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金映遂)
釋義湘은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이다. 師의 속성은 김씨니 「宋高僧傳」에서 師의 속성을 박씨라고 한 것은 착오된 것이다. 사의 속성이 신라 국성(國姓)과 동일하므로 당인(唐人)들이 신라 국성을 박씨로 인(認)하는 까닭에 사의 속성을 박씨라고 하였으나 의상 당시의 신라 국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었다. 진평왕 47년 갑신에 계림부(鷄林府)에서 탄생하니 고(考)의 휘(諱)는 한신(韓信)이라고 한다.
20세에 가까와서 경사(京師) 황복사(皇福寺)에서 양도(陽度)하고 문무왕 원년에 입당(入唐)하여 장안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공(智儼公)의 강하(講下)에 취하여 화엄경의 오지(奧旨)를 수(受)하고 문무왕 10년에 귀국하여 동 16년 2월에 조지(朝旨)를 봉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創)하여 화엄종풍을 선포하다가 효소왕 10년 3월에 이르러 향년 78세로써 부석사에서 귀적하였는데 고려 숙종 6년 8월에 이르러 華嚴初祖大聖圓敎國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부석사에다가 탑비를 입(立)하였다.
사가 원효와 한가지로 전주 경복사(景福寺) 보덕(普德)의 강하에 가서 열반경(槃經)을 수(受)함을 위시하여 제산 명장(諸山名匠)들에게 경학을 배운 후 입당 구법의 길을 떠나서 해문(海門) 당주(唐州)라는 땅에까지 가다가 원효는 도로 본국으로 귀환하고 고영단신(孤影單身)으로 서사불퇴(誓死不退)라는 결심으로 상선에 의탁하여 지나 산동 등주(登州)에 상륙하여 얼마간 유연(留連)한 후 바로 종남산 지상사에 就하여 지엄공의 강하에서 화엄경을 수학하였다.
지엄공은 지나 화엄종의 제2조인 운화국사(雲華國師)라는 이로서 두순(杜順)의 고제(高弟)이다. 이때 현수법장(賢首法藏)은 아직 득도하기 전 동자의 몸으로서 사와 한가지로 동문학이 되었었다. 당일 문하에 수백명의 학자가 있었으되 화엄의 의지(義旨)를 잘 통하는 사람은 사요, 장문의 지송(持誦)을 잘하는 사람은 현수이므로 엄공이 현수를 가리켜 문지(文持)라고 별명하고 사를 가리켜 의지(義持)라고 별호하였다고 한다. 엄공이 화엄경을 전수하는 중 해인(海印圖) 13개를 도성(圖成)하고 항상 제자들에게 교시하였다.
▶해인(海印):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져 만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는 뜻. 부처의슬기를 일컫는 말.
사가 하루는 해인도 한 개를 자기가 별(別)로 圖成하여 가지고 이것을 엄공에게 제정(提呈)하였더니 엄공은 이것을 보고 대경하여 상찬(賞讚)하기를
“너는 진실로 화엄의 법계를 궁증(窮證)하고 불타의 의지를 체달(體達)한 사람이다. 나의 73개 해인을 별상해인(別相海印)이라고 하면 너의 1개 해인은 총상해인(總相海印)이다.”
하고 해설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사는 곧 돌아앉아 집필하고 해설을 지었으니 이것이 즉 「法界圖記(혹명 해인도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 법계도기가 성(成)한 때를 총장(總章) 원년 7월 15일이라고 하였으니, 즉 사가 입당한 지 8년째 되던 신라 문무왕 8년이다. 해인이라는 것은 화엄종의 소의근본(所依根本)이 되는 삼매(三昧)의 명으로서 世出世間一切萬法이 이 해인삼매라는 大定 중에 인현되는 것이 흡사 천지만상이 해면에 印現되는 것과 같다고 하여 '해인삼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화엄경의 불사의(不思議) 경계는 모두 이 해인삼매 중에서 출현된 것이므로 해인삼매를 화엄경의 소의근본이라고 한다.
