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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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조선-박연(朴堧)

구글서생 2023. 5. 9.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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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박연(朴堧)

 

안확(安廓)
1884∼?. 국학자. 호 자산(山). 서울 출신. 니혼(日本) 대학 졸업. 청년연합회 잡지」, 「신천지」등의 잡지사 주간 역임. 저서에 「조선문학사」, 「수정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시조시학(時調詩學)」, 「조선문명사」등이 있음.

 

 

 

1. 출생과 성격

 

공의 초명(初名)은 연(然)이요 연(堧)은 후에 개명한 것이며 자는 탄부(坦夫)요 호는 난계(蘭溪)니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그 증조부로부터 그 친자(親子)까지의 대계(大系)는 아래의 표와 같다.

 

순(純;정랑) -시용(時庸;직강) - 천석(天錫;좌윤) - 연(堧)

1자 맹우(孟愚)

2자 중우(仲愚)

3자 계우(季愚)

1녀서 조주(趙注)

2녀서 권치경(權致敬)

3녀서 방순손(房順孫)

4녀서 최자청(崔自淸)

 

공은 고려 말엽의 우왕 4년(1378)에 생하니 예술상 천재의 사람이라. 고로 그 체질부터 이격(異格)을 부(賦)하여 총명이 절인(絶人)하며 겸하여 성천(性天)은 순아(純雅)한 덕량(德量)이 있었다. 급기야 장성하여는 그 소질이 점차 의표(儀表)에 나타나 덕기(德器)가 응중(凝重)하고 체모(體貌)가 심륭(甚隆)하여 중인(衆人)에게 사범의 인격으로써 앙모(仰慕)함을 수(受)한지라.

1)응중(凝重):바르고 묵직함.

 

 

2. 사상과 출세

 

공의 문벌은 비록 혁주(赫胄)2)가 아니나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용종인지(龍踵麟趾)3)로서 정치를 지도하고 국민생활의 안녕을 도(圖)하던 조선(祖先) 전래의 명예심이 그의 유전성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제세안민(濟世安民)에 유의하여 어떠한 경우든지 국가 국민의 이복(利福)을 위하는 사업에 종하기로써 지(志)를 입(立)할새 당시 여말에 세태가 분란(奔亂)하고 만사가 창황하여 인심이 극도로 요동되었으나 공은 안연(晏然)히 단좌하여 널리 재적(載籍)을 박구(博究)하고 전례(典禮)를 고찰하여 써 인도대의(人道大義)의 만선(萬善)을 재량하고 있었다.

2)혁주(赫胄): 빛나는 가문.

3)용종인지(龍踵麟趾):용의 발과 기린의 발, 곧 위대한 자취가 뻗어 있는 것.

 

그러나 공의 사상은 유검각주(遺劍刻舟)로 구습을 주수(株守)함이 아니요, 신도덕 신사상을 실행함에 있었다. 그 신사상, 신도덕은 무엇인가.

자전(自前)으로 여조 일대에 이르기까지 불도(佛道)가 왕성하여 그의 말폐(末弊)가 윤강(倫綱)을 난(亂)하고 인심을 멸하매 안문성(安文成)이 기(起)하여 유교의 신학술 신사상을 전파하여 국민을 증구(拯救)4)하는 운동이 있었으니 공의 신사상은 즉 이 신유학(新儒學)의 계통으로서 불(佛)을 배(排)하고 인도 정의를 취한 것이다.

4)증구(拯救):건짐. 구조함.

 

이태조가 등극하여 신사상으로 대정치의 책(策)을 운(運)하기는 즉 공의 15세 때로서 그의 지각이 성숙하던 때니 공은 이로부터 더욱 배불숭유의 신사상이 태산같이 견고하여 그로써 이풍역속(移風易俗)의 대이상을 강구하였다. 태종 11년 신묘에 진사로 급제되어 집현전 교리로부터 시강원(侍講院)에 입(入)하여 세자 수학에 강의(講義)를 담(擔)하게 되니 이것이 즉 공의 출세 초로서 자기의 평생 사상을 발휘하는 문로(門路)에 취한 것이니 당시 공의 상소문에

“바라옵건대, 성조(聖朝)가 새롭게 나라를 열어 예악(禮樂)을 일으켜 순치(純治)하고자 하였으나 개혁 초기에는 속습이 존재하고 더우기 폐조(廢朝)의 나머지 기풍마저 있으니 심히 개탄할 만한 일입니다. 이제 이 교가 백성의 마음을 유혹하여 함정에 떨어뜨리고 심지어 인가(人家)의 상제(喪祭)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술을 따라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풍(夷風)에 의한 난세(亂世)가 심합니다. 나라의 법전이 이 폐륜의 습속이 심함을 고칠 수 없음은 성세(聖世)의 풍화가 아닙니다. 청컨대 관청으로 하여금 이교의 이풍(夷風)이 민중을 유혹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금하도록 허락하여 주시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반포하여 나라의 예를 바로 하게 하소서.” (편집자 역)

에 의거하여도 공의 사상을 가히 추측할 것이다.

