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43.고려-안향(安珦) 본문
이병도(李丙燾)
1896∼ .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있음.
고려의 문교는 의종(제18대) 만년 장군 정중부(鄭仲夫)의 난의 결과 무인발호시대(武人跋扈時代)를 현출함으로부터 문관의 지위의 미약과 한가지로 침체하여 그후 고종(제23대) 때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으로 국도를 강화도에 옮기고(19년) 거기를 유일한 안전지대로 삼아 20여 년이나 몽고에 버티던 동안은 더구나 문교 방면에 돌아다볼 겨를이 없어 거의 암흑시대를 이루다시피 되었지만 동왕 만년에 부득이 몽고에 굴하여 평화를 회복하고 다음 원종(제24대) 11년에 개경(개성)으로 환도한 후에도 삼별초(三別抄)의 난, 정동(征東)의 역(役) 및 기타로 인하여 문교에 큰 힘을 쓰지 못하더니 다음 충렬왕(제25대) 때에 이르러 국학(태학) 중수(重修)를 중심으로 문교 부흥의 운동을 보게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요 큰 공로자로 후인의 추앙을 거의 독차지한 이가 즉 여기에 말할 문성공(文成公) 안향 그이였다.
향은 고려 유학사상에 있어 문종 때의 최충과 병칭할 만한 이니 충은 퇴야(退野) 후 9개 학당을 세워 사학 흥륭의 길을 열었음에 대하여 향은 재상의 직에 있어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관학을 진흥시킴에 물심 양 방면으로 공헌한 바가 많았으며, 또 그는 동방 최초의 주자(朱子) 숭배자로서 조선 유학사상에 처한 그의 지위는 자못 주의할 만한 것이 있었다. 층은 ‘해동공자’의 학칭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문묘 배향의 특전을 받지 못하고 말았지만 향은 사후 불과 10여 년에 승무1)의 영전을 받았으니 이 점이 또한 충과 향의 대조되는 바이었다.
1) 승무(陞廡):학덕이 있는 이를 문묘에 올려 합사(合祀)함.
안향의 초명은 유(裕요 호는 회헌(晦軒)이니 홍주(興州 ; 순홍) 사람이었다. ‘향(珦)'은 후세 이조 문종의 어휘(御諱)2)와 같으므로 이조에서는 이를 피하여 그의 초명인 '유'로써 개칭하여 현종 4년에는 예조의 계청(啓請)으로 각도 향교의 향의 위판(位版)을 개제(改題)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부는 부(孚)라 하는 이로 본시 홍주의 이원(吏員)이었는데 업의(業醫)로 출신하여 관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었다. 향은 고종 30년(1243 : 강화 피난시대)에 본향인 홍주에서 출생하여 소시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원종 원년(18세)에 등제하고 곧 취직하여 교서랑(校書郞)에 보(補)하였다가 한림원에 봉직하게 되었다.
2)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
원종 11년 왕이 강도(강화)에서 개성으로 환도하던 해에 강도에서는 삼별초(고려의 특별군대)의 군란이 일어나 개경과의 교통을 차단할새 도내에 있던 귀족, 관리, 기타 사서(士庶)들은 다 삼별초군에 억류되어 자유를 잃게 되었는데 이때 향도 역시 강도에 있다가 동일한 경우를 당하였다. 일찌기 향의 성명(聲名)을 들은 삼별초의 두목은 장차 그를 거용(擧用)하려 하여 일변으로 달래기도 하고 일변으로 위협도 하였으며 또 군중에 명하여
“안한림(安翰林;향)을 놓는 자는 벌하리라."
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향은 모계를 써서 화구(禍口)를 탈출하여 개경으로 돌아오매 왕은 이를 의롭게 여기어 가상(嘉尙)하였다 한다.
다음 충렬왕 원년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의 직에서 전배(轉拜)하여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는데 그 재임 치적 중에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즉 그때 3인의 여 무당이 있어 요신(妖神)을 봉(奉)하고 민중을 무혹하여 합천으로부터 여러 군현을 돌아다닐새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로 공중(空中)을 부르짖어 마치 은은히 귀인행차에 길을 물리치는 소리와 같은 것이 나는지라. 이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설제(設祭)에 분주하고 수령 중에도 또한 그러한 자가 있었다. 그 여무(女巫)의 일행이 상주에 이르매 향은 곧 이를 잡아들여 곤장을 때려 족계(足械)를 채웠다. 무당은 신을 빙자하고 화복의 설로써 공갈하거늘 주민들은 다 두려워하되 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며칠 후에 여무가 애걸하므로 놓아 주었더니 그 뒤로는 그런 것이 없어졌다고 한다.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공자의 도를 배우는 유자로서 당연한 일이라 하겠거니와 향의 이러한 미신 타파의 주의는 그의 이단 배척의 정신과 한가지로 여말 유학사상계에 있어 가위 선봉을 지었던 것이다.
