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18.신라-원효(元曉) 본문
김영수(金映遂)
석원효(釋元曉)는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이다. 사(師)의 속성은 설씨(薛氏)인데 잉피공(仍皮公)의 손이요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진평왕 39년에 상주(혹 上州 즉 지금의 尙州)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탄생하였으니 오늘의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이 즉 사의 고향이다. 신문왕 6년에 이르러 오늘의 경주 혈사(穴寺)에서 향년 70세로써 귀적(歸寂)하였다. 그 후 80여 년을 지나 혜공왕 때에 이르러 오늘의 경주 내동면 암곡(谷)에다 탑비(塔碑)를 세우고 서당화상(誓幢和尙)이라고 추시(追諡)하였다.
서당이란 이름은 새들(新野)이란 말로서 본래 사의 출생지인 불지촌의 일부 지명이다. 일부 지명을 새벌이라고도 하고 새들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이두식 한자로 쓰자면 새벌은 사라(裟羅)라고 쓰고 새들은 서당(혹은 新幢, 新毛, 新等乙, 新月이라고도 씀)이라고 쓴다. 사의 구택(舊宅)을 사(捨)하여 절을 만들고 초개사(初開寺)라고 명한 것도 '새들'의 의역일 것이다. 사가 이 새들에서 생장하였고, 또한 이 초개사에서 상주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서당화상, 서당화상 하고 불렀기 때문에 이것이 드디어 사의 尊號가 되고 사의 귀적 후에는 다시 시호같이 된 것이다. 고려 숙종 6년 8월에 이르러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고 追諡하여 사의 本寺인 오늘의 경주 분황사에다 비를 세웠었다.
사는 출생하면서부터 특출한 재질을 가진 데다가 불문에 귀의하여 三藏聖敎를 박통(博通)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萬人之敵이라고 號하였다고 한다. 그때 지나 玄奘이 인도로부터 귀국하여 道譽가 方盛하던 터이므로 이것을 들은 사는 義湘과 더불어 入唐求法의 길에 올라 고구려 영토인 어느 지점까지 이르렀다가 신라국 첩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어 수라자(戍邏者)에게 수폐(囚閉)되었다가 누순(累旬)을 지난 후에 겨우 모면하고 도로 환국하였다. 문무왕 원년에 이르러 다시 입당 구법의 길을 떠났었다.
해문(海門) 당주(唐州)라는 지점 (오늘의 경기도 南陽만 부근 지점)에 이르러 지나행의 상선을 기다리는 중 어느 날 하루는 인가를 찾아들지 못하고 일모(日暮)하여 어느 공가(空家)에서 일야(一夜)를 경과하는데 야반이 되어 갈정(渴情)이 심함을 인하여 음료수를 탐구하던 차에 마침 방안에 一器의 청량수가 있었다. 사는 이것을 마시고 갈정을 면하였더니 명조(明早)에 보니 經夜하던 공가는 공가가 아니라 총간(塚間)이요 일기의 청량수는 청량수가 아니라 髑髏水다. 이것을 알게 되자 사는 비위가 뒤집혀 대오토지(大惡吐之)하였다. 이렇게 토하다가 문득 반성하기를
“‘마음이 생기면 그에 따라 법도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그에 따라 법도 없어진다. 삼계(三界)는 오직 아는 것에 따라 있으며 萬法은 오직 마음에 달린 것이다. (편집자 역)'라고 하신 불타의 말씀이 진실로 사인(斯人)의 설이 아니다. 一物인 총간과 일물인 촉루수를 가지고 작야(昨夜)에 공가로 인하고 일기의 청량수로 인할 때에는 안온하고 청량하던 것이 今朝에 총간으로 간(看)하고 촉루수로 지(知)한 연후에 새삼스러이 공포심이 생기고 大吐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안온과 공포를 구분하고 染과 淨을 차별하는 것은 오직 자기 自心에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며 그 경물(境物) 자체에는 안(安), 위(危), 염(染), 정(淨)이 본래부터 무(無)한 것이다.”하고 확철대오(確徹大悟)하였다. 悟하기 전에 구법을 원하는 것이지 오한 후에는 구법할 필요가 없다 하여 의상을 전별(餞別)하고 그만 본국으로 돌아왔었다.
