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7.조선-안정복(安鼎福) 본문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牛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있음.
1
숙종영조 간의 기하(幾下) 남인 학자로 퇴계의 학을 숭봉하면서 일방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박학고증(博學考證)의 신학풍을 연 성호 이익(李翼)의 문하에는 그의 자질(子姪;자 맹휴, 질 병휴 등)을 비롯하여 제제(濟濟)한 명사(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순암 안정복 및 기타)들이 종학(從學)하여 그 학풍을 본받았거니와 그중에도 경사(經史)를 전공으로 풍다한 저술을 남겨 후학에 비익(裨益)함이 컸던 이는 순암(順菴) 안정복 그이었다.
1) 제제(濟濟):많고 성함.
즉, 순암은 경(經)을 경(經)으로 삼고 사(史)를 위(緯)로 하여 양자를 겸치하되 특히 조선 사학에 중(重)을 치(置)하여 성호의 이 방면의 학문을 일층 더 진보 발전시켰던 것이니 순암의 후학을 가혜(嘉惠)한 공도 이 사학 방면에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순암은 어떠한 생애와 저술을 하였던가?
2
순암 안정복의 자는 백순(百順)이니 순암은 즉 그의 호이며 그의 선(先)은 광주인(廣州人)으로 부의 명은 극(極)이요 조(祖)는 울산부사 서우(瑞羽)이었다.
순암은 숙종 38년 12월 25일에 제천에서 출생하여 그후 경성으로 또는 영광, 무주로 이거하다가 26세 때에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내주(來住)하니 이곳은 즉 그의 선영 소재지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를 중심으로 음양, 성력(星曆), 의약, 복서(卜筮), 병학, 불노(佛老), 패사(稗史), 소설에 이르기까지 박람치 아니함이 없었지만 더욱 이로부터는 거업(擧業)을 전폐하고 성리학에 유의하여 「성리대전」, 「심경」 등 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한다.
순암이 이성호(익)의 학덕을 사모하여 왕배문학(往拜問學)하기는 영조 22년(35세)이니 그때 성호는 안산 성촌에 거하여 65세의 노인으로 학문이 점점 정숙(精熟)하여 갈 때였다. 성호의 고족(高足)2)인 윤소남(尹邵南;東奎), 이정산(李貞山;秉休) 등을 동문사우로 교류하기도 이로부터였다.
2) 고족(高足):고족제자(高足弟子)의 준말로 뛰어난 제자를 이름.
이후 순암은 17년 동안 성호를 사사하였으되(신병 기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왕방(往訪) 승수(承受)한 것은 전후 4차에 불과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성호 몰후에 이를 대단 유감으로 여겨 4차 승회(承誨)한 일록(日錄)을 별기(別記)하여 책명을 「함장록(函丈錄)」이라 하여 추모의 침을 표하기까지 하였지만 성호 생전에도 매양 그를 산두(山斗)와 같이 경앙하여 서찰로써 왕복 질의함이 십수 차에 이르러 직접 간접으로 성호에게 계발되고 영향 자극된 바가 많았다.
성호도 그를 보통 문인보다는 유달리 알아 자기의 소찬(所撰)인 「도동록(道東錄;퇴계의 언행을 집한 것)」을 순암과 윤소남에게 촉(囑)하여 서로 상론편차(商論編次)케 하여 이를 「이자수어(李子粹語)」라 고쳤고 또 그 만년에는 그의 명저 「사설」을 순암에게 촉하여 분류 산정(刪正)케 하여 서명을 「사설유편」이라 하니 범 12권으로 되었다. 지금 방간(坊間)에 유행하는 「성호사설」이란 것이 즉 이것이다.
영조 25년(38세)에 조정에서 순암의 이름을 듣고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하였으나 부임치 아니하였고 이해 이어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을 제하매 부득이 출사하여 익익년에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에 승진하였다. 그후 누관(屢官)하여 동왕 30년(43세)에는 사헌부 감찰에 전임하였던바 미구에 부상(父喪)을 만나 사직 퇴거하여 이후 근 20년간 두문불출 독서 저술에 전심하였다.
