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모진 바람에 굳센 풀을 알 수가 있으며 추운 때라야 송백(松柏)의 변치 아니하는 줄을 아는 것이다. 고려조의 말기는 내외를 통하여 실로 다사다난하던 때였다. 국내에는 정치와 강기가 무너져 백폐(百弊)가 첩출(疊出)하는 위에 권신의 발호는 더욱 국맥(國脈)을 흔들었으며, 대륙에서는 원·명(元明)이 교체하여 기다(幾多)의 파란이 미쳐 왔으니 이러한 난국은 실로 정몽주를 시련하던 것이다.
고려조에 있어 각 방면에서 배출된 인재는 실로 다사제제(多士濟濟)의 관(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충효,절의, 학문, 문장, 경세지략(經世智略)을 겸비하여 살아서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며 일세의 종장(宗匠)이 되고 죽어서 길이 후세에까지 영명(命名)을 빛낸 이는 오직 정몽주가 있을 뿐이라 할 것이다. 먼저 그의 약력을 열거한 다음에 업적을 적어 보기로 하자.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요 호는 포은(圃隱)이니 고려 인종조의 유신 정습명(鄭襲明)의 후예요 관(瓘)의 아들로 충숙왕 6년(1337) 12월 무자에 영주군(永州郡) 동 우항리(愚巷里)에서 고고의 성을 발하였다(幼名은 夢蘭이라 하였다가 뒤에 夢龍으로 고쳤음). 그의 천자(天資)가 탁월 호매(豪邁)하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려서부터 대지(大志)를 품고 학(學)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학식이 매우 숙달하였었으니, 9세 때에 그 외가의 여종이 남편에게 소식을 전해 주려 하여 그에게 대서를 청하매 그는 먼저
“구름은 모여 흩어지고 달은 차고 기우나, 첩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나이다.” (편집자 역)
라고 써주었더니 여종은 너무나 간략하다고 앙탈하였다.
그는 다시 봉한 것을 떼고
“봉한 후에 다시 열어 한마디를 더하나니 세간에 병이 많으니 이 곧 상사입니다.”(편집자 역)
라는 구를 보첨(補添)하였다는 일화까지 전하는 바이다.
19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상기를 마친 다음에 공민왕 6년(1357)에 監試(감시)에서 제3에 합격되고 동 9년에 과시(科試)에 응하여 연괴삼장(連魁三場)에 제1로 뽑혀 명성이 드날리게 되었다.
동 11년 3월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그 익년 5월에 낭장(郎將) 겸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배(拜)하였고 8월에 선덕랑위위시승(宣德郎衛尉寺丞)으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그의 座主)의 종사관이 되어 화주(和州;永興)에 나아가 여진을 정벌하여 그 익년 2월에 철령에서 삼선(三善), 삼개(三介)를 격파하고 개선 후에 조봉랑전보도감판관(朝奉郎典寶都監判官)에 올라 사자금어대의 영(榮)을 누렸다. 동 14년에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천배(遷拜)하였다가 모상(母喪)으로 직을 사(辭)하였고 동 16년에 다시 출사하여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郎 兼成均博士)로서 이색 등과 같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풍(儒風)을 크게 진흥하였다.
동 17년에 봉선대부 성균사예 지제교(奉善大夫成均司藝 知製敎)에, 동 20년에 중의대부 태상소경 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中議大夫太常少卿 寶文閣應敎 兼 成均直講)으로, 다시 중정대부 성균사성(中正大夫成均司成)에 승진하였으며 그 익년 3월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명경(明京;南京)에 건너가 국교를 닦고 돌아오는 길에 해중(海中;許山 부근)에서 구풍(颶風)1)을 만나 홍사범은 익사하고 그는 말다래2)를 베어 먹으며 13일 동안 연명을 하다가 명(明)의 구조를 받아 구사일생으로 익년 7월에 복명을 하였다. 동 23년 2월에 경상도안렴사(慶尙道安廉使)로 전출하였다가 우왕 원년(1375)에 우사의대부 예문관직제학 충춘추관수찬(右司議大夫 藝文館直提學 充春秋館修撰)으로, 다시 성균대사성에 올랐다.
