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5.조선-김춘택(金春澤) 본문
김태준(金台俊)
생몰 연대 미상. 평론가. 성대(城大) 조선문학과 졸업. 점차 극좌적인 평론 활동을 하다 6·25 전에 월북.
저서에 「조선소설사」, 「고려가사 주해」,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청구영언」 등이 있음.
김춘택의 호는 북헌(北軒)이니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의 손(孫)이요 진구(鎭龜)의 아들이요 만중(萬重)의 종손이다. 그는 소성(素性)이 탕달(蕩達)하여 낙척불우(落拓不遇)로 일생을 시종하였으니 그의 문예는 차라리 그의 소수(消愁)의 구(具)요 망우(忘憂)의 물(物)이었다.
숙종 때다. 왕께서 중궁 민비를 폐하고 경묘(景廟)의 생모인 장희빈을 대치하려고 할 적에 이를 간하려다가 희생된 사람도 많거니와 이 민비의 복위를 도모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니 당시에 부로숙백(父老叔伯)이 많이 조정의 현귀(顯貴)한 지위에 있는 북헌 김춘택이 어찌 국사가 자가(自家)의 일과 달랐겠으며, 더욱 20세 전후의 그로서 시사일비(時事日非)에 수수방관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그는 일면 한중혁(韓重爀) 등과 함께 은화를 수취하여 곤위(壼位)1)의 회복을 기도하고 천금으로써궁인(宮人)의 매(妹)를 빙(聘)하여 첩을 삼아 내정(內庭)에 통하는 동시에 남모르게 장희빈의 형 희재(希載)의 처를 통하여 남인(南人)의 왕래자를 감시하는 동시에 임금의 뜻을 돌이키기 위하여 서포의 지은바 처첩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원래 조선말로 지은 것)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천람(天覧)2)에 공(供)케 하여 천심을 회복하려 하다가 실패되어 귀양갔다.
1)壼位: 왕비의 위.
2)천람(天覧): 임금이 직접 눈으로 봄.
그의 귀양살이는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정축(숙종 23년)~무인(동 24년) : 김천(金川)에 적(誦)함.
병술(동 32년) :해남(海南)에
병술~경인(동 36년) : 제주에 (2차)
경인:임피에
그의 유고 「북헌집(北軒集)」을 보면 시집 6권, 문집 12권인데 <초년록(初年錄)>, 〈수해록(囚海錄)〉, 〈취산록(鷲山錄)〉, 〈은귀록(恩歸錄)〉, 〈노산록(蘆山錄)〉으로 분류되어 있다. 수해는 제주, 취산은 임피 소안역(蘇安驛), 노산은 고향이다. 권 14 〈피체록(被逮錄)〉과 권 20 <갑오국옥의공사(甲午鞫獄擬供辭)> 같은 것은 자기 변해(辯解)의 참고 문자다.
그런데 항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로는 김춘택이라면 소설 「사씨남정기」의 작자로 알려 있다.
「오주연문(五洲衍文)」에도
“「남정기」는 북헌이 인현왕후 민씨 손위(巽位) 때에 숙묘(肅廟)의 성심(聖心)을 돌리기 위하여 지었다.”
라고 하였다.
「남정기」의 골자는 이러하다.
“명나라 가정(嘉靖)년간이다. 순천부(順天府) 유한림(劉翰林)의 정실 사씨는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이 원비(圓備)한 사람이었지만 출가한 지 9년 동안에 자녀가 없어서 한림을 권하여 첩 교씨(喬氏)를 맞아 성례케 하였다. 교첩은 흉음(凶淫)하기 짝이 없는지라 문객(門客)을 사축(私蓄)하고 정실을 讒毁하니 집을 쫓겨나게 된 사씨는 남으로 남으로 끝없는 길을 걸어 유랑하다가 회사정(懷沙亭) 황릉묘(黃陵廟)를 지나 아황(娥皇) 여영(女英)을 만나 보아 괴로운 앞길에 일조의 광명을 보는 듯하였다. 그러자 교녀의 모든 흉계가 일시에 탄로되어 한림은 교첩과 그 문객을 일시에 집어치우고 옛사랑 사씨를 찾아다가 다시 정실을 삼고 한림은 승상으로 영진하여 문호가 번락(繁樂)하였다.”
이 내용으로 보아 그러한 목적소설인지 모른다. 그러나 원래는 그의 종조인 서포 김만중의 작품인 것을 북헌이 한문소설로 번역하였을 뿐이다.
그의 「잡설(雜說)」에
“서포가 많이 속언(俗諺)으로써 소설을 지었는데 그중 「남정기」란 것은 등한지비(等閑之比)가 아니매 진작 문학으로써 번(翻)하였노라. 패관소설이 황탄(荒誕)치 않으면 부미(浮靡)3)한 것이지만 가히 민이 (民彝)4)를 돈(敦)하고 세교(世敎)를 보(補)할 자는 오직 「남정기」뿐일까.”
하였다.
3)浮靡:부박하고 화려함.
4)민이(民彝): 민간의 법
민비의 폐출은 숙종 15년인데 서포 53세, 북헌 20세 적이요, 민(閔)의 복위는 숙종 20년 즉 서포 몰후 2년이요 북헌 25세 적이니 「남정기」의 저작과 번역이 이 사이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대개 북헌은 또 정송강(鄭松江)의 후예 정중녀(鄭重汝)의 권고에 의하여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한시로 번역하였다(「북헌집」권 4).
그는 원래 한문 한시의 저술이 민섬(敏瞻)5)하여 일세에 으뜸이 될 것이로되 낙척불우는 재자(才子)의 운명인 듯하여 시사(詩辭)에 강개한 문자가 왕왕 독자의 장부를 찌르는 바가 있다.
5)민섬(敏瞻):재빠르고 많음.
그는 한역만을 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언시(諺詩)도 지었다.
「수문록(隨聞錄)」이란 책에는 그의 지은 언시 100여 구가 사람을 절도시킬 만한 것이 있다 하였다.
또 그는 「수호전」을
“기변굉박(奇變宏博)한 승작(勝作)이라”
고 평하였다(「북헌잡설」)
이로 보아 그는 연파문학(軟派文學) 내지 조선말로 된 시가 소설까지라도 종래의 완고한 부유(腐儒)들과 동일에 논할 수 없는 탁견을 가졌었다.
북헌은 서포를 충실하게 계승한 문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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