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90.조선-박지원(朴趾源) 본문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세 및 유년시대
연암(燕巖)의 성은 박이요, 명은 지원이요, 자는 중미(仲美)요, 호는 연암이요, 관(貫)은 반남(潘南)이니 영조 13년 정사에 경성 안국방(安國坊)에서 탄생하였다.
반남 박씨는 조선의 대족(大族)이요, 공의 가세(家世)는 박씨 성 중에도 더욱 명문 거족이다. 문강공(文康公) 소(紹; 冶川)의 8세손이요, 충익공(忠翼公) 동량(東亮;梧窓)의 6세손이요, 장간공(章簡公) 필균(弼均)의 손이요, 그 외 공시1)의 친(親)에도 명공 거경(名公巨卿)이 많이 출생하여 타성씨에 드물게 보는 바이다.
1)功緦 : 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 또는 소공친(小功親)과 시마친(緦麻親). 조금 먼 친척
연암이 이러한 명문에 출생하였으나 어렸을 때에 그의 부 사유(師愈)가 일찍 죽으므로 그의 조부 장간공의 무육(撫育)을 받아 자라다가 14세 되던 해에 장간공의 상을 당하여 학업을 닦지 못하였다.
공이 16세 되던 해에 전주 이보천(李輔天)의 여(女)에 결혼하여 부가(婦家)에 이어 머무르더니 부숙(婦叔)인 영목당(榮木堂)이 공의 수학치 아니함을 알고 경계하여 가로되
“사대부의 자손으로 어찌 배우지 아니하는 자가 있겠느냐.”
하고 즉시 책상 위에 놓인 「신릉군전(信陵君傳)」을 펴놓고 구두(句讀)를 가르쳐 주었다.
공이 한번 듣고 침실에 물러와서 논설 수백 편을 지어 드리니 부숙이 크게 놀라 공이 절세의 才藝가 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다.
공이 이로부터 발분 역학(發憤力學)하여 경사제자(經史諸子)의 서(書)와 병(兵), 농(農), 전(錢), 곡(穀), 갑(甲), 병(兵) 일체 경세(一切經世)의 학문을 연구치 아니함이 없고 천문과 지리에 깊은 연구를 더하여 당시에 견식이 탁월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으로 더불어 태서(泰西)의 지리학을 연역(演釋)하여 지구가 일전(一轉)하면 하루가 되는 법칙을 안출(按出)하였다. 그때에 문학으로 일세를 울리는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제인들이 다 공을 경모하여 사우(師友)를 삼아 서로 창수(唱酬)가 많았었다.
2. 연암의 곤돈(困頓)
▶곤돈(困頓):곤궁함과 좌절함.
공은 상모(狀貌)가 기걸(奇傑)하고 의기가 헌앙(軒昂)하여 안공일세(眼空一世)3)의 기개가 있었다.
3)안공일세(眼空一世):세상사람을 업신여김. 지나치게 교만을 부림..
그러나 녹록(碌碌)4)히 시문(時文)을 공부하여 거자(擧子)의 업(業)을 짓지 아니하고 매양 술이 취하고 흥이 날 때는 의논이 풍생(風生)하여 당세의 이폐(利弊)를 통론(痛論)하고 위학(僞學)의 세(世)를 속이는 것과 권신의 국(國)을 병들게 하는 것을 매도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으니 이로 인하여 공이 세인의 배척을 당하여 오랫동안 서용(敍用)치 못하게 되었다.
4)녹록(碌碌):주관이 없이 추종하는 모양.
그때는 정조의 초년(初年)이라, 홍국영(洪國榮)이 총행(寵幸)을 믿고 위복(威福)5)을 천작(檀作)하여 그 기세를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5)위복(威福):위력으로 복종시키고 은혜를 베풀어 심복하게 함.
