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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35.고려-의천(義天)

耽古樓主 2023. 5. 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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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천(義天)

 

권상로(權相老)
1879∼1965. 승려, 불교학자. 호 퇴경(退耕). 경북 문경 생. 문경 금룡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불교전문강원을 수료. 동국대 초대 총장 등을 역임. 사망 후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에 오름. 
저서에 「조선문학사」, 「퇴경역시집(退耕譯詩集)」,「고사성어사전」,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등이 있음.

 

 

1. 서언

 

조선의 불교 1,500여 년의 역사를 3기에 나누어 신라, 고려 및 이조에 평균적 500년씩 되나니 이것을 이렇게 갈라놓고 비교하여 관찰하건대, 신라 불교는 오직 향상(向上)으로 되어 있고 이조 불교는 그와 정반대로 오직 전락(轉落)의 일도(一道)뿐인즉 전의 향상과 후의 전락의 중간에 있는 고려 일대의 불교는 그 형세가 자연적으로 수말(首末)이 평평한 균형적 평면으로 되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가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모든 것을 수입하기에 골몰무가(汨沒無暇)1)하던 초미기(草味期)에 있었지마는 문무왕 이후로 헌덕왕 때까지는 현·밀(顯密) 2교의 교종(敎宗)이 분문열립(分門列立)하여 교해(敎海)의 파란이 왕양(汪洋)2)한 세를 이루었고, 헌덕왕 때로부터 경순왕 말년에까지 이르는 동안은 선종(禪宗)이 또한 발흥하는 운으로 9산문(九山門)의 다수가 성립되어 선림(禪林)의 가엽(梅葉) 3)이 극도 번영의 관(觀)을 정(呈)하게 되어서 선교 아울러 그 발달이 정점에 달한 그 시대를 제(際)하여 고려 태조는 병불혈인(兵不血刃)4)하고 신라를 통합한 결과, 백화난만한 불교의 화단을 그대로 받아오게 되니 고려는 오직 수이물실(守而勿失)할 뿐이요, 다시 더 발달시키지 않고 더 연구치 않더라도 자운법우(慈雲法雨)의 윤택은 자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1)골몰무가(汨沒無暇):한 일에만 몰두하여 겨를이 없음.

2) 왕양(汪洋): 넓고 큰 모양.

3)가엽(柯葉):가지와 잎.

4)병불혈인(兵不血刃): 칼에 피를 묻히지 않음.

 

그러므로 고려 일대를 들어 신라와 비교해 보건대 고려 불교는 흡사히 부호 자제들이 선대의 적덕누인(積德累仁)한 보(報)를 받아 편안히 좌식(坐食)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고승 대덕이 배출하지 아니한 바는 아니지마는 신라보다는 그 자자굴굴 5)하여 위법망구(爲法忘軀)6)하는 것이 손색있음을 엄휘(掩諱)7)할 수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 대인물을 선발하건대 오직 대각국사(大覺國師) 일인이 최다점을 득할 것은 개표를 기다리지 않고도 아무나 예언하기를 주저치 않을 것이나 이제 참고가 부족하고 사화(詞華)가 빈약한 나의 붓을 들어 국사의 사전(史傳)을 쓰려는 것은 너무나 외람함을 자각하는 바이다. 다만 판자(板子)가 반수 이상이 부괴(腐壞)하여 없어진 국사의 문집과 김부식이 지은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이것도 절반이나 닳아빠짐)〉와 임존(林存)이 지은〈선봉사(仙鳳寺) 대각국사비〉 및 박호(朴浩)가 지은 〈흥왕사(興王寺) 대각대화상묘지명(大覺大和尙墓誌銘)〉에서 대략을 들어 전표(全豹)의 일반을 그려 보는 바이다.

5) 자자굴굴 : 부지런하고 부지런함.

6)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닦음에 몸을 잊음.

7)엄휘(掩諱): 덮어 줌.

 

 

2. 탄생

 

국사의 초휘(初諱)는 후(煦)요, 자(字)는 의천이었었는데 후에 송 철종(哲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자로써 행세하게 되었다. 고려 제11대 문종대왕 휘(徽)의 제4자라, 모는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李氏)이니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장녀요 인주(仁州 ; 仁川)인이므로 국사는 그 외가인 이자연의 사제(私第) 인천에서 탄생하였으니 곧 문종 9년(1055) 을미 9월 28일이었다.

 

국사의 탄생에 대한 일 기화(話)가 있으니 「호연잡기」를 보건대

“국사가 시생(始生)하매 주야로 체곡(啼哭)하다가 오직 목어성(木魚聲)을 들으면 울음을 그치는데 어디서 오는 목어성인지는 모르나 혹은 멀리 들리다가 혹은 가까이 들리다가 하는지라. 중편(中便)에게 그 소리의 소자출(所自出)을 찾으라 명령하니 소리를 따라갈수록 점점 멀리 들리므로 필경에는 바다를 건너서 무림(武林;杭州界) 경호(鏡湖)의 반(畔)에까지 도착하니 그곳에 한 승(僧)이 있어 조그마한 초제(招提)8)에 앉으며 경을 외우면서 목어로써 구절을 맞추어 치는 소리가 청절(淸絶)한지라.

:찔후 뜨거울 후 베플추

8)초제(招提):.

 

사자(使者)가 그 앞에 경례하고 동방에 나아가 세자의 병을 고쳐 주기를 청하되 ‘세자가 탄생 이후로 주야에 울음을 그치치 아니하며, 뿐만 아니라 세자의 팔뚝에는 은은히 불무령(佛無靈) 3자(三字)가 있으니 세자는 원래에 우리 대왕께서 불전(佛前)에 빌고 낳았은즉 부처님이 점지하신 바인데 도리어 불무령이라는 문자가 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니 그 승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한 일이니 가서 보자' 하고 같이 따라 나와서 세자의 앞에 이르러 합장작례(合掌作禮)하니 세자는 웃음을 머금고 예배를 받는지라.

