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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세 및 유년시대 연암(燕巖)의 성은 박이요, 명은 지원이요, 자는 중미(仲美)요, 호는 연암이요, 관(貫)은 반남(潘南)이니 영조 13년 정사에 경성 안국방(安國坊)에서 탄생하였다. 반남 박씨는 조선의 대족(大族)이요, 공의 가세(家世)는 박씨 성 중에도 더욱 명문 거족이다. 문강공(文康公) 소(紹; 冶川)의 8세손이요, 충익공(忠翼公) 동량(東亮;梧窓)의 6세손이요, 장간공(章簡公) 필균(弼均)의 손이요, 그 외 공시1)의 친(親)에도 명공 거경(名公巨卿)이 많이 출생하여 타성씨에 드물게 보는 바이다. 1)功緦 : 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 또는 소공친(小功親)과 시마친(緦麻親). 조금 먼 친척 연암이 이러한 명..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시조의 개설과 창작」, 「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등이 있음. 영조 10년 을묘 6월 18일 한성 반송방 거평동(지금 경성부 평동정)에서 혜경궁 홍씨가 태어났다. 거평동은 그 외가이었다. 본집은 안국동에 있었으나 그때 解娩 같은 것은 흔히 그 친가에 가서 하던 것이 또한 풍속이었다. 그 아버지는 홍봉한(洪鳳漢)인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현손이고 판서 홍현보(洪..
이희승(李熙昇) 1886- . 국어국문학자, 시인, 문학박사. 호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 생.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름. 광복 후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사장, 학술원 부원장 등을 역임. 저서에 「역대 조선문학정화(歷代朝鮮文學精華)」, 「국어학개설」등이 있으며 그외 「박꽃(시집)」, 「벙어리 냉가슴(수필집)」 등이 있음. 신경준의 자는 순민(舜民)이요 호는 여암(旅庵)이요 관은 고령(高靈)이니 숙종 38년 임진(1712)에 신내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초매(超邁)하고 재기가 영민하더니 점점 자라매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깊이 탐구하는 기벽이 있어 유학의 정종인 9경에 숙달함은 물론이요, 구류백가(九流百家)에 박통하여 천관(天官), 직..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牛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있음. 1 숙종영조 간의 기하(幾下) 남인 학자로 퇴계의 학을 숭봉하면서 일방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박학고증(博學考證)의 신학풍을 연 성호 이익(李翼)의 문하에는 그의 자질(子姪;자 맹휴, 질 병휴 등)을 비롯하여 제제(濟濟)한 명사(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순암 안정복 및 기타)들이 종학(從學)하여 그 학풍을 본받았거니와 그중에도 경사(經史)를 전공으로 풍다한 저술을 남겨 후학에 비익(裨益)함이 컸던 이는 순암..
이훈구 1896∼1961. 교육자. 충남 생. 동경대 농학과 수료. 미국 위스콘신 대학 철학박사. 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 단국대 학장, 성균관대 총장,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 「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본관 여주로 광주 첨성(瞻星)에 살았으므로 자호를 성호(星湖)라고 한 이익 선생의 자는 자신(子新)이었다. 숙종 8년(1682)에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로 고고의 성을 세상에 들렸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하여서 뭇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었다. 조금 커서는 그의 사촌 형 양계(良溪) 진에게 취학하여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각종 서적을 독파할 뿐 아니라 전언(前言)과 왕행(往行)을 强記하여 그 천부의 우수한 기억력을 발휘하였고 또..
