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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고려-최무선(崔茂宣)

구글서생 2023. 5. 8.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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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최무선(崔茂宣)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 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선(先)하여 구진천(仇珍川)이 있고 후(後)하여 이의립(李義立)이 있으니 구진천은 천리노(千里弩)1)의 발명자로 신라 문무왕 때 사람이다.

1)(): 쇠노. 잇달아 여러 개의 화살이 나가게 된 활의 한 가지.

 

신라의 군사가 이 천리노를 써 전쟁에 큰 조익(助益)이 많은지라, 조정에서 사찬의 작(爵)을 주었다. 이 소문이 해외에 떨치매 서방 한토(漢土)의 당(唐) 임금(고종) 이치(李治)가 구진천을 청하여다가 그 술(術)을 자기 나라에 전해 주기를 청하되 구진천은 이내 그 능(能)을 다해 주지 않았다. 당 임금이 이 때문에 구진천을 후뢰(厚賂)2)로 달래되 고개를 흔들었고 중죄한다 으르되 무가내였다.

2)후뢰(厚略): 푸짐한 뇌물.

 

그 속에 잔사정은 말할 것이 없고 오직 하나 큰 이유는 당이 바야흐로 고구려·백제를 없애고 마저 신라를 기웃거리는 판임으로다. 이때 신라는 한참 융성기였다. 따라서 발명도 가득하였다. 대소 2양(二樣)의 무문금전(無文金錢)도 세계적 발명이요 고려 대성의 자기(磁器)도 이때의 발명이었다.

 

이의립은 이조 효종 때 사람이다. 이때까지는 농기와 부정(釜鼎)의 원료되는 수철(水鐵)과 화약의 주요한 원료인 유황이 역내에 나건만 변변히 찾지를 못하여 막대한 미곡으로 이를 남북 양 시(市)에서 바꿔다 쓰매 어느 때에도 불편과 불리가 적지 않으려든 가다가 급한 때이면 그 아쉬운 자료를 얻어 낼 구멍이 캄캄한 적도 있었다. 이에 발분(發憤)한 의립은 미친 듯이 스스로 중얼거렸다.

“땅은 사방이 다 같으니 동서에 다 있는 보배가 어찌 조선만 없으리오.

뿐만 아니라 예부터 금, 은, 동, 철, 유황의 유(類)를 안 쓴 적이 없었고 더구나 고려의 최무선 같은 이는 화약의 제법(製法)을 개량하여 큰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그 자료는 본국에서 채취하였을 것이요, 외지에만 기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내 천 인(千)의 땅을 파 얻지 못하면 만 장(萬丈)이라도 파내리라.”

하고 상당한 준비가 들어서는 날 곧 26세의 해에 딱 몸을 일으켜 탐광(探鑛)의 길을 나섰다.

 

정성이 뻗치는 바에 못할 것이 있으랴. 남으로 연해(沿海) 각지며 경기, 영동으로 관북, 서관을 두루 밟은 지 무릇 20년 동안에 마침내 수철광(水鐵鑛)을 울산 달천산(達川山)에서 얻고 비상광(砒霜鑛)을 경주 반척곡(盤尺谷)에서, 동해안 마뇌봉(瑪腦峯)에서 유황광을 얻어 채취의 방(方)과 정련의 술(術)을 깨쳐서 농구며 취기(炊器)와 무기를 우리 스스로 완전히 내 손으로 해내게 되니 이 세 가지에 걱정이 없게 되기는 참으로 이공(李公) 뒤의 일이다. 아, 그 공이 크도다. 이러하므로 조가(朝家)로서는 이 큰 공을 관직으로 상(賞)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공을 아울러 가진 최무선은 어떠한 어른인고,

최무선은 영주(永州) 사람이니 광창고사(廣倉庫使) 동순(東海)의 아들이다. 생김이 슬기롭고 방략(方略)이 많아 병법 이야기를 좋아하며 늘 말하기를 해구(海寇)를 꼼짝 못하게 억누르려면 화약을 쓰는 데에 지나는 것이 없거늘 우리 고려에 아직까지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도다. 검도로 덤비는 해구는 화약을 쓰는 군기로 혼낼밖에 없고 이 화약으로 쓰는 군기를 쓰려면 오직 하나 화약인데 화약을 쓰려면 그 제법에 정(精)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연찬하는 것이 곧 국가를 위함이거늘 이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으며 여기에 찬동하는 사람이 없음에 ‘어찌할고 큰일을'하고 남 아니하는 시름을 혼자 대신하였다.

