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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60.조선-서거정(徐居正)

노정희(盧鼎熙) 생몰 연대 미상. 조선사 연구가. 1. 출생과 혈통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의하여 그의 역사를 찾아본다. 그의 자는 강중(剛中)이요 대구 사람이었다. 호를 사가정(四佳亭)이라 하였고 우리의 석학 권근(權近)의 외손이라 하니 그의 혈관에는 벌써부터 일맥의 문장소(文章素)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영락(永樂) 경자에 출생하였다 하니 바로 이때가 이조 세종 2년이다. 그가 5~6세에 이르매 능히 문구를 지어 신동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니 재질이 선천적으로 우수하였던 것을 가히 알 것이다. 2. 사환생활(仕宦生活) 서거정이 19세 되는 무오년에 진사생원(進士生員) 시험에 연중(連中)하고 6년 후인 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니 이때로부터 사환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성(性)이 청직(淸直)..

59.조선-안견(安堅)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안견(安堅)의 자(字)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요 호는 현동자(玄洞子)요 혹은 주경(朱耕)이라. 지곡(池谷; 충남 서산 地谷) 사람으로서 세종조에 화원(畵員)으로 관(官)이 호군(護軍)에 있었다. 생사의 연월이 미상이나 세종조에 가장 드러나기 시작하여 세조조까지 화도(畫圖)에 종사하였던 모양이요(「槿域書畵徵」의 震彙續考에는 성종 때까지 ..

58.조선-이용(李瑢)

황의돈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성은 이, 명은 용, 자는 청지(淸之)요 호는 비해당(匪懈堂), 또는 매죽헌(梅竹軒), 또는 낭각거사(琅珏居士)라 하며 세종의 제3자로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봉하였으므로 세인이 안평대군이라 부르기를 많이 한다. 태종 무술에 탄생하였다가 단종 계유에 화를 입어 죽었으니 수(壽)가 36세였었다. 대군은 성군 세종대왕의 아들로서 위대한 혈통을 받고 난만치 각 방면으로 천재(天才)가 초월하였었다. 시문과 서화에 다 능한 중에도 더욱 서법이 奇絶(기절)하여 당시에 천하제일이라 숭앙..

56.조선-성삼문(成三問)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성삼문은 절의와 학문 문장에 있어 역사상에 드물게 보이는 대인물임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 바이거니와, 그의 도덕상(강기) 또는 문화상에 끼친 바 영향과 공헌이 막대한 것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천고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을 말할 때에는 이른바 단종의 사육신(死六臣)을 연상케 되며 사육신에는 그의 중심인물인 성삼문을 대표적으로 들게 되는 바이다. 그리고 세계 무비의 ..

56.조선-장영실(蔣英實)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내가 「삼국사기」를 보다가 가장 머리를 숙여 절하고 사모하는 이가 있으니 곧 몇십 장을 없이하여 몇만 말의 찬송을 드날려 늘어놓은 이보다는 어떤 사실 아래에 성명 몇 자나 일 행 미만의 간략한 행적을 적은 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집 하나를 짓자 해도 거기에는 들보에 기둥에 마루에 서까래에 중깃, 산자, 쐐기, 보임까지, 나무차날, 흙보무라지가 하나도 모자라서는 집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들보가 중하냐, 물론 중한 것이..

55.조선-세종대왕(世宗大王)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 있음. 1. 대왕의 역사상에 처한 위대성 정음(正音)을 상용하는 무리의 길이 잊히지 못할 큰 은인인 이조 제4대 세종대왕은 자래(自來)로 '해동요순(혹은 동방요순)'의 칭찬을 듣는 성군이거니와, 대왕의 역사상에 처한 존재는 실로 특이하고 위대한 바가 있었다. 이조의 개국이 아직 연천(年淺)하여 모든 것이 초창의 역(域)을 벗지 못할 즈음에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각종의 시설, 경영, 개혁, 정리를 성(盛)히 하여 조..

54.조선-양성지(梁誠之)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500년간에 학자 문인이 많았었고 또 모신 책사(謀臣策士)도 적지 않았으나 대개는 정주(程朱)의 학설과 반마(班馬)1)의 장구(章句)를 철습(掇拾)2)하는 이들이요, 그렇지 않으면 대의명분을 구실로 삼아 함부로 대외경(對外硬)을 부르짖는 이와 인의(仁義)의 공탄(空彈)3)을 가지고 국방의대본(大本)을 삼으려고 하는 우원무모(迂遠無謀)4)한 무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1..

53.조선-박연(朴堧)

안확(安廓) 1884∼?. 국학자. 호 자산(山). 서울 출신. 니혼(日本) 대학 졸업. 청년연합회 잡지」, 「신천지」등의 잡지사 주간 역임. 저서에 「조선문학사」, 「수정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시조시학(時調詩學)」, 「조선문명사」등이 있음. 1. 출생과 성격 공의 초명(初名)은 연(然)이요 연(堧)은 후에 개명한 것이며 자는 탄부(坦夫)요 호는 난계(蘭溪)니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그 증조부로부터 그 친자(親子)까지의 대계(大系)는 아래의 표와 같다. 순(純;정랑) -시용(時庸;직강) - 천석(天錫;좌윤) - 연(堧) 1자 맹우(孟愚) 2자 중우(仲愚) 3자 계우(季愚) 1녀서 조주(趙注) 2녀서 권치경(權致敬) 3녀서 방순손(房順孫) 4녀서 최자청(崔自淸) 공은 고려 말엽의 ..

52.조선-이천(李蕆)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있음. 이천은 예안(禮安)사람이니 호는 불곡(佛谷)이라. 군부판서(軍簿判書) 송(竦)의 아들이다. 태조 때의 별장(別將)으로 태종 10년 경인에 무과중시(重試)에 첩(捷)하여1) 관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생각이 정교하여 악기, 의상(儀象)2), 주자(鑄字), 무기에 대한 재능이 있고 또 무략(武略)이 있었다. 그 드러난 행실을 아래에 베푼다. 1)첩(捷)하여:우수한 성적으로 남들을 이겨 2)의상(儀象):혼천의(渾天儀). 조선..

51.조선-황희(黃喜)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계 및 소년시대 황희는 장수현(長水縣) 사람이라, 초명(初名)은 수노(壽老)요 자는 구부(懼夫)요 호는 방촌(厖村)이니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아들로서 고려 공민왕 12년 계묘 2월 초 10일에 송경(松京) 가조리(可助里)에서 탄생하였었다. 그때는 고려 말기라 衰運(쇠운)에 기울어진 때다. 내우와 외환이 층생첩출(層生疊出)하여 도저히 수습치 못할 비참한 지경에 빠졌었다. 이때에 마침 절세 위인 방촌 황선생을 잉육(孕育)하여 이씨 왕조 500년의 홍운(鴻運)을 찬양(贊襄)케 하였다. 공이 어릴 때부터 신기(神氣)가 영발(英發)하여 범아(凡兒)에 초출(超出)하더니 5세가 되매 총민이 절륜하여 보는 바를 문득 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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