김태준(金台俊) 생몰 연대 미상. 평론가. 성대(城大) 조선문학과 졸업. 점차 극좌적인 평론 활동을 하다 6·25 전에 월북. 저서에 「조선소설사」, 「고려가사 주해」,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청구영언」 등이 있음. 김춘택의 호는 북헌(北軒)이니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의 손(孫)이요 진구(鎭龜)의 아들이요 만중(萬重)의 종손이다. 그는 소성(素性)이 탕달(蕩達)하여 낙척불우(落拓不遇)로 일생을 시종하였으니 그의 문예는 차라리 그의 소수(消愁)의 구(具)요 망우(忘憂)의 물(物)이었다. 숙종 때다. 왕께서 중궁 민비를 폐하고 경묘(景廟)의 생모인 장희빈을 대치하려고 할 적에 이를 간하려다가 희생된 사람도 많거니와 이 민비의 복위를 도모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니 당시에 부로숙백(父老叔..
이원조(李源朝) 1909~1955. 평론가. 호 여천(泉). 경북 안동 생. 일본 도쿄 호오세이(法政) 대학 불문과 졸업. 조선일보 기자 등을 지내면서 문학의 행동 참여를 강조하는 글을 씀. 광복후 임화 등과 문학가동맹을 조직, 좌익 쪽에서 활약하다가 월북. 시에 등이 있고 논문으로 〈언어와 문학〉, 〈임화의문학의 논리〉, 〈시와 고향>등이 있음. 선생의 휘는 창협이요 자는 중화(仲和)요 호는 농암(農巖)이니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요 문곡(文谷) 수항(壽恒)의 제2자이며 관은 안동이다. 이만해도 선생의 세덕(世德)이 얼마나 혁석1)한 것은 알 일이지마는 사실 안동 김씨의 문미가 이때처럼 대창(大昌)한 적도 없는데 이제 선생의 전기를 쓰면서 선생의 세덕을 예외로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다른 까..
김태준(金台俊) 생몰 연대 미상. 평론가. 성대(城大) 조선문학과 졸업. 점차 극좌적인 평론 활동을 하다 6·25 전에 월북. 저서에 「조선소설사」, 「고려가사 주해」,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청구영언」 등이 있음.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의 아우로 전국에 관절(冠絶)한 명가에 태어났다. 본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인조 15년 생, 현종 6년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관력(官歷)은 대제학에서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나 숙종 15년 숙종께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으로 중전을 삼으려고 할 때에 소론(疏論)하다가 죄를 얻어 남해(南海)에 귀양가서 숙종 18년에 몰(歿)하였다. 그런데 서포의 위대한 성격과 학식을 성취케 한 배면에..
김원근(金瑗根) 생몰 연대 미상. 교회 지도자. 정신여고 교사 역임. 윤증의 자는 자인(子仁)이요, 호는 명재(明齋)요, 적은 파평(坡平)이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인조 기사년에 출생하였고 생월일은 미상이다. 선생의 화상을 보니 얼굴은 길고 천정은 높고 봉의 눈이요 검의 눈썹(鳳目刀眉)이다. 풍채가 당당하다. 덕성은 순수하다. 학식은 도덕과 문장이 겸비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유계 선생에게 소학을 배우셨다. 청년시대부터는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문학과 성리학을 배워 조예가 매우 고명하셨다. 선생이 어렸을 때이다. 청국에서 사신이 와서 억지로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의 부친인 미촌공은 크게 분이 나서 “강화를 하지 말고 그 사신을 잡아 목을 베고 대의를 밝히옵소서.” 하고 상소하셨다. ..
이훈구(李勳求, 1896~1961) 교육자, 충남 생, 동경대 농학과 수료. 미국 위스콘신 대학 철학 박사. 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 단국대 학장, 성균관대 총장, 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 등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 「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이조 인조 7년 을사(1629) 8월 19일에 남원부사 공아(公衙)에서 고고의 성을 낸 사람이 있으니 그는 곧 박세당 선생이었다. 선생은 번남인(潘南人)으로 자는 계긍(季肯)이요 호는 서계(西溪), 전수(田叟)라고 하였다. 유시(幼時)에 상밀단정(詳密端正)한 성격을 발휘하였고 문예가 숙성하여 성명이 있었다. 32세 때에 과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고 증광과(增廣科)와 전시(殿試)에 급제하여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