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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이훈구(李勳求) 1896∼1961. 교육자. 충남 생. 동경대 농학과 수료. 미국 위스콘신 대학 철학 박사.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 단국대 학장, 성균관대 총장,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 등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 「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恬: 편안할 념 이조 500여 년간에 실학파로 굴지할 학자가 몇 사람 있다. 그중에 제일 먼저 칠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서슴지 않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말하겠다. 선생은 문화(文化) 사람으로 자는 덕부(德夫)요 호는 반계라고 하였다. 광해군 14년 임술(1622)에 경성에서 출생하여 두 살 때에 부상(父喪)을 당하고 다섯 살 때부터 능독능산(能讀能算)하였는데 동무 아이들이 옆에서 장난을 하여도 보고 듣지 않는 것..
홍승구(洪承耉) 1. 서인(緖引)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매우 조심하고 두렵게 임하는 녹리의 공이 있다. 좁은 집에 끼이면서도 호연지기를 얻으니 가히 우주를 채울 만하다. 중임을 맡음에 이르러서도 일신을 소홀히 여겨 높은 영화를 거부하였다. 나아가서는 제왕을 가르치기 위해 암랑(巖廊)을 두어 게으름을 보지 못하며 물러나서는 언덕 구덩이에서 죽과 술장으로 친구들과 벗하며 지내나 그 궁색함을 볼 수 없다. 우뚝 솟음이여, 홍하(洪河)에 있는 지주(砥柱)1)와 같구나. 늠름하구나, 한 겨울소나무가 꼿꼿함과 같구나. 진실로 억세 이래로 이와 같은 7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오. 일찌기 300년 동안 기상의 정기가 뭉치어 된 바임을 알겠노라.”(편집자 역) 1) 지주(砥柱):난세에 있으면서 절도를 지키는 것. 황하..
홍승구(洪承耉) 1. 가세(家世)와 출재(出在) 허목의 자는 문부(文父), 또 자는 화부(和父), 자호 왈 미수(眉叟)라 하니 양천(陽川) 사람이다. 양천허씨는 본래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서 김해 김씨로 더불어 조계(祖系)를 같이하였다. 여초(麗初)에 이르러 허선문(許宣文)이 태조께 사(事)하여 군향(軍餉)1)에 효로(效勞)2)하여 자못 충근(忠勤)을 저(著)하였으므로 태조가 가(嘉)히 여기시어 공암촌주(孔巖村主)로 봉하여 공(功)에 酬)시니, 공암은 양천의 구호(舊號)요 그 자손이 인하여 세거(世居)하여 적관(籍貫)3)을 삼았다 한다. 1) 군향(軍餉) : 군량(軍糧). 2) 효로(效勞):공로(功勞). 3) 적관(籍貫): 대대로 거주한 땅. 우리의 미수허목 선생은 실로 선문의 22세손으로 증조 자(磁)..
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 문학박사. 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 생, 경성제대 조선문학과졸업. 서울대, 청주대, 영남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 역임. 진단학회(震檀學會) 결성에 참여, 국문학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의 초석을 놓고 나아가 민족사관의 학풍을 확립.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한국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등이 있음.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라 하는 전라도 해남인이다. 선조 20년 6월 21일에 한경(漢京)에서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자품이 특이하고 총명이 과인(過人)한 데다가 또 학을 좋아하여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통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 능하였다. 그 위에 지신(持身)이 엄숙하여 아직 10여 세에 산사에서 사승이..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창작」, 「국문학개론」 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음. 난설헌은 절륜한 천자(天姿)로 거족 명문에 태어났다. 그 아버지며 형제가 모두 재화(才華)와 학식이 겸비한 거장들이고 또는 조야에 명망이 높은 이들이다. 난설헌은 그 속에서 마(麻) 중의 봉(蓬)과 금상(錦上)의꽃처럼 자라고 피어나며 그 천분을 발휘하고 영예를 드날리었다. 그 아버지 허엽(許曄)은 호를 ..
이능화(李能和) 1869∼1962․ 학자, 호 간정(侃亭), 충북 괴산 생. 정동 영어학당, 한어(漢語)학교, 관립법어(法語 ; 프랑스어)학교 졸업. 칭경례식사무소(稱慶禮式事務所) 위원을 거쳐, 관립한성 외국어학교 학감 역임. 저서에 「조선불교통사」, 「조선무속고」,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 등이 있음. 허준 선생은 본시 조선의 세족이었다. 선조대왕 때에 내국의관(內局醫官)이 되어 의술에 정통하였다. 25년 임진에 왕의 서가(西駕)에 호종(扈從)1)하였다가 공훈을 세워 벼슬이 충근정량 호성공신 숭록대부 양평군(忠勤貞亮扈聖功臣崇祿大夫陽平君)에 이르렀다. 1) 호종(扈從): 임금의 행차에 뒤따름. 그리고 29년 병신에 왕명을 받들어 동인(東人)이 편용(使用)할 의서를 찬집하게..
이훈구(李勳求) 1896∼1961, 교육자. 충남 생. 동경대 농학과 수료. 미국 위스콘신대학 철학 박사. 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 단국대 학장, 성균관대 총장,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 등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 「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동양의 넬슨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요 명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汝該)다. 이조 인종 원년(1545) 경성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영상(英爽)하고도 箝制1)를 좇지 아니하며 동무 아이들과 유희를 할 때에도 반드시 전진(戰陣)의 흉을 내고 뭇 아이들의 장수가 되어서 호령을 하였다. 1)箝制:자유를 구속함. 箝:족집게 겸 동리에 틀리는 일이 생기면 장군이 나서서 억지 떼를 ..
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등을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중등조선역사」 등이 있음. 한호의 성은 한(韓), 명은 호(濩), 관(貫)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이요, 호는 석봉(石峰) 또는 청사(晴沙)라 하나 흔히 한석봉이라 부르면 가동주졸(街童走卒)도 거의 다 구가하는 명필로 알게 된다. 그는 정랑(正郞) 한관(韓寬)의 손으로서 중종 38년 계묘에 송도 한 모퉁이 빈한한 가정에서 처음으로 呱呱의 소리를 듣게 되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운필(運筆)의 천재가 있을 뿐 아니라 서도에 대하여 취미와 성의가 매우 간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주소(..
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 문학박사. 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 생. 경성제대 조선문학과졸업. 서울대, 청구대, 영남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 역임. 진단학회(震檀學會)결성에참여. 국문학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의 초석을 놓고 나아가 민족사관의 학풍을 확립.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등이 있음. 정철은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라 하였다. 중종 30년에 한양에서 나서 인종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니 백형 정랑(正郞公)은 피체장류(被逮杖流)하여 죽고, 부 판관공(判官公)은 정평(定平), 영일(迎日) 등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여기에 공은 벌써 그 유년시대에 있어 사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또 인하여 누년실학(厦年失學)을 ..
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 등이 있음. 1. 선생의 가계(家系)와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이(李), 휘(諱)는 이(珥)요,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 (栗谷)이며 관은 덕수(德水)요 그의 선계(先系)는 호귀(豪貴)한 명문거족이 아니라 이름 없이 향곡(鄕曲)에 묻혀 있던 궁조대(窮措大)1)의 집으로서 그 조(祖) 천은 백면의 서생으로 일생을 마쳤고 그의 부(父)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의 미직(微職)을 지냈었으나 「율곡전서(栗谷全書)」 세계도(世系圖)에 “정성스럽되 번화하지 않고 너그러워 고인(古人)의 면모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