 

 

3. 음악의 사상

 

당시에 불교로 인하여 멸패(蔑敗)된 윤기(倫氣)를 회복함에는 반드시 신도덕의 예를 흥(興)함이 주장될 것이나, 그러나 예는 악(樂)을 합하여야 원만한 인심을 중화하는 것이니 고로 예(禮) 밖에 악을 정(正)치 아니하면 불능이라.

그것이 어떤 것인가. 예를 정(靜)이라 하면 악은 동(動)이요, 예를 도리(道理)라 하면 악은 도술이라. 즉 인정의 풍화상(風化上) 발동으로써 도덕에 끼치는 영향은 가무 음악을 소(紹)함이 중대한 관계를 유(有)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와 악은 인심의 중화물로서 예를 주(主)하는 일방에 악을 병시(併施)치 아니하면 인도를 교정하기 불능이다. 공의 신교화에 대한 정견(正見)은 즉 여기 있으니 이의 관찰은 현대정치에도 부합된 의사이다.

 

인심의 중화

(1) 인륜(人倫) 예

(2) 인사(人事) 악

 

그런데 예악을 정(正)함에 취하여 그 난이(難易)를 양(亮)할진대 예는 목도(目睹)에 기(記)하기 용이하므로 지례(知禮)의 진유(眞儒)는 다(多)하되 악은 이문(耳聞)에 찰(察)하기 지난하므로 성악(成樂)의 군자는 핍(乏)한지라. 고로 공의 입지(立志)는 용이한 예(禮)를 위함보다 지난한 악(樂)을 자담(自擔)함이 그 본의였던 것이다.

 

1) 그 상소의 일절

 

“이로써 예를 아는 진유(眞儒)는 혹 있으되 성악(成樂)의 군자는 대대로 없읍니다. 사람이 악(樂)을 갖추지 못하면 예가 홀로 행하기 어려운바 삼대(三代)가 지난 후에도 옛것에서 얻지 못함은 그 예악이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제 5례(五禮)가 구차히 갖추어지고 6율(六律)이 모두 무너졌으니 어찌 성대(聖代)의 흠이 되는 일이 아니리까?” (편집자 역)

 

그리하여 공은 약관 때로부터 음악상의 지식을 정통한 공부가 있었다. 공이 그 음악에 유의함은 한갓 예(禮)의 부속물로서 함이 아니라 당시에 예도 망하고 악도 역시 망하였다. 고로 그 산망(散亡)한 악을 전문적으로 교정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 사정이 공의 책임을 돈독한 것이다.

 

본시 자래(自來) 음악은 신라 때로부터 본악(本樂)과 당악(唐樂)을 병용하여 악기도 50수종이요, 합주도 일시에 천 수십 인을 용(用)하여 대대적 성황을 이루더니 여조 예종 때에 송의 아악을 수입한 후로부터는 혼란이 생긴 중에 불도의 잡희(雜戱)로 종(從)하여 본정신을 실하고 기교로만 위주하며 가사에 있어서도 〈동동(動動)〉, 〈한림별곡(翰林別曲)〉,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만전춘(滿殿春)〉 등 같이 음왜희압(淫哇戯狎)5)을 위주하며 그 문장도 극히 야비하였다.

:음란한 소리 왜

5)음왜희압(淫吐戱狎):음란한 소리로 희롱함.

 

<쌍화점>의 일절

“삼장사(三藏寺)에 불혀려 가고신대

그 절 사주(寺主) 내 손목을 쥐여이다”

 

<만전춘>의 일절

“어름 우희 댓닢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든 오늘밤에 더디 새오시라”

 

그러므로 공의 흉중에는 예(禮)보다 더욱 악(樂)을 수정하여 풍화를 신치(新治)하는 것이 일대 급무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음악상의 지식을 해득하기에 입설지성(立雪之誠)을 다하니 당시 조정에는 자기보다 선배인 맹정승(孟政丞) 고불(古佛)이 지음(知音)하는 명예를 유(有)하나 우월한 물망은 오직 공에게 귀(歸)하였다.

 

 

4. 악기 신조

 

음악에 대한 개조는 이태조 등극 이후에 제례와 조의(朝儀)를 위하여 초년부터 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鄭道傳)은 고전을 수습하고 민안인(閔安仁)은 악기를 수리하며 또한 명(明)의 악기를 구래(求來)하여 신개조를 경영한 일이 있다. 그 결과 세종 6년에 비로소 14종의 악기를 신조하였다.

 

그러나 그 신조는 정확한 표준이 없이 명의 악기를 모조함에 불과하더니 세종 7,8년에 조율의 표준을 득(得)하니 즉 해주에서 거서가 생(生)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산(産)한지라. 자고로 천산물의 거서는 율관(律管)을 준(準)하고 지산물의 경석은 성음(聲音)을 조(調)하여 천지조화로 치던 것이다.

그중에 거서란 것은 1각(一殼) 안에 2립(二粒)이 유(有)한 자로서 천지음양의 조화적 물(物)이라 하여 그 1립의 장(長)으로써 척도를 삼고 또 의외로 그런 비상한 물종(物種)이 천연적으로 산출함은 상서라 하여 비상한 호감을 유(有)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정치에 대한 관념이 자고(自高)하여지고 동시에 대개혁을 행코자 하니 세종의 일반 대사업을 기(起)한 동기는 즉 이에서 시작한 것이다.