그에게 또 한 일화가 전하니 일찌기 그가 인읍(隣邑) 안동에 갔을 때 그 고을 이원(吏員)으로 하여금 자기의 발을 씻기게 하였더니 이(吏)가 노하여(저희들 사이에 말하기를)
“우리 고을 속읍(屬邑;훙주)의 이자(吏子 ; 향의 아비가 본시 홍주의 吏였으므로 하는 말)가 어찌하여 우리를 욕보이느냐.”
하고 여러 이속들과 공모하여 장차 힐문하려 할새 그중의 한 노리(老吏)가 향의 용모를 보고 나와 말하되
“내가 열인(閱人)을 많이 하였거니와 그의 용모가 후에 반드시 귀히 될 상이니 쉽사리 보지 말라.”
고 하였다 한다. 이 일화의 사실은 역시 그가 상주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3년 재임에 도장관(道長官)으로부터 그의 치정(治政)의 청백함을 드러내어 향은 드디어 조정으로 불려 올라가 판도좌랑(版圖佐郞)이란 벼슬에 임명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배하였다.
충렬왕 15년에는(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 낭중(郎中) 및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 등 직에 선임되고 또 이해에 충렬왕을 따라 원도(元都;북경)에 간 일이 있었으며 동왕 20년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合浦;창원)에 출전하여 군민을 무휼(撫恤)한 일이 있었다. 앞서 원(元; 몽고)이 이 합포를 출발지점으로 삼아 2차나 정동(征東)의 역을 행하였고 또 제3차 전역을 일으키려 하여 고려로 하여금 다년 준비케 하다가 이때에 정파(停罷)의 명을 내리게 되어 향은 오랫동안 곤피한 군민들을 위무한 것이었다.
재임 불과 수월에 지공거(知貢擧;과거 고시관)로 피소(被召)되어 윤안비(尹安庇) 등 33인의 진사를 선발하고 그후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고 충선왕이 즉위하여서는 행동경(行東京;경주)유수,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등을 역배하였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원 세조 흘필렬(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니 다년 원에서 교육을 받고 또한 원의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정비(正妃)로 취하여 충렬왕 23년에 부왕의 양위를 받아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충선은 소장기예(少壯氣銳)의 사람으로 조금도 기탄없이 구제를 개혁하여 권가세신(權家勢臣)의 불평을 일으키어 신주(新主)에 대한 비난과 참무(讒誣)가 원정(元廷)에 삭비(數飛)하고 또 마침 공주가 왕총(王寵)을 오로지 하려 하여 본국 부인인 조비(趙妃)를 원 태후에게 참소하매 원은 조비를 집거(執去)하고 즉위 1년을 넘지 못하여 왕과 공주를 소환하는 동시에 충렬을 복위케 하였다. 이때 향은 충선왕을 따라 재차 원도에 갔었다. 하루는 원제(元帝) 성종이 급히 충선을 부를새 왕은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하거늘 향이 종신으로 대신 들어가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때 원주는 승상에게 전지(傳旨)하여 묻기를
“너의 임금이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하지 아니하느냐.”
고 하매 향은 가로되
“규달사(閨闥事 ; 내간사)는 외신(外臣)의 알 바가 아니라.”
고 하였더니 원주는 좌우에게
“이 사람이 가위 대체(大體)를 아는 자라.”
하고 다시는 묻지를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때 원에서는 이미 지나의 고제(古制)에 의하여 국자감(國子監), 공자묘(孔子廟) 등을 설하고 석전(釋奠)3)·교사(郊祀)4)의 예와 과거시험도 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유교가 바야흐로 성황을 정(呈)하였으므로 향의 원도 재류시의 견문한 바와 자극된 바는 반드시 많았을 줄로 안다.
3) 석전(釋奠): 서울은 성균관 문묘에서, 각 지방은 향교에서 공자 및 선현에게 올리는 제향.
