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4.조선-김창협(金昌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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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조선-김창협(金昌協)

耽古樓主 2023. 5. 17.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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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김창협(金昌協)

 

이원조(李源朝)
1909~1955. 평론가호 여천(泉). 경북 안동 생일본 도쿄 호오세이(法政대학 불문과 졸업조선일보 기자 등을 지내면서 문학의 행동 참여를 강조하는 글을 씀광복후 임화 등과 문학가동맹을 조직좌익 쪽에서 활약하다가 월북.
시에 <나의 어머니〉〈오월의 노래등이 있고 논문으로 〈언어와 문학〉〈임화의문학의 논리〉〈시와 고향>등이 있음.

 

선생의 휘는 창협이요 자는 중화(仲和)요 호는 농암(農巖)이니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요 문곡(文谷) 수항(壽恒)의 제2자이며 관은 안동이다. 이만해도 선생의 세덕(世德)이 얼마나 혁석1)한 것은 알 일이지마는 사실 안동 김씨의 문미가 이때처럼 대창(大昌)한 적도 없는데 이제 선생의 전기를 쓰면서 선생의 세덕을 예외로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다른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1) 奕舃:매우 빛남.

 

그것은 선생의 정치적 국량이 어떠했다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이와 같은 세덕을 가지고도 실직으로는 대사성에서 청풍부사(淸風府使)밖에 지내지 못한 것과 또 한 가지는 기환가(綺紈家)2)에 반드시 명유석덕(名儒碩德)이 나지 말라는 법이 없지마는 선생과 같이 종정세가(鐘鼎世家)3)에 태어나서 수연(粹然)한 간세(間世)의 명문가가 되었다는 것도 예가 드문 때문이다.

2) 기환가(綺紈家):덕이 아름다운 집안. 부귀한 집안.

3) 종정(鐘鼎): 종명정식(鐘鳴鼎食). 옛적에 종을 울려 집안 사람들을 모아 솥을 벌여놓고 먹었다는 데서 부귀한 사람의 생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그러므로 선생의 전기를 씀에는 먼저 그 세덕을 상고하는 것이 다른 예와 다른 것으로서 이제 다시 그 일생을 돌아본다면 선생이 효종 신묘 정월초 2일에 과천 명월리 외씨제(外氏第;나씨)에서 나니 어려서부터 낭혜(朗慧)하기 군아(群兒)와 다르고 비로소 입학하매 능히 잠심완미 (潛心玩味)해서 스스로 호학(好學)의 벽(癖)이 있더니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문에 위금(委禽)4)하게 되매 더욱 강도수학(講道修學)해서 과루(科累)에 끌리지 않고 경훈(經訓)에 치력(致力)하는 일편으로 고문사(古文詞)에 힘써 청수연영(淸粹淵永)한 것이 거의 탁연히 성가(成家)하게 되었다.

4) 위금(委禽): 혼례의 납채에 기러기를 드리는 일. 곧 결혼함을 뜻함.

 

그뒤 우암 송시열(「농암집」 중에는 전부 尤齋라고 쓰였음)이 인선왕후(仁宣王后) 인산(因山)에 지부(祗赴)하였으므로 그길에 같이 용문산으로 들어가 여강 신륵사에 이르는 동안 여러 날 동안 서로 강설하고 또 소학 의의를 질문하여 우암의 추장을 받았더니 그뒤 우암이 문곡(文谷)에게 편지를 하고 칭장 가로되

“거의 귤송(橘頌)을 지을 만하다(幾乎作橘頌)”

고 하였으니 귤송이란 나이는 비록 적으나 가히 사장(師長)이 될 수 있다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그 뒤 선생이 32세 때 증광별시 문과 회시에 2등 제5인으로 뽑히고 또 전시에 장원하여서 성균관 전적에 탁용된 뒤 각조(各曹)의 낭관을 역사하고 그동안 대각(臺閣)에 의(擬)하기도 여러 번이었으나 그 아버지 수항이 수상으로 있으므로 매양 피혐청체(避嫌請遞)5)하였는데 그중 처음으로 사헌부 지평을 인피청체(引避請遞)하는 피사(避辭)를 한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다.