국영이 공을 증오하여 화망(禍網)에 몰아넣으려 하였다. 공의 우인(友人) 백영숙(白永叔)이 그 위기를 알고 가만히 공에게 고하니 공이 국문(國門) 나서 개성에 피하여 숨어 있다가 후에 김천 연암협(燕巖峽)에 가서 잠복하여 있어 화를 면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더욱 곤고기아(困苦饑餓)하여 생활의 방도가 없었다. 평일 공과 계분(契分)이 깊은 유언호(兪彦鎬)가 당시 외임(外任)으로 있었는데 공이 빈궁한 말을 듣고 탄식하여 가로되 어찌 우리 중미(仲美 ; 연암의 자)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료 하고 이에 개성 유수를 구하여 공을 고호(顧護)하니 대개 공이 거하는 연암협이 개성과 거리가 가까와서 왕래가 편리함을 취한 것이다.
3. 연암의 유력 (遊歷)
정조 4년 경자에 공의 삼종형(三從兄)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사명을 받들고 청국(淸國) 열하(熱河)에 들어갈새 공을 청하여 수원(隨員)으로 같이 가기를 권하거늘 공이 무연(憮然)히 허락하였다. 대개 명원이 공과 동행을 종용한 것은 공의 탁월한 견식과 유창한 문장이 아니면 능히 임기응변하기가 어려움을 간파한 것이요, 공이 허락한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남유강회(南遊江淮)와 같이 장관(壯觀)할 뜻이 있는 까닭이다.
공이 사행(使行)을 따라 요동, 산해관(山海關), 북경을 지나 열하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보고 듣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여 무릇 산천, 도리(道理), 기후, 풍속, 제도, 문물 등을 일일이 비재(備載)하였고, 열하에서는 홍려사 소경(少卿) 조광련(趙光連)과 포의(布衣) 왕민호 등으로 더불어 동서고금의 학설,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종교 등을 상밀(詳密)히 토론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열하일기」 수십 권이 편집된 재료이다. 여행가이든지 군략가이든지 정치가이든지 고증가이든지 누구나 다 이 일기 1부를 비치하지 아니할 수 없다.
4. 연암의 출사(出仕) 및 퇴로(退老)
공이 열하로부터 귀국한 후 2년(즉 정조 6년)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의 음관(蔭官)으로 하료(下僚)에 곤돈하다가 안의현감(安義縣監)의 외임으로 나갔었다. 공이 도임한 후에 치민(民)하기를 청백(淸白)히 하고 여러 번 사수(死囚)를 다스리매 사람들이 그 명찰(明察)함을 칭도(稱道)치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이보다 먼저 정조께서 공이 지은 「열하일기」 수십 권을 보시고 그 해학감분(諧謔感憤)한 문자를 불쾌히 여기셨더니 이때에 이르러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남공철(南公轍)의 문(文)을 보시고 그 체(體)의 기이한 것을 병들게 여기시어 이서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및 남공철 제신을 불러 벌문회(罰文會)를 베풀고 贖錢 징수하여 북청부사 성개(成槩;士執)를 전송케 하니 대개 성개의 문이 순정(醇正)한 고로 이런 명령이 있었다.
정조께서 이어 남공철에게 이르시되
“근일(近日) 문풍(文風)이 이렇게 변한 것은 그 근본이 다 그의 師 박지원의 죄라.”
하시고 남공철에게 명하시어 공에게 馳書하여 1부의 순정한 문을 지어 바쳐 그 「열하일기」 지은 죄를 속하게 하라 하셨다.
馳書: 빨리 글을 보냄.
공이 남공철의 서를 보고 간곡히 사(謝)하였더니 그 후에 공이 면천군수로 이직(移職)하였을 때에 마침 정조께서 중외(中外)에 명령하여 농서를 구하시니, 공이 이왕에 지었던 「과농소초(課農小抄)」 일편을 써 바치니 정조께서 그 의논이 정절명확(精切明確)한 것을 보시고 크게 칭상(稱賞)하시고 장차 등용하려 하셨더니 얼마 아니 되어 정조께서 승하하셨다.
공이 그 후에 양양(襄陽)부사로 승진하였으나 늙음으로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집에서 병몰하니 연(年)이 69세라, 공이 병극(病劇)할 때에 박제가가 문후(問候)하고 현연7)히 울어 가로되
“오사(吾師)여, 어찌 소자를 버리고자 하시나뇨.”