그의 경사에 대한 조예는 이때에 더욱 깊어가고 그의 중요한 편찬과 저술도 이때에 많이 되었었다. 동왕 48년(61세)에 이르러 병판(兵判) 채제공(蔡濟恭)의 천거로 익위사익찬(翊衛司 翊贊;일명 桂坊이니 세자 시위의 직)을 배수하고 그후에 또 동사 위솔(衛率)을 제하여 전후 동궁을 보도(補導)한 공이 컸었으니 동궁은 즉 근세 호문(好文)의 주(主)인 정조(正祖)시었다. 동궁의 학문은 이미 이때에도 고명하여 보통 강관(講官)으로는 그 뜻에 부키 어려웠고 오직 순암과 같은 박학 강기(强記)의 인물이라야 그 임에 적당하였다. 과연동궁은 순암의 강설을 경청하여 매양 기(己)를 허(虛)하여 문난(問難)하였다 한다.
정조 즉위 초(65세)에 목천현감을 제수하여 재임 3,4년에 혹은 권농 혹은 향약을 권행하고 혹은 사마소(司馬所)를 설하여 읍 중의 사자(士子)로 강학습업(講學習業)케 하는 등 자못 교화에 힘을 썼었다.
정조 8년(73세)에 또다시 익찬의 배명을 받으매 노병을 이유로 곧 사은, 퇴귀하였다.
동왕 13년에는 첨중추, 익년에는 동중추의 명예직을 수하고 이어 광성군(廣成君)을 봉하였더니 익 15년 7월에 이르러 80세의 고령으로 역책(易簧)하였다.
일찌기 서학 배척의 공이 있다 하여 순조 원년에 특히 좌참찬(左參贊)의 직을 증하고 고종 8년에는 시(諡)를 문숙(文肅)이라 사하였다.
3
순암은 역시 남인 학자로 더욱 성호의 영향을 받아 영남 남인의 학조(學祖)인 퇴계를 극존하여 매양 '퇴도이부자(退陶李夫子)’혹은 ‘이자(李子)’라 하고 또 일찌기 그 문인 황덕일(黃德壹)에게 이르되
“주자를 배우려면 먼저 퇴계를 배우라.”
하고 인하여
「이자수어」를 주어 가로되
“공맹의 말은 왕조의 법령과 같고 정주의 말은 엄사(嚴師)의 칙려(勅勵)와 같고 퇴계의 말은 자부(慈父)의 훈계와 같은지라. 이 책은 사람을 감발함에 우절(尤切)하다.”
고 하였다.
순암의 퇴계 숭배가 이와 같으므로 그 성리학설에 있어서도 퇴계의 설을 존봉하여 매양 사우 문인으로 더불어 변론하기를 마지 아니하였지만 더욱 퇴계의 소편(所編)인 「주자서절요」를 애독하여 마침내 이에 倣하여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8책을 편찬한 일도 있었다.
영조 50년 위솔로 서연(書筵;세자 講席)에 들어가 율곡의 명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였을 때 동궁(정조)이
“퇴계와 율곡의 이기설이 서로 다른데 그대는 어떤 설을 좇느냐.”
고 물음에 대하여 그는 역시 가로되
“율곡의 자득(自得)의 견(見)이 비록 좋기는 하나 퇴계의 사칠설은 주자어류에 근거한 원연(源淵)이 있는 설이므로 일찍부터 퇴계의 설을 좇아 왔다.”
고 하였다.
율곡은 서인의 학조인 까닭에 서인과 당파를 달리한 남인은 기호인이라도 대개 영남 남인의 학조인 퇴계를 추앙하게 되므로 순암의 퇴계 숭배에는 역시 이러한 당파적 영향이 많았을 것이다.
순암은 이와 같이 정주학, 퇴계학을 준수하였던 터이므로 조금이라도 이들과 설을 달리한 신이(新異)한 설에 대하여는 공격의 화살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더욱 당시 연소 남인학자 간에는 양명학설, 명·청간 고증학설, 서양 천주교설을 신봉하는 자가 많이 있는 까닭에 순암은 비단 학문적 입장으로뿐만 아니라 장래의 당화를 두려워하여 이를 극력으로 척계(斥戒)하였다.
그의 婿 권일신(權日身)의 형 권철신(權哲身)과 같은 이는 재기가 영발(穎發)하고 자못 호기(好奇)의 벽이 있어 고증학파의 신설과 왕양명의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좋아하여 이로써 가끔 순암과 왕복 논변한 일이 있었지만 순암은 매양 이를 불가한 양으로 論斥하였으며, 그 후 철신이 그 아우 일신과 및 그 지구문인(知舊門人)으로 더불어 성히 서양 천주교를 습신(習信)함에 이르러서는 순암은 누누이 장서(長書)를 보내어 서교의 불가함을 극론하고 아울러 당화(黨禍)의 우려를 암시하여 속히 폐지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철신 등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점점 거기에 열중하였으며 그 신도 중에는 왕왕 성호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로써 성호도 일찌기 이교를 신습하였다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순암은 이를 크게 염려하여 정조 9년에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등 서를 저하여 천주교의 비(非)를 척(斥)하는 동시에 성호의 〈천주실의발〉을 그 책에 말부(末附)하여 성호의 진의를 변명하였다. 순암 몰후 겨우 수개월에 국금(國禁)이 내려 천주교를 사교라 하여 신자를 극형에 처하고 그후 사옥이 계기(繼起)하여 신도들이 수차로 취륙(就戮)하매 사람들은 비로소 순암의 선견의 명을 알았다고 한다.