5) 피혐청체(避嫌請遞): 한 부자간이나 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에 있게 되면 공정성에 혐의를 받을 수 있으므로 청하여 한 벼슬에 더 오래 머묾.

 

“풍헌이라는 직분은 국가의 기강을 맡아 위로는 칭찬하고 아래로는 고하는 것이라 그 책임은 지극히 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불초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고 더우기 신에게는 불안한 바가 있읍니다. 대각에서 논하는 일이 묘당과 더불어 같지 않은 것이 많은데 더구나 오늘날 신의 아비인 수항이 수상에 있읍니다. 신이 또한 인책하는 말을 더한다면 피차의 논의가 일을 처리하는 데 장애가 될 염려가 있읍니다. 대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금일 본부의 장계로 올린 김중하(金重夏), 김환(金煥) 등의 일이 바야흐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처음에 반대한 일인데 신의 아비가 실로 그 의견에 동의한다면 신은 이 논의에 따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신이 사헌부의 자리에 앉는다면 이것은 더욱 결정하기에 어렵게 될 것입니다.”(편집자 역)

 

이러한 것은 비록 당시의 입조체통(立朝體統)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여기서 청개(淸介)한 선생의 성격적 일면은 넉넉히 추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뒤 홍문관 부교리에 승서(陞敍)되어 심경설(心經說)을 진강(進講)하고 또한 입시(入侍)할 때마다 크게 군덕(君德)을 계옥(啓沃)한 바 있더니 선생이 승정원 우부승지로 있을 때 교리 이징명(李徵明)의 상소에 말이 척리(戚里)6)에 미치고 또 坤聖을 면계(勉戒)하시라는 말이 있어 상의 觸怒한 바 되어 징명의 파직을 명하시매 동료와 더불어 징명을 力救하다가 불극(不克)하고 그 뒤 예조참의, 승문원(承文院) 부제조(副提調)를 역임하였으나 때인즉 黨禍가 일치(日熾)한지라, 피차에 조득모실(朝得暮失)이 무상하므로 선생이 시사(時事)의 일비(日非)함을 보고 스스로 외읍(外邑)을 구해 청풍부사로 출임(出任)하였더니 그 재익년 기사에 그 아버지 수항과 중부(仲父) 수홍(壽興)이 하나는 진도로 하나는 장기로 피축(被逐)되매 관을 버리고 돌아왔다.

6)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

 

그리고 인해 수항이 진도에서 후명(後命)을 받으매 응암(鷹巖) 구거(舊居)로 돌아가 전혀 독서연학(讀書硏學)에 독력하다가 다시 농암에 서실을 짓고 이듬해 농암수옥(農巖樹屋)이라 하며 스스로 호하기를 농암이라고 하니 이것은 전묘간에서 일생을 몰신할 우의(寓意)이었다.

 

그 뒤 갑술에 중전이 복위하시면서 수항의 관작을 복급(復給)하시고 선생에게 호조참의를 제수하셨더니 진정사직(陳情辭職)의 상소를 올렸으니 그 소사(疏辭)가 비창측달해서 가히 귀신을 울릴 만할 뿐 아니라 또 선생의 염관(厭官)하는 결의가 보이므로 약인(略引)하면 다음과 같다.

 

“신은 천지간의 한 죄인이라 불효의 죄가 위로는 하늘에 통한 것이 진실로 오래되었으며 오늘날 더욱 그 속죄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옛날에 붉은 댕기를 맨 일개 여자의 몸으로서도 짧은 글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아비의 화를 벗어나게 하였으며 전횡(田橫)7)의 객들은 골육의 정이 없었음에도 한갓 의기가 서로 감발하여 죽음을 아끼지 않고 지하에 따라갔읍니다.

