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42.고려- 일연(一然)

구글서생 2023. 5. 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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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일연(一然)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농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우리 고대의 수많은 사승(史乘)1)(해동고기, 단군기, 삼한고기, 신라고기, 신라국사, 고려국기, 고구려유기 및 신집, 백제서기, 제왕연대력, 신라수이전, 화랑세기, 한산기 등등)이 인멸한 오늘에 있어 고대 사실을 전하는 것은 약간의 금석문 이외에 사책(史冊)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편성한 것으로서 연대상으로 보면 「삼국유사」보다 약 140, 150년 가량 앞선 것이나 「삼국사기」는 지나의 소위 정사에 의(擬)하여 기전체(紀傳體)로 된 것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지나식 필치와 유교적 정신에 붙들려 왜곡 윤색을 가한 결과 필사(筆削)에 조솔(粗率)2)의 혐(嫌)을 면치 못하고 미사여구는 도리어 사실의 본면목을 흐리게 하였다.

1) 사승(史乘): 역사의 기록.

2) 조솔(粗率): 거칠고 경솔함.

 

그러나 「삼국유사」는 고래의 전승을 그대로 망라 수철(收綴)한 것이니 저 지나식으로 윤색된 「삼국사기」에 비하여 가치의 상위(相違)가 있음을 알 것이며 내용의 범위에 있어서도 「삼국사기」는 정치사의 영역을 넘지 못한 것이나 「삼국유사」는 고대 우리의 사회, 정치, 사상, 신앙, 풍속, 습관 등 모든 생활부문에 긍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 사회 내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이 「삼국유사」는 실로 최대 최귀의 보전(寶典)이 되는 것이니 그의 편저자야말로 고려 중·말기의 석문(釋門)의 거벽(巨璧)인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이다(조계종에 속함).

 

사(師)의 명은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며 호는 목암(睦庵)이니 일연은 그의 개명이다. 속성은 김씨요 부(父)는 언필(彦弼)이니 경주 장산군(章山郡) 사람으로 고려 희종 2년 병인(1206) 6월 신유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영오(穎悟)하여 어려서부터 출진(出塵)의 뜻을 품고 9세에 출가하여 해양(海陽; 南海) 무량사(無量寺)에 왕의(往衣)하고 여기에서 비로소 취학하였다. 총경(聰警)이 절륜하여 선사(禪肆)3)에 유력(遊歷)할새 성가가 매우 자자하였다. 그리하여 구산사선(九山四選)의 수(首)로 시배(時輩)에게 추중(推重)4)되었고 고종 14년 정해(1227) 겨울에 선불장(選佛場;僧科科場)에 부(赴)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3) 선사(()):참선하는 곳. 선방(禪房),

4) 추충(推重): 추앙하여 존중히 여김.

 

그 후에 포산(包山)의 보번암(寶幡庵), 묘문암(妙門庵), 무주암(無住庵) 등에 전거(轉居)하면서 더욱 수도에 정진한 결과 등 24년에 이르러 활연히 깨운 바 있어

“내가 금일에야 삼계(三界)가 환몽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에는 섬호(纖毫)5)의 거리낌이 없음을 보겠도다.”하였다.

5) 섬호(織毫): 조금. 약간.

 

이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제수되고 동 36년 기유에 남해 정림사(林社)의 사주(社主; 鄭相國 晏이 私第를 바쳐 정림사라 하고 사를 그의 主로 맞이하였음)가 되고 동 43년 병진에 선사가 되었다가 동 46년 기미에는 대선사에 올랐다. 원종 2년 신유(1261)에 소칙(召勅)을 받고 경사(京師)에 올라 선월사(禪月寺)에 개당(開堂)하여 멀리 목우화상(牧牛和尙)의 통(統)을 이었으며 동 5년 가을에 이르러 자주 남환(南還)하기를 청하여 오어사(吾魚寺)에 우거하다가 인홍사(仁弘寺)의 주석이 되매 학려(學儷)6)가 운집하였다.

6)학력(學儷): 배우려는 무리.