문종은 기이하여 그 이유를 물은즉 중이 대답하되 '세자께서는 저의 사승(師僧)입니다. 본래는 담여군(擔輿軍)으로서 담여하여 돈이 생기면 생활을 검약히 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우물에 집어던져 여러 해포 만에 금액이 많아지므로 그 돈으로 호상(湖上)에 절을 짓고 드디어 중이 되었으므로 저는 그이의 덕망을 흠모하여 스승으로 섬기었더니 불행하게도 1년 만에 앉은뱅이가 되고 2년 만에 장님이 되고 3년 만에는 벽력(霹靂)에 맞아 죽었으므로 저는 마음에 불평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무령 3자를 팔에 써서 장사를 지내었더니 여기 와서 응생(應生)하였을 줄이야 뉘가 뜻하였으리까’ 한다.

문종은 탄상(嘆賞)하되 ‘물무령이 아니라 불유령이다. 종종의 참상을 당한 것은 숙세(風世)10)의 쌓인 죄얼을 일세에서 다 받은 후에 선과(善果)를 받게 된 것인 줄을 어찌 알 리가 있겠느냐’하였다고 「해동역사석지(海東繹史釋志)」에도 씌어 있다.” (「해동역사」권 32,釋敎志寺刹條)

9)담여군(擔輿軍): 가마 메는 병졸.

10) 숙세(): 지나간 세상. 저세상.

 

3. 출가

 

문종대왕은 원래에 신심(信心)이 견고한 인군(人君)이라, 재위 37년 동안에 인왕(仁王), 반야(般若), 화엄 등 도량을 베풀어 불사(佛事)를 경영함이 거의 70회에 달하였고 사원에 행행(行幸)하여 행향(行香)11)하는 귀경(歸敬)으로 말하면 그 수가 또한 적지 아니하여 빈삭한 해에는 거의 8,9회에 이르렀고 보살계(菩薩戒)를 받음이 전후 5회에 달하며 그 이외에도 숭불경법(崇佛敬法)하는 사(事)이면 다수히 행하였으니 불전에 발원 기도하여 대각국사를 낳았다 함이 비록 정사(正史)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왕의 신념과 행적으로써 미루어 볼진대 당연히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가 탄생하던 9년 을미 10월 병진에는 조서(詔書)를 내려 가로되

“과인이 왕통을 이어 덕스러운 정치를 수행하지 못하여 재변이 자주 나타났으니, 불법의 힘을 빌어 나라를 복되게 해야겠다. 유사를 시켜 터를 찾아 절을 짓게 하라 하였다.”(「고려사」권 7) (이종찬 역)

하라 함에 문하성에서 상소역간(上疏力諫)함에도 불구하고 익년 병신 2월에 드디어 흥국사(興國寺)를 덕수현(德水顯)에 상지기공(相地起工)12)하여 21년 정미 춘정월에 비로소 준공하니 무릇 12개년 계속사업으로 2,800여 간의 대가람이며 소요 경비는 얼마나 되었는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12년 무술 춘2월에 도병마사가 상주(上奏)하되

“도내의 쇠가 전에는 병기에 충당되고 요사이는 흥왕사를 지었는데 또 더 바치라 하면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청컨대 염주(鹽州), 해주(海州), 안주(安州) 세 고을은 감면케 하소서. 정유년·무술년. 두 해의 병기에 드는 쇠를 모두 흥왕사의 창건에 썼읍니다. 이 수고로운 폐단을 풀어 주소서.”(「고려사」권 8)(이종찬 역)

라 한 것을 보아도 족히 상상할 수 있으니 여차한 대공역(大工役)을 작(作)함이 대각국사의 탄생과도 적지 아니한 깊은 관계가 없지 아니할 터인 동시에 문종의 신앙도 역시 이에서 보이는 바이다.

11) 행향(): 분향 또는 전향(傳香).

12) 상지기공(相地起工):땅을 골라 공사를 시작함.

 

그러나 문종의 신앙은 맹종적 미신이 아니라 실로 법을 위하여 불촉(佛囑)13)을 실추치 아니하려는 일념의 정신(正信)이 견고하였나니 그 10년 병신 9월의 다음의 제(制)는 피면(皮面)으로 보아 신앙과 정반대의 거조(擧措)인 듯하나 그 실은 이것이 그 정신 있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13) 불촉(佛囑): 불교에 부탁함.

 

그 제문(制文)중에

“석가모니가 불교를 천명한 것은 청정으로 우선을 삼아 더러운 때를 멀리 여의고 탐욕을 끊는 것인데 지금 나라의 역사를 피하는 무리가 승려로 위장하여 재물을 불리고 생업을 영위하여 농사와 가축으로 일삼아 장사하는 풍습이 생겼다.