이와 같은 오경(悟境)에 봉착한 연후의 사의 사상은 일변하여 염(染)·정(淨)이 무이(無二)하고, 동(動)·정(靜)이 상융(相融)하고 진(眞)·속(俗)이 상즉(相卽)하고, 색(色)·공(空)이 일도(一道)라는 일리제평(一理齊平)의 진경(眞境)에 도달하여 그의 심중에는 是·非·長·短과 好·惡·自·他가 없어지고 그의 行止에는 계율의 구속과 형식의 제한을 벗어나서 혹 어느 때에는 酒肆·倡家에 入하여 撫琴放歌도 하고 혹 어느 때에는 강헌선실(講軒禪室)에 좌(坐)하여 제소수선(製疏修禪)하기도 하여 그 행동이 이상하고 그 발언이 무애(無碍)하여 방랑무검(放浪無檢)하고 脫俗自由한 생활을 취하게 되었다.
▶무금방가(琴放歌):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뜯으며 크게 노래함.
이렇게 是·非·長·短·眞·俗·色·空의 모든 차별 이문(二門)이 一理齊平의 無二眞境에 도달된 자기 심경을 후에 10장으로 分門하여 自述成篇한 것이 이른바 유명한 「十門和諍論」이란 것이다. 이것이 즉 師의 불교사상이요 동시에 사를 宗祖로 하는 海東宗의 宗旨였고 和靜國師라고 贈諡하게 된 것도 이 和諍이란 諍자를 靜자로 改하여 和靜이라고 한 것이다.
사가 환국한 후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마침 신라 임금께서는 百座仁王般若經法會를 設하려고 국내에 유명한 高僧碩德을 소집하게 될새 압량군을 관할하는 상주에서는 사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당일 응소하여 온 제승들은 사의 放浪自由한 행동을 미워하여 왕에게 譖하여 사를 不納하도록 책동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무단히 왕후께서 뇌종을 앓게 되어 백약이 무효하고 산천신령에게 온갖 정성을 드리어 보았으나 신통한 영험이 없었다.
어느 무격의 진언에 의하여 사를 외국에 파견하여 방약(方藥)을 구하던 중 「金剛三昧經」이라는 경전 1권을 신기하게 得하여 이 경전을 講說하여서 왕후의 고질을 퇴치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이 삼매경은 원효가 아니고는 강설할 재능이 없다는 것도 또한 大安이라는 도인의 구두로부터 나오게 되어 마침내 원효를 영입하게 되었다. 사는 이 「금강삼매경」을 임금께 받아 가지고도 의연히 방랑자유한 생활을 계속하여 筆硯을 牛의 兩角 사이에다가 유치하기를 청하여 우차(牛車)를 타고 유행(遊行)하면서 시종 우차 중에서 「金剛三昧經疏」 5권을 완성하여 임금께 진헌(進獻)하므로 임금께서는 정일(定日)하여 황룡사에서 강연하도록 지휘하였더니 어느 무지도(無知徒)가 신소(新流) 5권을 절취하여 가버렸으므로 사는 부득이 3일의 연기를 청하여 약소(略) 3권을 다시 편성하였다.
강설 당일에 이르러 황룡사에는 엄숙한 강단이 설립되어 신라 임금께서는 친히 단 앞에 鞠躬하고 각간 이하 문무백관은 좌우에 俯伏하고 수천 수백의 龍象大衆은 합장 백배하고 低頭肅聽할새 사는 위의를 갖추어 가지고 등단하여 여병주수(如瓶注水)의 격으로 宣說하여 마치고 다시 창(唱)하여 말하기를,
“석일(昔日) 백주(百株)의 연목(椽木)을 채취함과 같은 인왕반야경법회에는 비록 참석치 못하였으나 今朝 一本의 동량을 횡가(橫架)함과 같은 금강삼매경 講席에는 오직 나의 독판이라.”