 

동 9년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선교명덕(禪敎名德)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현종시대에 각성된 대장경판은 고종 19년에 몽고의 병화로 소실되었으므로 동 23년에 再에 착수하여 16년 만에 완성된 것이니 세계적 重寶로서 지금 해인사에 있는 것이 곧 이것임)를 운해사(雲海寺)에 열새 사가 주맹(盟)이 되어 낮에는 금문(金文)을 읽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할제 제가(諸家)의 의문을 부석(剖釋)하기 흐름과 같아 정의(精義)가 신(神)에 들매, 회중(會衆)이 경복치 아니하는 이 없었다.

 

그가 인홍사를 주지한 지 11년에 중수하여 크게 확장하니 조가(朝家)로부터 인흥(仁興)이라 이름을 고치고 신서(宸書)7)의 액(額)을 사하셨으며, 또 포산(包山)의 동록(東麓)에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寺)라 개칭하는 등 사우창수(寺宇刱修)에도 많은 공헌이 있으며, 충렬왕 3년 정축(1277)에 왕명을 받아 운문사에 거주하여 교풍(風)을 더욱 闡揚하였다.

7) 신서(()): 임금의 글씨.

 

충렬왕의 사에 대한 傾注는 날로 깊어

“밀교를 전하매 어찌 다시 벼슬을 하리오

금땅에서 불러들이니 역시 기이하구료

연공(일연)을 원하여 대궐 아래에서 맞이하니

스님에 대한 오랜 사모는 흰구름의 흩어짐이로구나" (편집자 역)8)

라는 어제시(御製詩)를 주었고 동 7년 신사 여름에 왕이 동정(東征)으로 인하여 동도 경주에 가행(駕幸)하였을 때에 사는 행재(行在)9)로 피소(被召)되었고 익년 가을에는 대내에 영입되어 총우를 받았으며 때로는 법요(法要)의 자문에 봉대하였다.

8)“密傳何必更樞衣 金地逢招亦是奇 欲乞璉公激闕下 師何長戀白雲枝

9)행재(行在):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다시 그 익년에 이르러 왕은

“운문화상(일연)은 도가 높고 덕이 성하여 사람이 다 한가지로 숭앙하는 바이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자택(慈澤)을 몽(蒙)하랴. 마땅히 일국으로 더불어 같이하리라.”

하고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고자 하매 사는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은 牢請10)하기 재삼에 드디어 상장군 나유(羅裕) 등을 시켜 국사(國師)에 책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사하였으며 4월 신유에 대내에 영입하여 왕이 몸소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구의례11)를 행하였다.

10) 뇌청(牛請): 애오라지 청함.

11) 구의례 :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는 예로서 옛날의 경례.

 

조가(朝家)의 총우와 숭경이 이러하나 그는 본디 열뇨(熱鬧)12)한 경연(京輦)을 즐기지 아니하며 그 위에 노모가 계시므로 舊山에 돌아가기를 빌어 사의가 심히 간절하매 왕도 그 뜻을 어기지 못하여 드디어 윤허하고 근시좌랑(近侍左郞) 황수명(黃守命)을 보내어 호행케 하였다. 산 밑에 노모를 받듦에 조야가 그의 효성을 찬탄하더니 그 익년 즉 충렬왕 10년에 그의 노모는 드디어 96세의 고령으로 졸거하였다(師年이 79).

12) 열뇨(熱鬧):번화함. 1

 

이해에 조가에서는 인각사(麟角寺)로써 사의 하안(下安)13)의 사(寺)를 삼아 사우를 다시 수즙(修葺)14)하고 전토(田土) 100여 경을 사납하여 이곳에 상주케 하였다. 사는 인각사에서 거듭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여니 총림의 성황은 근고의 미증유한 바이었다.

13) 하안(()) : 말년에 안주함.

14) 수즙(修葺):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는 일.

 

동 15년(1289) 6월에 병후가 보여 7월 7일에 이르러 손수 대내에 올리는 상소를 쓰고 그 익일에 여러 선덕(禪德)으로 더불어 옹용(雍容)15)히 문답을 하다가 박연(泊然)히 시적(示寂)하니 향년이 84러라. 부음이 전하매 왕이 크게 진도(震悼)하여 판관후서사령(判觀候署事令) 척(周)을 보내어 식종(飾終)의 예를 전(展)하고 안렴사(按廉使)를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호케 하였으며 시(諡)를 보각(普覺)이라 내리고 탑을 정조(靜照)라 하였다.