 

신과 같은 사람은 아비가 재앙을 만나는 날에 나아가서 머리를 부수지 못하고 대궐을 향하여 살아서 물러나기만을 애걸했으며 칼에 엎드려 더불어 죽지 못하였읍니다. 이것은 곧 남자의 몸이 되어서 도리어 연약한 여자에게도 미치지 못한 것이며 부자의 친함으로도 도리어 나그네의 따름만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옛날 제나라 여자는 하늘의 번개를 불러 궁궐을 치게 하였으며 연나라 신하는 통곡하여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게 하였읍니다. 대저 정성이 감동시키는 바가 푸른 하늘에도 오르게 하여 정기가 상서로움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나 지금 신은 궁산(窮山)에 찬적된 몸으로서 숨어서 삶을 기약할 뿐이요 일찌기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읍니다. 지성이면 음양을 감동시킬 수 있어서 다행히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지극히 인자하시고 지극히 명철하지 않으셨다면 신이 비록 늙어 죽어서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아비의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원한을 밝혀서 단서(丹書)8)의 자취를 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이래로 남의 자식이 되어서 불효가 어찌 신과 같이 심한 자가 있었겠읍니까? 신은 더구나 가슴 속에 숨겨진 고통이 있읍니다. 아비께서 조정에 서신 지 40년에 임금님을 섬김에 바야흐로 우국 봉공의 절개가 있었으니 본말을 갖추어 임금의 부르심을 기다리지 않고 진술하였으며 작은 마음을 미루어서 삼가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겸손하고 공손하여 두려워하고 절약하는 것이 한결같았읍니다. 귀신이 인도(人道)를 시기하는 재앙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으나 특히 신의 형제는 한 가지라도 머뭇거림이 없었읍니다. 다행히 서로 과거에 올라 맑고 높은 관직에 차례로 섰고 대부의 열에서 영화로움과 총명을 밝게 받아서 세상에서 주목받는 바가 되었읍니다.

 

신 등은 늘 아버님의 훈계를 받아서 지극히 성한 곳에 나아가도 배반함이 없었는데 끝내 가득찬 재앙이 홀로 신의 아비에게 미치게 하고 신은 겨우 면하게 되니 그 불효가 이보다 큰 것이 없읍니다. 신은 늘 생각이 이에 미치면 미상불 부끄럽고 원통하여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가만히 맹세하되 농부가 되어 세상을 버리고 다시는 사대부의 반열에 서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만일 일시의 요행으로 오랜 뜻을 잊고 문득 다시 갓끈을 매고 당세에 뛰어든다면 이는 장차 인자하고 효성스런 임금님께 중죄를 짓는 것이며 지하에 계신 아비에게 뵐 낯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심히 완고하지만 어찌 이것을 차마 할 수 있겠읍니까?”(편집자 역)

7) 전횡(田橫): 나라 말 한나라 초의 사람으로 제나라 왕 전영(田榮)의 아우이다.

한신이 제왕 광()을 사로잡자 자립하여 제왕이 되어 부하 500여 명과 섬으로 피하여 갔음. 뒤에 고조가 부르자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자 500여 부하도 그 뒤를 따라 전부 순사(殉死)하였음. 고조는 횡의 절개를 높이 찬양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하였음.

8) 단서(丹書):죄를 붉은 글씨로 쓴 형서(刑書), 또는 임금의 조서.

 

이에 우비(優批)있어 가로되

 

“소인의 화가 어느 때는 없었으리오마는 지난 번처럼 참혹하고 독한 적은 없었도다. 그대의 아비는 평일에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에 신명의 바탕이 있었으니 포악한 마음을 품고 한을 머금은 적은 없었노라. 물결같이 고요한 언사는 과인의 잘못을 깨우치게 했었도다.

아! 천도는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니 그 이치는 어긋나지 않았노라. 여러 간사한 무리에게 원한을 갚고자 한즉 그대는 추호라도 조정에 대한 불안감을 갖지 마라.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환직을 받으라.” (편집자 역)

하셨을 뿐 아니라 지구(知舊)나 가인(家人) 간에도 조명(朝命)을 면승(勉承)하는 것이 의당하다고 권하였으나 선생은

“내 머리에 다시 사모를 쓰지 않을 것을 자단(自斷)한 지 오래다.”