나아가서는 계율의 조문을 어기고 물러나서는 청정한 규약이 없으니 어깨에 걸쳤던 가사옷은 술동이를 덮는 천이 되고 염불을 외던 장소는 마늘을 심는 밭이 되었다. 장사치와 어울려 취하고 즐기는 것으로 사귀고 시끄러운 꽃동산에 난초화분, 더러운 냄새 가득하다. 속인의 갓을 쓰고 속인의 옷을 입고 사원을 짓는다는 핑계로 노래와 깃발이 가득하며 여염집에 드나들고 시장거리에 활보하여 사람들과 싸워 피투성이가 되고 있다. 짐이 이에 선악을 구분하여 기강을 바로잡아야겠으니 사원의 안과 밖을 살펴 계행으로 정진하는 이는 안주하게 하고 범법자는 법으로 다스려라.”(「고려사」권 7) (이종찬 역)

이라 하였으며 13년 기해 8월에는

“양경과 동남의 주, 부, 군, 현에서 한 집에 아들이 셋 있는 이는 한 아들에게 15살이 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도록 허락하라.”(「고려사」권 8)(이종찬 역)

라는 제(制)를 내렸으니 이와 같이 일변으로는 대가람을 창건하여 국리민복을 지으며 일변으로는 사태령(沙汰令)14)을 내려 승니의 기강을 숙청하며 또 일변으로는 서민의 일자출가(一子出家)를 권장하여 불교에 대한 바 가위 주도하고 철저하므로 국가 즉 왕실과 인연이 가깝지 아니한 산중의 승려로 더불어 불교를 요리함으로는 차라리 나의 아들 여러 왕자 중에서 한 사람을 출가시켜 가지고 불법을 흥륭하는 것이 용이하고 타당치 아니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심부(心)에 배회하였을 것이다.

14) 사태령(沙法令): 선과 악을 다스리는 명령.

 

그리하여 하루는 문종이 여러 왕자를 앞에 모아놓고

“누가 스님이 되어 복밭(福田)의 이익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려사」권 90 열전) (이종찬 역)

하고 하문함에 국사가 곧 기립하여 대답하되

“신이 출가의 뜻이 있으니 왕의 명령에 따르겠읍니다.”(동상) (이종찬역)

하니 문종은 대희(大喜)하여 즉석에서 영통사(靈通寺) 경덕왕사(景德王師) 난원(爛圓)을 경령전(景靈殿)으로 초청하여 사(師)로 정하고 국사를 삭발하였으니, 때는 문종 19년 을사 5월 14일 계유였고 국사의 연령은 겨우 11세였다. 삭발을 마치고는 곧 국사의 뒤를 딸려 보내서 영통사에 나가 있게 하고 17일 만에 영통사에 행행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애자(愛子)의 동정이 궁금한 동시에 계칙(誡勅)하려는 말씀도 있으며 겸하여 영통사 대중에 대한 인사와 부탁이 있음인 듯하다.

 

출가한 이후로는 학업에 전정(專精)하여 안으로는 위계가 급속도로 승진하고 밖으로는 성예가 일찌기 파양(播揚)15)하였으니, 5월에 출가한 국사는 당년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16)를 품승(稟承)17)하였은즉 11세 더우기 출가 초 여름에 사미로 비구계 (比丘戒)를 구족한 예가 고금에 다시 없으며 21년 정미 7월 을유에는 우세(祐世)의법호를 받고 승통(僧統)의 법칙(法職)에 나아가니 13세에 이러한 영예 있음은 역시 광고(曠古)의 희전(稀典)이었다.

15) 파양(播揚) : 드날림.

16) 구족계(具足戒):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법계. 비구에 250, 비구니에 500계가 있음.

17) 품승(稟承):위로부터 전해 받음.

 

 

4. 수학(修學)

 

국사는 원래에 천질(天質)이 영오(穎悟)하여 궁중에 있던 유년기에도 벌써 그 총민함을 능히 따를 이 없었으니

“대사는 어려서부터 뛰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씀이 정하고 민첩하여 숙세(宿世)의 배움이 있는 듯하였다. "(김부식 찬 <영통사 대각국사비〉)

라 하였은즉 범인일가(凡人一家)의 간고(幹蠱)18)와 일문(一門)의 의망(倚望)에 당하는 자라도 총혜민급(聰慧敏給)19)하지 않고는 능히 그 책(責)을 감내시종(堪耐始終)치 못하거든 하물며 여래(如來)의 사인(使人)으로 인천(人天)을 도솔할 웅운출세(應運出世)한 자라면 천재(天才)있지 않고는 되지 못할 바이니, 선문(禪門)에 이른바 '멱개둔체한부득(覓個鈍滯漢不得)’20)이라 하여 총변(聰辯)과 학식을 배척하고 노둔(魯純)21) 멸학자(蔑學者)를 구함은 부수(膚受)22)의 학과 구두(口頭)의 선(禪)을 징창(懲創)하는 바이지마는 너무나 일편에 떨어지게 된다는 감상이 이른 때에 촉발되는 것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18) 간고(幹蠱): 과실이 있는 사람의 아들 중에 뛰어난 사람.

19) 총혜민급(聰慧敏給):총명하고 슬기롭고 민첩함.

20) 멱개둔체한부득(覓個鈍滯漢不得): 중국에 머물면서 노둔을 구했으나 얻지 못함.

21) 노둔(魯純):재주가 둔함.

22) 부수(膚受):속뜻은 모르고 겉만 이어받아 전함.

 

더우기 무사무려(無思無慮)한 토목 형해(土木形骸)를 감작(甘作)23)하여 흑산하(黑山下) 귀굴(鬼窟) 생애중에서 일생을 단속(斷)한다면 그야말로 불법에 대하여 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 될 것인가를 이에서 번제(煩提)24)할 바 아니지마는 국사의 역학(力學)을 볼 것 같으면 다만 각각 자반(白返)의 성찰이 자발(自發)함을 금치 못하리라.

23) 감작(甘作) : 달게 여김.

24) 번제(煩提): 번거로이 말을 꺼냄.

 

국사는 이와 같은 영오한 천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학문에 자자불태(孜孜不怠)하여 정익구정(精益求精)함을 말지 아니하였다.