4) 교사(郊祀): 서울의 동성 밖 교외에서 지내는 제사.
후세에 편찬된 「회헌연보」를 보면 가승(家乘)을 인용하여 회헌이 앞서 충렬왕 15년경에 원도에 갔을 때 신간 「주자서(朱子書)」를 얻어 보고 잠심독호(潛心篤好)하여 드디어 그 책을 손수 베끼고 또 주자의 진상(眞像)을 모사(模寫)하여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였으나 그때 주자학이 북방에서는 아직 세력을 잡지 못하였을뿐더러 「고려사」동인전에는 그러한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만년에 항상 회암(晦庵;주자)의 진상을 걸고 경모를 다하여 자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보일 뿐이다.
위의 가승 및 연보의 기재는 이 「고려사」의 기사를 근거로 삼아 일층 부연추설(敷演推說)한 것인 듯하거니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고려사」에는 주자서를 수록하여 가지고 왔다는 말은 물론이요, 이른바 회암의 진(眞)도 「고려사」에는 연보에 보이는 연대에 원도에서 모사하여 가지고 왔던 것이라는 분명한 유래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고려사」에 특히 만년이라고 한 것을 보면 회암의 진(眞)은 향의 제2차 도원시에 가지고 왔던 것이거나 혹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충렬왕 30년에 향이 찬성사(贊成事)로 국학섬학전(國學瞻學錢;재단)의 설치를 건의하고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남경에 보내어 선성(先聖) 및 70자(子)의 상과 기타를 구입하였을 때에 비로소 전래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나는 나의 후자의 추측을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주자의 서가 만일 향에 의하여 수입되었다고 하면 그것도 실상 김문정의 구입한 바가 아니었을까 한다(뒷글 참조).
향이 원도에서 받은 자극은 무엇보다도 부흥되는 문교, 참신한 학제에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만년에 국학 중수를 중심으로 문교부흥운동에 진력한 것도 간접 직접으로 이러한 자극과 영향에 부(負)함이 많았을 것이다.
충렬왕 25년에 향은 수국사(修國史;관직명)가 되어 송분, 민지(閔債)등으로 더불어 국사 편수의 임(任)에 당하였고 익년에 찬성사의 배명을 수(受)하였던바 간신의 참언으로 일시 치사(致仕; 사직)하였다가 미구에다시 찬성사에 복직되었었다.
이상은 향의 종환이력(從宦履歷)을 약술한 바이거니와 요컨대 향은 관계에서 다각적으로 활약하여 혹은 한림원 및 집현전에 학사로, 혹은 행정관 무관으로, 혹은 교관 혹은 고시관 혹은 수사관(修史官) 혹은 어용학자(御用學者)로 마침내 재상의 직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의의있고 빛난 사업은 만년 찬성사로 있을 때에 국학의 내용 충실 내지 문교의 부흥을 위하여 물심 양면으로 공헌한 일이었다. 앞서 의종 말년 이래 더욱 고종 중년 이후로 내외 환란에 의하여 문교 방면의 침체 암흑을 면치 못하였던 것은 위에도 잠깐 말한 바이지만 다음에 향의 유명한 <제학관시(題學官詩)〉를 보아 더욱 그때를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곳곳마다 연등은 모두 부처에게 기원함이요
집집마다 퉁소는 다 귀신에 제사함이라
홀로 수간 공자 사당이 있어
뜰에는 봄풀만 가득히 적막하여 사람 소리 없구나” (「회헌실기」권 2)(편집자 역) 5)
5)“香燈處皆祈佛 簫管家家盡祀神 獨有數間夫子廟 滿庭春草寂無人”
이 시는 즉 향이 일찌기 국학(태학)에 들어갔다가 공자묘의 황량 적폐(寂廢)함을 보고 매우 개탄하여 읊조린 것이라고 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당시 불교의 신앙과 민간 전래의 고유신앙은 의연히 성행하였음에 반하여 유교 방면의 교육과 세력은 홀로 쇠퇴하였던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당시의 최고학부인 국학이 저러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다른 학교의 형편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국학에는 특히 육영재단인 '양현고(養賢庫)'란 것이 있어 학생을 길러 오던 것인데 오랫동안 국가의 내환외우로 (이때) 그것의 내용은 전혀 공핍에 돌아가 이것이 또한 당시 학교를 부진케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충렬왕 27년에 원나라 사람 야율희일(耶律希逸 ; 고려에 주재하였던 원의 관리)의 권고로 국학 문묘의 대성전(大成殿)을 신축하여 30년에 낙성을 고하매 때에 찬성사의 직에 있던 향은 홍학(興學)의 실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년(30년)에 양부(兩府 ; 문화부 및 추밀원)에 건의하되
“재상의 직은 인재를 교육하는 데서 더 앞설 것이 없다. 지금 국학의 양현고가 탄갈(彈竭)하여 양사(養士)할 도리가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으로는 각각 은 1근씩을 내놓게 하고 7품 이하로는 포를 내되 차가 있도록 하여 이 기부금을 양현고에 귀속케 하여 본(本 ; 자본)은 존(存)하고 식(息;이자)은 취하여 길이 양사의 비(費)에 충(充)하자.”
