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장보고는 실로 조선사상의 유일한 해상 왕자이다. 이제 그의 활동을 들추어 보는 데 있어 먼저 그의 활동의 배경이 되는 신라 말기의 신라인의 해상 발전상태를 살펴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신라의 중·말기에 걸쳐 혹은 서로 황해를 통하여 혹은 동으로 조선해협을 끼고 신라인의 당 또는 일본에의 활동은 자못 왕성하던 것이었다. 무릇 해외 발전은 해상교통의 발달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니 반도는 그의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이미 三韓四郡시대로부터 동아 해상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의 국제교통상 지위만 보더라도, 신문왕 제31대 시대에 일본의 견당 유학생(遣唐留學生)과 입당 학문승(入唐學問僧) 등은 자주 신라 사절의 편에 의하여 본국에 송환되었으며, 경덕왕(제35대)시대에는 당의 사절이 신라를 통하여 일본에의 사명을 달한 일이 있고, 혜공왕(제 36대)시대에도 재당(唐) 일본 사신과 유학생이 신라 사절을 통하여 본국과의 통신을 행하였던 것으로서 이에 반(伴)하여 일본과의 무역도 자못 왕성하였다. 다시 황해를 무대로 대륙 방면에 있어서의 그들의 활약은 실로 후인을 경탄케 하는 바가 있었으니 지나 동부 연안 일대에는 신라인의 세력이 광범위에 긍하여 부식(扶植)되었다. 초주(楚州;강소성 회안현), 사주 연수향(泗州 漣水鄕; 강소성 회양도), 산동 등주 문등현(登州文登縣;상고로부터 반도와의 해상 교통의 요충), 양주(揚州) 등지에는 신라인의 집단 거류지로서 신라방(新羅坊)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의 특별행정기관으로는 구당신라소(句當新羅所)가 설치되었으며 그의 압아(押衙 ; 총관)도 신라인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 본국에 있어서는 그의 종말기에 가까울수록 세력이 쇠퇴하여 국내의 통제와 질서가 문란하여 이에 따라 근해에는 해적이 횡행하여 신라의 선박을 자주 약탈하며 신라인을 납거(拉去)하여 당인의 노예로 육매(鬻賣)하는 참상이 나타남에 이르렀다. 해적의 출몰로 말미암아 신라인의 해상 활동은 중대한 장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인신의 약매(掠賣)는 인도상으로도 방임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상 숙청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니 이에서 청해(淸海;완도)를 중심으로 호웅(豪雄) 장보고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1) 육매(鬻賣): 판매 행위.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弓巴로도 씀)이니 장보고라는 성명은 궁복이 중국식으로 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바이다(弓을 張으로, 福 또는 巴를 保皐로 한 것임). 그는 신라 사람으로서 서남 해도(海島)의 출생인 듯하거니와 일찌기 정연(鄭年)과 같이 당에 건너가 활동을 하였다. 장보고와 정연은 본디 전투에 능하고 창 쓰는 것이 용하였으며 특히 정연은 잠수에 능하여 50리를 가되 숨이 막히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용건(勇健)함을 다투는 데 있어 장보고가 정연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연령으로 인하여 정연은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연치(年齒)로, 정연은 무예로 서로 지지 아니하는 사이였었다. 양인은 드디어 당에 건너가 군적에 몸을 던져 무령군(武寧軍;徐州) 소장에까지 올랐다.
당시 당의 국내도 극히 혼란하여 연해에는 해적이 출몰하던 것으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신라의 변민(邊民)을 당인의 노예로 약매하던 상태이었다. 이것을 목격하던 장보고는 의분의 마음과 신라인으로서의 자각 아래에서 개연히 당의 군직을 내어 던지고 본국에 돌아와 실력으로써 해상숙청을 꾀하기로 하였다.
그는 흥덕왕(제42대) 3년에 왕께
“중국 각지에는 신라인으로써 노비를 삼는 자 많사오니 원컨대 청해에 진(鎭)을 베풀어 적으로 하여금 국인을 납거치 못하게 하여지이다.”