 

그리하여 이 걱정으로 다끽(茶喫)의 소가(少暇)에나 공퇴(公退)의 여극(餘隙)에도 조금을 쉬지 않고 생각을 분촌(分寸)히 하며 교제를 팔방으로 하여 북연(北燕)의 관역(官役)에게나 강남의 상객(商客)에게도 담화에 무릇 이 이야기를 섞어 물었다.

 

하더니 한번은 원(元)의 염소장 이원(李元)이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 어른의 정력을 풀어낼 기회요 심공(心功)을 필 시절이었다. 하여 이 사람을 청하여 집에 두고 음식의 뒤를 대어 주며 자료를 모으고 기구를 차려서 술(術)로써 묻고 방법(法)으로써 제련하여 이런 지 얼마 세월에 자못 그 요령을 얻은지라.

 

도당(都堂)에 말하여 이것을 시험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무기(無技)하니 당국을 속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하였다.

 

무선이 다시 세월을 쌓아 자신을 얻고 넉넉한 나머지 있은 뒤에 계획을 들여 시험하기를 청하여 말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이 어른의 고심 연찬을 들은 당로(當路)도 그 정성에 감(感)한 바 있어 이에 국(局)을 세워 무선으로 제조(提調)를 삼아 화약을 수련케 하였다.

 

기예와 물자와 성력(誠力)이 갖추인 바에 잘되지 않을 법이 없는 것이다. 연월을 두고 만들어 낸 포환의 종류만 하여도 대강 들면 이러하였다.

 

종류: 대장군, 2장군, 3장군, 6화(六花), 석포, 화포, 신포(信砲), 화통, 화전(火箭), 철령전, 질려포,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燭天火)들이 이것이다.

 

이 기묘하고 신출한 것으로 동장(東江)의 어구 서강 변두리에 실험으로 한번 터뜨리니 하늘이 타는 듯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자욱하였다. 그만 군중을 놀라게 했다. 구경하는 사람만 놀랄 뿐 아니라 당국을 속인다고 비웃정거리던 자들까지도 놀람을 지나 느끼고 그리하기를 백 번 하였다.

 

화구(火具)의 완성을 세상에 보인 최어른은 다시 전함(戰艦) 만드는 데에 착안하였다. 탄자(彈子)를 실을 만한 곳간, 화전을 쓰고 화통을 던질만한 방호 갑판, 화포를 뒤스를 만한 대탑(臺塔) 들을 갖추 갖게 차린 전함이라야 하겠다. 이렇게 갖춘 전함의 제(制)를 제안하여 다시 도당에 말하여 감독 비조(備造)하기를 청하니 이번에는 조가에서도 최어른을 심신(深信)하는 터라, 곧 그 청을 허락하여 그 일을 맡겼다. 복안이 있는 바요 지혜는 쓸수록 느는 것이라, 최어른은 전함 제조에 또 성공하였다.

 

시대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왕 6년(1380) 경신에 다다랐다. 이때의 해구는 기세가 성(盛)한 때였다. 조선의 서남해 연안에서 지나의 동남해 연안을 달로 달을 잇고 해에 해를 이어 5·6월 파리 꼬이듯하니 조·중(朝中)이 정히 성가심을 느끼는 때였다. 기세를 탄 해구 300여 소(般)는 한번 들어 바로 무엇이나 어떻게 할 듯이 전라도로 도적해 와 진포(鎭浦)까지 덤벼들었다. 아, 최어른의 화구를 시험할 시기는 정히 이때였다. 아, 최어른의 눈에는 정채(精彩)가 돌고 최어른의 팔에는 힘이 올라 내둘리었다.

 

조의(朝議)가 다 함께 최어른—최공의 화구를 시험하기로 하였다 하여 부원수로 하여 상원수 나세(羅世)의 아래에 좇으라 명하였다. 선병(船兵)은 떠난다. 화구를 한 배 가득 싣고. 이어차 어여디여 닻을 감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누구의 귀에나 개선의 노래로만 들렸다. 최공의 병선은 곧 진포에 다다랐다. 도적은 화약을 몰랐다. 또 화약 있는 줄을 몰랐다. 해서 화약의 화를 받기에 좋을이만치 배를 모아 걸어매어 연폭(聯幅)을 하여 가지고 뻗치어 싸우려 하였다. 아, 최어른—최공—최무선은 슬그머니 화구를 꺼내 한꺼번에 구선(寇船)을 향해 보기좋게 내던졌다. 탕 하고 터지는 화약 불길에 구선은 하염없이 쏘시개가 되어 버렸다.

 

배를 태우고 의지를 잃은 구도(寇徒)는 하나하나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었다. 세넷씩 패패이 노력해 먹으며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로 가면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돌쳐서 전라도로 들어서 운봉(雲峯)으로 모였다.

