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22.통일신라-혜초(慧超) 본문
홍순혁(洪淳赫)
1. 머리말
우리 반도 문헌에 도무지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신라승 혜초(혹은 惠超)의 사적이 근자 조선학계에 차차 알려져 그의 위명(偉名)과 업적을 사모하는 이 많게 됨을 기뻐하여 마지않는다. 혜초의 이름이 높았던 것은 그의 생존하였던 8세기경의 일이었으리니 그가 약관에 고국을 떠나 멀고 먼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법을 두루 오천축(五天竺; 인도)에 구하였고 또한 밀교(密敎)의 교조이며 역경(譯經)으로 유명한 금강지(金剛智;670~741)와 그의 고족(高足) 불공(不空;705~774) 두 분에게 수학하였을 뿐더러 스승을 도와 역경사업에 종사한 그이었는지라 이만하여도 그의 이름은 무던히 높았을 것이다.
▶고족(高足):학행이 뛰어난 우수한 제자.
그러나 그의 전기가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저서가 끼쳐지지 않아 후인들로 그의 이름을 좇아 기억케 못하였더니 1900년경(명치 33년) 지나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천불동(千佛洞) 막고굴(莫高窟)의 한 석실에서 우연히 발견된 수다한 고문적 중에서 혜초의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잔결본(殘缺本)이 나타나자 근세에 발흥한 서역사(西域史)의 둘도 없는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어 그의 이름은 다시금 동서 학계에 훤전(喧傳)케 된 것이다. 생각하면 그의 일생도 파란 많은 일생이었으려니와 사후에 남긴 그의 업적도 또한 기구하다 아니할 수 없다.
2. 그의 저서가 재발견되기까지
불경 중 난해의 범어(梵語;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에 주석을 가한 서책으로 혜림(慧琳;737~820년)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가 있다. 혜림은 혜초의 동학으로 인도의 성명(聲明; 음운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과 지나의 훈고(字義 설명)에 정통하여 20여 년간 고심하여 경(經), 논(論) 1,300 부 5,700여 권 중의 범어를 뽑아 100권의 거질(巨秩)을 대성한 것이 전기 「일체경음의」인바, 이 책 중에 혜초의 인도기행인 「왕오천축국전」도 인용되어 84조가 음석 의해(音釋義解)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혜초의 이름과 그의 유저(遺著)의 있음은 일부 독학자(篤學者)에 한하여 알려져 있으나 그 저서는 언제서부터인지 실전(失傳)하고 말았던 것이다.
감숙성 돈황은 한나라 무제가 장건(張騫)을 사자로 서역지방에 보낸 이후 동서 교통로상 요충으로 발달되어 온 곳이다. 멀리 서역지방에 왕환(往還)하는 이로 인도에 불법을 구하는 명승으로 이곳에 다리를 쉬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현장(玄奘)과 마르코 폴로가 그 일례이다. 그런데 돈황동남에 명사산(鳴沙山)이란 모래산이 있고 그 동록(東麓)에 뇌음사(雷音寺)라는 고찰이 있어 절 뒤에는 불상을 모신 동굴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명치 33년경 왕도사라고 불리는 중이 이 절 주지로 와서 황폐한 곳을 수선하던 중 우연히 동굴 속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서책으로 가득찬 석실을 발견하였다. 무식한 주지는 그중 몇 책을 그 고을 관부에 보내어 발견된 사유를 보고하였으나 그들 역시 그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대로 봉하여 두라고 지시만 하고 말 따름이었다.
이 소식이 어찌어찌 전하여 당시 (명치 40년, 1907) 서장(西藏) 방면 학술탐험 중에 있던 동양학 학자 영국인 스타인 박사의 귀에 들어갔었다. 그는 종자 수인을 데리고 천불동으로 가서 주지를 달래어 석실 구경을 하였다. 그는 한문에는 정통하지 못하였으나 범어, 서장어, 기타 중앙아시아의 신고어(新古語)에 능하였다. 그의 빛나는 눈앞에는 이상 여러 고어로 쓰인 불교관계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지나인의 욕심을 아는 그인지라 거짓 놀라지 않은 체하고 석실을 나왔다. 온갖 방법을 다하여 교섭한 결과 돈에 눈이 어두운 주지는 얼마 안 되는 값에 대부분을 팔아먹었다. 스타인 박사는 그 책 전부를 24개 대갑(大匣)에 묶어 본국 대영박물관에 옮겨 보관하여 학자의 연구에 제공하고 있는 중이다.
