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眞寶(고문진보)

《고문진보》 해제

구글서생 2024. 4. 20. 18:42



조선 刊 《詳說古文眞寶大全》에 관하여

 


1. 들어가는 말

 

《古文眞寶》는 '古文의 진짜 보배'라는 뜻이다. 이 책은 古詩와 古文의 교과서로서 조선시대에 무수히 간행되었으며 가장 널리 읽혔던 중국의 詩文選集이다.
*成宗朝(1470~1494)에 첫 活字本이 나온 이래로 韓末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刻本이 나왔다.

중국에서는 宋代에 歐陽修·蘇軾 등의 大家에 힘입어 古文運動이 성공을 거둔 뒤 元· 明代에 이 《고문진보》가 가장 성행하여 여러 가지 판본이 나왔다.

그러나 淸대에 이르러서는 桐城派의 古文이 주류를 이루고 姚鼐(1731~1815)의 《古文辭類纂》이 규범으로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고문진보》는 차츰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康熙年間(1662~1722)에 나온 《古文觀止》도 選文의 기준이 훨씬 분명하여 《고문진보》의 유행을 누르는 데 한몫을 하였을 것이며, 明 馮惟訥(1550 전후)의 《古詩紀》와 淸 沈德潛(1673~1769)의 《古詩源》 같은 빼어난 古詩選集의 출현도 《고문진보》 前集의 빛을 잃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계속 《고문진보》가 널리 읽혀, 일본에서도 여러 판본이 간행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간행되어 우리나라에 널리 읽힌 《상설고문진보대전》 판본은 빼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문진보》의 일반적인 성격을 검토해 보고, 조선시대에 간행되었던 《상설고문진보대전》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들과 비교할 때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를 밝혀 보려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간행된 眞德秀(1178~1235)의 《文章正宗》, 謝枋得(1226-1289)의 《文章軌範》등의 古文選集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검토해 보려 한다.

 

 

2. 《고문진보》의 편찬과 그 성격

 

明나라 弘治 15년(1502) 겨울에 靑藜齋가 쓴 〈重刊古文眞寶跋〉에는 이 책을 “永陽( 江蘇省 徐州府)의 黃堅이 편찬했다.”라고 하였고, 조선 刊本에도 편자를 황견이라고 한다. 황견이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에 南宋 말엽의 謝枋得과 文天祥(1236-1282)의 글이 실려 있으니, 혹 이 글들이 후세 사람에 의하여 보충된 것일는지도 모르나, 그가 宋末 元初의 사람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고문진보》는 판본을 막론하고 모두 후세 사람의 손에 의하여 개편을 거쳤다고 생각되므로 후인이 뒤에 골라 넣은 글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고문진보》에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모두 《前集》과 《後集》으로 크게 나뉘어 있고 《前集》에는 주로 古詩, 《후집》에는 古文이 모아져 있다.

古詩는 古風 또는 古體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唐 이후 성행한 律詩와 絶句로 대표되는 近體詩에 대가 되는 호칭이다. 그런데 근체시를 제외한 옛날의 시 중에서도 《詩經》과 《초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시라고 부름이 보통이다. 고시의 특징은 그 체재가 근체시에 비하여 매우 자유로운 것으로, 絶句에서 강조되는 起承轉結의 구법이나 율시와 같은 聯의 구성이나 對句의 법칙도 없고, 심지어 句數나 한 구의 字數에도 일정한 규정이 없고 押韻에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따라서 고시에는 근체시에 매우 가까운 형식의 것이 있고, 자유형이라 할 수 있는 것까지도 있다. 《고문진보》 前集에는 漢初에서 宋末에 이르는 시대에 지어진 고시들이 실려 있다. 그 중에도 李白·杜甫·蘇軾·韓愈·陶淵明의 작품이 수십 수에서 10여 수에 이르는 분량으로 두드러지게 많이 실려 있다.

古文이란 六朝시대에 성행하였던 騈儷文이 아닌 산문을 가리킨다. 변려문은 騈文·騈體·四六文 등으로도 불리는데, 全篇이 네 자 또는 여섯 자의 句를 爲主로 對句를 이룬 글이며, 또 그 구절은 각 글자의 음의 高低까지도 고려되어 배열된 것이다. 이런 형식상의 구속이 없이 자유로이 쓴 글이 고문이다.

