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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고려-강감찬(姜邯贊)

耽古樓主 2023. 5. 5.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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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강감찬(姜邯贊)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강감찬(舊名은 殷川)은 삼한벽상(三韓壁上) 공신인 (고려 태조시) 궁진(弓珍)의 아들로서 정종(제3대) 3년(948)에 금산(山; 시흥)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체구가 왜추(矮醜)하여 외모가 자못 초초(草草)1)하였으나 문무의 자질을 갖추어 어려서부터 학(學)을 좋아하고 특히 지략이 탁월하였다.

1)초초(草草):추함.

 

성종(제6대) 조에 갑과 제일에 발탁되어 문관으로 출세하였다가 마침내 무공으로써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었다. 고려에는 그의 중엽까지 문무가 넘나들어 양도에 나뉘지 아니하였으므로 문관으로서 무(武)에 종사한 것이 허다하니 강감찬은 그 예의 하나이다.

 

현종(제8대) 원년에 거란주(契丹主; 성종)가 40만 병으로써 입침(入侵)하였으니 이는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앞서 성종 12년에 거란이 압록강 동안지역을 침략하려 소손녕(蕭遜寧)이 대군으로써 내침하였다가 목적을 달치 못하고 돌아간 후에 늘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오더니 마침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시(廢弑)2)하고 현종이 위(位)에 오르게 되매 거란은 이것을 구실로 하여 원년 11월에 침입한 것이다.

2)폐시(廢弑): 폐위시켜서 죽임. ()는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시해하는 것을 뜻하는 글자.

 

이에 대하여 강조는 30만 군으로써 통주(通州 ; 선천)에서 방어하다가 패몰(敗沒)하매 거란군은 결하(決河)의 세로써 동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군신들은 거란의 대군을 막기 어렵다 하여 항복키를 의논하였으나 홀로 강감찬이

“적의 예봉을 피해 가지고 서서히 흥부(興復)를 도(圖)하자.”

고 반대하여 현종을 권하여 남행(南幸)케 하였다(동년 12월에 현종은 송도를 출발하여 남으로 나주에까지 내려갔음). 그 익년 정월에 거란주는 대군을 이끌고 송도에 쇄도하여 방화 약탈의 갖은 포학을 자행하다가 양규(楊規) 등의 요격을 받아 헛되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강감찬은 국자좨주(國子祭酒),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중추사(中樞使)에 역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가 동 9년 5월에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內史侍郎),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에 전임되었다. 그때에 현종은

“경술년에 몽진이 있어

적병이 한강변까지 깊이 들어왔네.

당시에 강공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온나라가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을”(편집자 역)3)

3)“庚戌年中有虜塵 干戈深入漢江濱 堂時不用姜公策 擧國皆爲在衽人

 

이라는 시를 사하여 그의 건의로 국가의 치욕을 면케 된 것을 못내 찬상하였다. 어쨌든 현종 원년 강감찬의 의견으로 국가의 치욕을 면한 후에 그를 동북면행영병마사 또는 서경유수, 내사시랑 등 서북의 요직에 임하였음은 거란에 비(備)코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동년 12월에 압록강 동안의 소위 6진 즉 홍화(興化;의주의 동남 삼교강의 북안), 통주(선천), 용주(용천), 철주(철산), 곽주(곽산), 구주(구성)를 요구하던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소손녕의 형)을 보내어 10만 군으로써 침입케 하였다. 현종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으로 상원수(上元帥)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원수를 삼아 그에 당케 하매 그들은 208,300군으로써 영주(寧州 ; 안주)로부터 흥화진에 둔진(屯陣)하고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곡(山谷)에 매복시키는 위에 대승(大繩)으로 우피(牛皮)를 꿰어 성동(城東)에 흐르는 대천을 막아 적을 기다리다가 졸연히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트고 복병이 일어나 적을 크게 파하였다. 그러나 소배압은 강감찬과 싸움을 피하고 길을 찾아 바로 송경을 향하여 직추(直趨)하였다. 강민첨이 그를 추격하여 자주(慈州) 내구산(來山)에서 파하고 조원(趙元)은 마탄(馬灘;대동강의 나루)에서 습격하여 만여 급을 베었다.