하니 그의 평일 依仰하던 바를 가히 알 것이다.
7)泫然:눈물이 줄줄 흐르는 모양.
그후에 공에게 시(諡)를 문도(文度)라 증하고 공의 손(孫) 규수(珪壽)는 관이 우의정에 이르고 선수(瓊壽)는 공조판서에 이르니 이는 공이 받지 못한 복록(福祿)을 그의 자손이 받은 것이라 할지로다.
5. 연암의 신이상(新理想)
영·정 양조의 시대는 역세(歷世)의 고식정치(姑息政治)를 이어 폐해가 백출하여 도저히 수습지 못할 경우에 이르고 조정에서는 사색의 당쟁이 격렬하여 국가의 이해(利害)는 불고(不顧)하고 다만 사당(私黨)을 부식(扶植)하기로 목적하여 서로 구수(仇讐)가 되어 백세난의(百世難醫)의 고질이 되었고, 겸하여 유교의 위학자(僞學者)는 정권을 가차(假借)하여 인(人)의 정신과 언론을 箝制8)하여 부패함이 극도에 달하여 回蘇할 가망이 없게 되었었다.
8) 箝制:남을 억제하여 구속함.
이 시대에 출생한 박연암은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만일 용용상상(庸庸常常)하게 그 사회에 순응하였다 하면 그 일생에 존관후록(尊官厚祿)을 취하기는 어렵지 아니한 일이다.
9) 용용상상(庸庸常常):평범하고 일상적임.
1
그러나 공은 견식이 탁월하고 안광이 회홍(恢弘)10)하여 현시의 불만을 느끼는 동시에 미래의 행복을 열기 위하여 항상 신생기(新生氣)와 신이상을 흡입하였다.
10) 회홍(恢弘):크고 넓음.
그러므로 평생에 감가불우(坎軻不遇)11)하여 신명이 위태하기를 여러 번이었었다. 뿐만 아니라 공의 친손인 환재(桓齋) 규수씨가 우상(右相)으로 있으면서도 시대에 기휘(忌諱)가 되어 공의 저서한 것을 감히 출판치 못하였었다.
11) 감가불우(坎軻不遇): 때를 만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
이제 공의 이상을 發來한 서(書)를 아래에 소개코자 하노라.
1) 「호질문」 일절
“그래도 아직 잔학을 부린 것이 부족하여 보드라운 털을 팔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붓을 만들되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다 담갔다가 가로 세로 멋대로 치고 찌르되, 그 굽음은 세모창 같고, 날카로움은 작은 칼 같고, 열셈은 긴 칼 같고, 갈래짐은 가시창 같고, 곧음은 살 같고, 팽팽하기는 활 같아서, 이 병장기가 한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들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니,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너희들보다 더할 자 그 누가 있겠느냐.”(편집자 역)
이는 조선의 사세도명(斯世盜名)하는 위학자가 실천궁행을 힘쓰지 아니하고 다만 필설을 희롱하여 무단히 인(人)을 공척(功斥)하는 것을 譏議한 것이다.
2) 「홍범우의서(洪範雨翼序)」 일절
“홍범은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읽기 어렵게 만든 것은 세상의 유림들이 어지럽힌 것이다. 대저 오행(五行)이란 것은 하늘이 부여하고 땅이 기르는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사람이 얻어서 자질을 삼는다. 대우(大禹)의 제차(第次)와 무왕(武王)과 기자(箕子)의 문답에 그 일은 덕을 바로 해서 이용후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 이용후생이란 중화(中和)의 기름의 공에서 나오지 아니하느냐. 한나라의 유림들은 이 기쁜 일과 재앙을 깊게 믿고 그 거짓됨을 즐기고 음양복서(陰陽卜筮)를 배우고 따르니 이는 성력(星曆)과 참위(讖緯)12)의 책으로 피하는 것이다.
12) 讖緯:미래의 일을 예언한 책이나 말씀.