따라서 고문에는 크게 볼 때 秦漢代 이전의 고문이 있고, 韓愈와 柳宗元이 古文運動을 일으켰던 中唐 이후의 고문이 있다. 《고문진보》 後集에는 漢에서 宋에 이르는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다만 한유·유종원 등 唐 以前 작가의 글은 몇 篇 되지 않으니 여기에는 唐宋의 고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겠다.

明나라 弘治 刊本의 靑藜齎의 跋文에는
“《고문진보》 20권(前·後集 各 10卷)은 七國 이래의 名家의 작품 都合 27體 312편을 싣고 있는데, 모두가 精選된 것이다.”*
*“永陽(屬徐州府) 黃堅氏(徐州 麟峰人) 所集古文眞寶二十卷(指眞寶 前後集), 載七國而下諸名家之作, 凡二十有七體, 三百十有二篇, 蓋精選也.”
라고 하였고, 그 注에
“《前集》에 245편이 있고 《後集》에 67편이 있으며, 합해서 312편이다. 《弘治本》의 《전집》은 《魁本》과 달라서 10體로 되어 있으며, 《후집》은 《괴본》과 완전히 같은 17체이다.”*
*“前集有二百四十五篇, 後集有六十七篇也, 合三百十二篇. 弘治本前集, 與魁本有異, 已有十體, 後集與魁本全同, 而十七體也.”
라고 하였다.

《魁本》이란 元나라 至正 26년(1366)에 林以正이 刪定·註釋하여 간행한 《魁本大字諸儒箋解古文眞寶》로 뒤에 일본에 전해져 여러 번 飜刻되매 중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행하였던 판본이다. 서울대 도서관에는 《善本大字諸儒箋解古文眞寶》의 零本 1冊이 있는데, 같은 판본으로 여겨지니 《괴본》을 간혹 《善本》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듯하다.

이밖에도 明 《萬曆重刻本》(張天啓 釋文)*, 明 萬曆 戊申 刊 《古文大全》(葉向高 注釋), 明刊 《評林注釋古文大全》淸 《新台閣校正注釋補遺古文大全》(張瑞圖 校釋등의 다른 판본이 있는데모두 체재와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萬曆重刻本에는 明宗序文이 있고, 帝命으로 35을 보충하여 萬曆11(1583)에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말 勅撰인지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형식에 있어서 이들보다 더욱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조선 刊 《詳說古文眞寶大全》이다. 앞머리에 前進士 宋伯貞 音釋, 後學 京兆 劉剡 校正이라 쓰고 있다. 《전집》은 모두 12권에 243首의 작품이 勸學文·五言古風短篇·五言古風長篇·七言古風短篇·七言古風長篇·長短句·歌類·行類·吟類·引類·曲類·辭의 12類로 분류되어 차례대로 실려 있다.

《후집》은 대체로 부정확하기는 하나 연대순으로 13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는 《전집》의 성질은 형식과 내용이 다른 판본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후집》은 다른 판본과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임을 알려준다.
《弘治本》이나 《魁本》 모두 《후집》은 10권이나 글을 辭·賦·說·解·序·記·箴·銘·文·頌·傳·碑·辯·表·原·論·書 등 17체로 나누어 67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조선 간본은 작품 수가 130편이니 분량 면에서 거의 배가된 셈이며, 작품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지 않다.*
*10 끝머리에 ·이 모아져 있으니, 배열에 글의 종류에 대해서도 약간은 의식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이것들을 音釋한 宋伯貞(一作 佑貞)과 교정한 劉剡이란 사람도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문진보》는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던 詩文의 교본이지만 그 選文基準이나 문장의 배열 등에는 전체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고문진보》가 《文選》 같은 다른 시문선집에 비길 때 학술적인 가치가 현저히 낮음을 뜻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淸代로 들어오면서 이 책이 거의 읽히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도 이것일 터이다.

