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26.통일신라-설총(薛聰) 본문

한글 文章/조선명인전

26.통일신라-설총(薛聰)

耽古樓主 2023. 5. 3.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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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李丙意)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 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있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즈음에는 국운의 진전과 짝하여 유교·불교 양방면에도 대성황을 이루어 석학과 고승이 무리로 나타났으니 불교계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과 같은 위인이 있었고 유교 방면에는 강수(强首)와 설총과 같은 석학이 났었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 10성(聖) 중의 인물로 해동불교계를 대표한 최고봉임에 대하여, 강수와 설총은 신라 10현(賢) 중의 인물로 당시 유교문학계를 대표한 거장이었다. 설총은 바로 원효의 아들로 父가 해동불교의 해동종(海東宗 ;법성종)의 개조(開祖)임과 같이 이는 해동경학(海東經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되어 후세에 문묘1)종사(文廟從祀)의 특전을 받게까지 되었지만 이 부자는 유·불 2방면을 각각 대표한 재미있는 대조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 문묘(文廟):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현재 성균관의 대성전(大聖殿)에는 공자의 위패와 함께 설총의 위패도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봉안되어 있다.

 

설총의 자는 총지(聰智)니 조(祖)는 담날 나마(談捺奈麻;나마는 직명이니 乃末이라고도 함)요 부는 지금 말한 원효이었다. 원효(진평왕 39년 출생, 신문왕 6년 사망)는 성(性)이 영민하여 어릴 때 출가하여 별로 상사(常師)없이 교학(敎學)에 정진하였으며 34세에 동지 의상과 더불어 입당 구법의 도정에 올라 요동에까지 갔다가 총간(塚間)에서 일야(一夜)를 지내던 중 잘못 촉루(髑髏;죽은 사람의 머리)의 물을 마시고 구역이 남을 억(抑)치 못하였으나 미구에 깨달은 바가 있어 가로되

“심(心)이 생(生)하면 종종(種種)의 법이 생하고 심이 멸(滅)하면 감분(龕墳)2)이 불이(不二)며, 또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心外에 법이 없으니 무엇을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하고 드디어 발을 돌이켜 환국하였다 한다.

2) 감분(龕墳):감은 절에서 부처님을 모셔 놓은 곳이고 분은 무덤을 말한다.

 

후에 무열왕의 총우(寵遇)를 받아 요석공주와 동거하여 한 아들을 생(生)하니 그가 곧 설총으로서, 총의 외가는 즉 김씨 왕실이었다.

 

총의 전기는 도대체 자세치 못하여 그를 소개함에 있어 너무도 막연한 감을 금치 못하거니와, 이러한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유감은 어찌할 수 없는 바이므로 소략하나마 「삼국사기」(설총) 및 「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 보이는 몇 줄거리 기재(記載)에 의하여 그에 관한 무엇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총의 생년, 졸년까지도 분명히 알 도리가 없으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 부 원효가 무열왕 때에 공주를 아내로 삼아 총을 낳고 또 총은 다음에 말한 바와 같이 신문왕을 섬긴 일이 있었은즉 그는 무열왕(재위 8년) 때로부터 문무왕(재위 21년), 신문왕(재위 12년) 내지 그 후 효소왕(재위 11년), 성덕왕(재위 36년) 때에까지 걸쳐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만일 6, 70의 수를 누렸다고 가정한다면 넉넉히 그럴 수가 있는 까닭이다).

 

총은 그 자명(字名)과 같이 성이 총명하고 예민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자기 나라의 어음(語音)으로써 중국 및 동방의 속언, 물명(物名)을 능숙하게 적으며 또 그것으로 모든 경서와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후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전수 계통이 길이 그치지 아니하여 고려시대에도 학자들이 그를 조종(祖宗)으로 삼았다고 한다.

 

동방에 언문 창제 이전에는 고유한 문자가 없었으므로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한자의 음훈(音訓)을 빌어 마치 향가식 이두식과 같은 방법으로 방언 방음(邦音)을 나타냈던 것이니 이런 방법의 사용은 실상 설총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며 다만 총에 이르러는 비교적 이를 규칙 있게 사용하고 비로소 경서 기타 한문학의 고전 훈해에까지 널리 이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훈해란 것은 어떠한 정도의 것을 의미한 말인지 자세치 아니하나 역시 후세의 구결식(口訣式)으로 한문에 현토(懸吐)하여 문리(文理)를 통석(通釋)하였던 것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경전의 훈독을 자국화한 것이라든지 또 이것으로 후생을 훈도한 것은 설총에서 시작되어 그의 공적은 매우 저대(著大)하였던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아니 되며, 그 전수는 신라, 고려뿐만 아니라 길이 이조시대에까지 그치지 아니하여 언문 창제 후 훌륭한 언독(諺讀)·언해(諺解)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투습(套習)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근자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후세에 문묘에 종사된 것도 이와 같이 해동경학(海東經學)에 기여 공헌한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총은 경사에 뿐 아니라 문학에도 조예가 깊고 더욱 속문(屬文;작문)을 잘하여 저술이 많았던 모양이나 죄다 인멸되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고 오직 그〈화왕계(花王戒)〉 1편이 「삼국사기」동인전(同人傳) 중에 소수(所收)되었을 뿐이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고려 인종)에도 총의 저술 문자는 전함이 없어 이것밖에는 들지 못한 바이며 「삼국사기」에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혹 설총이 제작한 비명(碑銘) 문자가 있으나, 빠지고 떨어져 읽을 수가 없어 끝내 그것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편집자 역)

라고 함을 보아 더욱 그 소전(所傳)문자가 (당시에) 얼마나 핍절(乏絶)되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다.