 

때에 이태조는 병마도원수로 제장(諸將)을 더불어 운봉 인월역(引月驛)에 가 이를 섬진(殲盡)하였다. 이후로 해구는 점점 자취를 그치고 항복을 걸하는 자가 잇달게 되었다. 서남해를 끼고 사는 백성들은 다시 예같이 업(業)을 복(復)하였다. 인월역의 싸움은 여말에 있어 과연 큰 전쟁이었다. 이태조의 영무(英武)로 동두란의 조방(助幇)을 얻어 구(寇)의 효장(驍將)3) 아지발도(阿只拔都)를 꺾어 부지른 것으로 인해 조·중(朝中) 연해의 해구는 그림자를 감추게 되고 이조 창업의 별미를 보게 된 것이다.

3)효장(驍將): 날래고 용감한 장수.

 

그러나 한편으로 아까운 것은 인월역 싸움에도 최공의 화전, 화포를 써 공효(功效)를 아뢴 것은 사실일 터인데 이·동 두 명궁의 그늘에 최공의 화약의 명예가 잠깐 시들은 것이다.

 

이조 개국 초라 최공이 연로로 등용치 못하되 태조가 그 공을 생각하시어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를 수(授)하고 졸하매 슬피 여겨 부의(賻儀)를 후사하고 태종 원년 신사에 의정부, 좌의정,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사(追賜)하여 그 영(榮)을 극하였으나 발명 개량의 대재(大才), 어구(禦寇)의 위공(偉功)을 찬양함에는 좀 부족이 있다는 것이다.

 

아, 최어른—최공―최무선의 생전의 공도 이와 같으려니와 사후까지의 민국(民國)에 대한 정성은 갸륵하기 진실로 짝이 없으니 최공이 돌아가기에 미쳐 아들 해산(海山)이 아직 어리므로 한 권의 책으로써 그 부인에게 부탁하여 해산이 자라면 전하라 하였으니 대체 그 무슨 문서인고.

 

아, 우리들이여, 우리 고인(故人)들로 하여금 죄다 독창전기(獨創專技)를 후인에게 물리지 아니하려던 청기와 장사본으로만 알지 말라.

도리어 후인이 전인의 업을 개량 발달하지 아니한 혐(嫌)이 있다 한다. 해산이 15, 6세에 수월히 셈이 들었다. 망부의 끼친 비책(冊)을 모당(母堂)에게서 받으니 이것이 곧 다른 것이 아니라 화약 수련의 법이었다. 해산이 그 학(學)으로써 군무에 도움이 많고 태종조에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세종조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정호(征胡)의 공이 있었다.

 

「삼국사기」를 상고하건대 고려 현종 때에 여진·고려인으로 연성(聯成)된 해적은 일본사상 이른바 도이(刀伊)4)의 난으로 관인(寬仁) 3년(1019) 기미에 그 이토(怡土), 박다(博多) 등지를 분약하였는데 이 적선 50소는 노축(臚舳) 양 현에다 철로 각(角)하였다 하였으니 철갑의 함이 벌써 반도에 사용된 일면의 증거요, 이 도이 운운은 반도어로 북방민족을 비칭(卑稱)하는 ‘되’의 댓자(對字)이며 태종 13년 계사에 상(上)이 임진도(臨津渡)에 차(次)하시어 귀선(龜船)과 왜선의 상전(相戰)하는 상(狀)을 보셨다 하니 귀선은 일명 판옥선(板屋船)으로 이 기록이 귀선에 대한 최고(最古)의 문헌이요, 이 선제(船制)가 고려 현종 때에 갑철제(甲鐵制) 아니 자래(自來)의 선제를 개량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말쯤에 해구 방어의 필요로 발명된 것――말하자면 최무선 어른의 개량 혹 발명에 계(係)한 것이 아닐까 한다.

4)도이(刀伊): 현종·숙종 때의 고려 동해안 일대와 대마도, 북구주 해안에 출몰한 해적.

 

세상의 유명한 임진란의 거북선 곧 귀선이 이충무의 창조라 하나 충무는 실상 이것의 개량 또는 활용자뿐으로 생각된다. 아뭏든지 귀선의 이름이 진작 이조 초에 눈에 띄고 갑철(甲鐵)의 소식이 벌써 고려 중엽에 돋보인즉 귀선 창조자의 명예는 이충무만이 홀로 오로지 가질 바 아니다.

아! 최무선 어른은 아마 우리 귀선의 발명자, 그 창조자인저.

(고려사, 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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