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9.조선-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본문

한글 文章/조선명인전

89.조선-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구글서생 2023. 5. 19. 02:24
반응형

조선-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국문학자수필가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서울대단국대 교수학술원 임명 회원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시조의 개설과 창작」「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가람문선」등이 있음.

 

영조 10년 을묘 6월 18일 한성 반송방 거평동(지금 경성부 평동정)에서 혜경궁 홍씨가 태어났다. 거평동은 그 외가이었다. 본집은 안국동에 있었으나 그때 解娩 같은 것은 흔히 그 친가에 가서 하던 것이 또한 풍속이었다.

 

그 아버지는 홍봉한(洪鳳漢)인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현손이고 판서 홍현보(洪鉉輔)의 큰아들이고 그 어머니 이씨는 황해감사 이집(李潗)의 따님이다. 이런 잠영세족(簪纓世族)1)으로 혁혁한 집이었으되 청렴함을 숭상하여 가계가 간고하였다.

1) 잠영세족(簪纓世族):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겨레붙이.

 

그 중모(仲母) 신씨는 덕행이 남다르고 백사에 능란하고 문식(文識)이 탁월하여 임하풍미(林下風味)2)요 여 중의 선비라 일컫는바 심히 이 홍씨를 사랑하여 언문을 가르치고 범백(凡百)을 지도하였다.

2) 임하풍미(林下風味):고상하고 閑雅한 취미가 있음.

 

홍씨는 여러 남매 가운데 가장 영오(穎悟)하였으며 이런 가법과 규범(閨範)이 있는 집에서 양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지각이 나고 언행이 갸륵하여 집안 사람들이 작은 어른으로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영조 19년 세자의 춘추가 아홉 살이 되자 간택령을 내렸다. 그해 홍씨도 아홉 살이던바 그 아버지는 능참봉(陵參奉)을 하여 박록을 받아 근근히 지내는 터이라 의상을 차릴 길이 없어 치마차는 그 형 혼수에 쓰려고 두었던 것으로 하고 옷안은 낡은 옷안을 넣어 입고 초간택에 참여하매 영조께서 보시고 천포(薦褒)하여 수망(首望)에 들고 재간, 3간을 다 치르고는 어의동(於義洞) 본궁으로 들어 수삭을 지내고 그 이듬해 갑자 정월에 세자빈이 되어 가례를 행하고 그 아버지 홍봉한은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이 되었다.

 

나이 열 살밖에 안 되신 홍씨가 그 무거운 수식(首飾)을 이기고 선원전(璿源殿) 종묘에 展謁을 하며 조금도 실조(失措)치 않고 대례를 순성하여 영조의 칭찬하심을 받았다. 그리고 문안을 하되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 계비 김씨), 정성왕후(貞聖王后 ; 영조비 서씨)께는 5일 일차씩하고 선희궁(宣禧宮; 사도세자의 사친)께는 3일 일차씩 하며 또는 날마다 뵈올 적이 잦은바 궁금법(宮禁法)이 지엄하여 예복을 아니하면 감히 뵈옵지 못하고 날이 늦게도 못하므로 새벽에 문안을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융동성서(隆冬盛暑)나 풍우대설 가운데라도 그 때를 어기지 아니하였다.

 

홍씨가 16세 되던 해 경오 8월에는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아 3년 만에 잃고 그해 임신 9월 22일에 정조대왕을 낳고 20세에 첫 따님 청연공주(淸衍公主)를 낳고 22세에는 청선공주(淸璿公主)를 낳았다.

 

홍씨는 제전(諸殿)의 자애도 받고 세자와의 금슬도 좋으신 바 세자께서는 10세 적부터 이상한 병환이 계시다, 부왕을 뵈올 때는 무단히 跼縮3)하고 어느 때에는 유희, 기도, 독경 등을 하고 서연(書筵)과 문안과 같은 일을 게을리하매 부왕께서는 엄책만 하시고 그 병환은 점점 더하시었다.