고 아뢰고 만 명의 사졸을 규합하여 청해에 진을 설하고 청해대사(淸海大使)로서 해상을 숙청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신라인을 납거하는 환(患)이 그쳤으며 그 위에 청해진은 서로 황해, 동으로 조선해협을 끼고 있어 대륙 항로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일·지 항로(日支航路)의 중계 지점으로 자못 중요한 위치를 점한 것이니 일·지 양국에 걸친 장보고의 활동은 실로 해상 왕자의 면목을 나타내었다. 청해진과 일본과의 교통 무역은 구주(九州)의 태재부(太宰府 ; 대륙 외교의 衝에 당하던 것)를 상대로 행하였다. 그의 무역 사절은 회역사(廻易使)라는 명칭으로 자주 박다(博多 : 북구주)에 건너가 양국의 무역과 일·당(日唐) 간의 중계무역을 행하였다. 당시 대륙의 물화(物貨)는 주로 청해진을 거쳐 일본에 공급되고 일본의 물화도 또한 이에 의하여 대륙에 유통되었으므로 태재부의 수입(付贈品이라는 명목으로)도 또한 많은 수에 달하였다 한다.
당에는 이른바 견당 매물사(遣唐賣物使)가 교관선(交關船)을 인솔하고 건너가 성(盛)히 무역을 행하였으니, 그의 범위는 신라인의 세력이 부식되어 있던 지나의 동안 일대가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서 북은 산동반도로부터 남은 명주(明州), 천주(泉州)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찰된다. 특히 산동의 등주(登州)는 고래로 반도와의 해상 교통의 요충이며 당시 신라인의 거류지 가운데에 가장 저명한 곳이었으니 장보고는 이 등주의 문등현(文登縣) 청녕향 적산(淸寧鄕 赤山 산동반도 동남 石城灣 부근)에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 ; 적산원 또는 신라원이라고도 칭함)이라는 사원을 창건하였다. 이 사원에는 기본재산으로서 연 수입 500석 미(五百石米)의 장전(庄田)이 있었으며, 상주하는 승니(僧尼;신라인)가 약 30명이었고 강설(講說)이 열릴 때에는 신라인 남녀 도속(俗)이 일시에 참집(參集)하는 자 250명에 달하였다. ;
이와 같이 적산법화원은 재류(在留) 신라인의 정신적 위안소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집회소를 겸하였으며 신라 본국과의 연락기관이 되었었다. 견당 매물사가 건너갈 때에나 당의 사절이 건너올 때에 대개 이 사원에 들리던 것이니 특히 당사(唐使)는 이곳에서 신라의 사정을 탐문하며 사행(使行)의 편의를 꾀하였었다.
이에 반하여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신라인의 해상 활약은 더욱 도미(掉尾)2)의 세(勢)를 보이었으니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지나 왕래(특히 承和 견당사)에 신라 역어(譯語;통역) 등의 인도(引導)와 주선한 바가 많았으며 그들 사행의 승용하던 선박도 신라선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선박에도 신라의 수수(水手)와 초공(梢工)3) 등을 고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입당 유학승들의(圓仁과 그의 제자 惟正·性海이며 圓載의 제자仁好·順昌 등) 왕래와 통신도 신라 상선에 의하여 행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인의 신라 선편을 이용하는 데에도 축전(筑前 ; 북구주)태수는 장보고에 향하여 의촉하던만큼 그는 내외 국민으로부터 해상 패자(海上覇者)로 공인을 받은 것이다.
2)도미(掉尾): 끝판에 더욱 힘차게 활약함.
3)초공(梢工): 뱃사공.
이상으로써 장보고의 활동 범위와 부문이 얼마나 넓었으며 국가를 대표하는 그의 해상 세력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의 대외 세력이 앙양된 데에는 반면에 있어 그의 국내적 위세가 또한 강대한 것을 의미하는 바이다. 애초에 그가 청해에 설진(設鎭)하기까지에는 보통 다른 진수(鎭戍)의 장(將)과 달리 그의 자력으로써 세력을 쌓았던 듯하거니와 그 위에 해상 세력이 신장됨을 따라 그의 국내적 지위는 가히 반독립적인 것으로서 정부로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되었다.
흥덕왕이 붕거하매 (836) 왕족 사이에 왕위 계승의 분쟁이 일어나 흥덕왕의 종제(從弟) 김균정(金均貞;균정의 아들 祐徵은 禮徵과 金陽으로 더불어 균정을 추대코자 활약하였음)과 종질(從姪) 제륭(悌隆;金明,利弘 등이 그의 일당임)이 서로 다툰 결과 균정이 피살되고 제륭이 즉위하였다(희강왕). 이에 우징 일당은 화를 두려워하여 청해진에 건너가 장보고에게 의탁하여 세력을 북돋우면서 기회를 기다리더니 그 재익년에 이르러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민애왕).