1) 구풍(颶風):태풍.
2) 말다래:말탄 사람에게 진흙 등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으로 만들어 말의 배 양쪽으로 늘어뜨린 물건.
공민왕이 피시(被弑)한 뒤에 조정에는 외교책에 있어 북원(北元;원의 유족이 和林에 돌아가 나라를 세운 것)과 명에 대한 의견이 자못 구구하던 중에 명사 채빈을 호송하던 김의(金義)가 중도 봉황성에서 채빈을 죽이고 말을 탈취하여 북원으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으며, 또 당시 집권자 이인임(李仁任)이 북원과 맺으려 함에 일찍부터 친명사상을 품고 있던 그는 박상충(朴尙衷), 김구용(金九容) 등으로 더불어 상소하여 이인임을 반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얼마 동안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다가 동 3년 3월에 풀려 돌아오자 바로 국명을 받들고 구주(九州)에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연해(沿海) 일대를 유린하던 X구의 금집3)을 교섭키 위한 것으로서 그 익년 7월에 소기의 목적을 달하고 피로자(被虜者) 수백 인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이에 정순대부 산기상시 보문각제학 지제교(正順大夫散騎常侍 寶文閣提學知製敎)를 배하였으며, 동 5년 4월에 봉익대부 전공판서 진현관제학(奉翊大夫典工判書 進賢館提學)에, 윤5월에 예의판서 예문관제학(禮儀判書 藝文館提學)에, 10월에 이르러 전법판서 진현관제학(典法判書 進賢館提學)을 역임하고 익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배하였다가 동년가을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이태조의 舊諱)와 같이 남하하여 ×구를 쳐 운봉대첩(雲峰大捷)을 얻고 돌아와 11월에 밀직제학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상호군(密直提學 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上護軍)에 올랐으며 익년 2월에 성근익찬공신 봉익대부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誠勤翊贊功臣 奉翊大夫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同知春秋館事 上護軍)에, 다시 9월에 이르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올랐다.
3)금집:침략을 금하게 함.
동 8년 4월과 11월에 2회에 긍하여 사절로 명(明)에 향하였으나 모두 명의 트집으로 인하여 건너가지 못하고 요동에서 돌아오고 말았으며 익년 8월에는 동북면 조전원수로 이성계와 같이 길주(吉州)에서 호발도(胡拔都;여진)를 격파하였다. 동 10년경에 이르러서는 북원(北元)·명(明)에 대한 우리의 이중 외교로 말미암아 명의 칭탈4)이 심하던 나머지에 명의 동병설(動兵說)까지 전하게 되었다. 그때에 다른 정신(延臣)들은 사절 되기를 극도로 기피하였으나 그는 의연히 희생적 각오로써 명제(明帝)의 탄신을 앞두고 건너갈 때에 90일의 노정을 주야배도(晝夜倍道)로 60일에 대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의로써 교섭에 당한 결과 국교는 다시 상궤(常軌)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익년에 돌아와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많은 인재를 선출하였고 익년 2월에는 다시 명에 건너가 세공 견감5)의 교섭에 성공하고 동 13년에 영원군(永原君)에 피봉(被封)케 되었다.
4)칭탈:트집을 잡음.
5)견감: 세금의 일부를 탕감함.
익년 정월에 명에 향하였다가 들이지 아니하므로 요동에서 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아 있을 때에 6월에 들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뒤이어 우왕이 폐출되고 창왕이 옹립되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변이 일어났다. 정몽주는 일국의 신망을 쌍견(雙肩)에 멘 국가 중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실력의 배경이 없으므로 이씨 일파에 당키 어려우며 그 위에 전왕(前王)의 아들이 왕통을 이었으므로 아직 내두(來頭)6)의 형세를 살피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6) 내두(來頭): 이제부터 닥쳐오게 될 일.