15) 옹용(雍容):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함.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고로면(古老面) 화수동(華水洞) 인각사에 탑과 잔비(殘碑)가 있으니 그 비에 의하면

“사는 사람됨이 말에 희학(戲謔)이 없고 천성이 연식(緣飾)함이 없어 진정으로써 물(物)을 우(遇)하여 중(衆)에 처함에 홀로 있음과 같고 존(尊)에 거하매 비(卑)에 있음과 같으며 학(學)함에 있어서도 사훈(師訓)에 말미암지 아니하되 자연히 통효(通曉)하였다. …또 선열(禪悅)의 나머지에 장경(藏經)을 재열(再閱)하여 제가의 장소(章疏)를 궁구하고 유서(儒書)를 방섭(傍涉)하며 백가를 병관(秉貫)하여 방(方)을 따라 물(物)을 이(利)케 하고 묘용(妙用)이 종횡하여 무릇 50년간에 법도의 칭수(稱首)하는 바 되었으므로 주처(住處)하는 곳마다 다투어 경모하였다.… 비록 괴걸을 자부하는 자라도 다만 유방여윤(遺芳餘潤)만 받으면 심취하여 자실(自失)치 아니함이 없으며 모친을 봉양함이 순효하여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의 풍(風)을 사모하였으므로 스스로 목암이라 하였다 운운.”(비명 병서는 閔漬의 奉勅撰임)

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사의 천성이 담박 청진(淸眞)하고 재질이 탁월하여 도법을 닦음에 있어 師導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엄통철오(淹通澈悟)16)한 것과 또 유가백자(儒家百子)에 박통하여 그의 학식이 불법에만 그치지 않고 엄박무응(淹博無凝)하였음을 알 수가 있으며 그의 효심은 목주 진존숙(唐僧이니 蒲鞋17)를 삼아 모친을 봉양하였으므로 진포혜의 호가 있음)을 흠모하여 목암의 호를 지었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그의 탁월한 재덕과 심오한 조예는 당시 불문(佛門)의 용상(龍象)으로서 일세의 종장(宗匠)이었으며 그의 국존(國尊)의 칭은 명실이 상부한 것으로서 일국의 숭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던 것이다.

16) 엄통철오(淹通澈悟):널리 통하여 깨달음.

17) 포혜(蒲鞋):부들풀로 만든 신발.

 

사의 찬술(纂述)도 또한 허다한 수를 보이고 있으니 「어록」2권, 「게송잡저(偈頌雜著)」3권,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2권, 「조도(祖圖)」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 「제승법수(諸乘法數)」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30권, 「삼국유사」(본서 중에는 일연 門徒의 한둘의 가필이 있으니 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 前後所將舍利條末에 ‘無極記’라 한 것으로써 짐작할 수가 있다. 무극은 그의 高足인 寶鑑國師 混丘의 호임) 등 백여 권에 달하였다. 이에 오인은 사의 엄박한 학식과 풍부한 온축(蘊蓄)18)이 각종의 저서로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특히 그는 불도이니만큼 저서에 있어서도 불교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이었으므로 보아 사서의 찬술은 그의 餘業에 지나지 못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18) 온축(蘊蓄):오랜 연구로 학식을 많이 쌓음.

 

그러나 그의 허다한 저서도 후세에 전해진 것이 거의 없고 오직 「삼국유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 이도 또한 일대 기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삼국유사」도 그의 다른 유저와 같이 인멸되었다면 과연 우리의 고대사 부면이 얼마나 암흑하였으며 근세 문화의 연원이 얼마나 희미하게 되었을까. 사의 두 가지 종류의 유저가 한가지로 보전되지 못할진대 「삼국유사」만이라도 전해진 것이 참으로 불행 중의 행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고전 중에도 가장 중보(重寶)인 「삼국유사」는 그의 명칭으로 본다면 다만 삼국의 사적을 적었을 것 같으나 실은 종으로 상고시대 전부에 긍하였으며(부분적으로는 고려 중엽까지 미친 사항도 있으나) 횡으로는 삼국은 물론이요, 삼한, 가락, 부여, 발해, 말갈 내지 낙랑, 대방 등 고대 동방의 각 부족과 국가 전체에 넘나들었고, 다시 그의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史實), 토속, 신화, 전설, 사상, 신앙, 가요, 기타 유문질사(遺聞軼事)19)를 원형대로 수록한 것이니 말하자면 본서는 우리 고대 생활사의 전부를 건드린 최대의 종합적 문헌이라 할 것이다.

