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56.조선-장영실(蔣英實)

구글서생 2023. 5. 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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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장영실(蔣英實)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내가 「삼국사기」를 보다가 가장 머리를 숙여 절하고 사모하는 이가 있으니 곧 몇십 장을 없이하여 몇만 말의 찬송을 드날려 늘어놓은 이보다는 어떤 사실 아래에 성명 몇 자나 일 행 미만의 간략한 행적을 적은 이다.

왜 그런고 하니 집 하나를 짓자 해도 거기에는 들보에 기둥에 마루에 서까래에 중깃, 산자, 쐐기, 보임까지, 나무차날, 흙보무라지가 하나도 모자라서는 집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들보가 중하냐, 물론 중한 것이요, 기둥이 중하냐, 물론 중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자. 중깃이 없어도 안 되고 쐐기가 없어도 안 된다. 급기야 집을 이루기에는 한마루가 더 중할 것이 없고 가시새가 덜 중할 것이 없다. 한 몫을 차지하기는 다 한가지요, 한 것을 놓는다면 모조리 놓아야 할 것이다. 내 성주(聖主) 세종임금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장영실에 당해서 더욱 그러함을 느낀다.

 

세종임금은 상하 5천재(五千載) 조선 역사상에 어느 제왕 어느 위인 어느 학자를 다 제쳐놓고 세종 한 분만 내세우더라도 남에게 꿀림이 없을 뿐 아니라 자랑하고 남음이 있다 한다. 그 성행에, 그 재학(才學)에, 그 포부에, 저술에, 창조에, 내치외정(內治外征) 어느 모로 보아서 마음 쓰지 아니한 것이 있으며 해놓지 아니한 것이 있는가.

 

우선 보자. 제 말을 제 글로 적게 된 것이 누구를 말미암았느냐. 고래로의 속용문자(俗用文字)가 있었다 하였지마는 세종의 밝힘이 아니면 정음이 되었겠는가.

호드기, 꽹가리로 엉덩춤이 있었을망정 세종의 다스림이 아니면 조례제향(朝禮祭享)에 아악이 갖추었겠는가.

백초(百草)를 상(嘗)하고 창상(瘡傷)에 침구(鍼灸)가 없기야 했으랴만 임금의 마르잼이 아니었던들 향악의방(鄕藥醫方)이 쉽사리 지어졌으며 학자를 기르고 편찬에 흐뭇해하기가 임금 때에 지남이 없고, 지식을 널리 펴서 영명(靈明)을 파내는 힘은 활자의 사용이요 인쇄의 편리인데 이 인쇄의 불편을 덜어준 이가 세종이 아닌가.

남으로 대마(對馬)와 북으로 야인(여진의 후예로 우리가 ‘되’ 곧 胡라 하였음)을 정벌하여 밖으로 국위를 떨침도 대왕의 사업 중 한 이채 있는 일이다.

 

관상과 측후는 아동(亞東) 여러 민족 중 우리가 최고(最古)한 학술이요 특장(特長)이다. 단조(檀朝)1)의 치리(治理)에 주곡주명(主穀主命)2)이 따로 일조(一條)를 이룸으로부터 그 이(理)를 추(推)하고 그 법(法)을 연(演)하여 경험과 재능이 장족히 진(進)하니 동양 최고(最古)의 경주 천문대(첨성대)는 우리 옛 기술의 나머지 흔적이라.

1) 단조(檀朝): 단군 조선.

2)주곡주명(主穀主命):곡식을 주로 하여 경영되는 농업과 임금의 명령이 주가 되는 정치.

 

이래 바뀌지 않는 술업(術業)이 지날수록 늘다가 세종임금께 와서는 이를테면 더할 나위 없는 대성(大成)에 이르니 혼의(天球儀), 앙부일귀(일시계), 자격루(수시계), 대소 간의대(관측기), 흠경각(다음에서 볼 것임) 등이 그것이었다.

 

장영실은 아산(牙山) 사람이니 세종 때에 상호군(上護軍)이다. 세종께서 백도(百度)를 쇄신하시고 역상(曆象)에 또한 뜻하시어 이에 관한 모든 기구를 제작하려 하실새 정인지·정초로 고전을 계고(稽考)3)케 하시고 이천, 장영실로 공역(工役)을 감독케 하시어 7년의 세월을 지내 공성(功成)을 고하게 되었다.

3)계고(稽考): 옛일을 상세히 살핌.

 

위의 여러 의상(儀象)은 다 세종의 성재(聖裁)에서 나온 것으로 백공(百工)이 하나도 이를 헤아려 만들 리 없는데 오직 장영실이 임금의 뜻을 이어 교(巧)를 부리고 묘(妙)를 피워서 모두 들어맞아 틀림없이 만드니 대왕이 퍽 아끼어 사랑하셨다 한다.