그리하여 7월에 창왕 밑에서 문하찬성사 지서연사(門下贊成事 知書筵事)에 제수되고 그 익년 6월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11월에 문하찬성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이씨의 세력은 욱일승천의 개(槪)가 있던 것으로서 동월에 드디어 창왕을 폐출하고 공양왕을 천립(檀立)하기에 이르매 우선 왕통을 끊기게 하지 않는 것이 종사 보전에 선결문제이므로 정몽주도 어쨌거나 이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7)천립(檀立): 마음대로 세움.
그리하여 공양왕 2년(1390) 8월에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호(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號)를 받고 삼중대광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영서운관사익 양군충의군(三重大匡門下贊成事 同判都評議使司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領書雲館事益陽郡忠義君)에, 다시 11월에 이르러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영전사 우문관대제학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都評議使司 兵曹尙瑞寺事 領景靈殿事 右文館大提學 益陽郡忠義伯)에 올라 국상(國相)으로서 많은 치적을 나타내었으며 익년 11월에 인물추변도감 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12월에 안사공신호(安社功臣號)의 가사(加賜)가 있었다.
그는 약 30년 동안 입조하여 대내 대외로 혁혁한 공적을 쌓으며 흘연(屹然)히 서서 기울어져 가는 고려조를 떠받치고 있었으나 원래 대하(大厦)8)의 기울어지는 곳에 한 개의 기둥이 탱지할 수 없는 것이다. 호시탐탐하던 이씨 일족으로는 정몽주를 그저 두고는 그의 목적을 달하기 어렵던 것으로서 공양왕 4년(1392)4월 4일에 그는 드디어 역세혁명(易世革命)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8) 대하(大厦): 큰 집.
이상으로써 그의 약력을 간단히 열거하였거니와 다시 그의 사적을 몇가지 조목에 나누어 적어 보겠다.
1. 그의 학문과 문학
문학의 유자는 대개 시소(詩騷) 훈고로써 주를 삼았었으나 성리학(宋學)을 다스리게 되기는 실로 포은(圃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주자집주(朱子集註)」의 경서(經書)가 들어왔을 뿐이었으나 포은은 스스로 학을 닦아 독창적으로 성리의 설을 발전시킨 바가 있었다. 공민왕 16년경에 그는 성균박사로 당시 석유(碩儒) 이색, 김구용, 박상충,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과 같이 강설을 할새 포은의 학설이 특히 발월(發越)하여 인의(人意)에 초출한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듣는 자도 자못 의심을 품었더니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들어옴에 미쳐 포은의 설과 호씨의 설이 서로 문합치 아니함이 없음을 알게 되매 제유(諸儒)들은 더욱 탄복하여 마지아니하였으며 목은 이색도
“달가(達可)- 이(理)를 논함에 횡설수설이 이(理)에 당치 아니함이 없다.”
하여 동방 이학(성리학)의 조(祖)로 추앙케 되었다.
그리하여 강학(講學) 훈도에 힘쓴 결과 영재(英材)가 울연(蔚然)히 배출되었으니 그의 학통은 길재(吉再)를 거쳐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叔滋의 子),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 계승되어 성리의 학은 드디어 일세를 풍미함에 이르렀다.
포은은 또 예(禮)에 있어서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수하였다. 당시 사대부의 계급에서도 부모의 상기(喪期)는 백 일에 불과하였으나 포은은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행하였으며 또 그가 국상(國相)으로서 정치를 행할 때에도 불식(佛式)에 젖은 풍습을 고치고 주자가례를 여행(勵行)시키기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교의례는 성리학과 같이 이조에 들어 성행하게 된 원류를 이룬 것이거니와, 여말에 이르러 포은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학운동은 고려조 일대에 성행하던 불교가 부패한 데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문학도 또한 탁월한 바가 있으니 호한표일(浩瀚飄逸)9)한 그의 문장 중에도 특히 시는 호방한원(豪放閑遠)하여 그의 낙락(落落)한 지조를 나타낸 것으로서 ‘호방준결(豪放峻潔)’의 평이 있으며 목은도 이에 대하여
“도(道)를 이음은 염락(濂洛)10)의 학풍에서 그 근원이 비롯되었고 많은 학생들을 시(詩)와 서(書)의 동산으로 인도하였으며 시문(詩文)을 잘함을 으뜸으로 삼으니 당세에 이름이 드날렸도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9) 표일(飄逸): 뛰어남.