이러한 심오의 의미를 모상하여 製成한 것이 즉 조선 화엄종의 종지(宗旨) 선포상(宣布上) 대표적 명물인 '해인도'라는 것이며 또한 이름을 법계도라고도 하고 혹은 법성도(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현금까지 조선 불교계에 유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년 동안을 두고 엄공의 훈도를 받았으므로 사의 도기(道器)는 이미 대성하였고 엄공도 벌써 귀적한 후이므로 사는 장차 환국하려는 준비를 하는 차에 마침 그때 본국 신라에서는 당조(唐朝)의 승인도 없이 백제의 토지, 유민을 취한 일이 있었는데 당 고종은 이것을 노책(怒責)하므로 본국 임금께서는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양도(良圖)를 보내어 사죄케 하였던 것이다.
흠순 등이 입당하여 알아보니 당 고종이 장차 대거(大擧)하여 동으로 신라를 치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으므로 감금 중에 있는 흠순 등은 비밀히 사를 동국으로 보내어 사실을 전달케 하였다. 그리하여 사는 곧 본국으로 귀환하여 사정을 조정에 들려주니 국가에서는 곧 신인종주(神印宗主) 명랑(明朗)을 청하여 비밀 단법(壇法)을 설(設)하여 鎭兵 기도를 행하였더니, 당 고종의 노기가 다소간 풀렸던지 당 고종은 흠순은 돌려 보내고 양도만은 유수(留囚)하였더니 양도는 필경 당의 옥중에서 명을 마쳤다고 한다.
사가 처음 산동 등주에 상륙하였을 때에 그곳 신사(信士)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유연하는데 유씨의 집에 선묘(善妙)라는 소녀가 있어서 사의 용모가 정특(挺特)한 것을 보고 여복미태(麗服媚態)로써 항상 유혹하여 보았으나 사의 마음은 태산과 같고 반석과 같아서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아니하였다.
▶정특(挺特): 훌륭하게 뛰어남.
이것을 본 선묘는 그 마음을 돌이켜 도심(道心)을 발하여 사의 앞에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화상에게 귀명(歸命)하고 제자가 되어 화상이 대승도(大乘道)를 학습하여 대사를 성판(成辦)할 때에 제자는 반드시 단월(檀越)이 되어 일용자생지구(日用資生之具)를 공급하겠다.”라는 대원을 발하였다고 한다.
▶단월(檀越): 범어 Danapati의 음역. 보시를 행하는 사람.
불타의 고제(高弟) 아난(阿難) 같은 이도 오히려 마등가녀(魔登伽女)의 요술에 실패를 당할 뻔하였다가 요행히 불타의 법력을 가차하여 구출된 바 되었거늘, 사는 이와 같은 난경(難境)에 봉착하였으되 그것에 유혹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로 하여금 도심을 발케 하였으니 사의 입지 결심이 얼마나 견고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가 지엄공의 휘하에서 수학할 때에 隣寺에 住하는 율종(律宗) 도선(道宣)은 천인(天人)의 感通을 득(得)하여 매일 천공(天供)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천인(天人): 비천(飛天), 낙천(樂天), 천상의 유정들. 허공을 날아다니며 음악을 하고 하늘 꽃을 흩날리기도 하며 항상 즐거운 경계에 있지마는 그 복이 다하면 5쇠(衰)의 괴로움이 생긴다 함.
도선이 하루는 사에게 천공을 대접하려고 청좌(請坐)하였던바 천공이 과시(過時)하여도 부지(不至)하므로 사는 이 공발(空鉢)로 귀래하였다. 그제야 천공이 나타나므로 도선은 그 이유를 천사에게 문난(問)하였더니 천사의 대답이
“웬일인지 화엄신병(華嚴神兵)이 도량에 옹위하여 통행을 차단하므로 득입(得入)지 못하였다.”
