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성삼문은 절의와 학문 문장에 있어 역사상에 드물게 보이는 대인물임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 바이거니와, 그의 도덕상(강기) 또는 문화상에 끼친 바 영향과 공헌이 막대한 것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천고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을 말할 때에는 이른바 단종의 사육신(死六臣)을 연상케 되며 사육신에는 그의 중심인물인 성삼문을 대표적으로 들게 되는 바이다.
그리고 세계 무비의 완전한 문자인 ‘한글’에도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성삼문의 심혈이 얼마나 경주(傾注)되었는가를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성삼문이 커다란 발자국을 역사상에 남김에는 여러 가지 준비와 조건이 제약되어 있는 것이다.
성삼문의 자는 근보(謹甫;혹은 訥翁)요,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니 태종 18년(1418)에 홍주(洪州) 적동리(赤洞里) 노은동(魯恩洞)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관향은 창녕(昌寧)으로서 고조 여완(汝完)은 여조 우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지문하(知門下)에 올랐다가 포천(抱川) 계류촌(溪流村)에 퇴거하여 만절(晩節)을 지켰으며(시호 文靖) 증조 석용(石瑢)은 이조에 들어 보문관 대제학에 이르고(시호는 文肅이니 獨谷石璘의 아우) 조(祖) 달생(達生)은 관이 판중추(判中樞;시호 襄惠)며 부(父) 승(勝)은 무과 출신이었다(勝의 행적은 아래에 보임).
성삼문은 세종 17년에 생원시에 뽑혀(18세) 동 20년에 하위지(河緯地)와 동방(同膀)으로 식년 정과(式年丁科)에 오르고 동 29년에 중시(重試) 장원에 발탁되었다. 특히 그의 중시 괴과(魁科)는 상례를 깨뜨린 것이니 그와 함께 우등으로 뽑힌 사람이 8명에 달하였으므로 시관(試官)도 고하(高下)를 정하기 어려워 세종께 품달하여 과차(科次)를 정하기로 되었다.
세종께서는 크게 기뻐하시어 8명의 우등자를 불러 친히 재시(再試)를 하실새 성삼문이 전(箋;집현전에서 八駿圖을 올림)을 올려 과연 장원으로 뽑혔다.
1. 그의 집현전 시대
성삼문은 중시 장원에 오른 뒤에 국가 문한(文翰)의 요직을 더욱 띠게 되었으나 그의 명성은 이미 집현전으로부터 날리게 되었다. 원래 집현전은 세종의 아카데미로서 문치(文治)에 힘을 기울이시던 세종은 그의 2년에 집현전을 두어 인재 양성에 심력을 기울이셨다.
그곳에서 총명 재지의 사(士) 20명을 정선하여 두고(인원 수는 때로 증감이 있었으나) 그중에서 10명은 서연(文翰)의 일을, 또 10명은 經筵(경연)의 일을 띠게 하여 학문 문장과 고금 치적을 강구 토론케 하였다. 규례도 자못 엄숙하여 조조(早朝)에 사진(仕進)하고 늦게야 파귀(罷歸)케 되었으며 식사에는 특별히 내관을 보내어 빈객과 같이 그들을 접대케 하고 때로 어찬(御饌)을 내리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주 직려(直廬)1)에 나오셔서 제유(諸儒)들과 경사(經史)와 치도(治道)를 논하시는 등 우악(優渥)한 대우는 실로 비할 데가 없었다.
1)직려(直廬):숙직하는 곳.
세종께서는 집현전 유사(儒士)들이 아침에 들어오고 저녁에 숙직하므로 학문에 전념하는 데에 혹 방해가 될까 하여 겨를을 주어 분번(分番)으로 입직케 하기도 하고 또는 연소하고 재행이 있는 자를 뽑아 산사에 보내어 경사백자(經史百子), 천문지리, 의약, 복서(卜)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마음껏 연구케 하여 뒷날에 크게 쓸 터를 닦으셨다. 그리하여 집현전을 중심으로 울연(蔚然)히 인재가 배출하였으니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개, 정인지, 신숙주, 최항, 양성지, 이석형, 임원준, 서거정 등 제제다사(濟濟多士)였다.