하며 끝끝내 굴요(屈撓)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예조판서를 탁제(擢除)하시매 또 소사(疏辭)하였던바 불허하시고 연(筵) 중에서 그 형 창집(昌集)에게 특명하시기를 본직과 겸대(兼帶)가 모두 긴중(緊重)하여구광(久曠)할 수 없으니 속히 출사하도록 권면하라시는 하교까지 있었으나 종시 번의치 않고 다음에는 예조판서 겸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제명(除命)하셨으므로 소사(疏辭)하는데 이 소에는 특히 이때까지 여러 번 총소(寵召)를 받았으나 종시 부명(命)하지 않다가 이제 영직(榮職)이라 해서 나아가는 것은 더욱 기만으로 작위를 취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요새는 질병이 더욱 심해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고사하였다.

 

이렇듯 여러 번 영작의 총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부명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아버지의 임화유계(臨禍遺戒)를 지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나, 또 선생의 빙청옥온(氷淸玉溫)한 자질로 관도(官道)에 나서 분주하는 것보다는 산수 간에 묻혀 스스로 강도수학(講道修學)하는 것으로써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길을 찾으려 한 것이니 이러한 선생의 입지(立志)를 엿봄에는 자저(自著) 「동음대(洞陰對)」 1편을 보면 넉넉하므로 다음에 인용하는 바이다.

 

“영가자(永嘉; 선생 자칭・・・ 필자)가 이미 동음산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있음에 문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어 말했다.

‘그대가 고생을 감수하는구나. 그대는 어려서 경사의 재상가에서 자랐고 집안은 누대로 재상을 지낸 명문이었다. 비록 사환(仕宦)의 길을 걷지는 않았으나 몸은 관복을 입는 명예를 누렸었다. 그리고 진실로 고량진미에 배부르고 비단옷을 걸쳤으며 거처에 편안히 하였고 유유자적하는 즐거움과 부귀에 즐거워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하루아침에 띠집에 거처하며 거친 음식을 먹고 처자는 초췌하고 노복들은 굶는 기색이 있으니 이 또한 심한 고통인 것이다. 또 이곳은 깊고 먼 곳이며 사람은 없고 호표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고 곰이 왕래하는 자취가 흔한데 그대가 이곳에 거처하니 나는 가만히 그대를 위하여 근심하노라. 어찌 그대가 또한 원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나는 장차 그대가 오랫동안 이런 곳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없음을 알겠노라.’

 

영가자가 막연히 잠깐 있다가 응대하여 말했다.

‘나그네가 나를 위해 근심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공경과 사의를 표한다. 비록 그러하나 불초한 나는 일찌기 군자의 도와 지명(知命)의 말씀을 들었다. 만물을 변화시키는 데는 하늘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만물을 기르는 데는 땅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하늘은 항상된 변화가 있지 않아서 낳음과 죽임이 있으며 땅은 항상된 기름이 있지 않아서 성함과 쇠함이 있는 것이다. 낳고 죽이는 분법과 성하게 하고 쇠하게 하는 한정이 있어서 대개 명(命)이 존재하는 것이라, 사물은 끝까지 존재할 수 없는 짓이다. 대지 이미 천지에 게시 명을 받고 만물에서 형체를 얻어서 사람이 되었으니 홀로 이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람이 궁하고 영달하며 영화롭고 욕을 받는 것이 어찌 늘 같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진실로 호적의 구분이 있으니 공주와 왕과 경상(卿相)이 있는가 하면 혹 필부로 태어나서 만종의 녹을 누리는 자도 있고 혹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강을 싫어하지 않고 이것으로써 세월을 지낸 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비록 그러하나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능히 더불어 할 수 있는 바이랴!