19) 유문질사(遺聞軼事):전해 들은 이야기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

 

이제 「삼국유사」에 나아가 몇 가지 사항을 들어 말씀해 보면, 첫째 단군에 관한 기록이니 원래 단군에 관한 단편적 기사로는 「삼국사기」에도

“평양은 본래 신인(神人) 왕검의 집이라.”(편집자 역)

라 하여 단군왕검을 의역적으로 신인 왕검이라 한 것이 보이며, 또 보각국사와 동시대인인 이승휴(李承休)도 그의 제왕운기(帝王韻記)」의

“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일으켰는가. 석제(釋帝)의 손으로 이름이 단군이다.”(편집자 역)

의 주(註)에 자못 자세한 기사를 실었으며 그후 공민왕조에 백문보(白文寶)의 상소 중에도

“우리 동방은 단군 이래 지금까지 이미 3,600 년 운운.”(편집자 역)

이라 한 것이 보이나 사승(史乘)으로서 단군을 우두머리로 하여 고조선을 자세히 적은 것은 현존한 사적 가운데에 「삼국유사」가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본서가 단군 기사의 전거가 되는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단군의 아들이라 주한 것이나 부여왕 해부루도 단군의 아들 부루(夫婁)와 동일한 것으로 주해한 것은 단군과 고대조선 열국의 국조(國祖)와의 맥락과 계통이 밀접한 것을 보여 주는 바로서 절대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 밖에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설화는 상고 모성 중심사회의 일 단면을 나타낸 것으로서 오인에게 여러 가지 암시를 주는 바이며, 문희(文姬)의 매몽설화(買夢說話)는 여조(麗朝) 조상 진(辰)의 전설과 전혀 궤를 동일히 하는 것이니 이는 일종의 지모신화(地母神話)로서 왕실조선(王室祖先)에 붙어다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은 고대 대외 교섭 및 태양 숭배에 관한 주양적(呪禳的) 행사의 잔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기타 다종다양의 신화 전설 및 사화는 모두 고대의 사회상, 생활태를 반영하는 편린 유주(遺珠)들이다. 그리고 본서에 실려 있는 고대가요 소위 향가 14수는 실로 우리의 '국풍'이며 '폐타(吠陀)20)로서 고가의 형식과 내용 내지 고어문의 유일한 전거가 되는 위에, 우리 고대인의 감정과 정조를 엿볼 수 있는 무상의 보(寶)라 할 것이다.

20) 폐타(吠陀): Veda의 음역. 인도 최고의 경전.

 

그러나 일면에 있어 「삼국유사」는 신라사가 중심이 된 관(觀)이 있으며 권 제3 이하는 특히 불교에 관한 사료가 주가 되어 있다. 보각국사 때만 해도 고대의 기록과 사료가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인즉 고구려, 백제의 일도 신라의 것과 같이 좀더 자세히 적어 두었더면, 조선의 신도(神道)와 화랑도에 관하여도 불교처럼 좀더 재료를 거두었었더면 하는 염원이 본서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기도 하는 바이다.

 

그러나 보각국사는 원래 경주인이며 또 불도이니만큼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할 것도 또한 이세(理勢)의 그러할 바이니 오인의 그와 같은 염원은 한갓 득롱망촉(得隴望蜀)21)의 욕망에 불과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름지기 만대의 후인에게 불멸의 보전(寶典)을 남겨 준 국사의 공덕을 봉찬하기에 겨를치 못하여야 할 것이다.

21) 득롱망촉(得隴望蜀):중국 한나라 때 광무가 농을 평정한 뒤에 촉나라를 쳤다는 옛일에서 나온 말로 욕심은 한이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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