“나이 장성하매 더욱 스스로 힘써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하여 널리 보고 기억에 힘썼다. 일정한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가 있는 곳이면 좇아가 배웠다. 현수(賢首)의 교관(敎觀)으로부터 돈교(頓敎), 점교(漸敎), 대승, 소승, 경, 율, 논, 장소(章疏)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이교(異敎)의 학문에도 힘을 기울여 견문이 넓었으니 공자, 노자의 글에서 제자백가의 글까지도 그 정수는 모두 모아 그 밑뿌리를 살폈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는 종횡으로 치달아 출렁이는 물이 끝이 없듯하여 비록 노스님이나 노숙한 선비라 하더라도 모두 따를 수 없다 하여 명성이 날로 퍼져 당시의 우두머리가 있다 하였다." (동상) (이종찬 역)

 

“일대의 종승(宗乘)을 스스로 해득하지 못함이 없어 경덕왕사가 입적한 뒤로 대사께서 법문을 계승하였다. 당시 불법을 배우는 자가 계율종, 법상종(法相宗), 열반종,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이 있었는데 대사는 이 여섯 종파에 모두 지극한 연구가 있었고 그 밖에도 육경(六經), 칠략(七略) 등의 책에서도 깊은 뜻을 찾아냈다.”(박호찬〈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이종찬 역)

 

“경덕국사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현수의 교관을 받았고 경덕국사가 돌아가매 그 문도와 함께 강의를 멈추지 않았으며, 또 모든 종파의 학자들을 모아 서로 강론하니 터득하신 바가 워낙 뛰어나 노숙한 스님이나 선비라도 따를 바가 아니었다."(임존 찬 <선봉사 대각국사비〉)(이종찬 역)

 

이상은 모두 국사의 소장시대에 역학정통(力學精通)하던 것을 말한 바이지마는 그 실은 국사의 일생을 통하여 한때도 이와 같이 자자굴굴하지 아니한 때가 없으니 “6종을 두루 궁구하여 극했다(六宗竝究至極)”라든지 “6경 7략에 각기 순취(醇趣)를 발했다(六經七略各發醇走)”라든지 “제종의 학자를 모아 더불어 서로 의론하여 얻은 바가 많았다(諸宗學者 相與講論所得卓爾)”라든지가 모두 일조일석의 소획(所獲)이 아닌즉 이로써도 가히 추상할지며, 더우기 송(宋)에 입(入)하여 법을 구할 때로 말하면 왕반(往返)을 통계하여 14개월밖에 아니 되는 단시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에 명산 성적(名山聖蹟)을 모두 참배하고 고승석덕(高僧碩德)을 모두 왕방(往訪)하여

“현수(賢首)의 성종(性宗)과 자은(慈恩)의 상(相宗)과 달마의 선종(禪宗)과 남산(南山)의 율종(律宗)과 천태(天台)의 관종(觀宗)을 그 묘체를 득하지 않은 것이 없다(無不得其妙旨).”

라 한 것으로도 그때의 고심 역학이 어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은즉, 국사의 일생 즉 47년 동안은 오직 학해(學海)에서 단송(斷送)하였다 하여도 그릇된 말이 아닐 것이다.

 

 

5. 구법(求法)

 

나·여시대의 고승 석덕들이 대개는 북학중원(北學中原)하는 것으로 일생 농사를 삼아서 가위 성풍(成風)이 되었으니, 북학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성가가 높아서 개종(開宗)도 할 수 있으며 내지 왕사, 국사도 되기 쉬운 까닭이었으나, 국사의 북학한 주안은 구구한 명예의 욕망이나 또는 편협한 일종의 종지(宗旨)에 있지 아니하고 적어도 통불교(通佛敎)에 대한 관념과 사색이 농후 또 철저하였으니 그러므로 급기야 입송하여는 왕환(往還) 통계 14개월인 단시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에 명산 성적을 모두 참배하며 고승 석덕을 모두 왕방하여 그 학을 전하고 그 지(旨)를 오(悟)하였으니, 대개를 역거(歷擧)하건대 최초에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사사하고는 상국사(相國寺)에서 원소 종본선사를 보고, 흥국사에서 서천삼장천길상(西天三藏天吉祥)을 만나고, 항주(杭州)로 가서 정원(淨源)법사를 찾아 숙원(宿願)을 다하고 금산사(金山寺)에서 불인요원(佛印了元)선사를 만나고 천태산에 이르러 지자대사탑(智者大師塔)에 예(禮)하고 육왕광리사(育王廣利寺)에 가서 대각회련(大覺懷璉) 선사를 보는 등이었으니 소우고승(所遇高僧)이 무릇 50여 인이었으나 낱낱이 법요(法要)를 자문하고 범과(泛過)25)한 데가 없었다.

25) 범과(泛過):정신을 가다듬지 않고 데면데면 지나감.

 

그러므로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이 시로써 국사를 찬하는 중에

“…일찌기 듣건대 장삼장(獎三藏)이 왕자에게 법의 길을 물으니 큰 가르침으로 유가(瑜伽)26)를 전하여 자은사(慈恩寺)를 창도하였다 하고, 또 들으니 부석노사(浮石老師)는 신라에서 대사라 칭하였으니 중국에서 화엄을 배우고 돌아와 기강을 날려 성(性)·상(相)이 서로 합당함이 있었지만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 할 수 없었으니 누가 우세승통인 대각국사께서 오종(五宗)의 묘리를 다 안 것만 하랴……”(이종찬 역)

운운하고 그 밑에 자주(自註)하기를

“조정에서 승통으로 허락하여 이르는 곳마다 참문(參問)했기 때문에 일년 사이에 현수의 성종(性宗), 자은의 상종(相宗), 달마의 선종(禪宗), 남산의 율종(律宗), 천태의 종지를 터득하지 않음이 없었다.”(「대각국사외집」)(이종찬 역)