 

세종이 거서로써 음악의 대개조를 작(作)키 위하여 그 책임자를 구함에 당하여도 묘당(廟堂)의 공론이 일제히 공에게 집중되니 이제야 공의 그 포부를 달성함은 이때에 출발한 것이다.

 

공이 이 책임을 담(擔)한 후에 일반 악기를 조사해 보니 본래의 악기는 새로이 명의 악기까지 모두 오천(誤舛)6)이 극하여 일물(一物)도 협음(協音)되는 것이 없는지라.

6) 오천(誤舛): 틀림.

 

이것이 여간 큰 문제가 아닌 동시에 여기 착수하자면 근본적으로 신개량을 행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므로 공은 범위를 크게 잡고 정사농(鄭司農), 정강성(鄭康成), 사마천(司馬遷), 두우(杜佑), 마단림(馬端臨), 진상도(陳詳道), 오원장(吳元章), 진원정(陳元靖), 채서산(蔡西山) 등의 설과 「진양악서」, 「율려신서 (律呂新書)」 등을 고협(鼓篋)7)치 않은 게 없고 실지로는 와(臥)나 좌(坐)나 심흉(心胸)을 盡하여 박자를 조(調)하여 구순(口脣)을 용(用)하여 음계를 협(協)할새 이론이든지 실지든지 성력(誠力)과 열정을 다하였다.

7) 고협(鼓篋):학과가 시작할 때 북을 쳐서 학생을 모아 놓고 책상자를 열어 책을 꺼낸다는 뜻으로 곧 학습을 시작함을 이름.

 

그중에도 가장 고심을 용(用)한 것은 율관(律管)의 제정이다. 율관이란 것은 음의 고저청탁을 정하는 것인바 그 법은 황종음(黃鐘音)8)을 기초로 하는데 황종음은 1척 되는 죽관(竹管)에서 발하는 음을 말함이다. 고로 초차(初次)에 척(尺)을 정함이 선결문제인데 1척은 즉 거서 1립의 장(長)을 90배 하는 것이나 지금에 해주 거서로 한즉 황종음에 협하지 않는지라. 그리하여 그 적당한 자를 득키 위하여 각지에 그것을 배양하여 누누이 실험하였으나 종내 불협에 귀(歸)하였다.

8)황종음(黃鐘音):12율의 하나인 양률(陽律).

 

그 고심의 결과 성음의 고하(高下)는 세세가 차이하여 중국율이 가(假)라 할 수 없고 조선의 거서가 진이라 할 수 없이 시대인의 음성을 표준함이 타당함을 각오하였다.

 

그리하여 명국(明國)의 황종음에 합할 만한 관(管)을 택정(擇定)하여 그를 1척으로 정하고 그 척도를 이(以)하여 악기를 제조하게 되니 율관은 12율의 정수(定數)에 의하여 12관을 작(作)할새 수학의 공식으로써 황종관 척도로 소위 삼분손익(三分損益) 즉 삼분지 일을 가우감(加又減)하여 차제로 12관을 정하니, 즉 황종관 길이에서 그 삼분지 일을 감하여 6촌으로 임종관(林鐘管), 임종관에서 그 삼분지 일을 가하여 8촌 3분, 7·6으로 대려관(大呂管)을 정한 예라.

 

제1음 황종 1척(곡척 1·2)

제2음 대려 8촌 3분 7·6

제3음 태주 8촌

제4음 협종 7촌 4분 3·7·3

제5음 고선 7촌 1분

제6음 중려 6촌 5분 8·3·4·6

제7음 유빈 6촌 2분 8

제8음 임종 6촌

제9음 이측 5촌 5분 5·1

제10음 남려 5촌 3분

제11음 무역 4촌 8분 8·4·8

제12음 응종 4촌 6분 6

 

이 12율관을 표준하여 일반 악기를 제조할새 이 졸업(卒業)은 범 7년에 이르러 완성하니,

 

현악기 10

금(琴), 슬(瑟), 대쟁, 아쟁, 당비파(唐琵琶), 향비파(鄕琵琶), 월금(月琴), 해금, 현금(玄琴), 가야금

 

관악기 23

관(管), 약, 화(和), 생(笙), 소(簫), 연(筵), 운, 호, 당적(唐笛), 대금, 중금, 소금, 통소(洞簫), 태평소(太平簫), 가, 동각(銅角), 당필률, 향필률, 소관자(小管子), 목각(木角), 나(螺)

 

타악기 32

특종(特鐘), 특경(特磬), 편종(編鐘), 편경(編磬), 방향(方響), 건고(建鼓), 진고(晋鼓), 삭고(朔鼓), 응고(應鼓), 뇌고(雷鼓), 영고(靈鼓),노고(路鼓), 뇌도, 영도, 노도, 도, 절고(節鼓), 장고(杖鼓), 갈고(羯鼓), 무고(舞鼓), 교방고(敎坊鼓), 중고(中鼓), 용고(龍鼓), 부, 축(柷), 박(柏), 어, 대금(大金), 소금(小金), 정라(鉦鑼), 동발

 

모두 65종이라. 그런데 그 12관은 금일 음향악으로 보면 조금 불합(不合)한 점이 있으므로 반드시 30/13을 표준하여야 될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경방(京房)의 언(言)에도

“죽성 불가(竹聲不可)하므로 조절해야 한다(以度調).”