순암의 유학사상은 시대 환경의 관계도 있었겠지만 도대체 완고하고 고루하여 위와 같이 신이한 설을 배척하기를 좋아하였거니와, 일찌기 성호가 그에게
“배움은 스스로 체득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반드시 옛사람들이 말한 것에 막혀 고정될 필요는 없다.” (편집자 역)
고 하였음에 대하여 그는 말하되
“뒤에 태어난 젊은이가 그 진리를 궁구하는 것이 이르지 못하고 뜻과 생각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면서도 간략한 소견이 있다 하여 문득 자기의 뜻을 고집하면서 옛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것이라 하는 이런 습성이 점점 커진다면 한갓 그의 가볍고 얕은 뜻만을 고집하는 것에만 더할 뿐이지 덕의 업에 나가는 데는 무익하다.”(편집자 역)
고 하였다.
순암의 말 가운데에는 물론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나 너무도 (신인의)자득 자견의 진보적 태도를 무시한 말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문은 성호의 말과 같이 독창 자득을 숭상할 것이지 반드시 전인의 설에 구니(拘泥)3)할 것은 없는 까닭이다.
3) 구니(拘泥): 일정한 일에 얽매임.
그리함에서 진보가 있고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암의 위의 태도와 언론에는 전부를 찬성치 않는다.
그런데 사학 방면에 있어서의 순암의 학적 태도는 매우 비판적이요 진보적이었다. 재래의 동방 사책에 대하여 그는 큰 분개와 불만을 느끼고 무수한 결함을 지적하여 마침내 「동사강목(東史綱目 ; 모두 20권)」이란 대저를 저술하였지만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전사(前史)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고 소략한 곳을 보충하고 모호한 데를 밝히려고 하였다. 더욱 고대 지리연구에 있어서는 정밀한 고증과 날카로운 비판을 시(試)하여 전인의 연구에서 수보를 내킨 바가 있었다.
물론 그 저술 중에는 오견오해처(誤見誤解處)도 더러 있고 의문 중의 것도 불소(不少)하지만 가다가 정론탁견(精論卓見)을 발한 곳도 많이 있어 그 개척의 공은 물론이요 후학을 개도비익(開導裨益)한 공이 또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동사강목」은 상고에서 붓을 일으켜 여말에 그친 강목체(綱目體)의 사기로 조선측 및 지나측 사료를 널리 참고하여 만든 것이니 그중의 주 및 안설(按說)과 부록의 「고이지리고(考異地理考)」는 문집에 소수된 「동사문답」과 한가지로 다 그의 단편적 연구로 조선사 연구자의 일독을 요할 큰 참고서이다.
또 그의 동사에 관한 저술로는 「열조통기(列朝通紀 ; 모두 28권)란 것이 있는데 이는 이조 태조에서 시작하여 영조 말까지의 사실(史實)을 각 서에서 수집한 것으로 사체(史體)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동사강목」에서 계속된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암의 경사 기타에 걸친 편찬·저술은 매우 풍다하여 이를 통틀어 열거하여 보이면, 편찬에는 「이자수어」, 「성호사설유편」(이상 성호 소찬), 「주자어류절요」등이 있고, 저술에는 「하학지남내범(下學指南內範)」, 「희현록(希賢錄)」, 「가례집해(家禮集解)」, 「시명물고(詩名物攷)」, 「홍범연의(洪範演義)」, 「잡괘설(雜卦說)」, 「소학강의(小學綱義)」(이상은 유학에 관한 것), 「동사강목」 및 「고이 지리고」, 「사감(史鑑)」, 「열조통기」, 「독사상절(讀史祥節)」, 「광주지(廣州誌)」, 「목주지(木州誌)」(이상은 史地에 관한 것), 「임관정요(臨官政要)」(행정에 관한 것), 「천학고」, 「천학문답」(이상은 천주교에 관한 것이니 문집 중에 실림) 및 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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