라 하고 또 <선봉사비>에

“처음 밀주(密州)의 경계에 이르니 철종이 소문을 듣고 서울 계성원(啓聖院)으로 모시게 하고 수공전(垂拱殿)에 납시어 친견하니 예우가 지극하였다. 대사께서 이름난 대덕을 두루 참견(參見)할 것을 청하니 화엄법사 유식(有識)에게 조서를 내려 별원(別院)에 오게 하여 서로 상종하여 노닐게 하였다. 대저 성인은 자신을 굽히기를 꺼려하지 않고 남의 선한 점을 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장홍(弘)27), 사양(師襄), 노담28), 염자와 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대사께서 밀주에서 서울로 와서 법을 알고 수행을 견지하는 이가 있다고 들으면 두루 찾아 자문하지 않는 바가 없어, 가서는 제자의 예로 뵙고 그날 오가는 문답은 현수, 천태의 교판(敎判)의 차이와 두 종지의 오묘한 뜻으로 강설(講說)이 아주 곡진하였다.”(이종찬 역)

라 하고 종본선사는 게(偈)로써 증(贈)하였으되

"만리의 그 험한 파도 위에

누가 법을 위해 몸을 잊어

선재(善財)동자 본받으랴

생각건대 염부제(閻浮提)29)에도 드물게 있을 일

불 속에서 피어난 우담(優曇)의 꽃30)이여" (이종찬 역)31)

31)“誰人萬里洪波上 爲法忘軀效善財 想得閻浮應罕有 優曇花向火中開

라 하고 불인요원은 희세지우(稀世之遇)를 느낀 것이 마치 공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보고 ‘목격하여 도 있음을 안(目擊而道存)’것 같았으며 정원법사는 상봉의 만(晩)을 한(恨)하여 전도(傳道)로써 사(事)를 삼았다고 하였다.

26) 유가(瑜伽):산스크리트어로 융합’.

27) 장홍(萇弘):주나라 경왕(敬王)의 대부(大夫).

28) 노담:노자.

29) 염부제(閻浮提):인간계.

30) 우담화(優花): 3천 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상상의 식물.

 

그러나 국사가 이와 같이 50여 인의 고승에게 법요를 자문하였지마는 모두 입송(入宋)한 이후에 비로소 상종한 바이었고, 오직 정원법사(淨源法師)만은 그전 본국에 있을 때부터 서사(書辭)가 자주 왕래하고 경모(景慕)가 자못 깊었으니

“대사께서 일찌기 뜻이 있어 송나라로 가서 도를 물었다. 진수(晋水)의 정원법사가 자비로운 수행으로 배우는 이의 스승이 될 만하다는 소문을 듣고 장사배의 편에 서신을 올려 예를 닦으니 정원법사도 대사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답신을 보내어 초청했다.

이로부터 중국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다.”(〈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한 일절을 보아도 그 신왕심치(神往心馳)하던 바를 보는 듯하거니와, 서간만이 왕래할 뿐 아니라 정원법사가 가끔 서적도 보내었으므로 그 욕왕(欲往)의 지(志)는 각일각 더욱 심각하여졌다. 국사의 문집 중에 상정원법사서(上淨源法師書)〉가 있으니,

“엎드려 생각컨대 저는 원래 사람이 작고 거기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용상(龍象)의 높은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니 우뢰와 같은 오묘한 말씀을 듣기가 어렵습니다.…이에 천리를 떠나는 배편에 붙여 한 통의 편지를 올려 마음이 가지 못하는 먼 곳에 도달할 것을 기약합니다. 지난해 8월 15일 도강(都綱) 이원적(李元積)이 왔을 때 2월에 주신 서신 한 통과 손수 편찬하신 화엄현수행원참의(華嚴賢首行願懺儀), 원인발미록(原人發微錄), 환원관소초보해(還源觀疏鈔補解), 우란분예찬문(孟蘭盆禮贊文), 교의분제장과문(敎義分齊章科文) 등 8권을 담은 한 상자를 받잡고 단정히 앉아 무수히 펼쳐 보았읍니다.……46책은 모두가 횡경(橫經)32)에 끼일 것들입니다. 아침에 보고 저녁에 생각하게 하니 이것을 본 이후로 인연의 맺음이 넓어짐에 기뻐합니다.”(「대각국사문집」권 10 <상정원법사서>(이종찬 역)

라 하였다.

32) 횡경(橫經): 경서를 펴듦.

 

 

6. 개종(開宗)

 

천태종에 관한 관념은 고려 초년부터 심히 원구(願求)하였으니 고려 태조 창업의 초에 행군복전사대법사(行軍福田四大法師) 능긍(能兢) 등이 상서(上書)하되

“대당(大唐)의 낙타에 회삼귀일묘법연화경(會三歸一妙法蓮華經)과 천태지자선사(天台智者禪師)의 일심삼관선법(一心三觀禪法)이 있다고 들었으니 성인스런 임금께서 삼한을 통합하여 한 나라를 이룬 것과 풍토가 서로 합합니다. 만약 이 법을 구하여 유행케 하면 뒤의 자손들이 수명이 연장되고 왕업이 끊이지 않아 항상 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이종찬 역)

이 상서로 인하여 즉시 천태종을 구해 오지는 못하였지마는 그러한 묘법과 종문이 있음은 항상 경모하여 왔으므로 대각국사도 역시 천태종을 구래(求來)하려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니 국사도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하루는 태후를 가 뵈니 우연히 말이 있었다.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최상의 진선(眞善)인데 이 나라에는 아직 종문이 성립되지 못함이 심히 애석합니다. 신이 여기에 뜻이 있읍니다’ 하였더니 태후도 심히 기뻐하셨고 숙종도 외호(外護)되기를 원했다."(〈선봉사비〉)(이종찬 역)

라 하였으니 국사가 화엄종 사람인즉 당연히 화엄종을 위하여 북학(北學)하였겠지마는 그 실은 화엄종보다 천태종을 위함이 더욱 심절(深切)하였다.

