任)에 당하였다.

 

신라에서 자기의 연호를 사용하기는 진흥 즉위 4년 전인 법흥왕 23년에 건원(建元) 원년이라 한 것을 시초로 삼거니와, 진흥 즉위 12년에 이르러는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고 하였다. 이 개원(改元)의 이유는 「삼국사기」에 명시한 바가 없어 자세하지 않으나 나의 억측으로는 이 해 진흥대왕의 나이 17세가 되었으므로 혹시 이해 정초로써(왕태후의 섭정을 떠나) 친정(親政)에 임하기 시작하여 이와 동시에 '개국'이라고 개원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때는 고구려의 장수왕 몰후 정히 60년인 양원왕(陽原王) 7년이요, 또 백제가 국도(國都)를 웅진(熊津;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긴 후 13년인 성왕 29년이었다. 다음에 보일 바와 같이 이해에 신라는 북방 진출의 대경략을 행하고 이로 인하여 삼국의 관계가 아연 변동하였으므로 비단 신라사상에서뿐 아니라 전 삼국사상에 있어 크게 주의할만한 해였다.

 

1) 대왕의 북방 경략

 

대왕의 북방 경략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의 삼국관계 내지 신라 국정을 잠깐 살펴보면, 이로부터 76년 전(신라 자비마립간 때)에 고구려 장수왕의 대병(大兵)이 백제의 남북한성(南北漢城)을 무찌를 때 제왕 개로(蓋)는 왕자 문주(文周)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걸(乞)하매 신라는 곧 군사 1만을 출동하여 보냈으나 기(期)에 미치지 못하고 성은 함락, 왕은 잡혀 참해를 당하였다. 신라는 그 대신 문주를 도와 왕위를 잇게 하고 제도(濟都)는 부득이 웅진으로 옮겨 가게 되었으며, 그 후 고구려의 남침은 일진월취(日進月就)하여 마침내 죽령 이북의 땅이 그 판도로 화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진에 대하여는 신라도 역시 큰 불안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제·나 두 나라간의 친밀과 결합은 점점 굳어 가 공수(攻守)를 동맹하여 신라 소지마립간 6년(백제 동성왕 6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침하였을 때 백제는 신라와 더불어 이를 모산성(母山城;진천 동쪽) 아래에서 격파하고, 동왕 15년에는 양국이 서로 혼인을 맺고(백제왕 동성이 신라에 혼인을 청하매 신라왕 소지는 이벌찬 比智의 딸을 보냈다) 익년 신라가 지금의 보은(報恩) 부근에서 고구려와 싸워 고경(苦境)에 빠졌을 때 백제는 이를 구원하였고, 또 그 익년 고구려가 치양성(雉壤城;위치 미상)에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백제를 구한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밖으로 백제를 유일한 우방으로 삼아 고구령 남침에 대항하는 동시에 안으로는 국력을 기르고 정치에 힘을 써, 지증마립간에 이르러서는 한문화(漢文化)의 양식을 모방하여 비로소 '신라'란 아의(雅義)의 국호 문자와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상복(喪服法)을 제정하고 또 국내의 주군현(州郡縣)을 정하여 실직주(悉直州;三陟)를 두고 소경(小京)을 아시촌(阿尸村 ; 미상)에 두었으며, 다음의 법흥왕은 7년에 율령을 반시(頒示)하여 비로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15년에 불법(佛法)의 신앙을 공허(公許)하고, 23년에 연호를 용(用)하여 건원 원년이라 하는 등 내치(內治)에 정(精)을 기울일 뿐 아니라, 또한 밖으로 가야(지금의 김해 중심)방면의 외교 경략에 힘을 써서 마침내 19년에 이를 병합함에 이르렀다. 이때 신라의 발전은 마치 욱일(旭日)이 승천하는 형세와 같았다.

 

신라의 우방인 백제는 성왕 16년에 (신라 법흥왕 건원 3년) 다시 국도를 웅진(공주)에서 그 서남쪽인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하고 維新의 치(治)를 행하려 하였거니와, 성왕(혹은 聖明王)은 지기(志氣)가 영매(英邁)하고 지식이 탁월하여 안으로 교법(敎法)과 학예를 장려하고 밖으로 양(梁;南支那)과 일본에(자주 遣使하여) 우의를 후히하여 北敵 고구려에 대한 견제책을 썼었다.

