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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통일신라-강고내말(强古乃末)

耽古樓主 2023. 5. 3.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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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강고내말(强古乃末)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경주(慶州)는 한갓 신라 왕조의 국도가 아니었을뿐더러 삼보(三寶)의 都會地였으니 지금에 폐허로나마 잔존된 고적 유물은 거의 다 과거의 정사(精舍)의 유적이요, 가람의 유물들이다. 크고 장하던 불찰(佛刹)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부중(府中)에 남아 있는 당시의 거찰로는 오직 분황(芬皇) 1寺만을 들 수 있게 되었으니, 유명한 의전석탑(擬塼石塔 ; 아찬 昔五源의 建塔이라 칭한다)은 이미 세인에 회자됨이 오래였고 역내(域內) 석정(石井)은 신라 호국룡(護國龍)의 주처(住處)이다(「삼국유사」권 2, 원성왕 조).

석불, 석초(石礎), 비대(碑臺) 등이 굴러 있는 법당 안에 약사여래의 동조입상(銅造立像)이 거연(巨然)히 남아 있어 그 아름답지 못한 형태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명장 강고내말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분황사(芬皇寺 ; 혹은 王芬寺)는 원래 신라 제27대 여주(女主) 선덕왕 3년 갑오에 준성(竣成)된 사찰로 대덕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괘석(掛錫)1)한 곳이요, 원효대사가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찬(纂)하던 곳으로 이름 높은 가람이다.

1)괘석(掛錫):중이 한 곳에 머무름.

 

일찌기 원효의 소상(塑像)이 있어 파계하여 낳은 아들 설총이 들어옴에 외면하던 머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고, 고려 숙종대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撰)한 오금석(烏金石)의 화정국사(和靜國師 ; 원효)비는 김추사(金秋史;正喜)가 제(題)한 방부(方跌)2)만 남아 있고 선서(善書)로 유명한 석혜강(釋慧江)도 이곳에 있었다.

2)방부(方跋): 귀부의 네모난 부분.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고려 숙종조에 306,700 근의 약사동상을 주성(鑄成)하였다가 후에 개소(改小)시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 제35대 경덕대왕 천보(天寶) 14년 을미에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로 하여금 주성케 한 약사동상이 중(重) 306,700근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근량(斤量)과 동일하니 무슨 착간(錯簡)으로 말미암은 오록(誤錄)이었던 듯하며, 세조조의 서거정(徐居正)의 〈분황폐사시(芬皇廢寺詩〉에

“분황사는 황룡사와 마주하고

천년의 기반 위에 풀이 스스로 돋아나니

흰 탑은 정정(亭亭)함이 객(客)을 부르는 것 같고

청산은 묵묵함이 근심스런 사람 같네.

앞의 세 마디 말을 해독할 스님 없으나

여섯 장(六丈)이 되는 몸을 담을 빈 곳 있으니

비로소 민간에 믿는 자가 반이나 되어

불법이 흥함이 어느 대에 秦나라와 흡사하였으리”(편집자역)3)

라는 것이 있으니 강고내말의 불상이 이때까지는 있었던 것인가.

3)“芬皇寺對皇龍寺 千載遺基草自新 白塔亭亭如喚客 靑山默默己愁人 無僧能解前三語 有物空餘丈六身 如信閭閻半佛宇 法興何代似姚秦

 

「지봉유설(芝峰類說)」,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에 의하면 경주 탑좌(搭左)에 동불(銅佛)이 있음을 듣고 명하여 군기(軍器)로 개용(改容)하였다는 설이 있으니(중종 때인 듯) 이는 반드시 분황불상이라 말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때 혹 어떠한 영향을 받음이 없었던가 의구되는 바 많다. 이는 현존한 불상이 고려 이전을 올라갈 수 없을 듯한 점에서 추상(推想)되는 바이다.

 

하여간 강고내말의 유작은 남게 되지 못하였으나, 강고내말의 이름만은 고전(古傳)으로부터 남게 되었으니 그의 범공(凡工)이 아니었음을 알 만하다. 다만 그가 경덕왕대 인물이요, 본피부의 사람이란 것만 알려 있으니 본피부 신라 6촌 중 취산 진지촌(紫山珍支村 ; 또는 于珍村)으로 불려지던 곳으로 유리왕 8년에 본피부로 개칭되고 고려 태조 23년에 들어 통선부(通仙部)로 고쳐서 소위 경주 최씨(혹은 정씨)의 본원지라 하여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경주군 외동면(外東面)이라고도 하고(「경주고적안내」) 또는 내동면(內東面) 인왕리(仁旺里) 일대라고도 한다(「진단학보」 제8호 이병도씨 논문 중).

 

이와 같이 그의 세계(世系)는 불명(不明)하고 유작은 볼 수 없지마는 그가 처한 경덕왕대란 신라의 조형예술이 최고봉에 이른 때요, 저 불국사, 석굴암 등의 제존(諸尊)이 조성되던 때이다. 불국사 석굴암이 결코 1인의 손에서 된 것이 아니니 강고내말이 당대 명장의 한 사람이었다면 그도 반드시 불국사, 석굴암의 제존 조성에 있어 커다란 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불국사 경내에 지금 동상으로서 비로자나좌상(毘盧遮那坐像)과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이 있고 전설상으로는 시대가 매우 앞서나(「삼국유사」 栢栗寺條,孝昭王代作으로 말함), 조형 규범상 동일한 형식을 갖고 있는 백률약사여래입상(지금 경주박물관 내에 있음)등에서 강고내말의 소주(所鑄) 동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풍요한 면모, 웅위한 체구, 분방 자유로운 의문(衣紋), 원만 충실된 흉억(胸臆)4),이러한 약사장육(藥師丈六)이 십이대원(十二大願)을 그 손에 받들고 동방유리정토(琉璃淨土)에 엄연히 서 계셨을 것이다.

4) 흉억(胸臆):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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