천지도 또한 그 주고 빼앗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성명의 정을 결정하고 부귀의 이로움을 누리려고 하여 그 구함을 애쓰나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으면 잃을까 근심하며 잃으면 또한 안달하여 근심하고 불끈 성내면서 애석해하니 이들은 모두 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저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빈부와 귀천과 가고 오는 것과 얻고 잃는 것을 밤과 낮이 서로 바뀌는 것과 같이 여겨서 그 사이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안연은 누항에 처했으면서도 그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으며 증자는 거친 옷을 입고 떨어진 신을 끌면서도 노랫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 뜻이 크고 활달한 것이니 어찌 빈천(貧賤)이 멀거나 더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그들이 처하는 바에서도 그러했던 것이다. 백이와 숙제 같은 이는 북해의 바닷가에서 주를 피하여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꺾어 먹었다. 저들은 진실로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로서 임금자리의 존귀함과 부귀의 즐거움이 있었으나 그들이 소유한 바를 버리는 것이 헌신짝 버리는 것과 같았으니 죽을 곤경에 처했음에도 후회하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지난날의 부귀를 돌아 사모하여 그 정을 잊지 못하였다면 어찌 하루라도 이에서 편안했었겠는가? 비록 仁人君子들이 곤궁한 데 처하는 것이 이들과 같았다 해도 어찌 부득이 억지로 힘씀이 있었겠는가?

하늘을 즐기고 천명을 알면 때를 따라서 처함이 순조롭게 되니 여름날에 목이 마름과 겨울날에 갖옷을 입는 것과 같이 각자 알맞은 바가 있는 것이다. 지금 베옷으로 가죽옷의 따뜻한 것에 비견한다면 또한 사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더위에 두꺼운 가죽옷을 바란다면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부귀와 빈천은 진실로 사람들에게 있어 큰 문제이다. 그러나 또한 사시와 차고 더운 것의 변화가 있으니 각각 그에 처하는 데에 어찌 각자에 알맞은 바가 없으리오.

 

대저 가장 높은 것은 의를 가지고 명(命)에 처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명으로 의에 편안한 것이고 가장 낮은 것은 명을 모르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장 도의 높은 단계를 바라기에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대하여서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가장 낮은 자로서 나를 생각한다면 어찌 서로 아는 바가 얕기에 그러한가?

내가 비록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부귀한 집에서 생장하기는 했으나 본래 성품이 담백하여 돌아보건대 부귀한 용모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가세를 자랑하는 데 습관이 되지 못하였다. 지금 이미 불우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그치어 세상사에 사절하고 스스로 깊은 산을 병풍으로 하며 바위 가운데서 감내하고 있다. 궁벽하고 굶주리며 말라서 쇠약해짐에 처함은 곧 내 스스로 구한 바이다. 대저 이미 구한 것을 이어서 원망하고 후회한다면 이것은 어찌 목욕하는 자가 따뜻한 물을 싫어하는 것과 밥짓는 자가 뜨거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다르랴? 내 비록 심히 노둔하지만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한가하게 거할 때 도를 구하는 뜻이 있어서 가만히 소강절 선생이나 요임금을 사모하였으며 흰 들에 고요히 앉아서 그들을 배우기를 원한 것이 이미 오래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진실로 유심(幽深)하고 청광(淸曠)함을 즐거워하여 숨어서 수신(修身)하고 노닐며 휴식할 만하다. 이미 울타리 쳐진 집을 짓고 6예(六藝)의 서적을 가득히 채우고 새벽과 밤에는 풍월을 읊으면서 성인의 유지를 구하고 있다. 그 한가한 때를 타서 문득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어 성정(性情)을 노래부른다. 권태함에 이르면 또 높은 곳에 오르고 깊은 곳에 임해서 물의 흐름에 쉼이 없음과 구름이 변화함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들의 왕래함을 보면서 그 뜻을 고르고 있다. 이 또한 즐길 만한 것이요 죽음을 잊을 만하니 어찌 불안함이 있겠는가?

호표와 맹수의 공포와 같은 것이 간혹 있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이보다 심히 두려운 것이 많다. 이것으로써 나의 근심을 삼으니 또한 끝이 아니겠는가?’

나그네가 그렇다 하면서 가버리더라.”(편집자 역)

 