고 하였다.
양부는 이에 종(從)하여 위에 알린즉 충렬왕도 내고(內庫)의 전곡을 내어 부조하였다. 이 재단을 특히 ‘섬학전(瞻學錢)’이라 명명하였으니 즉 위의 양현고와 마찬가지 뜻이었다. 그런데 이때 밀직(密直)의 직에 있던 고세(高世)란 사람은 무인이라 하여 즐겨 기금을 내놓으려고 하지 아니하거늘 향이 여러 재상에게 공언하되
“부자(夫子)의 도는 헌(憲)을 만세에 수(垂)하나니 신은 군에 충하고 자는 부에 효하고 제는 형에 공(恭)하는 것이 이 누가 가르침이냐. 만약 나는 무인이라 돈을 내어 생도를 기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이는 공자를 무시함이라.”
고 하였다.
고세가 이 말을 듣고 매우 참괴하여 곧 돈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때 향은 또 자기의 여재(餘財)를 내어 박사 김문정 등에게 남지나(南支那 ; 남경)에 가서 선성(先聖) 및 70자의 상을 그리고 제기, 악기, 육경 제자사(諸子史)를 구입하여 국학의 내용을 더욱 충실케 하였다. 「회헌연보」에는 이 신래 서적 중에 또한 「주자신서」를 들었으나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므로 의아가 없지 아니하나, 남지나는 남송의 구지(舊地)로 주자학과 지역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졌을 뿐더러 시간적으로도 (이때는) 주자 몰후 이미 100여 년, 남송 멸망 후 불과 20년이므로 김문정의 구입한 신래 서적 중에 주자 소저(所著)의 혹 종류의 것이 있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회헌실기」 권 2에는 또 회헌의 유문으로 권양촌집(權陽村集;양촌은 권근)」에서 인(引)하였다고 하는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을 게재하여 그 문에
"(전략) 내 일찌기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얻어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힌 것이요 불교와 노자의 학문을 배척한 것이라. 공은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여러 생도들은 주자신서를 읽고 행하여 마땅히 배움에 힘쓸 것이요,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편집자 역)
라고 한 것이 있다. 즉 향 자신이 일찌기 중국(원도)에서 주자의 저술을 얻어 보았는데 주자의 공이 족히 공자에 비할 만하여 공자를 학(學)하려 할진대 먼저 주자를 학함만 같지 못하니 국학 제생은 마땅히 「주자신서」를 힘써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조사한 바로는 이 글의 출처라고 하는 「권양촌집」에서 하등의 이러한 문자를 발견치 못하였다. 이는 마치 충렬왕 15, 6년경에 회헌이 마치 원도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신간 주자서를 얻어 보고 친히 수록하여 가지고 왔다는 전설과 같이 실상은 그 전설에 부회한 -후인의 위조에 의한 맹랑한 일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김문정이 구래(購來)한 서적 중에는 주자의 저술에 계(係)한 것이 혹 있었을지도 모르며 또 그 만년에는 항상 주자의 화상을 걸고 경모를 다하여 호를 회헌이라고까지 하였다는 명문이 「고려사」 동인전에 보이는 터이므로 -그 경모의 이허(裏許)에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요 주자의 저술과 그의 학적 지위를 다소 완미(玩味) 인식함이 있어서의 일일 것인즉 - 회헌을 동방 최초의 주자 숭배자 내지 주자학 수입의 최초 매개자로 인(認)함에 나는 이의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역설하려는 바이다. 그리고 그의 경모하였다는 주자의 화상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역시 김문정이 강남에서 모사 휴래(携來)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어떻든 (회헌이 使命한) 김문정이 구입한 신서적 및 선성현(先聖賢)의 화상들은 회헌의 섬학전 설치와 아울러 국학의 내용을 일신케 함과 동시에 당시 학계에 일신생면(一新生面)을 열었다고 하여도 가할 것이다.