우선 《전집》을 보면 古詩集이면서도 권1에는 순전한 시라고 하기에 어려운 勸學文 8편이 실려 있고, 近體의 시도 여러 편 눈에 띈다. 그리고 시의 句形과 長短에 따라 5·7言의 단편과 장편으로 분류하고 나서, 또 일부는 詩題에 따라 歌·行·吟·引·曲·辭로 분류한 것도 그 방법이 일관되지 못하다. 앞의 5·7언 단편과 장편 가운데는 또 적지 않은 歌·行·吟 등의 작품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 간본의 경우이지만 끝머리의 辭로 元稹(779-831)의 <連昌宮辭>를 놓은 것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後集에 또 辭類가 있음을 생각하면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朝鮮刊本後集의 경우 文體 分類가 되어 있지 않아 이것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을 따름이다.

《후집》에는 《弘治刊本》이나 《魁本》 등이 문장의 분류를 너무나 題名에 의존하여, 記·序·解 등으로 나누고 있으며, 심지어 韓愈(768-824)의 〈原人〉, 〈原道〉로 말미암아 原類까지 생김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韻文이라 할 수 있는 類類·賦類가 앞에 붙어 있음도 고문선집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 간본은 더욱이 맨 앞머리에 《離騷經》까지 붙여 놓았고, 더 많은 名文을 뽑다 보니 騈儷體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더 크게 볼 때 《전집》의 고시와 《후집》의 고문을 한곳에 몰아놓고 《고문진보》라 부르고 있음도 문제이다. 고시와 고문이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으나,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문학사의 줄기를 타고 발전한 시와 산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술상의 瑕疵에도 불구하고 《고문진보》가 존중되며 널리 읽힌 것은 性理學의 성행에 따른 道學的인 意義가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元 至正 26년(1366) 간본의 鄭本 〈서문>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六藝(六經)를 가르치지 않게 되자, 세상에서 학문의 초보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論語》와 《孟子》를 가르친 다음에야 古文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행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그것으로 글을 배운다'(論語 學而)고 한 뜻을 따른 것이다. 《고문진보》는 책의 첫머리에 학문을 권하는 勸學文이 들어 있고, 끝머리에는 〈出師表〉·〈陳情表〉가 들어 있는데, 어찌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학문을 닦은에 힘쓰도록 하여 그들을 충효로 유도하려 함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편자의 숨겨진 뜻이다."*
*“自六藝不講, 而世之誨小學者, 必以語孟, 而次以古文, 亦餘力學文之意也. 眞寶之編, 首有勸學之作, 終有出師陳情之表, 豈不欲勉之以勤, 而誘之以忠孝乎? 此編者之微意也.”

《고문진보》는 이처럼 학문을 올바로 닦아 충효의 도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는 이외에, 또 고시와 고문을 공부함에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3. 《상설고문진보대전》의 전래와 간행

 

순조 3년(1803) 全北 泰仁 사람인 田以采·朴致維 두 사람이 간행한 《상설고문진보대전》에는 成化 8년(1472) 金宗直(1431~1492)이 쓴 跋文, 萬曆 40년(1612) 梁夢說( 1565~1627)이 쓴 발문과 함께 丙辰年(1796)에 耐翁이 쓴 발문이 붙어 있다. 김종직의 발문에 의하면 《고문진보》는 高麗朝에 직접 사람들이 휴대하여 세 번에 걸쳐 우리나라로 유입되었다.*
*“前後三經人手, 自流入東土.”

그리고 이것을 처음 간행한 사람은 麗末 合浦의 田祿生(號 埜隱, 1318~1357)이었고, 뒤이어 管城에서도 異本이 간행되었다 하였으니,* 여말에는 두 가지 다른 판본의 《고문진보》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金宗直 跋文s: “埜隱田先生, 首刊于合甫, 厥後繼刊于管城, 二本互有增減.”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판본은 世宗 32년(1450)에 명나라 倪謙(1453 전후)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면서 가져왔던 것으로, 이전의 것보다 거기에 실린 詩文이 거의 배가된 것이었다.*
*上曰: “景泰初(1450), 翰林侍講倪先生將今本以遺我東方, 其詩若文, 視舊倍徙, 號爲大全.”