스타인 박사의 돈황석실 유서 지거(持去)가 세상에 알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이 중에 못하지 않게 놀라 즉시로 천불동으로 달려간 이는 불란서인 페리오 교수이다. 그는 스타인 박사 못지않은 학자로 한문은 그의 전공이었으며 그 위에다가 스타인의 어학을 겸한 이이다. 대부분을 이미 가져간 나머지언마는 석실에 들어가 본 그의 눈에는 오히려 스타인 박사가 놀란 이상으로 놀랐다. 거기에는 세상에 전하지 않는 당·송 이래의 불경과 기타 희귀한 진적(珍籍)이 가득하였음이다. 교섭을 거듭한 결과 나머지의 삼분의 일 5천 권을 매수한 그는 귀도(歸途) 북경, 천진, 남경 등지에서 그 일부분을 학자들에게 보인 것이 단서가 되어 소위 돈황학파의 발흥을 보게 된 것이다. 페리오 교수의 장래품은 불란서 파리의 기메 박물관, 국민도서관 기타에 분장되어 있어 동서 학자 연구에 제공되어 있는바 그중에 우연히도 실전하였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다시금 그 얼굴을 나타낸 것이다.
3. 동서 학자의 왕오천축국전 연구와 그 학적 가치
페리오 교수의 손에 다시 세상에 나온 혜초의 유저는 불행히도 완본이 아니고 앞뒤가 끊어진 그나마 당나라 때 흔히 유행하던 절략본(節略本:사본)이었었다. 맨 처음으로 원문에 교록찰기(校錄札記)를 붙이어 발행한 이는 당시 지나의 유명한 학자 나진옥(羅振玉)씨였으니 그의 돈황석실 유서에 수재되어 있다. 그후 지나에 있어 서역사를 연구하던 등전풍팔(藤田豊八) 박사(마지막에는 대북제대 교수, 필자의 와세다 대학 재학시 은사)는 「혜초왕오천축국전전석(慧超往五天竺國傳箋釋)」이란 연구를 발표하여 그의 박학을 드러내었는데 단행본으로만 지나에서 2차, 일본에서 1차 간행되었었다. 그후 이 전석은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 유방전총서(遊方傳叢書) 제1에 실리게 되자 고남순차랑(高楠順次郎) 박사는 약간 고정(考訂)을 가입하였고 따로이 「혜초전고(慧超傳考)」1편을 총서에 붙였다. 혜초의 신라인임과 그가 유명한 금강지, 불공 양사(兩師)에게 취학하여 역경에 종사함을 고증한 이는 고남 박사로 비롯한다. 박사는 따로 이 〈혜초왕오천축국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잡지 「종교계」 제11권 제7호에 발표까지 한 일이 있는 분이다.
이상까지는 대개 페리오 교수가 가진 원본의 중사본(重寫本)으로 연구하여 온 까닭에 약간 틀림이 없지 않더니 페리오 교수와 경도제대 교수 우전(羽田) 박사 두 분의 협력으로 사진판 인쇄로 그 원형을 그대로 나타내게 되었으니 소화 1년(1926)에 간행된 「돈황유서」 제1집 맨 첫머리에 실린 것이 그것이다.
우전 박사는 간단하고도 조리있는 해제를 붙였는데 후에 고남 박사가 편찬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중에는 사진판을 원본으로 한 혜초의 유저가 수재되었다. 최근 이에 대한 논문으로는 성대(城大)교수 대곡승진(大谷勝眞)씨가 〈혜초왕오천축국전의 1, 2에 대하여>를 「소전선생송수기념 조선논집」 중에 발표한 것이 있다.
그러면 혜초의 유저가 어찌해서 이와 같이 동서 학자의 손에 생선(爭先) 연구되어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근세 동양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서역사의 한 분파가 생겨 가지고 동서 학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중인데 그 연구자료로는 지나 정사(正史) 중에 실려 있는 서역전(西域傳)과 명승의 인도기행과 서양 학자들의 현지 실제 연구의 보고서류가 중요한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불편을 느끼던 것은 당나라 현종시대에 있어 그 전후의 사료는 있으면서 당대 문화의 최고조이던 소위 개원(開元)년간의 것이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동서 학자들이 이 시대의 사료의 출현을 오래 열망하던 차 우연히 페리오 교수의 손에 발견된 것이 혜초의 유저이다. 원본이 아닌 절략본, 그나마 전후 잔결된 것일지라도 귀하기가 짝이 없는 것이다.
우전 박사가 그 해제에
“당대 의정(義淨) 삼장(三藏)의 후에 서유(西遊)의 사(士)로서 겨우 그 견문을 전한 이는 정원(貞元) 5년 북정(北庭)에 귀환한 오공(梧空)이다. 그리고 양자의 중간인 서방 제국의 사정에 나아가서는 역사에 기록한 바가 심히 상세치 못하다. 이에 개원시대에 당하여 인도를 비롯하여 서역 제국의 종교, 풍속, 정정(政情), 지리 등의 일반을 알 수 있음은 진실로 이 잔권(殘卷)의 덕이라고 본다. 어찌 그 기사가 간략하고 행(行)이 평판(平板)임을 물을 것이냐."(편집자 역)
라고 하였고 그 발견 당시의 동서 학자들의 경이에 대하여는 오랫동안 동경 동양문고(東洋文庫) 주임으로 있는 석전간지조(石田幹之助)씨가 동경일일신문에 지나학에 관한 두세 권의 신간서(支那學忙關寸石二三的新刊書)〉(소화 2년 4월 11일)라는 제목하에
“이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적에는 세계의 지나학자가 크게 놀랐었다. (중략)인도, 서역에 관한 제1 사료로 귀중히 여길 만한 것으로 학계가 크게 소동하면서 각국 학자가 다투어 연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의 역)”
라고 보도된 것으로 알 수 있다.