회헌의 당시 유학에 기여한 공훈은 비단 이뿐만 아니라 밀직부사치사(密直副使致士) 이동(李恒)과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진(李)의 2名儒를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란 경사 전문의 교관을 삼게 하였던 것이니 이때 관리 및 관사(官私) 학생으로 횡경수업(橫經受業)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회헌이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물심양면으로 유술(儒術) 교육에 진력한 점은 직접 교육의 책(責)에 당한 학관보다도 몇 배나 더하여 항상 생도를 자기의 자질(子姪)과 같이 지도하고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야기가 또 사전에 전한다. 이때 생도 중에는 선배에게 예를 하지 않는 자가 더러 있었다. 회헌이 노하여 장차 벌하려 하매 제생(諸生)이 죄를 사하거늘 회헌이 타일러 가로되
“나는 제생을 나의 자손과 같이 보는데 제생은 어째서 이 노부의 뜻을 아지 못하는고?”
하고 인하여 제생을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먹였더니 생도들이 감복하여 서로 이르되
“공이 우리를 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정성껏 하니 우리가 이에 화복하지 못하면 어찌 사람 노릇을 하겠느냐.”
고 하였다 한다.
회헌의 후생 교육의 성의가 어떠하였던가는 이로써 넉넉히 짐작된다.
충렬왕 32년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여 동년에 졸하니 회헌의 나이 64세였다. 시(諡)를 문성(文城)이라 사하고 또 왕이 특히 장지를 사하여 장단부 송림현 대덕산 구정리(즉 서로 15리)에 장하였다. 장시에는 경내 관사 학생이 다 소복하고 노제를 지냈다 한다.
「고려사」동인전에 회헌의 인물을 논평하여
“향은 장중안상(莊重安詳)6)하여 사람들이 다 외경하고 조정에 있어서도 능모선단(能謀善斷)하여 동료들이 그의 의견을 승순(承順)할 뿐이었고 감히 다투지 못하였으며 항상 홍학(興學)·양현(養賢)으로써 그 임(任)을 삼아 비록 퇴관거가(退官居家)한 때라도 마음에 잊지를 아니하였고 빈객과 시여(施與)를 좋아하고 그 문장이 청경(淸勁)7) 하여 가히 볼 만하다.”
고 하였다.
6) 안상(安詳): 성질이 찬찬하고 자세함.
7) 청경(淸勁): 청렴하고 강직함. 청경(淸鰱).
또 일찌기 고금(古琴) 1장을 축하여 사자(士子)의 가히 가르칠 만한 자를 만나면 반드시 이를 권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하여 오인은 더욱 그의 성격, 풍도, 재량, 주의 및 기호의 여하를 방불(仿佛)히 상견(想見)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헌의 유자로서의 사업은 무엇보다도 만년에 흥학·양사 특히 문교 부흥에 있었으니 그는 정히 응기이생(應期而生)한 시대정신의 지도자로 당시 학계의 중망(衆望)의 적(的)이 되었고 또 동방 최초의 주자 숭배자인만치 후세 주자학의 발전에 따라 그의 존재는 점점 높아가 후인의 추앙을 거의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후 13년인 충숙왕 6년에 조신(朝臣) 중에 문묘 종사의 건의가 있어 이때 일파의 이론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마침내 실현되어 오늘날에 이르도록 혈식(血食)8)의 영(榮)을 누리거니와, 그는 여조(麗朝)의 유신으로 여대에 승무된 오직 일인이었었다. 여말의 명유요 충신인 정포은(몽주)도 승무유현 중의 일인이지만 그에게 이 특전을 내린 것은 이조 중종 12년의 일이었다.
8) 혈식(血食): 나라의 의식으로 제사를 지냄.
회헌의 소저 문자는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매우 영성하여 「회헌실기」중에 몇 개의 시문을 수재한 것이 있으나 그 수 불과 8, 9개일 뿐더러 그중의
어떤 것은 (위에도 말하였지만) 회헌이 소작이 아닌 듯한 것도 있어 우리가 그의 학문 문장을 엿보는 데는 망연한 감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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