10) 염락(濂洛): 주돈이, 정이,정호, 주희 등이 제창한 유교, 곧 성리학.
그의 〈다경루시(多景樓詩)〉는 호장횡방(豪壯橫放)하고 〈청심루시(淸心樓詩)〉는 한원유미(閑遠有味)하며 〈봉사일본(奉使日本) 5언율(五言律)〉은 지절(志節)의 낙락함을 보인 것으로서 정평이 있는 바이다(그의 유저「포은집」이 있음).
2. 정치상의 업적
그는 고려말의 국가가 다난하던 때를 당하여 치도(治道), 교린, 군정 (軍政) 등 각 방면에 긍하여 동치서구(東馳西驅)11)에 심력을 기울이다가 죽은 뒤에야 말게 되었다. 당시 정치와 강기의 괴란(壞亂)으로 말미암아 전제(田制)가 더욱 무너져 권간(權奸)12)과 토호(土豪)는 민전(民田)을 병탈하고 공전(公田)을 은닉하여 소위 겸병(兼併)의 풍이 성행케 되매 인민은 더욱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고갈하였다.
11) 동치서구(東魏西驅):동분서주.
12)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
이러한 폐해를 통절히 느낀 그는 창왕께 사전 혁파를 건의하여(趙浚과 같이한 듯함) 민생의 안도를 꾀하였으며 다음 창왕이 폐출되고 공양왕이 옹립되어 인심이 자못 흉흉할 때에 위세에 아부하는 무리는
“창왕 부자의 영립(迎立)을 주장하였다”
는 등의 구실로써 정신(延臣)을 서제(鋤除)13)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다투어 가며 적발하는 풍은 그칠 바를 몰라 물의는 분분하고 인심은 위구에 빠졌으며 무고한 희생도 적지 아니하였다. 정몽주는 드디어 치죄의 한계를 밝힌 다음에 이에 관하여 다시 논쟁하는 자는 무고율(誣告律)로 다스릴 것을 의정하여 인심을 저으기 안정케 한 일도 있었다. 동왕 2년에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가 되어 국상으로서 서정(庶政)에 당할새그의 치적은 매우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는 국가 대사를 처결할새 성색(聲色)도 동하지 않고 좌수우응(左酬右應)에 모두 적의(適宜)함을 얻었던 것으로서 감히 횡의(橫議)14)하는 자도 없었다.
13) 서제(鋤除): 악한 사람을 없앰.
14) 횡의(橫議):탈선된 의논.
당시 지방관과 서리는 품질이 낮고 열악한 인물이 많아서 인민을 괴롭혔다. 그는 특히 지방관의 인선을 엄히 하여 품질이 높고 청망(淸望)이 있는 자를 채용하고 그 위에 감사와 수령관을 보내어 黜陟(출척)을 엄히 하매 피로하던 인민은 다시 소생된 관이 있었다.
또 도평의사사(의정부와 같음)는 전혀 국정을 총할하고 금곡 출납은 육방 녹사(錄事)가 행하여 왔으므로 폐단이 많이 생겼다. 그는 새로 경력도사(經歷都事)라는 중간기관을 두어 서무를 종리(綜理)하고 출납을 적기케 하여 그의 숙폐를 고쳤다. 그리고 빈민의 구제기관으로 의창(義倉)을 세워 진휼에 힘쓰며 수참(水站;津站)을 두어 조운(漕運)의 편을 꾀하는 등 여러 시설을 일으켰으며 다시 문교 방면에 있어서는 더욱 이채를 발휘하였다.