다만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판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명대에 간행되었던 《評林注釋古文大全》 또는 《新增注釋古文大全》과 비슷한 계열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성행한 《상설고문진보대전》의 조선 初刊本은 前監司였던 李恕長이 자기 집에 전해지고 있던 판본을 내어 당시 晉陽監司였던 吳伯昌(1415~1473)에게 간행을 부탁하여, 다시 그는 牧使 權良과 判官 崔榮에게 刻印토록 함으로써 성종 3년(1472)에 나온 것이다.*
*上同: “前監司李相公恕長, 嘗慨干玆, 以傳家一帙囑之晉陽今監司吳相公伯昌, 繼督牧使權公良, 判官崔侯榮, 敬承二相之志力, 調工費, 未朞月訖功, 將見是書之流布三輯, 如菽粟布帛焉

그러나 金宗直이 이러한 기록을 하기 직전에
"그러나 이 책은 세상에 성행하지 못했다. 대체로 鑄字는 인쇄하는 대로 부서져서 판본이 한 번 완성된 뒤에는 마음대로 찍어 낼 수 없었다."*
*上同: “然而此書不能盛行于世, 盖鑄字隨印隨壞, 非如板本一完之後可恣意以印也.”
라고 말하고 있으니, 성종 5년에 刊印한 것은 木版本이고 그 이전에 鑄字本이 나왔음이 분명하다. 또 가람문고에는 세종 32년(1450) 간본이 소장되어 있다. 《端宗實錄》에도 단종 원년(1453)에 활자로 《고문진보》를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 서울大學校圖書館 가람문고에 古文眞寶大典(庚午字) 後集이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때 찍은 것인 듯하다.

뒤의 梁夢說의 발문은 光海君 5년(1612)에 이 책을 간인한 경과를 쓴 것이고 다시 끝머리 耐翁의 발문은 純祖 3년(1803)에 田以采가 이 책을 간행한 의의를 쓴 글이다. 내용은 전이채가 麗末에 《고문진보》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행하였던 田祿生의 후손이어서, 이 책의 간행은 자기 선조의 뜻을 계승한 훌륭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문진보》의 전래와 간행을 설명하기 위하여 순조 때 간행된 판본의 발문을 이용하였지만, 그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여러 번 《고문진보》가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4. 《文章正宗》·《文章軌範》과의 관계

 

《고문진보》의 발문에서 金宗直은 말하기를 “《고문진보》야말로 그 편집에 있어서 眞德秀(1178~1235)의 《文章正宗》의 遺法을 잘 터득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惟眞寶一書不然, 其採輯颇得眞西山正宗之遺法.”
진덕수는 南宋의 性理學者로서 조선시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편집한 《문장정종》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選文한 것이므로, 그 古文選輯의 기준은 조선 학자들에게는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다. 《고문진보》에 앞서 世宗 10년(1428)에 《西山先生眞文忠公文章正宗》이 간행된 이래로 다시 여러 번 그 책이 刊印되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文章正宗》은 <正編>이 20권, <속편>이 다시 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편>은 모두 唐 이전의 글로서 《左傳》·《國語》 이하의 글들이 辭令·議論·敍事·詩歌의 네 종류로 나뉘어 있고, 거기에 진덕수 스스로 주를 달고 있다. <속편>은 모두 宋代의 글로서 議論·敍事의 두 가지만 있으매 미완성의 것이라 여겨진다. 어떻든 모두 選文에 있어서 이전 사람과는 달리 성리학의 입장에서 言理를 위주로 한 글을 뽑았다. 그의 嚴正한 選文態度 때문에 《文章正宗》은 성리학파의 고문 교과서로서 매우 존중되었다.

《고문진보》는 선문 기준이 〈문장정종>만큼 엄정하지는 않다. 言理만을 강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辭采도 어느 정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前集》에는 近體에 가까운 시가 들어 있고, 《後集》에는 騈儷體에 가까운 글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고문진보》가 뒤에는 《문장정종》보다 더 성행하였던 것은, 《고문진보》는 선문의 기본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장이 다양하고 글을 뽑은 폭이 넓었기 때문일 터이다. 심지어 《고문진보》는 잡되다고까지 평할 수도 있겠지만, 문장 敎範으로서는 매우 폭넓고 다양한 점이 선호되었다고 여겨진다.