3) 국축(跼縮):몸을 구부림. 跼蹐.

 

병화가 몹시 일어날 때에는 과거(過擧)와 행패하신 일도 종종 있으매 홍씨는 그 간장을 퍽 태웠었다.

 

그러다가 영조 38년 임오 5월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겸종4)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으로 세자는 드디어 죄인이 되어 뒤주 속에 갇히어 이레를 굶고 승하하시었다.

4) 겸종(傔從):하인.

 

춘추는 28, 시(諡)는 사도(思悼). 이를 사도세자라 하고 홍씨는 호를 혜빈(惠嬪)이라 하였다.

 

홍씨는 이렇게 소천(所天)을 잃고 그 즉시 따라 죽으려다 못 하고 겨우 그 잔명을 이어오던바 영조 40년 갑신에는 자기 소생으로 다만 하나인 정조대왕과 같은 아드님을 효장세자(孝章世子)에 승통(承統)하게 하였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첫 아드님으로 10세에 승하하였는바 이렇게 승통을 삼고 보면 사도세자와 혜빈과의 승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부왕이 하시는 일이라 어이할 수는 없으나 홍씨의 가슴에는 설상가상이 되었다.

 

유난히 홍씨를 사랑하시던 정성왕후가 승하하신 후 영조께서 오홍부원군 김한구(金漢耉)의 따님으로 계비를 삼으니 즉 이가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이다. 정순왕후의 친정 장질(長姪)인 김구주(金龜柱)는 궁중에 출입하며 동지를 얻어 가지고 홍봉한의 트집을 잡아 공격을 하는지라,

홍과 김과는 드디어 적이 되고 각기 당을 이루어 김을 남당, 홍을 북당이라 하다 북당은 시파(時派) 남당은 벽파(僻派)로 변하였다.

이는 한 정당의 권리 다툼에 불과하지마는 사도세자의 사변을 중심으로 하고 말썽을 하였다. 혜빈은 한편으로는 친정아버지와 또 한편으로는 시어머니 되시는 정순왕후의 친족에 당한 일이라 처지가 여북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 친정 삼촌 홍인한(洪麟漢)은 세손의 청정(聽政)을 저지하다 죄를 얻어 사사(賜死)를 당하고 그 아우 홍낙임(洪樂任)은 역모하던 홍상범(洪相範) 등의 구초(口招)에 올라 친국(親鞠)까지 당하고 다행히 방송은 되었으나 혜빈의 가슴을 자주 울렁거리게 하였다.

 

정조께서는 지극하신 효성으로 자전(慈殿)을 섬기시고 재위하시는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사도세자와 그 외가에 당한 일을 다시 번복하지 않을 양으로 진념하시었다.

 

그리고 정조께서는 당신보다 더하신 자전의 정경을 감촉하시고 즉위하시던 때 사도세자의 궁호를 경모(景慕)라 하고 자전을 혜경궁(惠慶宮)으로 진(進)하고 그 13년 10월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이봉(移奉)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주상이 지통 중 달포 심려로 지내옵시고 자로 미령하옵서 성체 손상하옵시기 이를 것이 없사온대 출현궁(出玄宮)하오시는 일을 보옵시게 하옵기 차마 절박하옵고 지통을 겸하와 병이 일어 위중하올 뿐 아니오라 성궁(聖躬) 위하옵는 염려가 간절하와 붙드옵고 못 가시게 하오니 이제 즉시가려 하옵시기 지정을 생각하셔 동가(動駕) 전의 성빈(成殯)하옵시고 알외게 하소서.”

이는 혜경궁이 그때 영우원 개광(開壙)의 일을 맡아보던 관원에게 하신 봉서(封書)이다. 10월 1일 정조께서 옹가(甕家)에 가시어 친히 동역(董役)5)을 하시고 10월 2일 경모궁의 현궁을 내어 찬궁에 성빈을 하였다는 실록의 기사와도 대동한바, 그때 성(聖候)와 효성을 말씀한 것이다. 그후 현륭원에는 정조께서 그 자전과 청연, 두 누이들까지 더불고 가시어 모자 손을 잡고 분토(墳土)를 두드려 곡통을 하시었으며 환가하실 때에는 자전을 더 극진히 모시어 위의를 베푸시었다.