라고 할 적에 청법(聽法) 대중 중에는 무안하다는 慙色으로 伏膺懺悔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연목(椽木): 서까래.
▶伏膺懺悔: 마음에 깊이 새겨 참회함.
이 「금강삼매경 약소」 3권이 지나에 전입(傳入)하여 행하더니 후에 어느 역경삼장(譯經三藏)이 이 「금강삼매경소」는 범인(凡人)이 저술한 소(疏), 초(鈔)류로 볼 것이 아니라 보살이 설법한 논장(論藏)으로 대하는 것이 가하다 하여 「金剛三昧論」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사의 저술로서 위에서 말한 「십문화쟁론」과 「금강삼매경론 대본」 5권을 제한 이외에 「華嚴經疏」10권, 「楞伽經疏」7권, 「維摩經略贊」7권, 「金光明經疏」8권, 「解深密經疏」2권, 「方等經疏」2권, 「四分羯磨疏」4권, 「四分羯磨行宗記」8권, 「四分羯磨濟緣記」8권, 「영락본업경소」 3권, 「成維識論疏」10권, 「攝大乘論疏」4권, 「瑜伽師地論中實」4권, 「雜集論疏」5권, 「成實論疏」16권, 「최승왕경소(最勝王經疏」8권, 「世親釋論略記」4권, 「中邊分別論疏」4권, 「阿毘曇藏章」15권, 「略記阿毘曇心大義)」10권, 「雜阿毘曇義疏」7권이 있고 이 밖에 2권 혹은 단권으로 된 소(疏), 기(記), 종요(宗要), 강목(綱目), 집(集), 장(章) 등을 합하면 총계 92부 230여 권의 저술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 고려시대까지 유전(流傳)하여 오던 것이요, 현금까지 보존된 것으로는 「금강삼매경론 약본」3권과 「大乘起信論疏」2권 이외에 「法華經宗要」, 「大慧度經宗要」, 「涅槃經宗要」, 「영락본업경종요」, 「無量壽經易要」, 「彌勒上生經宗要」, 「華嚴經疏散卷」, 「阿彌陀經疏」, 「中邊分別論疏」, 「起信論義記」, 「菩薩戒本持犯要記」, 「菩薩戒本私記」, 「遊心安樂道」, 「大乘六情懺悔法」, 「發心章」, 「二障義」 등 각 1권이 있다.
이상 저술 중에 「대승기신론소」 2권은 저작 즉시 지나에 전입되어 지나인들의 종상(宗尙)하는 바로서 '해동소(海東流)’라는 존칭을 붙여 부르는 것이다. 화엄종의 대성자인 현수법장(賢首法藏)은 전연 이것을 근거 삼아가지고 「기신론소」를 저작한 것이고 현수의 후계자인 청량(淸凉)은
“독수생정(毒樹生庭)에 불가불벌(不可不伐)이라”
라는 독설을 농(弄)하여 자가(自家)의 선진인 간완(刊完) 혜원공(琴苑公)의 학설을 여지없이 공박하는 판이지만 「해동소」에 대하여는 감히 일언일자라도 시비 논평을 가한 일이 없고 오직 유유복종하는 태도로써 「해동소」의 것을 끌어다가 자기 학설을 증명한 것을 본다면 「해동소」가 지나 불교학계에서 얼마만한 위신을 가졌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 어느 지나 학승(學僧)의 기록 중에
“화엄종의 여러 스님들은 옛날에 소(疏)나 초(鈔)를 지을 때 원효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며, 그를 칭송하여 ‘해동의 태양(海東日)’이라 하고 감히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못했다. 몸은 신라에 있었으나 당나라 땅에 덕을 입혔으니 불세(不世)의 위인이라고 할 만하다.”(편집자 역)
라고 찬평한 것도 있다..