그는 儒者인만큼 한문화에 심취된 혐(嫌)도 없지 않으나 어쨌든 이로 인하여 불교에 젖은 폐습이 많이 고쳐진 것은 사실이다. 도성 5부에 각각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10실(十室)의 소읍이라도 또한 향교를 세워 문풍을 크게 진작하였으며 관혼상제에는 주자가례에 의준(依遵)케 하였다. 당시 복제(服制)에는 몽고 양식이 섞여 있었으므로 그는 지나식으로 고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니 요컨대 그는 유교문화 진흥의 선도자였다.
그리고 그는 일찌기 본조(本朝)의 사승(史乘)이 미비하고 실록도 상실(詳悉)15)치 못함을 유감으로 여겨 편수관을 두어 가지고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체례(體例)에 의하여 사승을 편찬하자고 주의(奏議)하였으며(실현은 되지 못하였음) 그는 또 괴란된 율법과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본조법령에 대명률과 지정조격(至正條格)을 참작하여 공양왕 4년 2월 신율(新律)을 선진(選進)하였다. 왕은 이첨을 명하여 6일 동안 그것을 진강(進講)케 하고 그 내용의 정비된 것을 크게 찬상하였다.
15) 상실(詳悉): 자세하게 앎.
그 밖에 강기를 바로잡고 현량을 등용하는 등 그의 치적은 매우 탁월한 것이 많았으며, 일면에 있어 그는 군사에도 옅지 아니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니, 기거(旣擧)한 바와 같이 때로 종사관, 조군원수로서 여진과 X구를 출정하였던 것으로서 여진의 삼선, 삼개, 호발도의 격파와 운봉대첩에 그의 참획(參劃)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외교상에 바친 바 공헌은 실로 위대한 것이 있었다. 공민왕 17년에 명군이 연경(燕京)을 공함(攻陷)하여 몽고세력을 북으로 쫓게 되매 이로부터 고려의 대륙외교는 얼마동안 기로에 서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흥의 명(明)과 국교를 행하매 때로는 북원과도 통하게 되었으므로 조정에도 외교방침을 싸고 친명 친원의 양파가 생김에 이르렀다. 정몽주는 유자로서 지나 문화에 가장 큰 이해와 숭앙을 가졌으며 정치적으로는 쇠퇴한 원보다도 신흥세력인 명에 친화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견지에서 처음부터 친명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공민왕 21년에 서장관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과 같이 남경에 건너가 명의 평촉(平蜀;明昇)을하(賀)하는 동시에 유학생 파견의 건과 3년1빙(三年一聘) 예를 행할 것, 방물(方物)도 토산포자(土産布子)에 한할 것 등의 유리한 절충을 행하고 귀항 도중에 파선을 당하여 천신만고를 겪어 익년 7월에 돌아와 복명을 하였다(前擧).
그 익년에 공민왕이 환자(宦者) 최만생(崔萬生), 폐신(臣)16) 홍윤(洪倫)등에게 被弑(피시)하고 우왕이 즉위하매 명과 북원에 각각 사절을 보내어 통고키로 되었다.
16) 폐신(臣):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
그러나 명에 향하던 사절은 중도에서 불상사건이 일어나 안주(安州)에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앞에 든 김의의 명사(明使)살해사건이었다. 이에 국인(國人)들은 의구의 염을 품어 명과 통교하기를 꺼리게 되었던 것이니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속히 자세한 사유를 명에 알려 의혹을 풀게 하는 것이 국가 생민의 화를 더는 소이인 것'을 역설하여 드디어 최원(崔源)을 보내게 되었으며, 또 당시 집권자요 친원사상을 품은 이인임이 북원의 사절을 맞아들이려 할 때 정몽주는 박상충, 김구용 등으로 더불어 통렬히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케 되었다.