이것은 물론 선생의 자문자답으로 선생의 지의(志意)를 기탁한 것이다. 그러니 본문의 초두에 서술한 선생의 가세로나 이 「동음대」를 본다면 비록 중간에 기사년의 참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다시 설원한 날에 그다지 융숭한 천총(天寵)을 받았으니 만약 다시 한번 입조당로(立朝當路)하였던들 선생의 작위가 공경(公卿)에 이를 것은 호말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종시 환로에 나서지 않고 유원청광(幽遠淸曠)한 산림에 묻혀 안빈낙도로 일생을 마치면서 문생과 더불어 일야(日夜)로 도의를 강마(講磨)하고 특히 고문에 치력(致力)해 멀리 한구(韓歐)의 진수에 핍박하여 아동(我東)의 고문정종(古文正宗)에 억연(嶷然)10)한 일맥을 이루었으니 가만히 생각건대 기사 참변이 선생에게 있어서는 철천의 통한일지 모르나 만약 그 일로 말미암아 선생이 스스로 기환(綺紈)을 버리고 포갈(布褐)을 즐겨 관도에 염(念)을 끊고 산간에 병거(屛居)함으로 이렇듯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라면 기사년 일은 선생의 사통(私痛)보다 사문(斯文)에 공익됨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할까?

9) 한구(韓歐): 한유와 구양수.

10) 嶷然: 뛰어나게 높이 빼어남.

 

이만 서술에서 우러러 생각해 보더라도 선생의 개결청직(介潔淸直)한 자질과 옹용단아(雍容端雅)한 태도가 가히 방불하나 선생의 문장이 또한 유완처절(幽婉悽絶)해서 그 글을 읽으면 족히 선생의 경해(警咳)에 접하는11) 듯한 감이 없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에 보면 선생의 문장을 아동(我東) 제가에 비겨 평한 것이 있으니 실로 긍경12)에 당하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1) 경해(警咳)에 접함: 웃사람을 만나 뵘의 뜻. 경해는 웃사람의 기침 소리나 말씀을 일컫는 말.

12) 肯綮: 긍은 뼈에 붙은 고기, 경은 힘줄이 얽힌 곳. 옛날 요리의 명수가 소를 각뜰 때 칼이 긍경에 잘 맞아서 고기살을 잘 베어 낼 수 있었다는 고사가 있음. 사물의 핵심이나 일의 관건이 되는 부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간역(簡易)의 문장은 웅건하고 깊어서 기이한 생각이 종을 만드는 것과 같고 글의 무게는 다섯 석의 활 무게와 같아서 모든 힘을 분발하더라도 들어 올릴 만한 힘이 있는 자가 드물다. 계곡의 문장은 얕으면서 멀리 굽이돌아 다시 보면 더욱 심원하여 강하(江河)를 돌아가는데 천리가 한결같이 푸르고 고기와 용이 배의 앞뒤에서 따르는 것과 같다. 택당(이식)의 문장은 고산 심곡에서 돌의 기가 종유(鐘乳)로 맺어진 것과 같으며 산림의 나무들이 빽빽하여 조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농암의 문장은 복건도복을 입고서 산림 사이에서 가볍게 배회하는데 용모가 가지런하고 사양하는 말이 있으며 말 중에 이치의 진실함이 있는 것이 선비의 기상이 있는 것과 같다.”(편집자 역)

 

이래 제가가 모두 선생의 문장을 간역와 계곡(谿谷)과 택당(澤堂)에 비길 뿐 아니라 근고 몇백 년간의 유일인이라고 한 것이 비일비재이다. 그리고 세칭 ‘농연시문(農淵詩文)’이라고 하는 것은 선생의 문과 그 아우 삼연(三淵) 창흡(昌翕)의 시를 아울러 치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이 이렇듯 단아순정(端雅純正)한 것은 비록 단간영초(短簡零艸)일지라도 일찌기 소홀히 한 바가 없으므로 가위 편편이 주옥인데 이렇듯 정금미옥(精金美玉)을 만들기 때문에 노심각골(勞心刻骨)해서 거의 생병(生病)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선생이 숙종 무자 4월 11일에 삼주정사(三洲精舍)에서 계수족(啓手足)13)하니 조야가 함께 애도하며 문인의 지복자(持服者)가 67인이었다.

13) 啟手足: 손발을 벌린다는 뜻으로 죽는 일을 말함. 증자가 그의 임종 때에 내 손발을 벌려 달라고 그의 제자에게 말한 데서 나옴. 사람이 상처 없이 죽은 것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기도 함.

 

그뒤 계사년에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하고 문집 30여 권이 행세(行世)하며 그 뒤 기사에 賜諡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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