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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86.조선-이익(李瀷)

구글서생 2023. 5. 18.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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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익(李瀷)

 

이훈구
1896∼1961. 교육자충남 생동경대 농학과 수료미국 위스콘신 대학 철학박사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단국대 학장성균관대 총장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본관 여주로 광주 첨성(瞻星)에 살았으므로 자호를 성호(星湖)라고 한 이익 선생의 자는 자신(子新)이었다. 숙종 8년(1682)에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로 고고의 성을 세상에 들렸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하여서 뭇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었다.

조금 커서는 그의 사촌 형 양계(良溪) 진에게 취학하여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각종 서적을 독파할 뿐 아니라 전언(前言)과 왕행(往行)을 强記하여 그 천부의 우수한 기억력을 발휘하였고 또 문과 시에 능하여 驚人의 절필(絶筆)이 많았었다.

 

성호는 24세 때에 증광과에 급제하였으나 서명(書名)의 서식이 위착(違錯)된 까닭으로 하여서 회시(會試)를 치르지 않았다. 익년에 그의 중형 염계(炎溪) 잠(潛)이 상소사건으로 고사하매 그는 청운의 뜻을 버리고 개연히 도를 닦는 데 뜻을 두어 모친에게 조석정성(朝夕定省)하는 외에는 서재에 단좌하여 고대 성현의 경전 특히 「퇴계문집」을 정독 연구하고 침잠 반복하여 한 자의 의의나 한 구의 문장이라도 반드시 명백히 변론하고 상세히 주석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그 정세하고 주밀한 고핵과 논리는 전대의 유현(儒賢)도 미치지 못한 곳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실역행으로 엄숙히 자기를 자수(自修)하고 예의로 사람을 대하여서 일시 사림간에 성명이 대진(大振)하였다. 성호가 65세 되던 해에 당시 조정에서 그의 성덕과 외명(嵬名)을 듣고 불러서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상은(上恩)을 일사(一謝)하고는 기관귀가(棄官歸家)하여서 성호(星湖)로 종신하니 83세이었다.

 

성호 선생은 천품이 강건하고 중정순수(中正純粹)하여 인격이 준결(峻潔)하였다. 안광은 형형하고 수염은 하수(下垂)하여서 거처가 엄연하므로 위의가 당당하였다. 그러나 대인접물(待人接物)할 때에는 언어가 유순하고 기풍이 온화하였으며 도를 논하고 의를 강할 때에는 의논이 풍발(風發))하여서 불감당(不敢當)의 위세가 있었다.

1) 풍발(風發): 바람이 일 듯이 의논이 잇달아 나옴. 풍생(風生).

 

고종 4년에 우의정 유후조(柳厚祚)가 사림의 공의(公議)에 좇아서 어전에 집주(執奏)하였는데 그 말에 의하면

그런 까닭에 감역 이익은 학문이 하늘과 인간을 꿰뚫었으며 의논은 고금에 통했고 조예가 깊었다.

경술과 문장은 일로 절세의 큰 선비였으며 저술이 매우 많아서 후인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풂이 있었다. 양서가 처음 이르매 사사로운 일을 다 버리고 그 근원을 파악하기에 몰두하였다. 그 학문의 바름과 견의(見議)의 밝음이 학문의 문을 열어 헤친 공이 있었다. 그에게 의당한 포상을 베풀어 정경(正卿)을 제수하시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렸다.”(편집자 역)

라 하였는데 이 말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사실상 선생은 당시에 남인파에 속하여서 당쟁이 효효하던 때이므로 관해(官海)에 투신하는 것을 단념하고 일의(一意)로 연구와 저술로 일평생을 보내었던 것이다. 당시 위정자는 성호와 같은 분을 불러서 가감역을 시켰으니 그것은 성호를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호의 서거 후 수십 년에 비로소 이조판서를 추증한들 그의 학문과 포부와 온축이 경국제민하는 데에 하등 직접 효과를 얻지 못하였으니 가석한 일이다.

 

성호의 학문, 사상, 문장은 그 저서를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성호는 비단 유학에 있어서 일가를 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500년간을 통하여 희귀하게 볼 수 있는 실학의 거장이었다.

「성호근사록질서(星湖近思錄疾書)」는 「근사록」 중에서 가숙(家塾)의 자제를 교습시키는 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발췌 해석한 것인데 이것을 통하여 성호의 유학자로서의 규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유가의 糟粕을 석명(釋明)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요, 기실은 성호의 실학자로서의 본색이 「성호사설」의 일서를 통하여 십이분 발휘되었다.

 

이 「사설」은 그가 일평생을 두고 수록한 것인데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에 분류해설하여서 그의 온축을 경주한 것이다.

그 견문의 해박한 것과 고증의 명확한 것은 비단 당대의 유일한 양저대작(良著大作)일 뿐 아니라 금일에 있어서도 자료와 참고가 되는 것이 극히 많은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조선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특히 조선의 실학을 연구코자 하는 사람은 성호의 이 책을 독송치 않고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후일에 안정복(安鼎福)선생이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여 「사설」을 산번취요(刪煩取要)로 중문(中門)을 편(篇)으로 개칭하고 매 편에 문(門)을 설치하여 천지문, 지리문, 귀신문, 인사문, 논학문, 논례문(論禮門), 친속문(親屬門), 군신문, 치도문(治道門), 복식문(服食門), 기용문(器用門), 기예문, 경서문(經書門), 논사문(論史門), 성현문, 이단문(異端門), 초목문, 논문문(論文門), 논시문(論詩門) 등으로 세분하고 자기의 안설(按說)2)을 부가하였다.

2) 안설(按說):살펴서 증험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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