라 하고 「노사(路史)」 및 「수서(隋書)」에도 고황종(高黃鐘)을 3촌 9분으로 작(作)한다는 설이 있는데 박난계(朴蘭溪)의 작(作)은 여하한 산법(算法)으로 한 것인지 그의 유물이 지금에 전하지 아니하여 자세치 못하다(금일 아악부에 보존한 악기는 최근의 作物이다).

 

 

5. 악기의 유래와 용법

 

공의 신조(新造)한 악기를 용(用)하여 1곡을 주(奏)하는 법은 각기 악기의 성능에 의하여 선율을 주함이 아니라 동일한 보조로 일제히 진행함이 본의(本意)로 되어 극히 단조(單調)로 행하는 것이니 이는 즉 고악(古樂)의 고악된 본색이라.

그러나 그 제주(齊奏)에 취하여는 약간의 규정이 있으니 타악기는 박자에 당하여 타(打)하는 것인데 특히 종경 또는 방향의 3종은 주요 선율의 위력을 여(與)하는 것이요, 현악기의 아쟁과 해금은 종경의 다음에 선율을 주하는 것이요, 관악기의 대금, 필률 등은 주선율을 세분하여 기교화하는 것이요, 그중에 슬(瑟) 또는 생(笙)은 화성(和聲)을 발하는 것이며 고(鼓)는 주박자를 타(打)하고 장고 및 갈고는 주박자를 세분하는 것이다.

 

신조 악기는 물론 창작품은 아니나 재래물을 일체 학술에 의하여 본상(本像)대로 하고 전대에 사용함이 없던 신기(新器)는 9종을 가조(加造)하였으니 이것이 완비한 것이다.

악기 일반에 취하여 그 소자출(所自出)을 말하면, 조선 본래물은 대금, 중금, 소금, 소관자, 현금, 가야금, 향비파, 초적 8종인데 가급적 조선 고래(古來物)을 멱득(覓得)9)하기에 용력(用力)하였으며 중아시아 및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지방의 물(物)은 태평소, 가, 필률, 나, 대쟁, 아쟁, 비파, 월금, 해금, 장고, 갈고, 방향, 동발, 박, 정, 대금, 소금, 나 등으로서 원지(遠地)에서 내(來)한 것이다.

9)멱득(覓得): 찾아서 얻음. 찾아냄.

 

위의 2종을 제하고 그 나머지는 다 중국 본토물인데 이는 소위 아악이란 곡조를 주(奏)할 때에 전용(專用)하고 그외 악곡에는 3처물(三處物)을 거진 통용하게 되었다.

 

 

6. 아악 교정과 음계

 

악기의 제조를 필한 후에 악곡을 교정함에 입(入)하니 그 교정의 근거는 음계에 있으며 그 음계는 즉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5음이요, 이 5음은 자연원리와 인사윤리에 배합한 것이다.


(音)

(時)
5행
(象)
방위 5색
(色)
5성
(性)
5정
(情)
5사
(事)
5미
(味)
5취
(臭)
5장
(臟)

(氣)

(語)
長夏 中氣
西 陰中
陽中
陽正
陰正

 

1) 5음과 7음

 

5음을 수리상으로 말하면 공식이 있다. 즉 최저음은 궁이요 최고음은 우이다. 궁과 우의 간(間)을 5단으로 나누니 그 5단의 구성된 관계는 삼분손익법이란 공식으로 계산된 것이다. 9의 방승(方乘)인 81로써 궁을 정하고 궁수에서 그 삼분지 일을 감하여 치를 정하고, 치에서 상, 상에서 우, 우에서 각을 정하니

궁 9×9=81

치 81(궁)-(81÷3)=54

상 54(치)+(54÷3)=72

우 72(상)-(72÷3)=48

각 48(우)+(48÷3)=64

 

그러나 각·치 간과 우·궁 간은 각각 상거(相距)가 소원하여 다시 그간에 1음씩을 가하되 각·치 간에는 변치(變徵), 우·궁 간에는 변궁(變宮)이라 칭하는 것을 가입하니 전자 5음과 다음 2변음을 가하여 합 7음으로 정한 것이다. 그 수리를 말하면,

변궁 64(각)-(64÷3)=42

변치 42(변궁)+(42÷3)=56

 

이것을 현대 음향학의 공식으로 해석하면

음정 1 9/8 81/24 729/512 3/2 27/16 243/128 2
0 1.02 2.04 3.06 3.51 4.53 5.55 6.00
7음의 이름 변치 변궁

즉, 서양 음악의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7음과 같다.

 

2) 12율

 

12율은 음 자신의 진동수에 응하여 명(名)한 것이니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측, 남려, 무역, 응종 등이니 이는 서양악의 7음에 영변음(嬰變音) 5를 합한 12음과 같다. 그런데 이 12율은 1년 12월에 배합하여 다시 음양으로 나누어 6율양(六律陽) 6여음(六呂陰)이라 한다.