 

<화왕계〉 1편도 그것이 완전한 원형대로의 것인지 혹은 후세 수사관(修史官)의 붓끝에 인하여 다소 수략(修略)된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이것은 총의 소전 문자로 금일에 남은 유일무이의 것인즉 다음에 그 글을 들어 보이는 동시에 역문을 붙이려고 하거니와, 이 화왕편은 일종의 우의(寓意)를 포함한 우화(fable)류의 이야기로 총이 처음 신문왕에게 이야기하여 드렸던 것인데 왕이 이를 듣고 가히 왕자(王者)의 계명(戒銘)이 되겠다 하여 글월로 써서 바치라 하여 총이 지은 바이었다. 즉,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신문대왕께서 여름 한더위에 높고 통창한 집에 계옵시어 총에게 일러 가로되

“오늘은 오던 비도 개고 더운 바람도 조금 서늘하여졌으니 맛있는 음식이나 아름다운 음악보다도 재미있는 담화와 우스운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풀고 싶다. 그대는 이상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터이니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지)말하라.”

라고 하였다.

총이 가로되

“신은 들으니 옛적에 화왕(모란)이 처음으로 오자 이를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을 둘러 호위하였더니 삼춘(三春)을 당하여 어여쁘게 피어 백화(百花)중에 홀로 뛰어난지라 이에 가까운 곳 먼 곳에서(遠近을 불문하고) 곱고 어여쁜 꽃들이 분주히 화왕을 뵈려고 애를 쓰던 차에 홀연히 한 가인(佳人)이 있어 밝은 얼굴과 옥같은 이에 곱게 단장하고 (맵시있게 옷을 입고) 기우뚱거리며 와서 얌전히 나와 말하되

‘첩은 눈같아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닷물을 대하고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청풍을 시원타 하고 제대로 노는 자이온대 이름은 장미라 하오며 왕의 어지심을 듣고 이 향기로운 장막에서 하룻밤을 모셔 볼까 하오니 왕께서 허락하실는지요.’

라고 하였읍니다.

또 (얼마 있다가)한 장부가 있어 베옷에 가죽띠를 띠고 흰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후들후들 걸어 굽은 허리로 와서 말하되

‘나는 경성 밖 큰 길가에 사는 자로 아래로는 창망(蒼莊)한 야경(野景)을 임하고 위로는 높은 산색(山色)을 대하오며 이름은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고 합니다. 생각컨대 좌우에서 봉양함이 고량진미로 충복(充腹)하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광주리 속에는 기운을 보할 양약과 독을 제할 악석(惡石ㅡ극약)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까닭에 옛말에 사마(絲麻)가 있더라도 관괴를 버리지 말라(「左傳」成公 9년조에 있는 말로 귀한 물건이 있더라도 천한 것을 버리지 말라는 뜻)고 하였으며 모든 군자가 대대로 그치지 아니함이 없으니 왕께서도 또한 의향이 계십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두 사람이 온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려고 하느냐 하였읍니다. 화왕이 가로되

‘장부의 말에도 또한 도리가 있지만 가인은 한번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라고 하였읍니다.

장부가 나와 말하되,

‘나는 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아시는 줄로 알고 왔더니 지금 본즉 소료(所料)3)는 틀렸읍니다. 대개 임금으로서 간사하고 아양부리는 자를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드문 까닭에 맹자도 종신토록 불우하였고 풍당(馮唐)도 낭서(郎署)에 잠기어(숨어) 백수(白首)로 늙었거니와 예로부터 이러하니 난들 어찌할 수 있으리오.’

하매 화왕이 가로되

‘내가 잘못하였다.'

라고 하였읍니다.”

3)소료(所料): 미루어 생각한 바.

 

이에 신문대왕이 추연한 빛을 띠어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우언(寓言)이 진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서 왕자의 계감(戒鑑)을 삼게 하라.”

하셨다.

 

시대가 초당(初唐)에 당하니만큼 그 문장은 변문체(騈文體)4)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가 유자(儒者)이니만큼 위의 우의는 전혀 원녕사(遠俀邪;소인) 친정직(親正直 : 군자)의 유교주의적 사상을 강조함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4)변문체(騈文體): 한문체의 하나로 4·6자의 댓구와 맞추어 뜻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미()의 한문.

 

그리하여 신문왕은 드디어 총을 초탁(超擢)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관직의 이력은 역시 자세치 않다. 총의 아들 중업(仲業)이 당 대력년간(大曆年間;신라 혜공왕 때)에 일본에 사행(使行)하였다가 돌아온 일이 있음은 경주 고선사(高仙寺) 서당화상탑비(誓幢和上塔碑)에서 보니 이는 아마 「속일본기(續日本紀)」 광인천황(光仁天皇) 보구(寶龜) 10년(신라 혜공왕 15년) 조에 나타나는 신라사(新羅使) 김난손(金蘭孫)·김엄[金嚴(巖)] 일행 중의 일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설총전에 세전일본국진인(世傳日本國眞人)의 〈증 신라사 설판관시서(贈新羅使薛判官詩序)〉에

“일찌기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을 보았으나, 그분을 뵙지 못한 것이 깊은 한이었는데 신라국의 사신인 설판관이 곧 원효거사의 손자라는 소리를 들으니 비록 그 할아버지를 뵙지는 못했으나 그 손자라도 만난 것이 아주 기쁘다." (편집자 역)

라고 한 것도 역시 설중업에 관한 말임은 재언을 부대(不待)한다. 고려 현종 12년에 이르러 설총을 추증하여 홍유후(弘儒侯)를 삼고 문묘에 종사케 하니 이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총이 일찌기 방언으로써 경전을 훈독하여 후생을 교도하고 동시에 해동경학에 공헌한 바가 많았던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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