4. 그의 인물 사업과 반도 학계에 소개된 유래
머리말에 소개한 바와 같이 혜초에게 있어서는 이상스럽게도 전기가 끼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이 재현되지 않았다면 그저 혜림의 音義에 그의 이름과 저서명이 남았었을 뿐이었을 것이 페리오 교수의 우연한 발견으로 아니 그보다도 돈황석실 유서의 꿈같은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그가 신라인이었다는 것은 표제집(表制集) 중에 불공 삼장(三藏)에게 수학한 제자 6인의 이름이 적혀 ‘신라 혜초'라 있음에서 안 것이고 좀 더 무슨 재료가 없을까 하여 찾는 중에 스승을 도와 역경사업에 종사한 역경 서문에 그의 사적이 약간 기록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남 박사가 그의 「혜초전고」에
“살펴보건대 신라의 혜초는 나이가 약관에도 미치지 못하여 고국을 떠나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다와 선박에는 오래 견디지 못하여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불가에 귀의해서 자주(子洲)를 스승삼고, 오천축에 이르러 두루 성역을 찾아보았다. 드디어 북천로(北天路)를 취하여 안서(安西)에 돌아오니 나이가 30이었다. 당나라에 있었던 기간을 더해 보면 대충 84~5가 되니 그의 수명을 알 수 있겠다.”(편집자 역)
라고 하였다.
요컨대 혜초가 연소한 때 불문에 귀의하여 그의 신앙과 그의 열성은 그로 하여금 급(岌)을 멀리 당에 부(負)케 하였고, 이어 당시 인도로부터 당에 와서 밀교를 창시한 명승 금강지의 문인으로 있다가 뜻한 바 있어, 해로로 인도에 들어가 불적(佛蹟)의 순례를 마치고 육로로 장안에 돌아와 금강지의 제자 불공의 앞에서 수학하는 일방에 역경사업에 종사하니 일본의 홍법대사(弘法大師) 공해(空海)는 혜초 동문인 혜과(惠果)의 제자이다.
2)급(岌):우뚝 솟은 모양. 학문의 뛰어난 영역
그는 불행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땅에 영면한 듯 그의 博學高德을 고국에 펴지 못한 것이 우리의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그의 기행문 잔결 1권이 불교사보다도 서역사 연구상 세계적으로 경이를 주었다. 불교학자의 손에 재현되어 중국, 일본 여러 일류학자의 연구하에 그의 이름이 드날리게 됨도 한 운명이라 할까 기이라 할까. 그의 생전에 받았던 승려로서의 성가와 금일에 자료를 제공한 학자로서의 가치가 그 어떤 것이 나을지는 모르겠으나, 지하의 그도 사바세계의 유전무상(流轉無常)을 더 한번 웃지 않았을는지 누가 알리요.
그를 조선학계에 문자로 처음 소개한 분은 이능화(李能和)선생이니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조선사강좌(朝鮮史講座)」,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에 전기 고남 박사의 전고가 초출되어 실리었다. 그러나 이것은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먼저 읽으시고 알려 주셨다는 것을 필자는 최선생에게서 들은 듯하다. 그 후 권덕규(權悳奎) 선생이 교과서 「조선유기(朝鮮留記)」에 간단히 요령있게 기재하였으나 약간 억측과 오서(誤書)가 있음이 유감이다. 그리고는 말도(末徒)인 필자가 「한글잡지」에 <세계적 학계에 대경이를 신라승 혜초에 대하여>라고 발표한 것이(소화 3년 2월 15일) 비교적 상세한 소개이겠으나 이 졸고와 마찬가지로 혜초의 공적을 잘못 전함이 있지 않은가 하는 恐懼를 품는 미완성품이다.
문일평(文一平) 선생이 조선일보 지상에 발표하심이 있었건만 그의 장서(長逝)로 필자가 부득이 집필하게 되었음을 독자에게 심사(深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장서(長逝): 영영 죽어 돌아오지 아니함. 서거.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통일신라-김생(金生) (0) | 2023.05.03 |
---|---|
23.통일신라-박한미(朴韓味) (0) | 2023.05.03 |
21.통일신라-김대성(金大城) (9) | 2023.05.03 |
20.발해-발해태조 고왕(渤海太祖 高王) (0) | 2023.05.03 |
19.신라-의상(義湘) (1) | 2023.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