 

진흥대왕이 즉위하여서도 처음에는 제·나 2국의 고구려에 대한 공수적(攻守的) 관계는 의연 변동이 없어 동왕 9년 고구려가 동예(함남지방)와 더불어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충주)을 공위(攻圍)하였을 때에 신라는 백제의 청구에 의하여 장병 3천을 보내어 여군(麗軍)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북방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이로부터 자못 발발하여 진흥왕 11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淸安)을 발(拔)하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 ; 미상)을 함(陷)하여 양국의 병(兵)이 피로하였을 때에 신라는 이 틈을 타서 이찬(신라 관등 제2위) 이사부로 하여금 출병 습격하여 위의 두 성을 취하였고, 익 12년 즉 개국 원년(백제 성왕 29년)에는 거칠부 등 8장군을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략할새 제병(濟兵)은 먼저 남북한성에 쳐들어가 6군의 땅을 수복하고 나군은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 땅을 취하였는데, 이듬해에 신라는 백제가 수복한 남북한성의 땅까지 마저 탈취하여 한성(廣州古邑)에 ‘신주(新州)’라는 1주를 두고 아찬 김무력(金武力;가락왕 金仇衡의 아들)으로 군주를 삼았었다. 그런즉 나•제 2국의 공동 출병의 효과는 신라에 의하여 독점되고 만 것이다.

 

고현의 위치는 미상이나 이때 신라의 세력이 한강 북쪽에까지 미쳤던 것은 사실이므로 그곳은 아마 북한강 유역 중의 어느 분수령에 불외(不外)한 것 같고 따라서 그 이남 죽령 이북의 10군 땅이란 것은 즉 남북한강 유역의 여러 군읍을 이름인 듯하다.

 

신라가 이와 같이 한강 유역을 점거하여 서해안의 일부분을 얻은 것은 후절(後節)에 말할 낙동강 유역의 점거 이상의 큰 의의를 가진 것이니, 신라는 이로부터 서해를 통하여 중국 방면과 직접 교통을 열어 정치 문화상으로 공전적(空前的) 활약을 하여 마침내 반도 제국의 형세에 대변화를 생기게 한 것이다. 지금껏 신라는 반도 동남우(東南隅)에 편재하여 지나대륙의 문화를 수입함에 다른 두 나라(고구려, 백제)를 경유하게 되었고 또 사절을 파견함에 있어서도 다른 두 나라의 사행(使行)에 수반을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신라로 하여금 대륙문화 섭취와 기타 모든 점에 있어 다른 두 나라보다 뒤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진흥대왕 25년(개국 14년)에 비로소 직접으로 사(使)를 북제(北齊)에 파견하고 이래 거의 연년세세 중국의 남북 여러 조(朝)와 사절을 교환하게 된 것은 물론 신라가 중국에 통하는 직접 교통로를 서해안에 가진 이후의 일이거니와, 후일에 신라가 수·당과 친선하여 백제·고구려를 견제하고 또 드디어 당의 힘을 빌려 여·제 두 나라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될 먼 기초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신라의 한강 유역 점거는 비단 신라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전 삼국사상에 있어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강 유역의 구토(舊土)를 신라에게 뺏긴 백제는 분개치 아니할 수 없었다. 신라의 남북한성 입거(入居)의 익년 백제의 성왕은 드디어 임나(任那;대가야. 지금의 고령지방)와 협력하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沃川)을 공함(攻陷)하고 맹진(猛進)하여 지금 영동지방에서 성색(城塞)을 쌓을새 신라의 신주(新州;廣州) 군주 김무력이 이를 듣고 주병(州兵)을 들어 와서 구원하였다. 성왕은 김무력의 비장(裨將)의 급격을 받아 구천(川; 미상)에서 살해되고 백제의 전군(全軍)도 섬멸의 운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나 2국의 오랫동안의 화목은 깨뜨려져 길이 구수(仇讐)의 관계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신라는 백제와 화(和)를 실(失)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도 -죽령 이북 10군의 소유로 인하여 - 큰 간극을 생(生)하게 되니 오랫동안 구적(仇敵)관계이던 제·여 2국이 서로 접근하게 될 것은 자연한 추세였다.

 

익 개국 5년(진흥왕 16년) 겨울 10월에는 진흥대왕이 거가(車駕)를 내어 친히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정하고 익 6년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州治는 지금 安邊)를 치(置)하고 익 7년에는 국원(國原;忠州)에 소경(小京)을 치하고 동년에 신주(州治는 廣州)를 폐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州治는 지금 경성 부근)를 치하더니 그 후 10여 년에 이르러 북한주를 폐하여 남천주(南川州;州治는 지금 利川)를 치하고 또 비열홀주를 폐하여 달흘주(達忽州;州治는 지금 高城)를 치하였다.

