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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30.고려-태조(太祖)

현상윤(玄相允) 1893∼?. 신소설가, 사학자, 교육자. 호 기당(幾堂). 평북 정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 광복 후 서울대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6·25 남침 중에 납북됨. 신소설 「한(恨)의 일생」, 「박명(薄命)」과 저서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등이 있음. 1. 내력 태조의 성은 왕씨요 휘(諱)는 건(建)이요 자는 약천(若天)이니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 사람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장자요 모는 한씨이니, 턱이 네모지고 이마가 넓으며 어음(語音)이 홍대(洪大)하고 기도(器度)1)가 웅심하며 성품이 관후하여 제세(濟世)의 양(量)이 있었다. 1)기도(器度):재능과 도량. 17세 때에..

29.통일신라-최치원(崔致遠)

차상찬(車相瓚) 1887~1946. 저널리스트, 한시 시인, 수필가. 호 청오(靑吾). 강원도 춘천 생. 보성전문 졸업. 「개벽」의 창간 동인이며 신간 「개벽」의 발행인. 이어 「별건곤(別乾坤)」,「신여성(新女性)」, 「농민」, 「학생」등을 발간. 이란 시가 있은 즉 귀국의 길을 떠나기는 갑진 10월이나 실제 귀국은 을사이며 따라서 28귀국이란 것은 그 떠나던 해 갑진을 표준한 듯하다. (註 2)공의 호를 유선이라 한 것은 「대동운옥(大東韻)」에 기재되고 또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동도시(東都詩)〉에도 '억석최유선 문장동중토(憶昔崔儒仙,文章動中士)’라는 구가 있고 「여람」 에 '신라유선 최학사(新羅儒仙 崔學士)'란 구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혹설에는 유선은 후인의 찬미요 고운의 자호(自號)는 아니라 하..

28.통일신라-장보고(張保皐)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장보고는 실로 조선사상의 유일한 해상 왕자이다. 이제 그의 활동을 들추어 보는 데 있어 먼저 그의 활동의 배경이 되는 신라 말기의 신라인의 해상 발전상태를 살펴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신라의 중·말기에 걸쳐 혹은 서로 황해를 통하여 혹은 동으로 조선해협을 끼고 신라인의 당 또는 일본에의 활동은 자못 왕성하던 것이었다. 무릇 해외 발전은 해상교통의 발달을 조건으로 하는..

27.통일신라-월명사(月明師)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창작」, 「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등이 있음. 동해 한 모퉁이에 오랫동안 쫓겨 지내던 조그마한 신라가 차츰 강성하여 그 무력으로 백제·고구려와 같은 강한 인방(隣邦)을 다 정복하였으나 그 문화로는 오히려 백제·고구려의 것을 많이 받았으며 또는 멀리 당나라와 사귀어 그것을 더욱 수입하기도 하였고 그 뒤 반세기를 지내어 제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한창 예술..

26.통일신라-설총(薛聰)

이병도(李丙意)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 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있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즈음에는 국운의 진전과 짝하여 유교·불교 양방면에도 대성황을 이루어 석학과 고승이 무리로 나타났으니 불교계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과 같은 위인이 있었고 유교 방면에는 강수(强首)와 설총과 같은 석학이 났었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 10성(聖) 중의 인물로 해동불교계를 대표한 최고봉임에 대하여, 강수와 설총은 신라 10현(賢) 중의 인물로 당시 유교문학계를 대표한 거장이었다. ..

25.통일신라-강고내말(强古乃末)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경주(慶州)는 한갓 신라 왕조의 국도가 아니었을뿐더러 삼보(三寶)의 都會地였으니 지금에 폐허로나마 잔존된 고적 유물은 거의 다 과거의 정사(精舍)의 유적이요, 가람의 유물들이다. 크고 장하던 불찰(佛刹)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부중(府中)에 남아 있는 당시의 거찰로는 오직 분황(芬皇) 1寺만을 들 수 있게 되었으니, 유명한 의전석탑(擬塼石塔 ;..

24.통일신라-김생(金生)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광복 후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에는 동양문화의 가장 전성시기였었다. 지나에서는 당(唐)의 건국 후 약 100년으로서 부력(富力)이 증진되고 문화가 원숙한 때인 동시에 영주(英主) 현종(玄宗)의 통치하던 개원(開元) 천보시대(天寶時代)였었다. 유당(有唐)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오른 때요, 그중에도 가장 예술의 꽃이 만발하였었던 때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이른바 “시는 두자미(杜子美)가 지극하고 문(文)은 한퇴지(韓退之)가 지극하고 화(畵)는 오도자(吳道子..

23.통일신라-박한미(朴韓味)

고유섭(高裕燮)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이조에 들어와 불교의 배척은 마침내 불상, 불구(佛具) 등 동철(銅鐵)의 材를 개용(改鎔)하여, 제전(製錢), 製武器 등에 사용하였으니, 불교예술이 일반(一半)은 이로 말미암아 괴훼소실(壞毁消失)된 바 적지 않고, 부상국(扶桑國) 제진수(諸鎭守)의 대장경(大藏經) 내구(來求)와 함께 범종의 소청이 또한 많아, 세종조에 벌써 국내 범종이 태진(殆盡)..

22.통일신라-혜초(慧超)

홍순혁(洪淳赫) 1. 머리말 우리 반도 문헌에 도무지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신라승 혜초(혹은 惠超)의 사적이 근자 조선학계에 차차 알려져 그의 위명(偉名)과 업적을 사모하는 이 많게 됨을 기뻐하여 마지않는다. 혜초의 이름이 높았던 것은 그의 생존하였던 8세기경의 일이었으리니 그가 약관에 고국을 떠나 멀고 먼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법을 두루 오천축(五天竺; 인도)에 구하였고 또한 밀교(密敎)의 교조이며 역경(譯經)으로 유명한 금강지(金剛智;670~741)와 그의 고족(高足) 불공(不空;705~774) 두 분에게 수학하였을 뿐더러 스승을 도와 역경사업에 종사한 그이었는지라 이만하여도 그의 이름은 무던히 높았을 것이다. ▶고족(高足):학행이 뛰어난 우수한 제자. 그러나 그의 전기가 남아..

21.통일신라-김대성(金大城)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 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 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등이 있음. 김대성을 전하는 가장 오래인 문헌은 「삼국유사」이다. 권5에 〈대성효이세부모 신문왕대(大成孝二世父母 神文王代)〉라 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모량리(牟梁里;浮雲村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毛良里라 부른다)에 빈녀(貧女) 경조(慶祖)가 있어 아이를 낳았더니 머리는 크고 이마는 성(城)같이 평평한지라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困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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