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8.조선-신경준 본문
이희승(李熙昇)
1886- . 국어국문학자, 시인, 문학박사. 호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 생.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름. 광복 후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사장, 학술원 부원장 등을 역임.
저서에 「역대 조선문학정화(歷代朝鮮文學精華)」, 「국어학개설」등이 있으며 그외 「박꽃(시집)」, 「벙어리 냉가슴(수필집)」 등이 있음.
신경준의 자는 순민(舜民)이요 호는 여암(旅庵)이요 관은 고령(高靈)이니 숙종 38년 임진(1712)에 신내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초매(超邁)하고 재기가 영민하더니 점점 자라매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깊이 탐구하는 기벽이 있어 유학의 정종인 9경에 숙달함은 물론이요, 구류백가(九流百家)에 박통하여 천관(天官), 직방(職方), 성률(聲律), 의복(醫卜) 등의 학술과 역대의 헌장(憲章)과 해외 기벽(奇僻)의 서적에까지 무불통지하였었다.
영조 14년 무오 즉 순민 28세 때에 집을 소사에 옮겨 「소사문답(素砂問答)」이란 책을 저술하였고 3년 후 신유에는 다시 직산으로 이사하여 「직서(稷書)」라는 책을 지었다. 또 3년 후 갑자에는 순창으로 내려가서 10년 동안을 고금전적 섭렵에 잠심 몰두하여 영조 30년 갑술에 증광 을과에 뽑혀 승문원(承文院)에 벼슬하고 휘릉별검(徽陵別檢), 성균전적(成均典籍),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거쳐서 병조참지에까지 이르렀었다.
순민은 특히 동국 산천과 도리(道里)에 정통하여 일찌기 영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교고(校考)를 감수한 일이 있고 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함에 당하여 그 일부되는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었다. 그리고 「팔도지도」의 제작을 감수하여 지도가 완성하매 괘축(掛軸)으로 만들어 전중(殿中)에 걸어두었었다 한다.
왕(영조)이 자주 입시를 명하셔서 여러 가지 하문에 응대케 하여 흔히 밤이 깊도록 한가지로 하시다가 주찬을 내리시고 또 지부(地部)와 군문에 명하셔서 가끔 전곡과 시탄(柴炭)을 사급하셨다 하니 이는 모두 순민의 학문과 재조를 기특히 여기신 연유로였다.
그를 승정원 동부승지와 병조참지에 특별히 탁용하신 것도 역시 순민의 재학(才學)을 사랑하신 까닭이었다. 영조 52년 병신에 왕이 훙(薨)하시매 순민은 선왕의 지우(知遇)를 감격히 여겨 정성을 다하여 심상(心喪)1) 3년을 받들었다.
1) 심상(心喪): 거상이나 복을 입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슬퍼하며 마치 상제나 부인처럼 근신하는 일.
3년 후 기해에 우인(友人)에게 말하기를
“내 선왕의 우악(優渥)하신 지우를 받아 자주 은혜로운 말씀을 받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였더니 이제 3년을 이미 마쳤으니 돌아감이 마땅하도다.”
하고 벼슬을 하직하고 남산 옛터에 돌아가서 한갓 도서를 열독(閱讀)하며 임학에 소요하여 청빈한 생활을 스스로 만족히 여겼었다. 이듬해 경자(정조 4년)에는 세 번 승지의 제수를 받았으나 사퇴하여 나아가지 않더니 그 이듬해 신축에 마침내 물고(物故)하였다.
순민은 수중에 서책을 놓지 아니하면서 동시에 저술의 붓을 항상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술작(述作)은 심히 많으니 전기한 「소사문답」, 「직서」 외에 「의표도(儀表圖)」, 「부앙도」,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등이 있다 한다.
이상은 영조조 사람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 속에 등재된 순민에 대한 기사를 초록한 데 불과하다. 따라서 순민의 저서도 「이계집」에 소개된 그대로다. 필자는 아직 그 대부분의 일열(一閲)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전존하여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나 그중의 「도로고」는 조선도서 해제에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고 또 「언서음해」는 오늘날 학자 간에 많이 알려진 「훈민정음 운해」가 그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훈민정음 운해」는 그의 박식을 응용하여 저작된 훈민정음의 음리학적(音理學的) 논고로서 상위(象緯), 필수(筆數) 등이 많이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 그대로가 개권 벽두(開卷劈頭)에 첨부되어 있고 운해 본문 제1엽에 ‘순주(淳州) 신순민(申舜民)찬’이라 적혀 있으니 이것은 아마 순창에 내려가 있던 10년간에 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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