 

이해는 즉 진흥 즉위 29년으로 연호를 태창(太昌)이라고 고치던 해이거니와, 주(州)의 폐치(廢置)는 결코 영토의 퇴축(退縮)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다만 행정상 혹은 군사상 필요로 때를 따라 주치(州治)를 타처에 옮겨 이름을 고친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이해 (태창 원년)에 북경(北境)을 순수하여 민심을 방채(訪採)하는 동시에 2·3처에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웠으니 지금 북한산 비봉(碑峰)에 꽂힌 순수비는 자획의 마멸로 소기(所記) 연월이 미상이나 대개 이때의 소립(所立)으로 그 처소에 대하여는 하등의 용의할 여지가 없고, 지금 함흥 황초령(黃草嶺) 근처에 있는 비와 근자에 새로 발견된 이원(利原) 마운령비(摩雲嶺碑)는 연대는 분명히 이해지만 그 소재가 너무도 우리의 상상 부도처에 있어 당시 신라의 동북 경계가 과연 이런 먼 곳에까지 미쳤을까 하는 疑訝가 일어나 혹은 그 두 비의 후대 이전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방채(訪採) : 찾아 모아 취함.

 

“지내굉(池內宏) 박사는 마운령비 발견 전에 있어 황초령비는 본래 철령 부근에 있던 것을 고려 윤관의 9성 영축 때에 북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주장하고 이에 대하여 전간공작(前間恭作)씨는 황초령비는 본시 감문(甘文;지금 開寧), 마운령비는 본시 철원에 있던 것인데 이조 초 관북 경영 때에 관북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현존 문헌상에 나타나는 당시 신라의 동북경은 위에 말한 비열홀, 지금의 안변에서 더 지나가지 못하고 또 그때 고구려가 비록 쇠약하였다 할지라도 그 방면이 무인지경이 아닌 이상 그렇게 깊이 (신라에게) 침략을 당하였을까 하는 의심이 미상불 없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 대해서는 앞으로 오인의 더 신중한 연구를 요하는 터이므로 지금 경솔히 단정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여하간 문헌상으로는 당시 신라의 동북경은 지금 안변에서 더 지나지 않았던 것 같으나 진흥 순수(管境)비의 소립처로 보면 함흥 황초령으로부터 이원의 마운령을 극(極)하였다고 하겠다.

 

2) 대왕의 임나제국 경략

 

임나는 즉 「위지(魏志)」에 보이는 변진 20여 국 중의 하나인 미오사마[彌烏(馬)邪馬(烏); 미마나오]국 그것으로, 지금의 고령지방을 근거로 하던 나라이니 조선사상에는 흔히 이를 대가야라고 일컫는다. 낙동강 유역에는 이 임나국 이외에 여러 소국(小國)들이 있어 그중에 저명한 자가 다섯이 있었으니 하나는 구사국(狗邪國;金海), 하나는 불사국(不斯國;昌寧), 하나는 안사국(安邪國;咸安), 하나는 고자국(古資國;固城), 하나는 반파국(半破國;星山)이었다. 조선사상에는 대가야를 합하여 이들을 6가야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대가야나 본가야(本伽耶;狗邪)의 어느 것을 주로 하여 그 나머지 5소국을 5가야라고 불러왔다.

 

5 가야니 6 가야니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 나는 가야의 연맹으로 해석하거니와 그중에 牛耳를 잡던 나라는 임나(대가야와 가야의 2국이었다. 즉 임나와 가야를 중심으로 6개의 소국이 동맹을 조직하였던 것이니 그것은 서(西)로 백제의 세력이 점점 동침(東侵)해 오고 동으로는 신라의 세력이 차차 서진(西進)하므로 이 두 외부 압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생긴 자연스런 결합이었다. 신라와 가야 여러 나라는 다 같은 변진족으로 동일문화권 안에 속한 자이지만 피차의 영토적 야심으로 말미암아 자주 충돌이 생겨 신흥 신라의 이 방면에 대한 야심과 침략은 더욱 강렬하였다.

 

법흥왕 때에는 신라의 세력이 낙동강 서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동왕 19년에는 6가야 중의 유력한 가야(김해)의 항부(降附)를 받게 되었거니와, 이로부터 신라의 가야연맹 제국에 대한 침략은 점점 그 도를 더해갔다. 그리하여 진흥대왕에 이르러는 또 가야연맹의 하나인 불사국(창녕)을 병합하여 이곳에 비자벌정(比子伐停) 및 하주(下州)의 치소(治所)를 두고 동왕 22년에는 그곳에 행행의 거가(車駕)를 내어 순수관경비를 세웠으니 지금 창녕읍에 있는 진흥비가 그것이다. 이 비의 건립은 다른 3비에 앞서기 7년 전이므로 현존한 진흥비 중에 가장 오랜 것일뿐더러 반도내 동인 소립(東人所立) 비갈(碑碣) 중에 연대상 최고(最古)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왕은 익년에 또 가야연맹의 우이를 잡는 임나 즉 대가야를 도모하려 하여 이찬 이사부를 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不意에) 이를 일거에 습멸하여 그곳에 대가야군을 치(置)하였으며, 동년에 안사국(함안)도 동일한 운명에 빠지고 기타의 소국들도 망풍(望風)의 세로 몰락되어 이제야 신라는 완전히 변진을 통일하게 되었다.