3) 조(調)와 균(均)

 

7음 12율을 기본하여 악곡을 작함에는 조와 균이 있는데 조라 함은 7음계가 변하는 것을 말함이요, 균이라 한 것은 12율의 기조(基調)됨을 말함인바, 5조 60균으로 되니 흡사 서양의 피타고라스의 선법(旋法)과 동일하다. 이 조와 균의 내부는 번다하여 여기에는 약하겠다.

 

 

7. 가무와 곡조

 

공이 악곡 개정에 있어 가장 용력(用力)한 것은 아악이다. 어찌하여 아악을 위주하였느냐 하면 이는 제례와 조회(朝會)의 의식을 위함이라. 그리하여 당(唐)으로부터 명(明)까지의 아악을 조사하니 전부 오천(誤舛)이 되었으매 이를 그대로 사용하기는 도저히 불가한 것이라. 고로 이를 근본적으로 혁신치 아니하기 불가한 의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 혁신한 근거는 즉 위에 보인 7음 12율과 조법, 균법으로써 한 것이다.

 

1) 무(舞)

 

무는 고대로부터 문무 2종이 있어 제례와 조회에 다 이것을 행하니, 이 무의 법은 12법이 있었던바 이것을 기본하여 각종 무를 작출하니, 상전세 (上轉勢), 하전세(下轉勢), 외전세(外轉勢), 내전세(內轉勢), 전초세(轉初勢), 전반세(轉牛勢), 전주세(轉周勢), 전과세(轉過勢), 전유세(轉留勢), 복도세(伏睹勢), 앙첨세(仰瞻勢), 회고세(回顧勢) 등이 그것이다.

 

2) 가(歌)

 

가에 있어서는 8법이 있었는데, 거중구(据中矩), 구중균(九中鈞), 단여관주(端如貫珠), 하여타(下如墮), 하곡여절(下曲如折), 상여항(上如抗), 상곡여절(上曲如折), 지여고목(止如稿木)이것으로써 표준하되 악(樂)과 가(歌)를 합주함에는 가는 악보다 고음을 용(用)하여 음양이법에 합케 하였다.

 

3) 악곡

 

악곡도 공자묘(孔子廟), 종묘, 산천(山川), 천(天), 지(地), 사직, 농(農), 잠(蠶) 등 신(神)의 위격(位格)에 따라 각이한 바, 그 세조(細條)에 입(入)하여 정연(井然)한 곡조가 자재(自在)한 것이라. 이 세밀한 조건을 학리(學理)에 의하여 일병 교정(一併較正)하였다.

그런데 공은 전연 존고주의(尊古主義)가 아니요, 가급적 인정(人情)을 표서(表敍)함에 적당한 것이면 고금의 법을 불고하고 이용하였나니

 

“가로되 중고(中古) 이래로 그 법은 당상당하(堂上堂下)의 악(樂)을 침변하니, 비록 그 수가 다르다 하나 각기 8음은 스스로 능히 장(章)을 이루매 노래는 이에 있지 아니하다. 비록 상고(上古)의 제(制)가 아니어도 조리의 엄밀함과 소리 모양의 성함을 해치지 않고 또 가로되 금일에 악을 쓰는 법은 고문(古文)이 후세인들에게 끼친 바에 부합하지 않으니 마치 사청(四淸)을 써서 북을 꾸미는 유의 것과 같음이 많다. 그런즉 이제 조회의 악은…단지 그 8수의 다소를 열거하여 설치하면 근거가 없으므로 불가하니, 만일 수제(隋制)에 근거해 각각 갖추어 나열하면 조정의 협애함이 원나라 제의 폐고(弊姑)를 담당하지 못하리라.”(편집자 역)

 

이로써 보면 공이 예술의 진리와 세태의 변천을 각오하여 이(理) 중에 변(變)이 있고 변 중에 이가 있게 함을 가히 추지(推知)할지니라.

 

 

8. 향·당악(鄕唐樂)의 음계와 정오(正誤)

 

당시에 작곡과 신가사(新歌詞)는 세종대왕이 집필한 것인데 그 작곡 중의 아악 수종은 주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있는 곡조를 응용한 것이요, 아악 이외의 곡조는 당악, 향악의 2종으로 나눈바, 즉 종묘연회악 등이 그것인데 이 향·당악을 수습하여 교정한 것은 전혀 공의 연구에서 출(出)한 것이라. 그 고곡(古曲)을 교정한 근거는 특별한 명칭의 음계가 있으니 아래와 같다.

조선의 특별 명칭 균(均) 궁조(宮調) 상조(商調) 각조(角調) 우조(羽調)
樂 時 調 一指 夾鐘均 中呂宮調 雙 調 雙 調 角 中 呂 調
二指 中呂均 道 調 宮 小 石 調 小石角調 正 平 調
三指 林鐘均 南 呂 宮 歇 指 調 歇指角調 高 平 調
四指 夷則均 仙 呂 宮 商 調 商 角 調 仙 呂 調
羽調 五指 無射均 黃 鐘 宮 越 調 越 角 調 羽 調
八調 六指 黄鐘均 正 宮 調 大 石 調 大石角調 盤 涉 調
邈調 七指 大呂均 高 宮 調 高大石調 高 石 角 高盤涉調

이 28조는 중아시아의 구자국(龜玆國)의 물(物)로서 북주(北周) 무제(武帝) 때에 유입된 것인바, 이것으로써 당악의 근본을 삼은 것이다. 향악, 즉 조선 본래악은 5음을 용(用)하였으나 그 음계는 최고음과 최저음을 배합한 선율(즉 우조)을 취하여 그것을 아악 경위(經緯)로서의 7음으로 화하였다.