5) 동역(董役): 역사(役事)를 지휘하는 일.

 

“내려갈 제 주상이 내 가교(駕轎)에 바로 서시고 나라 거동 위의를 다 내앞에 세이오셔 찬란한 旌旗는 풍운을 희롱하고 진열한 고취(鼓吹)는 산악을 움직이고 서호(西湖)의 주교(舟橋)는 평지를 밟음 같고 망해의고평은 반공에 의지한 듯 태평연월(太平煙月) 강호에 유람하니 심기가 안서하고 안계(眼界)는 훤활하여 심궁(深宮)의 깊은 몸이 일조에 장관(壯觀)하니 실로 용이히 얻을 일이 아니요 노인의 안부를 보보(步步)히 물으시니 행로(行路)에 빛이 나며 이 몸이 영화로와 성효(聖孝)를 흠탄하나 도로혀 불안터라.”

 

이는 혜경궁이 지은 「한중록(恨中錄)」의 일절인바 현륭원에 가신 때 그 위로받음을 적은 것이다. 실컷 곡통을 하고 나서 대자연을 보고는 해탈이나 한 듯한 희열을 느낀 것이다.

 

이런 지효(至孝)이신 정조께서 그 후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에게는 늦도록 아드님을 두시지 못하고 가순궁(嘉順宮) 박씨를 얻어 순조를 낳으시고 순조께서 아직 沖年으로 계실 때 정조께서는 승하를 하시매 정순왕후 김씨께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시었다.

6) 충년(沖年): 열 살 안팎의 어린 나이.

 

한동안 잠잠하던 벽파들은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사교(邪敎)를 한다는 죄목은 다르지만 은언군(恩彦君) 인과 홍낙임도 필경 그들에게 몰려 죽었다. 혜경궁께서 또한 수난의 시기이었다. 그 친정의 위구함을 보고도 어쩔 수 없었다. 정리보다도 도리를 지키던 것이었다.

 

다만 이런 억울함과 철천의 원한을 품고 있다가 정순왕후께서 승하하신 후에 저으기 비로소 이를 풀어 말하였다. 「한중록」 제2서문의 가순궁 청으로 쓴다는 것이 이를 이름이었다.

 

「한중록」은 과연 이런 것을 주지로 하여 적은 것이었다. 혹은 「한중록」을 홍낙임의 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홍낙임이 죽은 뒤 지었을뿐더러 또는 홍낙임 생전에도 그게 어떤 지중(至重) 지엄(至嚴) 지비(至祕)한 일이라고 무엄히 지을 것이 아니었다. 그 글을 읽어 보면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바이다.

 

혜경궁은 순조 15년 을해 12월 15일 경경궁(景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하시어 그 익년 병자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이 되었고 광무 3년에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고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진호(進號)되었다.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이 파란과 곡절이 많거니와 그의 천분(天分)은 가장 문필에 있다.

이를 위한다면 그 불행이 도리어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았으면 약간 전교(傳敎)와 봉서장이나 남겼는지는 모르되 「한중록」 같은 귀중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그 작품은 우리 말글을 용하게 적은 점으로 보아 우리 종래의 산문가로서 그 이상 솟기는커녕 비견할 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또 서법도 용하였다. 그 수필(手筆)인 봉서나 「유향열녀전(劉向烈女傳)」 등을 보면 같은 궁체로도 청초 전아한 것이 품이 썩 높다.

 
반응형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91.조선-김홍도(金弘道)  (1) 2023.05.19
90.조선-박지원(朴趾源)  (1) 2023.05.19
88.조선-신경준  (1) 2023.05.19
87.조선-안정복(安鼎福)  (1) 2023.05.19
86.조선-이익(李瀷)  (0) 2023.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