삼성(三聖)의 가르침을 따라 대상(大相)이 이그러지고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설(說)에 이르름이 그 극단인바, 상생은 서로 자모(子母)를 가를 수 있는 게 아니요 서로 힘을 합쳐 생기는 것이다.”(편집자 역)
이는 동양 인사(東洋人士)의 참위(讖緯)를 혹신(惑信)하는 자를 일필로 타파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리지읍(百里之邑)13)에서 300에 60은 고산준령이니, 열에 일곱, 여덟은 이름은 비록 백 리이나 그 실은 평지라면 불과 30리이다. 백성의 탐내는 바는 저 신14) 같이 넓고 큰 곳이니, 사면을 헤아린다면 가히 수배의 땅을 얻을 수 있다. 금과 은과 동과 철이 왕왕 나오니 만일 이를 캐는 법이 있고 제련기술이 있다면 가히 천하에 갑부가 되리라.” (편집자 역)
13) 백리지읍(百里之邑):백 리 안의 마을.
14) 신 : 지명. 이윤(伊尹)이 농사 지은 곳.
이는 공의 부국책의 일단이니 그때에 만일 공의 말을 채용하였더면 조선의 부(富)가 과연 어떠할고.
3) 「과농소초(課農小抄)」
“① 수시(授時)
② 점후(占候)
③ 전제(田制)
④ 농기(農器)
⑤ 경간(耕墾)
⑥ 분양(糞壤)
⑦ 수리(水利)
⑧ 택종(擇種)
⑨ 파곡(播穀)
⑩ 서치(鋤治)
⑪ 비황잡법(備煌雜法)
⑫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15)”
15)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사람의 밭 소유를 제한하는 것.
이는 공의 농업정책이다. 전편이 262페이지의 대저작인데 다 명확절실하여 농가의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그 법칙을 여행(勵行)하였으면 국리민복에 영향 다대한 것은 언어로 형용치 못할 것이다. 하물며 〈한민명전의>는 소유권에 제한을 붙여서 부호 겸병의 폐를 막은 것이니 실로 천고의 탁견이라 하겠다.
4) 「왕새론(王璽論)」 일절
“옛날에는 나라를 전하는 것이 도였는데 오늘엔 보물이라. 또 말하기를 오호라! 천하 대사(大事)를 전하는 데 어찌 옥새 하나로 믿음을 삼을 것인가.
도장을 간수하는 관리를 승상과 위관처럼 받들 뿐이다. 또 말하기를 그것을 얻은 자가 본래 옥새로 말미암지 않고 흥한 자이면 천하를 상서로이 하기에는 족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명나라가 망한 날에 항복하여 대를 이었을 때에 그것을 받들어 헌납할 겨를이 없은즉 그 흉하고 쇠함과 상서롭지 못함은 이 물건에 지나침이 없었다.” (편집자 역)
이는 동양 역대 제왕의 옥새에 대한 미신을 타파한 것이니 그 명정(明正) 통쾌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흉금을 爽豁16)케 한다.
16) 상활(爽豁):상쾌하고 활달함.
5) 「허생전(許生傳)」
이는 연암이 허생을 가탁하여 이상적 상업을 경륜도 하여 보고 이상적 국가를 건설도 하여 보고 이상적 군략도 계획하여 당시에 공언장담으로 대의를 말하고 한 가지 일도 성립치 못하는 자들을 비소(非笑)한 것이니 해학 한가운데에 묘리를 간파하기에 족하다.
6) 양반전」
이는 불농불상(不農不商)하고 조선(祖先)의 백골을 팔아 소민(小民)을 침어(侵漁)하는 양반의 폐해를 통론(痛論)한 것이다.
7) 「의서얼소통소」
이조 300년래로 서얼을 廢錮하여 큰 폐막이 된 것을 연암이 「소통소」를 의작(擬作)하여 당국의 청취하기를 바란 것인데 그 의논이 慷慨激切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감탄함을 이기지 못하게 하였다.