망풍(望風):멀리서 그 모습을 그리워하여 사모함.

즉 낙동강을 동맥으로 한 지금의 경상남북도 땅이 다 그 영토로 화하게 되었다. 신라의 낙동강 전유역의 점거는 한강 유역 점거에 다음가는 의의있는 사실이니 신라는 이로 인하여 막대한 인적·물적의 동력을 얻어 일층 웅비(雄飛)의 기초를 지었던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상은 간략하나마 대왕의 외치(外治)에 관하여 말하였으므로 다음에는 그 내치의 일반에 대하여 약술하려 한다.

 

첫째, 대왕의 사업으로 들어 말할 것은 국사(國史)의 편수니 6년에 이찬 이사부가 아뢰되

“국사란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褒貶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만일 이것의 수찬(修撰)이 없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랴.”

하매 대왕은 그렇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을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국사를 편수케 하였다. 신라의 국사 편수는 아마 이것이 처음일 것이나 오늘날 그 책이 전해 오지 않으므로 그 체재 내용에 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가위 대왕의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비단 척경사업(拓境事業)에만 높은 공훈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이 문치(文治) 방면에도 공헌한 바가 컸었다. 그중에도 거칠부는 일찍이 승이 되어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유명한 혜량법사(惠亮法師)의 강설을 듣고 법사의 밀탁(密託;그대는 장래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니 만약 군사를 이끌고 오더라도 내게 해를 입히진 말라-편집자 역)까지 받은 일이 있었지만, 본국에 돌아와 출사하여 위에 기술한 것과 같이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수하고, 그 후 6년에 또 왕명으로 출정하여 고구려의 죽령 이북 10군의 땅을 취했을 때 혜량법사를 맞아 데리고 와서 왕에게 천거하여 승통(僧統)을 삼아 신라 불교에 기여한 바가 또한 컸었다.

 

대왕은 열심한 불교신자요, 애호자니 5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일으키고 인민의 출가봉불(出家奉佛)을 허하였으며 14년(개국 3년)에는 월성(月城) 동(東)에 신궁을 경영할 즈음에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났다 하여 고쳐서 불사(佛寺)를 삼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황룡사는 그 규모가 굉대하여 십수 년 후에 工을 畢한 신라의 유명한 사찰이었다. 이에 전후하여 지나의 진(陳)으로부터 승 명관(明觀)과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보내왔고 지원(祗園)·실제(實際)의 두 사찰도 황룡사를 낙성하던 해(27년)에 되었다. 33년에는 전사(戰死) 사졸을 위하여 7일 동안이나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 설(設)하였고 35년에는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성(鑄成)하되 동(銅) 35,007근과 鍍金 10,198푼을 사용하였다 한다. 장육존상은 동사(同寺)의 9층탑(선덕왕 14년 成)과 한가지로 신라3보 중에 꼽던 유명한 예술품이니 고려 고종 25년(蒙寇의 난에 탑과 한가지로 소멸)까지 존전(存傳)하였던 것이다. 대왕은 이와 같이 불(佛)을 숭봉하여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일생을 마쳤고 왕비 박씨(思道夫人)도 이를 본받아 니(尼)가 되어 영흥사에 거하였다 한다. 법흥왕 때 公許된 불교는 진흥왕에 이르러 국운의 융창과 한가지로 비상한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대왕은 이와 같이 불교에 열심한 애호자인 동시에 또한 음악의 애호자로 이를 극히 장려하던 임금이었다. 이에 앞서 대가야(임나)국의 가실왕이 12현금(가야금)을 제(製)하여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작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우륵이 자국이 망할 줄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투신하여 낭성(娘城 : 청주)에 은거하였더니 12년 (개국 원년)에 대왕이 그곳에 巡狩하다가 우륵과 그 제자 이문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특소(特召)하여 하림궁에서 악을 연주하게 할새 2인은 각기 新歌를 지어 주(奏)하였다.