 

향악 음계

7 6   5   4   3 2   1
변음 변음
       

 

금일 양악(洋樂)으로 말하면 ‘띄’에서 기(起)한 음계와 같다. 이 새로 구성한 7음계에서 다시 5음으로 된 조를 분석하면 아악조에 합한 치조와 우조의 2조가 출하니 고로 이 치·우 2조로써 향악 작곡의 근본을 삼은 것이다(단 향악 음계는 나의 견해다). 이 원리에 의하여 고곡(古曲)을 조사하니 산란(散亂)이 태심(太甚)하여 정리하기에 극히 곤란을 감(感)하더니 나중에는 부득이 4조의 방법을 설(設)함에 귀(歸)하다.

 

① 의자(疑者)는 궐지(闕之)하나 다시 유실치 않도록 보존하여 후일의 참고에 공(貢)케 하고

② 실망(失亡)한 가사는 중외(中外)에 광고하여 상(賞)으로써 사장(私藏)을 발견케 하고

③ 오류된 것은 원리에 의하여 개정하고

④ 오전(誤傳)이 된 것이라도 영위일법(永爲一法)이 되어 졸변(卒變)키 불능한 것은 대위(大違)가 없는 한에서 시행을 허한 것이다.

 

“가로되 그 악은 총 백여 편에 이르나 우리 조(朝)의 공인(工人)들이 해석하는 것은 다만 30여 성이요 나머지는 다 그 악보를 밝히지 못했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이치가 있으나 빠르고 느린 마디를 알지 못함을 한탄하여 더불어 아는 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 가로되…악보의 법이 아직 있다 해도 그 가사의 구본은 반드시 전사되어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 터이다. 원컨대 중외에 영을 내려 아조의 옛 가곡 모두와 옛 본을 구하여 증정하는 자는 상을 주고 직(職)을 주어 구악(舊樂)의 빠진 것을 다 채우게 하소서.

 

또 가로되 그 궁조라 칭하는 것은 실은 궁이 아니요 그 우조라 칭하는 것도 또한 우조가 아니다. 신이 이제 자세히 그 성보(聲譜)를 다 살피고 율의 이름을 고치고 그 지법(指法), 곡조를 또한 밝힌즉 궁을 5음에 속하게 하여 서로 문란하지 않게 하였으니 이 역시 금일에 소신이 찬록(纂錄)한 것의 대강이다.”

 

 

9. 가극(歌劇)과 무극(舞劇)

 

가와 악과 무를 합하여 대연예를 작함에는 화려한 무대를 장설(張設)하고 극(劇)을 행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정재(呈才)라 하였다. 이 정재에 용(用)하는 무법(舞法)은 선회무(旋回舞), 대무(對舞), 무릎지피무, 배무(背舞), 도돔무, 발바디무, 협무(狹舞), 협수무(狹手舞), 절화무(折花舞), 사수무(四手舞), 수양무(垂楊舞), 퇴수무(退手舞), 입수무(入手舞), 챌무, 인무(人舞), 대무(代舞), 광수무(廣手舞), 농구무(弄毬舞), 도약무(跳躍舞) 등 19법이 있는데 이 법을 응용하여 각종의 정재를 작한 것은 전대부터 전한 것이 십수 종이 있다.

 

조선 고유물: 처용무, 왕모대(王母隊), 무고(舞鼓), 동동(動動), 검무(劍舞)

중국의 물(物):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악(地球樂), 연화대(蓮花臺), 향발, 곡파(曲破)

 

이것을 일일이 정리하고 당시에 신작(新作)한 것은 금척(金尺), 수보록(受寶錄), 근천정(勤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봉래의(鳳來儀) 등 10종이라. 이 신작품은 가사만 신작한 것이요, 무와 악곡은 고물(古物)을 가감하여 응용한 것이다. 이 구각본(舊脚本)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4종이니 아래와 같다.

 

○ 검무는 신라로부터 전하는 황창랑무(黃昌郎舞)라 하는 것인데 2인의 기녀(妓女)가 남복으로써 양손에 검을 잡고 무사 기풍의 활극을 연(演)하는 것이다.

 

○ 처용무는 신라의 고대작품으로서 무(舞) 9인, 가기(歌妓) 16인, 악대(樂隊) 39인, 의장(儀仗) 10인으로 조직한 것인데 그 개연(開演)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서막―처용곡

② 가(歌)―처용가

③ 무(舞)—오방무(五方舞)

④ 가(歌)—봉황음(鳳凰吟)

⑤ 무(舞)—대무(對舞)

⑥ 가(歌)—진작(眞勺), 봉황음, 북전(北殿)

⑦ 무(舞)-전대회선(全隊回旋), 영산회상가(靈山會相歌)

 

○ 곡파는 「몽량록(夢梁錄)」, 「벽계만지(碧溪漫志)」, 「악부아록(樂府雅錄)」 등 서(書)에 보이는 당의 물(物)로서 무(舞)는 간단하나 그 악곡은 8투수(八套數)로 된바 동양 음악에서는 가장 대곡(大曲)으로 유명하던 것이다.