 

이 중에 제일 정교에 극한 것은 천추전(경복궁 내) 서정(西庭)에 세운 간의대이니 1간 소각(小閣)의 가운데에 높이 7척의 지산을 만들고 그 속에 옥루기륜이란 큰 시계를 앉히고 수력으로써 운행하되 금으로 일형(日形)을 만들기 탄환만 하며 5운(五雲)이 산허리로 떠돌게 하고 일환(日丸)이 1일에 1주 하되 낮에는 산 밖에 보이고 밤에는 산 가운데 숨어 출입의 나뉨이 천행(天行)을 준하여 절기에 합하고 일하(日下)에 옥녀(玉女) 4인이 금탁(金鐸)4)을 가지고 동서남북 사방에 입하여 각기 12시를 따라 탁을 울리고 또 그 밑에 청룡, 주작, 백호, 현무 4신이 각기 그 방향에 서서 산을 면하여 있다가 그 시(時)가 되면 그 방향을 향하고 산남(山南)에 고대(高臺)가 있어 거기에 司晨(사신)한 사람이 강사공복(絳紗公服)으로 산을 배립(背立)하고 무사 3인으로 갑주(甲胄)를 갖추어 하나는 종을 들고 동에 가 서향해 섰고, 하나는 북을 들고 서북에 가 동향하여 섰고, 하나는 정(鉦)5)을 들고 서남에 가 동향하여 섰다가 매시(每時)가 되면 사신이 종인(鐘人)을 돌아보거던 종인이 사신을 돌아보고 종을 치며 매경(每更)엔 고인(鼓人)이 북을 치고 매점(每點)에 정인(鉦人)이 정(鉦)을 치고, 그 아래 평지 위에 12신이 있어 각기 그 방위에 엎드리고 각 신의 뒤에 혈(穴)이 있어 상폐(常閉)하였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서신(鼠神)의 혈이 자개(自開)하며 옥녀가 시패(時牌)를 가지고 나오면 서신이 그 앞에 일어나고 자시가 지나면 옥녀가 들어가고 그 혈이 자폐(自閉)하며 서(鼠)가환복(還伏)하고 축시(丑時)가 되면 우신(牛神)의 혈이 자개(自開)하며 옥녀가 나오고 하여 12시를 다 그리 하였다. 또 대 위에 의기를 만들어 그릇북에 궁인이 병을 들고 용루(用漏)의 물로써 따르게 하여 그릇이 비면 의하고 중(中)하면 정(正)하고 만(滿)하면 복(覆)케 하여 천도영허(天道盈虛)의 이를 보게 하고 지산의 주위에는 빈풍 7월시에 의하여 4시의 경(景)을 작(作)하고 나무로 인물, 조수, 초목의 형상을 새겨 절후를 따라 안포(按佈)하여 민생 가색의 어려움을 알게 하였다.

4) 금탁(金鐸):금으로 만든 요령.

5)(): .

이 각을 흠경각이라 하니 이는 「서경」의 “광대한 하늘의 힘으로 인하여 인민에게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을 지시한다”(편집자 역)의 뜻을 취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대왕의 업적의 특별한 것은 측우기이니 동(銅)으로 주조하여 서운관(書雲觀;천문, 역상, 측후를 맡아 보는 관청) 대상(臺上)에 두고 하우(下雨)의 상태를 심시(審視)케 하고 각 도읍에도 이를 비치케 하여 매번 비온 후에 수령이 몸소 심시계문(審視啓聞)6)케 한 것이다.

6) 심시계문(審視啓聞): 자세히 살펴보고 아룀.

 

서양에서는 기기(機器)로 우량을 측정하기가 1639년인즉 조선의 측우기는 이보다 앞서기 근 2세기의 일로서 두말없이 세계의 처음이다. 또 그 기(器)의 정(精)함이 현금의 우량기에 비하여 별차가 없는 바이다.

 

과학문명의 독창적 기기가 남 앞서 이토록 정상(精詳)하기에 이르기는 그 생각이 비록 세종의 성의(聖意)에서 빚어진 것이나 백공(工)의 능히 못한바, 장영실의 운기빙교(運奇騁巧)7)가 아니었던들 얼마나 덜림이 있었을까 한다.

7)운기빙교(運奇驃巧):기이하고 교묘한 재주가 뛰어남.

 

그러므로 세상이 일컫는 바 박연의 악기와 한가지로 장영실은 대왕의 성(盛)한 제작을 위하여 시기를 응하여 난 사람 곧 '때맞춰 난 이'라 한다.

 

아, 장영실, 이 이는 과연 공이 많고 사전(史傳)이 적은 이라 한다. (昭代紀年,연려실기술, 諸臣所撰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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