 

그러므로 천태산에 이르러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를 참알(參謁)할 때에 발원문(發願文)을 지어서 탑전에서 서원(誓願)을 세웠으니

“일찌기 듣건대 대사께서 오시(五時) 팔교(八敎)로 불교가 우리에게 유입됨을 판별하여 한 시대의 성스러운 말씀이 다하지 않음이 없읍니다. 우리나라에 옛부터 체관(諦觀)이 있어 교관을 전해 왔으나 지금은 끊겨있다 합니다. 내 이제 의분을 발하여 자신을 잊고 대사를 찾아 도를 묻는 것입니다. 이제 전당(錢塘)33)의 자변( 강의에 나와 교관을 배우고 )있으니 다음날 돌아와 목숨을 바쳐 전파하겠읍니다."(이종찬 역)

라 하였으니, 국사가 동환(東還)하는 임발(臨發)에 주객원외랑 양걸이 선·교(禪敎) 제공(諸公)에게 하던 말과 마찬가지로

 

“옛부터 성현들이 바다를 건너 법을 구한 이가 많지만 승통(僧統)께서 한번 중국으로 가 천태, 현수, 남산, 자은, 조계, 인도의 불법을 소유하시어 일시에 전한 것만 같겠는가. 참으로 법을 널리 편 보살의 실행이었도다.”(〈선봉사비〉)(이종찬 역)

라 한 것은 참으로 일미(溢美)한 칭찬이 아니었다. 국사가 송으로부터 환국한 후에 곧 천태의 개종(開宗)을 종용하여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숙종 2년 5월에 낙성을 보게 되고 일변으로는 신설하는 종문에 문도(門徒) 없음을 염려하여 조계종 9산문으로부터 덕린(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을 탈적(脫籍)시켜 천태종으로 전적케 하니 각각 자기의 문하 수백 인씩을 거느리고 들어오므로 태종의 종도(宗徒)가 일조에 제제(濟濟)하게 되었다.

33) 전당(錢塘): 전당강.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강.

 

그리하여 국청사에서 처음으로 개종할 때에 계강사(啓講辭)를 자제(自製)하여 가로되

“생각컨대 해동의 불법이 700여 년 동안 비록 여러 종파가 다투어 펴고 뭇 교리가 서로 개진되었지만 천태의 한 교리는 대를 따라 명멸하였다. 옛날 원효보살이 앞서 일깨웠고 체관법사가 뒤따라 드날렸지만 어쩌다 인연이 미숙해서 빛이 무산(無山)에 열렸고 교법의 유통은 장래에 기대함이 있은 듯하다.”(「대각국사전집」)(이종찬 역)

라고 운운하였다.

 

 

7. 간장(刊藏)

 

불교에 있어 교의 전부를 말하자면 반드시 경, 율, 논의 3부를 합하여 이것을 3장(三藏)이라 하며 3장을 혹은 대장(大藏)이라고도 하니 이 대장 속에 포함된 법리는 곧 이른바 8만 4천 법장(法藏)이라. 그러므로 거대수(擧大數)34)하여 다만 팔만 대장경이라고도 하니 이 팔만 대장경의 간판(刊板)이 전세계 불교를 통하여 범어, 파리어 (巴利語), 몽고어 등을 제하고 단 한자판만으로도 지나에서 간행한 것이 17회(최근 상해 활자본까지 포함)나 되고 일본에서 간행한 것이 6회(최근 大正 新修藏經까지 포함)가 되고 고려에서 간행한 것이 무릇 4회인데 그 제1회는 고려 제8대 현종 원년(1010)에 거란의 성종(聖宗)이 대거병(大擧兵) 입구(入寇)하여 강조(康兆)35)를 살(殺)하고 경성을 진박(進迫)하므로 왕과 후비(后妃)는 모두 남분(南奔)하여 전라남도까지 몽진하게 되고 거란병은 드디어 경성을 함락하고 사방에 종병유린(縱兵蹂躍)하므로 병력으로는 이를 대항할 도리가 없어서 최후의 묘책이 불타의 법력을 빌어 거란의 병을 퇴치코자 하여 드디어 그 익년에 군신 상하가 동공(同共) 발원하여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니 계(計) 1,076부 5,048권이니 이것이 고려초 조본이었고 그후 문종왕은 현종이 간행한 장경에 동간(同刊)치 못한 것을 약 1천 권이나 새로 얻어서 그것을 간행하니 이것은 「고려속장(高麗續藏)」이라는 것이요,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할 때에 석전(釋典)과 경서 1천여 권을 奉還하여 홍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치(置)하고 다시 요와 송과 일본에 사람을 보내어 경전을 구해 옴이 4천 권이나 되는 것을 모두 간행하였으니 총히1,010부 4,740여 권이니 이것이 이른바 흥왕사판이다.

34) 거대수(擧大數):큰 수만 듦.

35) 강조(康兆):고려의 무신.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임금으로 세워 세력을 떨쳤으나요의 성종이 임금 살해사건을 핑계로 쳐들어오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죽음.

 

 

불행하게도 고종 19년 임진에 몽고병의 유린을 당하여 현종 때에 개간(開刊)한 판본과 아울러 한꺼번에 소실을 당하고 고종이 다시 발원하여 16년 계속사업으로 중간(重刊)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장여 있는 고려재조본 곧 이른바 해인장본(海印藏本)이 있은즉 국사가 간행하였던 경문만은이 해인장본에서 응당 유루(遺漏) 없이 중간하였을 터이지마는 국사의 개간한 판에서 인출한 책자로는 지금 순천군(順川郡) 송광사에 있는 법화경찬술(讚述)36) 같은 것이 몇 권이나 잔재하여 있는가를 알 수 없는 바이다.