또 언제 누가 합쳐 놓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상설고문진보대전》에는 《후집》 끝머리에 謝枋得의 《문장궤범》이 부록으로 첨부된 판본이 많다. 지금 판본의 부록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서울대학교 圖書館 藏本으로는 壬辰字로 찍은 詳說古文眞寶大典文章軌範附錄으로 붙인 가장 오래된 것으로 正祖 刊本으로 보인다.
“《고문진보》와 《문장궤범》은 세간에 함께 유행되던 책이다. 《문장궤범》은 모두 7권으로 '侯王將相有種乎'의 일곱 자를 각 권의 이름으로 삼았다. 글은 모두 69편인데 그중 42편은 《고문진보》에 이미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 나머지 27편을 지금 《고문진보》의 끝머리에 附刊하는 바이다. 그리고 <문장궤범>의 目錄을 아래에 적음으로써 참고에 편리케 하고자 한다.”*
*“眞寶軌範, 世間竝行之書也. 軌範凡七編, 以侯王將相有種乎七字爲號, 其文共六十九篇, 而四十二則眞寶中已錄, 故其餘二十七篇, 今附刊於眞寶之末, 因書軌範目錄於下, 以便參考云.”

그러나 실제로 그 <목록>은 이 글 앞에 붙여져 있다. 《문장궤범》은 蜀 諸葛亮의 〈出師表〉와 晉 陶淵明의 <歸去來辭>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唐宋의 글이고, 그중에서도 韓愈와 蘇軾의 글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柳宗元·歐陽修·蘇洵의 글이 많다. 그밖에 전편의 글을 放膽文(권1. 권2)과 小心文(권3 이하)으로 나누고, <출사표>와 <귀거래사>를 제외한 전편의 글에 圈點과 評語를 붙이고 있다.

《고문진보》에 <부록>으로 덧붙어 있는 27편의 글은 한유 16편, 유종원 1편, 구양수 2편, 소순 1편, 소식 5편, 胡銓 1편, 辛棄疾 1편이니, 《고문진보》에 실린 글들과 성격상 별로 다름이 없는 것들이다. 사방득의 《疊山先生批點軌範》도 조선에서 中宗朝 이후 두 차례 이상 간행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 퍽 존중되던 문장선집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편자인 사방득이 성리학자이며 宋의 충신이었다는 점과, 그 선문 기준이 고문진보》·《문장정종》 등과 비슷해서 조선시대에 많이 읽혔을 터이다.

그리고 《고문진보》와 《문장궤범》에는 서로 중복되는 글이 3분의 2를 넘고 있어, 이 두 책을 함께 간편히 읽으려는 욕심에서 《고문진보》의 부록으로, 《문장궤범》의 서로 중복되지 않는 글 27편을 붙여 놓게 되었을 터이다. 조선에서 유행한 《고문진보》가 엄정한 선문 기준이나 일정한 체계를 갖춘 판본보다는 실린 글의 수가 많은 판본을 선택한 위에, 또 이처럼 《문장궤범》까지도 <부록>으로 합쳐 놓음은 되도록 많은 문장을 읽어 고문을 제대로 익히게 하려는 욕심 때문이라 여겨진다.

 

5. 맺음말


《고문진보》는 중국의 고시와 고문의 選集이면서도 그 편집의 규범은 金宗直이 성종3년(1472) 간본 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詩文을 올바로 공부하되
“또한 周敦頤·張載·程子에서 이루어진 性命之說을 참작함으로써 후세에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이 그 뿌리를 둔 바가 있음을 알게 하려는 함이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진실한 보배'가 된 까닭이라 하겠다."*
又且參之以濂溪關洛性命之說, 使後之學爲文章者, 知有所根柢焉, 嗚呼! 此其所以爲眞寶也歟!”
고 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문장정종》과의 관계는 그러한 규범으로서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할 터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간행된 《상설고문진보대전》은 거기에 실린 詩文의 양이 보통 다른 판본들에 비하여 월등히 많다. 이것은 되도록 많은 시와 글을 읽어 고시와 고문을 잘 익히게 하려는 욕망이 그처럼 많은 글을 이 책에 싣도록 하였을 터이다. 더구나 후세에 와서 거기에 부록으로 《문장궤범》까지도 첨가함은 그러한 推論을 더욱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