성삼문이 집현전에 선입(選入)케 된 것은 생각컨대 세종 20년 식년과에 오를 때부터서의 일인 듯하거니와, 그의 학행 문장은 일찍부터 동료의 추중을 받았으니 집현전 제사(諸士) 가운데에 '문란호종(文瀾豪縱)’2)한 것이 근보(謹甫) 문장의 특색으로 들게 되었으며 세종 24년에 성삼문은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이석형, 이개 등과 상명(上命)을 받들어 진관사에 올라가 더욱 업(業)에 정진하였다.
2)문란호종(文瀾豪縱):문장이 큰 물결같이 유려하고 호방함.
성삼문은 오랫동안 경악(經幄)3)에서 세종을 모시어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고 세종도 또한 그를 중히 여기셨다.
3) 경악(經幄): 경연(經筵).
세종 만년에 숙환으로 자주 온천에 행행하실 때에도 매양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 최항 등을 변복(便服)으로 가전(駕前)에 따르게 하여 고문(顧問)에 비(備)하셨으며 문종이 세자로 계실 때에 성삼문은 그의 포의(布衣)의 벗이었다.
학문을 즐기시던 문종(동궁)은 달 밝고 고요한 밤이면 한 권 책을 손에 드시고 집현전 직려에 나오시어 숙직 유사와 논란을 하시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삼문 등이 전직(殿直)이 될 때에는 밤이라도 함부로 관대(冠帶)를 끄르지 못하더니(夜不解帶), 한번은 밤이 깊어 야반이 된지라, 그는 동궁의 행차가 계시지 아니하리라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할 때 창 밖에서 근보를 부르시고 들어오시매 황공히 맞아들여 학문을 논란하였다는 것은 천고에 빛나는 미담이다.
일찌기 세종이 희우정(喜雨亭; 양화진)에 노실새 안평대군(세종의 제3자 瑢)이 성삼문, 임원준으로 더불어 강에 임하여 술을 마시며 달을 구경하더니 동궁(문종)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셨다. 쟁반 안에는어제시(御製詩)가 있고 그에 화답하여 시를 지어 드리라 하셨다. 이에 명필인 안평대군은 서사(敍事)의 글을 쓰고 화가 안견이 그림으로 그 광경을 그려 봉화시(奉和詩)를 지어 올렸다. 이 얼마나 화기스러운 일이며 풍치 있는 성사(盛事)이냐.
“공자는 마음 속 깊이 나그네를 사랑하여
호수 위에서 따로이 연(잔치)을 베풀새
달은 대낮같이 밝고 사람들은 옥(玉) 같구나
아래로는 맑은 강물이요 위로는 하늘이며
천한 선비가 올해에 성군을 맞이하니
오늘 행궁(行宮)에서 선인(仙人)이 된 듯하다
산수(山水)의 기이한 장관은 나를 위한 즐거움이니
하물며 궁(宮)에서 내리신 과일과 술 앞에서야 취할 수 밖에”(東宮賜橘題,匪懈堂詩軸)(편집자 역)4)
은 그때 지은 성삼문의 시다.
4)“公子中心愛敬客 爲於湖上別開筵 月如淸書人如玉 下有澄江上有天 賤士當年親遇聖行宮此日試登仙 山水奇觀己爲樂 況承宮橋醉樽前”
그 후 문종 원년 겨울에 왕이 병환에 계실 때에 집현전 제신(諸臣)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을 불러 모으시고 밤이 들도록 담론을 하실 제 동궁(단종)을 무릎 아래에 앉히시고 그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이 아이를 경 등에게 부탁하노라”
하시고 드디어 술을 주실새 어탑(御榻)5)에 내려 평좌(平坐)하시어 먼저 잔을 들으시며 권하셨다.
5)어탑(御楊): 임금이 앉는 평상.