우징은 드디어 장보고에 향하여
“원컨대 장군의 병(兵)으로써 군부(君父)의 수(雙)를 갚아지이라.”
고 간청하니 이에 대하여 장보고는
“의를 보고 하지 않으면 용맹이 없는 것이다."
하고 5천병으로써 그의 벗 정연에게 주며 그의 손을 잡고
“자네가 아니면 능히 난을 평정치 못할 것이다.”
하여 눈물로써 부탁하였다.
장보고와 정연은 기술(旣述)한 바와 같이 일찌기 당에 건너가 군적에 몸을 던졌다가 장보고는 본국에 돌아와 청해진 대사로서 위세를 누렸으나 정연은 당에 머물러 있다가 실의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연은 할 수 없이 본국에 돌아와 장보고에게 의탁코자 할 제 다른 사람들은 장·정 양인의 감정이 본디 좋지 못하였으므로 정연의 생명이 위험할까 하여 만류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기한(飢寒)에 울던 정연은 드디어 청해진을 찾아오게 된 것이니 이러한 고우(故友)에 대하여 사소한 구일(舊日)의 감정에 사로잡힐 장보고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감개하여 정연에게 술을 권하며 극히 즐기었다. 그 때에 김명 사건으로 우징을 돕게 되어 정연의 무용을 믿었던 그는 의심치 아니하고 5천 병을 맡겼던 것이니 이러한 장보고의 국가에 대한 의용(義勇)과 고우에 대한 의협은 당·송인(당의 杜牧과 송의 宋祁)을 감탄케 한 천고의 미담으로 전하는 바이다.
정연은 김양(金陽)과 더불어 우징을 도와 대구(大丘)에서 김흔(金昕)이 인솔한 민애왕군을 격파한 결과 민애왕은 병사에게 피살되고 (839) 우징이 왕위에 올라 제45대 신무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우징의 성공에는 장보고의 힘이 많았으므로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식실봉(食實封) 2천 호에 감의군사(感義軍使)를 봉하였고 그 다음 문성왕은 선조에 대한 그의 공로를 포상하여 진해장군(鎭海將軍)을 봉하였다.
장보고의 위망(威望)은 이로부터 더욱 국내에 떨쳤던 것으로서 이에 대하여 시의(淸疑)와 불안의 염(念)을 품는 자 또한 많았으며 장보고의 몰락한 원인도 실로 이곳에 있었다. 애초에 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 때에 만일 성공케 되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영입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재위한 지 겨우 4개월에 붕하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동왕 7년에 이르러 납비(妃)문제가 일어났으나 장보고를 꺼려하는 군신의 반대로 인하여 성립치 못하였던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왕실과 장보고와의 사이에 자못 감정이 소격(疎隔)됨에 이르렀던 듯하다.
장보고의 세력에 대하여 미리부터 불안을 느끼고 있던 왕실측에서는 실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그 익년에 (846) 이르러 드디어 암살 수단을 취하기로 하여 무주인(武州人;광주인) 염장(閻長)을 시켜 고육계(苦肉計)를 쓰게 하였다. 염장은 짐짓 조정을 배반하는 체하고 장보고에게 귀부(歸附)하매 장보고는 원래 장사를 사랑하는지라 의심치 아니하고 상객(上客)으로 대접하여 술을 마시며 즐기더니 염장은 장보고의 취하기를 기다려 그의 칼을 빼앗아 가지고 살해하고 말았다.
호웅 장보고가 이와 같이 비명에 원통히 거꾸러지매 그의 부하(李昌珍등)와 진민(鎭民)은 크게 분격하여 난을 일으켜 오랫동안 반항을 계속하였다.
동왕 13년에 이르러는 드디어 청해진을 혁파하고 진민을 벽골(碧骨 : 김제)군에 옮겼으며 다시 염장 일파의 간당(奸黨)은(李少貞 등) 장보고 부하의 도출(桃出)4)을 두려워하여 일본에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머물던 회역사(廻易使)의 인도를 요구하는 등 갖은 추태를 연출하였다.
이리하여 도미의 세를 보이던 신라인의 해상 세력도 장보고의 몰락을 일 전기로 하여 신라 왕조의 운명과 아울러 쇠망의 일로를 밟고 만 것이다.
4) 도출(桃出): 시비를 일으키거나 싸움을 돋음.
(참고 서목: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신라전, 입당구법순례행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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