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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40.고려-이녕(李寧)

구글서생 2023. 5. 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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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녕(李寧)

 

이여성(李如星)
1901∼?. 화가. 호 청정(淸汀), 경북 생. 대구 청년을 중심으로 혜성단(慧星團)을 조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 복역. 닛교(立敎) 대학 경제학부 중퇴.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조사부장, 편집차장 역임. 좌익활동하다가 월북.저서에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이녕은 고려 인종(1123~1146), 의종(1147~1170) 때 전주인(全州人)으로서 고려 때 가장 널리 알려진 국제적 대화가이다. 그의 천재적 화기(畫技)는 어려서부터도 놀라운 바 있어 화명이 곧 경향(京鄕)을 떨치게 되자 당시 추밀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은 그를 발탁하여 입송 사절단 수행원의 일인으로 삼았다. 당시의 송나라는 국내 화평, 역대 제왕은 문치주의로써 문화를 숭상하며 예술을 애장(愛獎)하여 감상적 회화의 발달은 전고(前古) 미유(未有)의 황금기를 이룬 때이니 천재화가 이녕의 입송은 실로 그 용무지지(用武之地)1)를 얻었음이라 할까.

1)용무지지(用武之地): 군사를 쓸 만한 곳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화가로서 활동할 만한 곳을 이름.

 

특히 송의 휘종(徽宗;1101~1125)은 그 자신이 유명한 산수, 翎毛화가일 뿐 아니라 이당(李唐), 이적(李迪), 이안충(李安忠), 소계신(蘇溪臣), 최백(崔白), 최각출(崔慤出), 오원유(吳元瑜) 등등 명가가 제제(濟濟)하여 그 시대의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은 융성을 극한 자이었나니 혈혈편방(孑孑偏邦)2) 이녕의 기유(覬覦)3)할 바 아님은 물론이었다.

2)혈혈편방(偏邦): 궁벽지고 낯선 곳에서 홀로 있음.

3)기유(覬誠):분에 넘치는 희망을 품음.

 

 

그러나 이녕의 비상한 천재를 본 휘종은 대국의 긍지를 가질 사이도 없이 그만 솔직이 머리를 숙이게 되어 그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왕가훈(王可訓), 진덕(陳德), 지전종인(之田宗仁), 조수종(趙守宗) 등으로 하여금 녕에게 화기를 배우도록 명하며 녕이 그린 <조선예성강도(朝鮮禮成江圖)〉를 보고서는 감탄불이(感嘆不已)하여 금기능견(錦綺綾絹)으로 예우를 극진히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예술이 얼마나 휘종 화원 제가(畵院諸家)의 그것을 압도하였던가 하는 것을 십분 규예(窺睨)4)할 수 있다.

4)규예(窺睨): 극진히 살펴봄.

 

송대는 지나 회화의 황금기요 휘종대의 그것은 그중에서도 최성시니 그때 그들을 누르고 스스로 스승이 된 그의 예술을 어찌 위대치 않다고 할 것이냐. 고려 인종도 녕의 회화를 사랑하여 그가 불법(不凡)한 화가인 줄은 알았으나 왕이 송상(宋商)의 바치는 우수한 회화를 중화기품(中華奇品)이라 하여 이녕에게 과시하였을 때

“이것은 신의 그림이올시다."

라 한 녕의 답에는 끝내 믿지를 못하고

“녕이 그림을 들고 뒷장을 뜯으니 과연 성명이 있었다.”(편집자 역)

한 것을 보고서는 비로소 놀라 더욱 그를 애행(愛幸)하였다.

 

이로써 보면 그의 회화는 내외 독보, 고려 예술을 위하여는 실로 만장의 기염을 토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광필(光弼)도 비상한 화재가 있어 명종은 그를 사랑하던 나머지 공을 지어 벼슬을 주며

“광필은 내 나라를 영화롭게 한 자이니 광필을 미(微)하게 하면 삼한도화(三韓圖畵)가 거의 끊어질 것이 아니냐.”

하였다.

녕은 또 그같은 아들을 두었으매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자못 행복하였다고도 할 것이지만 그가 그린 고려내합(高麗內閤)의 수많은 걸작도 금(金)·원(元)의 병선兵燹)5)에 모조리 灰土로 화하고 이제는 황대패초(荒臺敗礎)에 추초(秋草)만 쓰러져 있을 뿐이니 그는 또 가장 불행한 화인(畵人)이라고도 할 것이다.

5)병선(兵燹): 전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화재.

 

그러나 이제 와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의 화풍을 상상하여 본다면 그는 원체 화풍(院體畫風)의 북화 계통으로서 거기서 고려인 독자의 모티브가 있었고 자가 특수한 筆韻이 있었기 때문에 원체화의 아카데미즘에서 일단 비약한 회화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 어찌 조단(早斷)할 바이리오. 다못 북송화(北宋畫)와 고려미술 유품에서 얻은 토막토막의 개념을 거두어 내린 한 막연한 추정일 따름이다.

 

(참고서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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