사는 말년에 대처생남(帶妻生男)의 보살행을 취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제21권 경주 고적조 요석궁 주(瑤石宮註)에
“신라의 중인 원효는 일찍이 도끼에 대해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나에게 자루가 빠진 도끼(無主婦)를 허락할는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賢子)을 깎겠네’ 하였다. 태종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자식을 낳고자 하는 것이다. 나라에 크게 어진 사람이 있다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하였다.
이때 요석궁에는 종실의 과부가 있었다. 왕이 궁지기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했는데, 원효가 남산으로부터 오다가 유교(楡橋)를 지날 때 거짓으로 실족하여 물에 빠졌다. 궁지기가 원효를 요석궁에 모시고 와서 옷을 말리게 하고 이것을 이유로 머물러 묵게 되었다. 이로부터 과연 과부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설총이다. 궁터는 향교의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편집자 역)
고 하였다. 사는 이와 같이 요석궁에 동거하여 설총을 생(生)하였으니 이가 즉 신라 2賢 중 일인으로서 조선 儒學의 初祖이다. 총은 본시 睿敏한 재질이 있는 데다가 경사(經史)를 박통하여 일반 학자의 師表가 되는 이로서, 조선말로써 6경을 訓解하여 후진의 교양에 무한한 공로를 끼쳐 준 이다.
사가 총을 생한 후로는 小性居士라고 자칭하여 승려로서 행세치 아니하려고 하였지마는, 사의 法恩에 젖은 법제자들은 의연히 동방에 一佛이 출세한 것같이 추숭하였다. 그 제자들 중에는 불법에 능통하여 慧命을 계승하여 일방의 교주가 될 만한 上首만 치더라도 萬善和尙 등 9인이 있었으니 이들은 다 大德의 位에 오른 이들이다. 이 9인의 대덕들이 各化一方함으로부터 그 法孫이 신라시대에는 경주 분황사를 근본 도량으로 하고 고려시대에는 개성 王輪寺를 본산 사찰로 하여 宗風을 선양하여 필경 해동종이라는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해동이라는 것은 원래 조선의 별칭인데 원효의 불교는 지나 불교의 계통에는 관계가 없이 조선 동국에서 특창한 것이라 하여 해동종이라는 宗名을 갖게 된 것으로서 혹은 法性宗이라고 하고 또는 中道宗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고려 숙종 때에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뒤를 이어 화정국사의 眞影을 寫하여 봉안하고 문사 김부식을 명하여 影贊을 지었는데 그 영찬에
“넓고 넓음이여 부처님의 도
크고 큼이며 부처님 말씀(圓音)
들을 때마다 각각 다르니
크고 작으며 얕고 깊음이 조각달 같고
끊임없는 바람과 흡사하도다.
至人의 큰 거울이 다르면서도 같고 마음과 이치가 서로 상응하는구나.
방정하게 넓고 모든 이치가 융합되도다.
스스로 봄에 통하지 않는 법이 없도다
백 개의 내(川)가 바다를 이루고
만 가지 모양이 하나의 하늘이 되도다.
넓고 크도다
이름을 지을 수가 없구나" (편집자 역)
“恢恢一道 落落圓音 機聞自異 大小淺深 如三舟月 似萬窮風 至人大鑑 即異而同 瑜伽名相 方廣圓融 自我觀之 無法不通 百川共海 萬相一天 廣矣大矣 莫得名焉”
라고 하였다.
사의 신이한 행적으로서 「宋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擲盤救衆이니 噴水鎭火니 分軀百松이니 六方告滅이니 塑像回顧니 하는 것은 다 사를 神人視하고 如佛崇拜하는 신념으로부터 나온 일종 전설일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그만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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