이로부터 명의 까다로운 태도는 더욱 경화하여 출병설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며 함부로 세공(歲貢)의 액(額)을 증가하는 위에 5년간 세공이 약정한 바와 틀리다 하여 사신을 장류(杖流)하는 등 자못 강압적 태도를 보이게 되매 고려의 조신들도 모두 도명(渡明)하기를 기피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에서 든 바와 같이 우왕 10년에 명제 탄신의 축하사를 보내려 할 때에 군신들은 당로자에 시뢰(施賂)하여 모두 모피(謀避)하고 결국 정몽주가 추천되매 그는
“군부(君父)의 명이면 수화(水火)라도 피치 못하거든 하물며 이러한 일임에랴.”
하고 드디어 그날로 발정(發程)하여 주야 배도로 달려간 결과 90일정을 겨우 60일로 돌파하여 절일(節日)에 대어 가게 되었다.
명제(明帝)도 그의 단시일에 대어 온 것과 전행(前行)에 파선을 당하여 신고(辛苦)한 것을 생각하고 더욱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그의 맺혔던 감정이 드디어 풀려 양국 국교가 상궤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다시 동 12년에 명에 건너가 조복(朝服)과 편복(便服)을 청하고 세공 견감을 교섭할 때에 사정을 상명(詳明)하게 진술하여 드디어 5년간 미납의 분을 면제하고 세공의 증액된 것은 감삭하여 상수(常數)에 내리게 하였다. 이와 같이 외교의 충(衝)에 달하는 겨를에 문학으로써 명인들과 사귀어 문학 재예의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일면에 있어 X구는 고려말경의 숙환으로서 이로 인하여 연해지방은 이른바 ‘소연일공(蕭然一空)’케 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일본에 교섭하여 금집해 주기를 청하기로 되어 우왕 원년에 나흥유(羅興儒)를 구주(九州)에 보내었더니 일본측에서는 도리어 의심을 품고 오랫동안 그를 구금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X구의 환(患)은 갈수록 심하게 되매 동 3년 9월에 다시 정몽주를 보내어 교섭을 행키로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이 여겼으나 그는 조금도 난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覇家臺)에 건너가 구주탐제(九州探題) 금천요준(今川了俊)과 만나 고금 교린의 대도와 양국의 이해를 들어 절충한 결과 금천요준도 크게 경복하여 관대(館待)를 심히 후하게 하며 삼도(三島)로 하여금 침략을 금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에 시(詩)를 구하는 승려가(당시 일본에는 승려가 많이 외교의 충에 당하였으며 문학에 통한 사람도 많았음) 날로 운집하였다. 그는 붓을 들어 선 자리에서 수용하매 승려들은 크게 감복하여 날로 견여(肩輿)를 메고 승지(勝地) 구경을 권유하였다.
그 익년 7월에 피로자(被虜者) 윤명(尹明) 등 수백 인과 일본의 보빙사(報聘使) 주맹인(周孟仁)을 데리고 돌아온 후에 그는 다시 양가 자제가 피로되어 있는 것을 민망히 여겨 여러 대신을 권유하여 각각 사자(私資)를 내게 하여 윤명을 금천에게 보내어 상환을 교섭케 하였다. 금천요준도 정몽주의 서사(書詞)가 간측함에 감동하여 백여 인을 돌려 보내었고 그밖에도 매양 윤명이 왕환(往還)할 때에는 반드시 부로(俘携)를 돌려 보내었다.
당시 명과 일본에 관한 외교는 심히 난삽하고 험악하여 타개의 길이 막힐 만큼 되었으나 정몽주의 공정한 태도와 성의에 넘치는 교섭에는 풀리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던 것으로서 명제(太祖)의 숙감(宿憾)도 이제는 환연(渙然)17)히 풀렸으며 일본에도 또한 다대한 감명을 남겼던 것이니 뒤에 그의 훙보(薨報)가 전케 되매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는 바이다.