36) 찬술(讚述): 이어받아 저술함.

 

 

8. 저술

 

국사는 다만 경적(經籍) 간행에만 위대한 공적이 있을 뿐 아니라 저술에도 또한 막대한 근로(勤勞)가 있었으니, 국사는 원래에 전인(前引)한 바와 같이

“널리 보고 기억에 힘썼다. 일정한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가 있는 곳이면 좇아가 배웠다. 현수의 교관으로부터 돈교, 점교, 대승, 소승, 경, 율, 논, 章疏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이교의 학문에도 힘을 기울여 견문이 넓었으니 공자, 노자의 글에서 제자백가의 글까지도 그 정수는 모두 모아 그 밑뿌리를 살폈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는 종횡으로 치달아 출렁이는 물이 끝이 없듯하여 비록 노스님이나 노숙한 선비라 하더라도 모두 따를 수 없었다.”(〈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하였으니 그 법량(法量)과 식력(識力)이 남보다 백 배나 초월하여 서(書)로는 부독(不讀)한 바가 무(無)하고 이(理)에는 불통한 바가 무하여 안(眼)이 일세에 공(空)하고 시구성장(矢口成章)37)하였으므로 국사는 일찌기 입언(立言)을 하여서 불후에 영원히 전하고자 하였으나 그 소지(素志)는 가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거짓되지 아니하였다.

37) 시구성장(矢口成章):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여도 장()을 이룸.

 

그러나 사의편집에 「원종문류」 22권을 이루었으니

“일찌기 못 이론이 너무 산만하여 정요(精)로운 것만 모아 종류별로 나누어 원종문류(圓宗文類)라 하였다."(〈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하고 그 문집 중에는 「신집원종문류서(新集圓宗文類序)」가 실려 있으되 그중 일절을 절취(取)하건대

“모든 종파의 학문이 처음부터 논의로 시작되지 않음이 없지만 다만 지극한 이치가 깊고 깊으며 뭇 이론이 호한(浩汗)해서 문답하는 사이에 인용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근세에 우리 종문에 기이함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근본을 버리고 끝만을 좇아 억설이 분분하여 마침내 조사(祖師)들의 현묘한 뜻이 막히고 통하지 않게 해 놓은 것이 10에 7, 8은 된다. 교관에 정통한 이로서는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랴.” (「문집」권 제1) (이종찬역)

하였으니 이 「원종문류」는 참으로 조령(祖令)과 교관에 막중한 보전(寶典)이거늘 지금에 오인의 아는 바로는 상현(尙玄) 이능화(李能和)선생이 보장(寶藏)하고 있는 제1권 및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에 수재(收載)되어 있는 제14권, 제22권이 있을 뿐이며 또「석원사림(釋苑詞林)」 5권을 저술하였으니

“또 고금의 문장을 모아 가르침에 도움이 되고자 하여 「석원사림」을 만들었으나 참고 수정을 미처 못하여 그 뒤에야 이루었다. 그래서 버리고 취함에 정당성을 잃었다."(〈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하였은즉 집성(集成)은 하였으나 교정을 하지 못하고 국사가 열반하시므로 그 후에 그 문인들이 그 유서(遺緖)38)를 족성(足成)하기 때문에 존발(存拔)39)이 국사의 본회(本懷)에 타당치 못하게 되었고 또 「성유식론단과(成唯識論單科)」 3권을 刊定하였으니 이것은 국사의 만년 곧 해인사로 퇴거하신 후에 편술한 것이니

“기신(起信)과 유식(唯識) 두 논은 이는 성종, 상종의 요지이니 배우는이는 마땅히 진심(盡心)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은 일찌기 대충 익혔고 다만 유식론에는 공력을 다하지못했기 때문에 번거로운 말에 빠져 요점되는 교의를 혼미하게 할까 두렵다.

이에 본기(本記)를 찾아 연구하고 옛 교과를 참조하여 3권으로 간행하였으니 혹 뜻이 같은 이가 교과와 논(論疏)를 보고자 하거든 먼저 본문부터 익숙히 하고 다음에 疏鈔를 익히면 유식의 뜻은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문집」권 1간정 성유식론단과 서) (이종찬 역)

라 하였고, 그 외에도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과 「신편 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이 있으며 또 「대각국사집」 33권이 있으니 본집 20권은 국사의 시와 문(文)을 문인이 편찬한 것이므로

“지으신 시문을 문인(門人)들이 모았으나 잘라진 원고들이 남은 것이 얼마 없어 차례로 묶어 20권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모두 순간순간 쓰는 것으로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생전에 글을 써서 판각했던 것도 모두 불사르셨다.”(<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하였고 「외집(外集)」 12권은 문하 혜관(慧觀) 등이 국사와 친교 있는지나(支那) 승속(僧俗)의 시, 문, 서독(書臟)40)을 수습하여 개간한 것인데 원래에 그 판을 해인사에 기장41)하였으나 지금에는 태반이나 후패(朽敗)하여 버리고 존자(存者)가 무기(無幾)42)하게 되었다.

38) 유서(遺緖):유업.

39) 존발(存拔): 어떤 것은 남겨 두고 어떤 것은 빼어 버림.

40) 서독(書牘): 서찰. 편지.

41) 기장: 저장..

42) 무기(無幾):얼마 안 됨.