하므로 도선은 항상 사를 추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전설이지만 이 전설로 인하여
“판상(判相)은 화엄 신병이 옹위하는 신인(神人)이라.”
고 당시인들이 추앙하였던 것을 窺知할 수 있는 것이다.
사가 귀국 후에 양양 낙산사에 가서 백화도량(白華道場;관음기도란 말과 같음) 원문(願文)을 지어 관음보살상 앞에서 3·7일의 기도를 드리던바, 기도의 최종일에 가서 관음보살이 현신 설법(現身說法)하는 것을 감득하였고, 또한 수정 영주 1관과 여의보주 1관을 傳受하여 낙산사에 遺傳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신청(信聽)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앙이 돈독한 사람으로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니, 이것으로 보아 사가 평일에 불타에 대한 신앙심이 어느 정도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는 이와 같은 학식과 입지와 신앙심을 가지고 영주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하여 화엄법문을 개설하였으므로, 부르지 아니한 학자들이 스스로 모여든 것이 3천 인의 다수에 이르러, 이것을 ‘판상문하(判相門下) 3천 제자’라고 한다. 그 3천인 제자 중에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인 대덕(大德)이 上首가 되었으므로 이것을 '의상문하 10성 제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10성 제자를 상수로 한 3천 인의 제자들이 판상의 법등(法燈)을 조선 전토에 분전(分傳)함으로부터 해동화엄원종이라는 일 교단을 성함에 이르렀다. 이 화엄종의 근본 대도량으로 영주 부석사를 필두로 하여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와 가야산 해인사와 비슬산(毘瑟山) 옥천사(玉泉寺)와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와 지리산 화엄사 등 10대 사찰이 있었다.
사의 일평생 생활을 보면 삼의(三衣)와 병발(瓶鉢) 이외에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의(三衣)와 병발(瓶鉢): 비구가 입는 세 가지 옷과 발우를 일컬어 스님이 반드시갖추어야 할 소지품. 삼의는 대의(大衣), 상의(上衣), 내의(內衣).
일찌기 신라 임금님께서 사의 도덕을 흠중(欽重)하여 전장(田莊)과 노복을 보시하였더니 사가 임금께 여쭈옵기를
“불법은 평등하여 귀천 고하가 없으니 노복이 무슨 소용이 있사오며 열반경에서 八不淨財를 설하였으니 전장이 무슨 소용이 있사오리까. 빈도(貧道)는 법계로써 위가(爲家)하고 걸식으로써 보명(保命)하는지라 법신(法身) 혜명(慧命)이 자차이생(籍此而生)할 따름이니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팔부정재(八不淨財): 혹은 팔부정물(八不淨物)이라 함. 비구가 쌓아두지 않아야하는 8종의 부정물.
① 집과 논밭을 가짐,
② 농사짓고 곡식을 쌓아둠,
③ 종을 부림,
④ 짐승을 기름,
⑤ 재물을 저축함,
⑥ 상아 등 조각품을 모아둠,
⑦ 가마솥을 마련하여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음,
⑧ 담과 벽에 그림을 그림.
그러고 문무왕 21년 6월 어느날 문무왕께서 경주 도성을 新作코자 하여 사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사의 대답이
“비록 초야 모옥에서 생활할지라도 정도를 행한다면 왕업이 장구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면 설사 인민을 노력케 하여 도성을 신작한다 할지라도 하등 이익이 없을지니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는 본래부터 실천 수행을 위주하고 문자의 조박(糟柏)을 남기지 아니하려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法界圖」와 「法界圖記」 1권을 제한 이외에는 별로 저술한 것이라고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오직 사가 평일에 제자들을 데리고 화엄교리에 대하여 수문 수답한 것을 제자 도신(道身)이 필기하여 둔 「도신장(道身章)」이 있고 제자 지통이 추동(錐洞)에서 필기하여 두었던 「추동기(錐洞記)」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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