17) 환연(渙然): 녹아서 풀리는 모양.
3. 그의 절의와 순국
우왕 14년 6월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고려조 운명에 결정적 한계를 그은 것이다.
무(武)에 최영과 문(文)에 정몽주 이 2대 인물이 여조의 지주였으나 최영은 회군시에 바로 희생이 되고 정몽주만이 대재상으로 엄연히 쓰러져 가는 여조를 떠받치며 비상한 변국(變局)을 바로잡으려 모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30년 동안 많은 공적을 쌓아 국가의 중신으로서 국민의 신망을 한몸에 모으고 있었으나 문관 출신으로서 무력의 배경이 없었으므로 당시 욱일승천의 세로 실권을 거두어 쥐고 조아(爪牙)18)를 벌고 있던 이씨에게 정면공격을 가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8) 조아(爪牙) : 자기에게 긴요한 물건이나 사람.
그러다가 공양왕 4년 3월에 세자(奭)가 명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이성계는 출영키 위하여 해주(海州)에 나가 그곳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자못 중태에 빠졌다.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심히 기꺼워하여 드디어 이씨 타도운동을 구체적으로 일으킴에 이르렀다.
이씨를 제거하려면 먼저 그의 우익인 조준(趙浚), 남은, 정도전(鄭道傳), 윤소종(尹紹宗), 남재(南在), 조박(趙璞) 등을 전거(翦去)19)해야 되므로 대간(臺諫)을 움직여 그들을 탄핵케 하여 원지(遠地)로 유배하고 다시 이씨의 입경(入京)을 기다려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다.
19) 전거(去): 없앰.
이 풍색을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성계의 제5자, 후일의 태종임)은 급히 달려가 부병(負病)하고 돌아오는 그의 부친을 벽란도(碧瀾渡)에서 맞이하여 사태의 급박함을 알리고 그 밤으로 질치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코자 부친과 밀의하였으나 일국의 신망이 높고 국가의 중신인 정몽주를 경솔히 하수(下手)키가 어려웠던 것으로서 그의 부친은 자못 난색을 보였다 한다. 이에 잠깐 머뭇거리던 이방원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는가?” (편집자 역)
하는 광흥창사(廣興倉使) 정총(鄭摠)의 말을 듣고 드디어 ‘뒷일은 내가 당하겠다’하고 결심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방원은 그의 휘하 조영규(趙英珪),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등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할 것을 위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안 변중량(卞仲良;이성계의 형 원계의 사위)이 정몽주에게 알리매 그는 계획이 틀어짐을 염려하여 사태를 떠보려고 문병하는 체하고 대담하게도 이씨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방원은 좋은 기회라 하여 조영규등에게 노변에서 요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바로 이씨의 집을 나와 회로(回路)에 유원(柳源)을 조상하는 동안에 (전 판개성부사 유원이 마침 죽었으므로) 조영규 등은 병기를 갖추고 선죽교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몽주가 그곳에 이르매 조영규는 먼저 달려가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는 이를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을 달렸더니 영규는 다시 달려들어 그의 말머리를 치매 그는 땅에 떨어져 드디어 고여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에 마침 그의 門生 權遇와 수행녹사가 동반하여 따르게 되었더니 그는 노상의 풍색이 자못 수상함을 깨닫고 미리 예감이 있는 듯이 혼자 당하려는 마음에서 권우와 녹사를 굳이 권하여 따르지 못하게 하였다. 권우는 할 수 없이 떨어지고 수행녹사는 차마 떠나지 못하여 같이 해를 당하였음).