 

○ 육화대(六花隊)는 홍의(紅衣舞) 3인, 남의무(藍衣舞) 3인, 의장(儀仗) 14인의 20인으로 조직한 것인데 그 연주 순서는

① 서막— 인자곡(引子曲)

② 가— 문답(問答) 6회

③ 무— 유자령곡(唯子令曲), 중강령곡(中令曲)

 

이는 간단하나 금일 가곡과 같은 것인바 6인이 일문일답의 가(歌)를 창하는 것이다. 이런 대곡을 서실10) 치 아니하고 수습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며 조선 고대에도 가극 같은 것이 있던 것을 알게 됨은 실상 공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10) 서실:잃어버림.

 

 

10. 일반 악곡의 통규(通規)

 

일반 악곡을 실주(實)상 진행함에 취하여 가장 긴요한 것은 박자와 절주(節奏)이다. 박자는 고(鼓)로 주(主)하고 그 주박자를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 장고로써 지배하고 절주는 장고와 박으로써 지휘하는데 그중에 중난(重難)한 것은 장고이다. 장고는 5법을 기초하여 1박절(拍節)을 정하고 1박절은 작곡과 같이 악곡에 따라 각이한 타법의 순서를 정한 것인데 일곡에는 수 박절 내지 수십 박절을 용(用)하여 조직함이 있으니 예컨대 〈동동〉은 10박절, 〈북전〉은 32박절로 된 것 같은 것이다. 공은 여기에 관심을 치(置)하였다. 그리하여 일일이 보표(譜表)를 작(作)하여 교학(敎學)과 실주에 편케 하였다.

 

절주에 있어서는 1곡을 3단으로 나누니 초단은 서완(徐緩)하여 만기(慢機) 또는 전강(前腔)이라 하고 중단은 초속(稍速)하여 중기(中機) 또는 중강(中腔)이라 하고 후단은 급촉(急促)하여 수기(數機) 또는 후강(後腔)이라 하니 이를 3기(三機)라 한다. 이 3기법은 1곡의 단락으로 정한 것이나 또한 1곡을 3종으로 별작(別作)하여 만조(慢調), 중조(中調), 삭조(數調)로 함이 있으니 여민락(與民樂)으로 말하여도 그 만조를 양악 보표로 역(譯)하면 아래와 같이 단순하나 중조의 여민락은 그 만보(慢譜)에 다시 장식음을 가하고 삭조(數調)의 여민락은 중조에 또다시 장식음을 첨가한 것이니 이 법이 즉 일반 악곡의 작례(作例)이다. 현금 기생들이 창하는 소위 가곡으로 볼지라도 초에는 만엽(慢葉), 중엽(中葉)이 있었으나 다 산망(散亡)하고 지금은 삭엽(數葉)만 창하는데

최후에 연창하는 농(弄), 악(樂), 편(編) 3종도

점차 속(速)하다가 최후에는 급촉함에 이르니 이것이 역시 3기법으로 된 것이라. 3기법은 전대에는 이것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하여 산란(散亂)에 이르더니 공은 이것을 문서로써 명기하여 정연한 규칙을 입(立)하니라.

 

 

11. 문학과 정조(情調)

 

공의 유고(遺稿) 1책은 시 8수, 소(疏) 39조 및 가훈 등을 수집한 간략한 서(書)이다. 그 내용이 빈약하므로 그 문학의 전모를 규찰(窺察)키 불능하나 그 문장의 대체를 보면 극히 평범하여 순아(純雅)의 미(味)가 있다. 그 시는 단편이로되 그 격은 1수라도 변투(變套)로 된 것이 없고 연과 연이 상계(相繼)하여 율조가 원칙에 합하며 선율의 점(粘)11) 이 시법(詩法)의 정체를 잃지 아니하였다. 또 그 문장에 표현된 정조(情調)는 자기의 본심을 천진(天眞)으로 묘사하였나니 8수 중의 반부 4수에는 백발의 단심(丹心)이 구구(句句)에 함존(含存)하여 연구(捐驅)12)의 성의(誠意)가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의 감격을 동(動)케 한다.

11) ():엉겨붙음.

12) 연구(捐軀): 의를 위하여 몸을 버림.

 

종형차운(從兄次韻)

“저 사람의 나이는 오래되었지만

성대(聖代)는 승평(昇平)13)을 이루다

아직 청강(淸江)의 낚시를 거두지 않고

의연히 푸른 들을 경작하네

청빈한 삶에 마음이 웅장해지고

악(樂)에 뜻을 두니 세상 인연이 가벼워지도다

때늦은 만남을 한하지 않음은

명군(明君)이 노성(老成)을 귀히 여김이로다” (편집자 역)14)

13) 승평(昇平): 태평한 세상.