 

그러나 국사의 시와 문이 모두 평담(平淡)하여 숙속(菽粟)43)의 미(味)와 포백(布帛)의 문(文)을 갖추었으니 김부식의 이른바

“식견이 훤히 통달하고 선(善)을 즐겨 게을리하지 않으시어 항시 선비들과 사석에서 응대하더라도 말씀이 성인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또한 문장도 평담(平澹)하면서도 멋이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도 이 풍도를 따라 갈고 닦아 점점 우아한 정도(正道)를 가게 되었다.”( <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한 일절만 보아도 국사의 문화(文華)를 과반이나 생각할 수 있는 바이다.

43) 숙속(菽粟):사람이 상식(常食)하는 음식.

 

 

9. 정략(政略)

 

국사는 다만 출세법(出世法)에만 조예가 깊어서 도술(道術) 문장과 법화(法話)만이 일세를 풍미할 뿐 아니라 세간법(世間法)에도 또한 한숙44)하여 치국의 대경(大經)과 응변(應變)의 대권(大權)에도 역시 탁탁(卓卓)45) 한 견해가 있었으니 국사가 일찌기 국가의 통화제도에 대하여 누누 수천 언으로 건의한 바 있어 세병(世病)에 적중하며 시무(時務)에 지요(指要)46)한 바 있으나 그 문이 장황하므로 이에서 인술치 아니하거니와

“대사께서 이미 한 나라의 높으신 친족이시기에 큰 국사가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진언한 바가 여러 나라의 사정을 논한 것이 많고 백성들에게 음덕으로 끼친 것 또한 많으니 다 일러 말할 수 없다.”( 〈영통사비〉〉(이종찬 역)

라 하였으니 이 일단으로써 국사의 정략을 추상할지라도 그 성·상(性相)이 쌍융(雙融)하고 사리에 무애(無碍)하여 즉 소위 “대리(大利)로 천하를 이롭게(利天下)하되 그 이를 취한 바는 말하지 않는다(不信其所利)”하던 그 모유(謨猷)47)와 덕택(德澤)을 가히 상상할 수 있는 바이다.

44)한숙:익숙함. 연숙(辣熱).

45) 탁탁(卓卓):(많은 가운데) 두드러짐.

46) 지요(指要): 문장 등의 속에 담긴 중요한 뜻.

47) 모유(謨猷):, 지모.

 

 

10. 연보

 

국사의 일생은 다만 47세를 일기로 하였으니 그 시야(始也)에는 11세에 출가하여 동년에 구계(具戒)를 받고 13세에 우세 승통의 법직을 받았은즉 국사보다 조달(早達)한 이가 불교 유사 이래에 드물게 보는 바이며 승랍(僧臘) 36, 세수(世壽) 47로 가위 요수(夭壽)를 면치 못함은 역시 고금의 고승 중에 그 예를 또한 찾을 수 없는 바이라.

흡사히 공문(孔門)의 성제(聖弟)로서 안자(顔子)의 요수함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은즉, 만일 국사로 하여금 상수(上壽)를 하였던들 국사 자신에 대한 도학(道學)도 글자 그대로 대각(大覺)에 제등48)하였을 것이요, 불교에 대한 업적도 만고에 능히 독보(獨步)함이 있었을 터이었지마는 성인과 대(代)가 멀어지고 정법(正法)의 운(運)이 낮아져서 국사로 하여금 수(壽)에 오르지 못함은 진실로 이보다 더함이 없는 한사(恨事)이다.

48) 제등: 오름.

 

국사는 평시에 항상 통심(痛心)의 질(疾)이 있음으로써 자기의 생사에 미리 간파함이 있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매사를 항상 조성(早成)한 양하다.

 

이제 연보를 약고(略考)하건대, 11세에 출가 수구(受具)하고 13세에 승통이 되고 31세에 입송(入宋)을 청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고 익년 곧 32세에 상선(商船)에 붙어 4월에 발정(呈)하여 5월에 밀주(密州)에 이르고 7월에 경사(京師) 계성사(啓聖寺)에 이르고 또 연년(年年) 곧 33세인 정묘 5월에 본국 조하사(朝賀使)를 따라 환국하여서 40세 2월부터 홍원사(洪圓寺)에서 강학(講學)하다가 5월에 해인사로 퇴거하고 41세에 숙종의 청을 받아 다시 흥왕사로 왔다가 44세에 국청사 주지가 되고 45세에는 숙종의 제5자(혹은 제3자) 징엄이 출가하여 국사의 시자(侍者)가 되고, 47세 신사 8월에 미질(微疾)을 만나고 10월 3일에 국사가 되고 5일에 우협(右脅)으로 와(臥)하여 열반에 들므로 16일에 다비하여서 11월 4일에는 부도에 유골을 봉안하였다.

: 계고할모, 꾀할모

:꾀 모

 

맨 끝으로 시 일절과 명(銘) 일편을 소개하고 기타는 약하겠다.

 

“남으로 천리를 와 님을 찾으니

외로이 청산(靑山)에서 몇 봄을 지났소

말법(末法)시대 법 행하기 어려운 때 만나면

나도 그대처럼 몸 아끼지 않겠소"(大覺國師謁 舍人 박염촉 묘) (이종찬 역)49)

 

“대사의 말씀 모든 부처 있고

대사의 교화(敎化) 중생 이롭게 했고

대사의 실행 정도(正道)를 잡아 주셨고

대사의 지혜 큰 정성 펴냈었도다

이렇게 새겨 그 빛 빛내기에 족할까”(박호 찬〈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이종찬 역)50)

 

49)“千里南來訪舍人 青由獨立幾經春 若逢末法難行法 我亦如君不惜身

50)“師之言足以繼諸佛 化足以盒象生 行足以扶正道 智足以發大誠 而銘以此 是以流其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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