 

익년 정월에 거란병이 송경 가까이 쳐들어갈 제 강감찬은 다시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에게 1만 병을 주어 倍道4)하여 경도에 입위(入衛)케 하고 동북면병마사도 3,300병을 보내어 입원(入援)하여 적의 진로를 막으매 거란병은 할 수 없이 서로 향하여 회주(回走)함에 이르렀다.

4)배도(倍道): 길 가는 속도를 두 배로 냄. 즉 밤낮없이 달리게 함.

 

목을 지키고 있던 강감찬은 먼저 연주(漣州 ; 개천), 위주(渭州 ; 영변)에서 요격하여 많은 손해를 주고 다시 3월에 거란병의 대부대가 구주를 통과할 때에 강감찬이 동교(東郊)에서 엄격(掩擊)할새 풍우가 남으로부터 몰아오고 발이 나부껴 북을 가리키는지라. 강감찬이 이 기세를 타 3군을 몰아 분격하여 크게 적을 무찌르고 다시 추격에 옮겼다. 그리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는 동안에 적의 강시(僵尸)5)가 들을 덮었으며 인구(人口), 마타(馬駝), 갑주(甲胄), 병장(兵使) 등 부획(俘獲)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었던 것으로서 거란병의 생환한 자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한다.

5)강시(優尸) : 얼어죽은 시체.

 

2월 갑오에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매 영파역(迎波驛 ; 우봉)에 채붕(綵綱)6)을 베풀고 음악을 갖추어 현종이 친히 나가 맞이할 제, 금화팔지(金花八枝)를 강감찬의 두상(頭上)에 꽂아 주며 좌수로 그의 손을 잡고 우수로 잔을 들어 위로하는 감격한 장면이 나타났다.

6)채붕(): 오색 비단으로 만든 장막.

 

그리고 이 개선을 영원히 기념키 위하여 역명을 흥의(興義)로 고치고 역리에게까지 특전을 베풀어 주현리(州縣吏)와 같이 대우하였다.

 

강감찬은 공을 이루고 물러가기를 원하여 표(表)를 올려 청로(請老)7)를 하매 현종은 윤허치 아니하고 사궤장(賜几杖)8)에 3일1조(三日一朝)를 명하며 검교태위문하시랑동내사문하(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 평장사천수현(平章事天水縣), 개국남(開國男)에 식읍 300호를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호(推忠協謀安國功臣號)를 사(賜)하였다.

7)청로(講老): 늙어서 퇴직을 원함. 치사(致仕).

8) 사궤장(賜几杖):늙어서 관직을 물러가는 대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함.

 

11년에 치사(致仕)를 허할새 다시 특진검교태부천수현(特進檢校太傅天水縣) 개국자식읍(開國子食邑) 500호를 봉하고 21년에 문하시중에 진(進)하였으며 덕종 즉위 초에 다시 개부의동삼사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시중, 권수군개국후 식읍 1천 호를 봉하였다. 동년(덕종 즉위의 해. 1031) 8월에 84세로 졸하매 인헌(仁憲)이라 시(諡)하고 뒤에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종(제11대)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의 직을 증(贈)하였던 것으로서 후세에 그를 강태사(姜太師)라 부르게 된 것이다.

 

강감찬은 체구가 비록 추왜하고 의상도 변변치 못하여 외관이 자못 초초하였으나 빛을 가다듬고 조정에 서서 큰일에 다다라 대책(大策)을 결할 때에는 홀연히 국가의 주석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천성이 청검(淸儉)하여 산업을 영(營)치 아니하고 출장입상(出將入相)에 오직 봉공(奉公)의 정신으로 종시하였으니 일찌기 전토(田土) 12결을 국가에 바쳐 군호(軍戶)에게 배급하였고 경도(京都)의 망비 시설이 소루(疎漏)함을 염려하여 나성(羅城)을 쌓게 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외구를 물리쳐 국위가 밖에 빛나고 국내에는 민물(民物)이 은성(殷盛)하여 중외(中外)가 안온하매 국인은 이를 강감찬의 공덕이라 하여 숭앙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한다.

 

그는 치사(致仕) 후에 성남별야(城南別野)에 돌아가 야학(野鶴)과 벗을 삼고 저서에 뜻을 붙여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을 저술하였으나 모두 지금에는 전하지 아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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