정몽주는 천품이 호매강직하여 절의의 앞에는 부월(斧鉞)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가 등제하여 첫번 환로에 나섰을 때에 간신 김용(金鏞)이 김득배(金得培 ; 김득배는 그의 座主이니 鄭世雲, 安祐와 같이 홍적을 격파하고 경성을 수복하여 큰 공을 세움)를 천살(檀殺)하여 머리를 상주(尙州)에 효시하매 그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권간의 기염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감연히 왕께 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그의 의연한 기백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신뢰도 자못 두터운 바가 있었으니 그는 일찌기 최영과 이색 등을 청하여 연회를 연 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우왕이 친히 이르러
“부왕 때의 노상(老相)이 모두 모였다 하기로 부왕을 보는 듯하여 찾아왔노라.”
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으로 형세가 날로 기울어 우왕, 창왕이 순차로 폐시(廢弑)를 당할 때에 그는 실력이 없으므로 어찌하지 못하고 오직 왕조의 운명이 아직 붙어 있으니 어디까지 탈 만한 기회를 기다려 최후의 시험을 해보다가 되지 않으면 한 몸으로 순국을 하자는 것이 그의 고충이었던 듯하다.
그의 심적(心跡)을 알아차린 이방원은 일찌기 잔치를 열고 그를 청하여 짐짓 마음을 떠보려고 술을 권하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서 백년까지 하리라”
고 노래하매
정몽주는 술을 부어 돌리며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 노래를 지어 받으니 늠연하여 범치 못할 기개가 떠돌았다. 이에 이방원도 그의 마음은 돌릴 수가 없는 것을 알고 드디어 살해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세를 알고 있던 그의 우승(友僧)은
“강남 만리에 들꽃이 만발하니
어느 곳인들 봄바람을 싫어할 산이 있으랴” (편집자 역)20)
의 시를 주어 산야에 돌아가 은둔하라는 뜻을 보였으나 '늦었도다 늦었도다’ 하여 왕조의 운명을 쌍견에 지게 된 자기로는 인제 와서 산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20)“江南萬里野花發 何處春風無好山”
그리하여 형세가 날로 글러 감을 보고 그의 심정은 매우 애처로와 하던 바가 있었으니 피해(被害)될 무렵에 그는 어느 친우를 찾았었다. 마침 벗은 집에 없고 화계(花階)에는 꽃만 피어 있는지라. 그는 꽃을 꺾어 읊조리며 춤을 추면서 술을 청하여 통음하며
“제철의 물건은 이같이 아름답건마는 아까울손 풍기(風氣)는 심히 사나웁구나."
하고 시운(時運)의 비색(否塞)함을 한(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치상(厠上)21)에서 많이 싯구를 얻으므로 흔히 그 자리에서 필연(筆硯)을 취하여 쓰던 것이었다.
21) 치상(廊上):평상 위.
그러나 그 무렵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시짓기도 잊었었다. 부인이 그 연고를 물으매 그는
“시상(詩想)까지도 없어졌노라.”
하였으며 최후로 이씨 일파를 도모할 제 일이 순조롭게 되지 못하매 그는 3일 동안 먹지를 아니하였다고 전하니 국가와 일신의 최후를 앞에 두고 얼마나 초조하였음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탁월한 천자(天資)로 이른바 천인(天人)의 학과 왕좌(王佐)의 재(才)22)를 가지고 마침내 그의 믿은 바 진리에 순(殉)하였던 것으로서 그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다시 천고에 빛나는 바가 있다.
22) 왕자(王佐)의 재(才) : 임금의 보필이 될 만한 재능.
그를 죽인 태종도 그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錄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의 직을 증하고 문충(文忠)의 시를 주었으며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민에게 충의를 권장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나 일면에는 평소부터 정몽주의 고고한 인품 절행과 탁월한 학문 업적 등을 숭경(崇敬)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바이니 그의 정몽주를 추억한
“충의의 유래가 사라짐은 옳지 않구나.
평소에 부지런히 힘쓰는 사람 또한 없으며
빠른 바람 굳은 풀 또한 보기가 어려우니
모름지기 기록된 고려의 일개 신하로고”(편집자 역)23)
라는 시로도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가 있다.
23)“忠義由來不可淫 平時砥礪且無人 疾風勁草尤難見 須識高麗一介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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