 

대왕은 그 악을 유지 장려하기 위하여 익년에 계고, 법지, 만덕의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에게 악을 배우게 하였는데 우륵은 3인의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琴)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쳐 주었다. 3인의 업이 이루어지매 대왕은 이들에게 주악(奏樂)을 명하여 듣고 가로되

“전날 낭성에서 듣던 음악과 다름이 없다.”

하여 후히 상을 내렸다. 이로써 보면 대왕이 얼마나 음악을 잘 이해하고 또 이를 유지 장려함에 얼마나 용심(用心)하였던가를 알 수 있거니와, 대왕의 이 용심이 아니었던들 가야금이란 것이 과연 오늘날에 전래되었을까가 의문이다.

 

다음에 말하여 둘 것은 흔히 사상(史上)에 대왕 말경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하는 화랑제도에 대해서니, 이것의 기원은 실상 진흥 이전 구원(久遠)한 원시사회에서 구할 수 있지만 화랑도의 국사(國事) 방면(정치·군사 등)의 활약은 이 진흥대왕 때로부터 현저하게 시작한 듯하므로 여기에 특히 언급하려는 바이다. 화랑의 기원, 성능, 조직 내지 그 변천 발달에 관한 신중한 연구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하거니와 어떻든 우견(愚見)으로는 신라에는 원시종교단에서 파생된 일종의 수양단이 있어 연소미모자(年少美貌者)로 性行이 아름다운 자를 택하여 단장으로 받들고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이를 중심으로 도중(徒衆)이 서로 모여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시(試)하여 일종의 무사도적 기풍을 기르던 것과, 또 이것이 진흥대왕 때에 이르러 현저히 국사에 이용된 자취가 있었던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진흥왕 23년 대가야 정벌 때에 명장 이사부의 비장으로 발군의 전공을 세웠던 사다함(斯多含)은 「삼국사기」 동인전에 의하면 그는 본시 귀족으로 외표(外表)가 청수(淸秀)하고 지기(志氣)가 방정하여 시인(時人)이 받들어 화랑을 삼았더니 무리가 무려 1천 인에 달하여 군중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를 명하여 가라(加羅;대가야)를 침습할 때 사다함은 나이 15, 6임에도 불구하고 종군하기를 청하매 왕이 처음에는 그의 연소(年少)를 이유로 허하지 아니하다가 여러 번 간청에 못 이겨 종군을 허하였다 하고, 출정 때에는 그의 도중도 많이 참가하였다 하니 이것이 화랑도의 사적(事跡)으로 역사상에 나타난 최고(最古) 기록인 동시에 그들의 국사를 위한 활약의 사실도 역시 이것으로써 최초의 기록을 삼지 아니하면 안 된다.

 

화랑도와 신라의 정치 및 군사 방면과의 교섭이 진흥왕 이전에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상에 나타날 만큼 현저하게 되기는 진흥왕시대부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말년)조에는 화랑의 전신으로 원화(源花;혹은 原花)에 관한 기사를 실어, 인가(人家)의 미녀를 택하여 이름을 원화라 하여 도중을 모으고 더불어 놀게 하여 인물을 시택(試擇)케 하였는데 남모(南毛), 준정(俊貞)이란 두 아름다운 원화가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자가(自家)로 유인하여 권주대취(勸酒大醉)케 한 후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이매 준정도 이로 인하여 주(誅)에 복(伏)하고 그 도중들도 따라 해산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는 여성 대신 미모 남성을 택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도중을 모아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서로 즐거워하고 산수에 유오(遊娛)하여 사람의 邪正을 알아 착한 자를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한다.

 

화랑의 전신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무격단과 같은 것이 있어 일종의 사교기관을 겸하였던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나, 진흥왕 말년에 원화란 화랑의 전신이 창시되어 인물을 시택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는 필경 위에 말한 화랑도의 국사 방면의 활약이 현저하게 된 사실에 부회하여 생긴 설화에 불과할 것이다. 신라의 화랑도의 활약이 진흥왕 이후 해를 따라 성황을 정(呈)하여 현좌 충신과 양장 용졸이 이 단체에서 배출되었거니와, 위 설화의 이면에는 진흥대왕이 화랑도를 극력 애호하여 유지장려하였던 사실의 일면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진흥대왕의 내치(內治)는 그 척경사업과 한가지로 각 방면에 혁혁한 바가 있었음은 위에 술한 바에 의하여 넉넉히 알 수 있지만, 워낙 사료가 부족하여 이 이상 더 상고할 길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긴다. 대왕은 재위 37년 향수 겨우 43세로 승하하셨으니 대왕으로 천수를 다하였던들 얼마나 더 광휘 있는 업적을 남겼을까 하는 애석한 감을 또한 금치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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