6. 연암의 신문장(新文章)
연암의 문장은 사마천과 한유(韓愈)의 진수를 득하였고 만래(晚來)에는 백가(百家)에 침음17)하여 천태만상을 마음대로 묘숙(墓宿)하여 능히 평(平)하고 능히 험(險)하고 능히 강(剛)하고 능히 유(柔)하고 혹은 전아(典雅)하고 혹은 회해하여 심상한 이어속담(俚語俗談)이라도 그의 붓끝을 한번 지나면 기려(綺麗)한 문장이 되니 실로 조선 5천 년에 처음 난 대문호이다. 아래에 그 문장의 일절을 소개하노라.
17) 침음(沈淫): 차차 젖어 들어감.
1) 「답경지서(答京之書)」
“족하(足下)에게. 태사공(太史公)을 읽었는데 그 책을 읽었지만 마음으로 읽지 못하였다.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는 장면을 보니 가히 사마천의 마음을 얻음이다. 앞으로 다리를 반쯤 꿇고 뒤로 다리를 잠깐 들고 손가락을 두 갈래로 벌리며 팔은 가만히 있는데 나비가 날아갈까 저어함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어 실없이 웃음을 웃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니 이는 사마천의 글 짓던 때의 마음이다.”(편집자 역)
이는 문장의 상물여화(像物如畫)18)한 구절이다.
18) 상물여화(像物如畫):그림과 같이 자세함.
2) 「답모서(答謀書)」
“바라건대, 내 일찌기 산에 오르고 오르면서 그 마을을 굽어보니 그 사람들과 물건들이 마치 따오기가 내달리는 것 같은지라.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꿈틀거리는 것 같고 개미둑을 기는 개미와 같은지라. 가히 능히 한번 불어 날릴 만하다. 다시 읍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하니 절벽을 휘어잡고 암석을 돌아 푸른 나무의 덩굴을 잡고 이미 꼭대기에 올라 스스로 높고 큰 사람이라 즐거워하니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과 인연함이나 어찌 다를 게 있겠는가.” (편집자 역)
이는 문장이 일탕유창(逸宕流暢)19)한 구절이다.
19) 일탕유창(逸若流暢): 빼어나게 거침이 없이 매끄러움.
3) 「열녀박씨전(列女朴氏傳)」
“대저 사람의 혈기란 음양에 뿌리를 박고 정욕은 혈기 속에 뭉쳐지는 것이고 생각은 외로운 데서 생기게 되고 슬픔도 사색함에서 비롯된다.
과부는 홀로 생을 보내는 것이므로, 그 상심과 비수가 누구보다도 쓰라린 것이니라.
젊은 혈기가 시시로 왕성할 때 어찌 과부라고 해서 정욕인들 없겠는가. 가물가물 심짓불은 외로운 그림자를 슬퍼하고 홀로 새는 긴 밤은 어이나 더디 샐까.
게다가 처마 밑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창밖의 달빛이 밝게 흐르고 지는 잎 우수수 뜰 앞에 속삭이고 짝 잃은 외기러기 중천(中天)에서 울어댈 제 멀리 닭의 우는 소리 들릴락 말락, 어린 종년 쌔근쌔근 코고는 소리에 그리운 님 못 잊어 잠 못 이룬 이 한밤. 남 모르는 괴로운 마음 누구에게 호소하리.” (편집자 역)
이는 문장의 곡진인정(曲盡人情)한 구절이다.
4) 「명론(名論)」
“천하는 큰 것이 큰 그릇과 같다. 어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이른바 이름이라.
그런즉 무엇이 이름을 이끌어 내는가, 즉 욕망이라.
무엇이 그 욕망을 기르는가, 부끄러움이라.
만물이 바뀌고 흩어져서 서로 속하지 않게 하는 것은 이름이 남기 때문이다. 오륜의 뒤바뀌고 어그러짐은 친할 수 없게 하니 이름으로 그것들을 관계지은 다음에야 저 큰 그릇이 그 능히 실하고 완전하게 갖추어져 기울어지거나 전복될 걱정이 없어진다.
천하의 작록(爵祿)은 가히 두루 상 주지 못하니 선하면 군자가 가히 이름을 권할 것이요,
천하의 형벌은 악한 자에게 두루 미치지 못하나, 소인이 가히 이름을 부끄러워하느니라.” (편집자 역)
이는 문장의 전아엄정(典雅嚴正)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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