14)“伊人歲器久 聖代已昇平 未罷淸江釣 依然綠野耕 安貧心力壯 樂志世緣輕 莫恨遭時晚

明君貴老成

 

과교하(過交河)

“푸른 바다의 물결이 현문(縣門)에 닿으니

화봉(華峰)의 푸른 기운 붉은 구름에 비치네(빛나네)

마을 뽕밭을 가는 사람들 아무 일이 없으니

푸른 비단을 우리 군주에게 드리고자 하네” (편집자 역)15)

15)“滄海餘波接縣門 華峰蒼翠暎紅雲 一村桑柘人無事 欲上靑兼獻我君

 

또한 그 거처한 송설당(松雪堂)에 제(題)한 시는

“환한 저 하늘(天章)이 법궁(法宮)에 드리우니

은하수 하늘 따라 밝게 도는 그림자가 화산(華山) 높은 곳에 닿아더라

몸을 의지해 서로 주고받아 전하던 날이여

도(道)와 크나큰 경륜이 조화의 묘를 기리니

천길 우물을 파도 뜻이 아직 깊이 있거든

산을 만들려고 흙을 한 궤 떠도 공은 이지러지지 않도다

구름이 만약 객(客) 태우는 것을 허락한다면

곧바로 원천(源泉)을 찾아 하늘로 가고 싶도다” (편집자 역)

 

자기의 상현궁리(尙玄窮理)16)하던 지취(志趣)가 표출되어 주일무적(主一無適)17)의 심상(心像)이 문자에 인(印)쳐 있다. 그의 조조(慥慥)18) 한성심(誠心)이 신혼(晨昏)에 불식(不息)하여 친(親)을 사(事)함에도 근천(根天)의 효(孝)를 다하였나니 고로 공이 20세 때에 내간상(內艱喪)19)에 정(丁)하여 전후 6년 거려(居廬)20)에 애감(哀感)이 초인(超人)하니 그 효성이 상(上)에 입문(入聞)하여 태종 2년에 효자문(孝子門)을 정립(旌立)한 일도 있었다.

16) 상현궁리(尙玄窮理):현묘함을 숭상하고 이치를 궁구함.

17) 주일무적(主一無適):한 일에만 열중함.

18) 조조(慥慥): 성의 있는 모양.

19) 내간상(內艱喪):어머니의 상사(喪事).

20) 거려(居廬):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지내는 것.

 

 

12. 만세(萬世)의 공덕

 

그의 덕업이 축일(逐日)21)로 고(高)하여 관이 이조판서, 대제학에 승진하더니 천명(天命)이 유한하여 공이 81세에 차세(此世)를 이별하니 때는 세조 4년이요, 서력 1458년이라.

21) 축일(逐日):날마다.

 

상이 그의 공을 기(記)하여 문헌(文獻)의 시(諡)를 추사(追賜)하였다. 말년에 비운(悲運)이 있어 제3자가 사육신과 동절(同節)되고 공도 역시 그 화에 연좌할지나 다행히 삼조원로(三朝元老)로서 면좌(免坐)된지라. 오늘에 오인이 공을 모(慕)할 때는 그런 비운도 위(慰)할 것이 아니요 문헌공의 영시(榮諡)도 하(賀)할 것이 아니라 공의 사공(事功)이 만세에 불후함을 찬송하는 바이다.

 

세종 때에는 국운이 융창하여 인물이 배출할새 명필의 이용(李瑢)과 명화의 안견(安堅)도 있으니 공도 역시 시대적 명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서양 음악의 역사를 보면 15~6세기에 하란사원파(荷蘭寺院派)로 시작하여 학술적 발달을 기(起)하였나니 조선의 음악도 이와 동시에 흥하였으매 이것이 우연치 아니한 사실이다. 고로 공은 실로 세계적 예술의 홍운(興運)이 탄생시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일시적 호운(好運)의 인물이 아니라 만세의 유산을 여(與)한 은인이다. 생각컨대 세종이 28자의 언문으로써 영구의 문화를 기(起)함같이 공은 일물의 척(尺)을 제(制)하여 만사만물의 표준을 지(知)케 하니 이 도량형이 없었더면 500년 문물을 무엇으로써 준측(準測)했었던가.

 

더욱 공이 아니더면 고가(古歌)의 면영(面影)은 구경도 못했을지라. 자래로 유전한 금옥문자(金玉文字)는 피가혹(彼苛酷)한 한문 독살에 멸망을 당하고 근근히 수편의 시가가 고금성석(敲金聲石)22)에 잔명(殘命)을 기(寄)하던 것이거늘, 공이 이를 수습 유전한 고로 금일 오인이 조선(祖先)의 문적(文跡)을 알게 되었나니 공이 이 척도를 제정하고 고가(古歌)를 수습한 것은 실상 음악 정리의 공보다 더 큰 사공(事功)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편죽(編竹)23)의 혜택이 아니랴.

22) 고금성석(敲金聲石):쇠를 두드리고 돌을 울림. 즉 시나 문장의 어울림이 뛰어남.

23) 편죽(編竹):대나무를 엮음.

 

희(噴)라. 공의 덕화(德華)는 난초의 유향(幽)같이 만세에 유(流)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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