제신들은 술에 취하여 인사를 차리지 못하고 어전에 쓰러졌더니 문종은 제신들을 입직청(入直廳)에 떠메다 눕히게 하고 마침 밤눈이 내려 추운지라, 초피금(貂皮)을 들어다가 손수 덮어 주셨다. 제신들은 술이 깨인 후에 비로소 알고 수은(殊恩)에 감격하는 눈물을 서로 흘렸다 한다
2. 저술
집현전 학사로서의 성삼문은 저술의 명을 받아 이에 종사한 바 또한 많았거니와 그 가운데에도 가장 대서특필할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바친 그의 공헌이라 할 것이다. 세종께서는 우리에게 고유문자가 없기 때문에 사상과 언어를 자유로 적지 못함을 민망히 생각하시고 또 각국에는 각기 고유한 문자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 그것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시어 일찍부터 이에 마음을 두시어 궁중에 국(局;諺文廳)을 베푸시고 친히 성삼문, 신숙주, 최항을 비롯하여 정인지, 박팽년, 강희안, 이개 등 집현전 문신으로 더불어 고심에 고심을 가하여 25년 겨울에 새 문자의 구성 원칙을 정하시고 자모 28자를 안출하시어 훈민정음이라 이름하시고, 다시 제신에 명하시어 음운 자양의 정리 배열과 범례 해설을 가하게 하시어 정묘(精妙)에 정묘를 가한 다음에 동 28년 9월에 정식으로 공포함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이 완성되기까지에 고심과 노력이 어떠하였음을 알겠거니와 특히 성삼문은 훈민정음의 음운을 고르기 위하여 요동에 건너가 그곳에 적거(謫居)하는 명(明)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질정(質正)할 제 왕반(往返)하기 무릇 13회에 긍하였으며 그는 다시 음운과 혹은 교장(敎場)의 제(制)를 연구하기 위하여 국명을 받들어 자주(세종 27년, 29년, 32년의세 번에 달함) 명에 건너갔으며 동 31년에 명사(明使) 예겸(倪謙)이 건너왔을 때에도 성삼문이 어명을 받들어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여 예겸에게 음운을 자주 문의한 일이 있었다. 이로 보면 성삼문이 특히 음운의 전문적 조예를 쌓았던 만큼 정음 창제에 있어 그가 음운의 정조(整調)에 당하였을 것은 명백히 추단(推斷)할 수가 있는 바이다.
정음이 공포된 그 익년에 성삼문은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으로 더불어 「동국정운」을 제진(製進)하였고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 중국어학서)」, 「훈세평화(訓世評話 ; 중국어 학서)」, 「홍무정운(洪武正韻)」등의 교역(校譯)과 역대 병(兵) 기타 당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서적 찬술에 그의 공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히 「세종실록」 찬수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역대 국인의 명문(名文)을 뽑아 「동인문보(東人文寶)」를 편찬하였으나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김계온(金季溫)이 뒤를 이어 완성하여 「동문수(東文粹)」라 이름하였다. 명사 예겸과 사마순(司馬悔)이 건너왔을 때에 세종께서는 성삼문, 신숙주로 하여금 시문의 수응(酬應)에 당케 하였더니 예겸과 성·신(成申) 양인과의 교의가 날로 두터워 형제의 의를 맺고 시가의 수창(酬唱)으로 날을 보내었으며 명사가 돌아갈 때 국중의 명사들이 시로써 전송할새 성삼문이 문사시인(文士詩人)을 대표하여 그 송환시 축(軸)에 서문과 발문을 지었다. 예겸의 사행(使行)을 중심으로 국제 문학의 교환은 실로 당세의 성관(盛觀)이었으니 명사와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의 수창한 시가를 모은 것이 「황화집(皇華集)」이며 예겸도 본국에 돌아가 조선 명사와 그 일행의 시집(詩什)을 모아 「요해편(遼海篇)」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국 명사(東國名士)의 이름이 중국에 널리 전하여졌으므로 그 뒤 명사(明使) 장녕(張寧;예겸의 문인이라 함)이 입국하여 성삼문 등을 찾았으나 그때에는 이미 죽고 없는지라.
그들의 이름을 듣고 기대를 가지고 건너왔던 장녕은 “마음이 쓸쓸하다(寥寥眼中)”라 하여 쓸쓸함을 한탄하였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3. 단종 손위(遜位)와 사육신의 참화
단종의 손위와 그로 인한 사육신의 참화는 조선사상의 일대 비극이다. 단종을 중심으로 한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은 실로 이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세종의 다음에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한 지 겨우 2년에 붕거하고 세자(휘가 홍위)가 12세의 어린 몸으로 위(位)에 올랐으니 이분이 곧 단종이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후에 정분이 이에 취함), 우의정 김종서와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아 유주(幼主)의 보익(輔翼)과 협찬(協贊)의 임(任)에 당하였다.
당시 7인의 왕숙(王叔) 가운데 수양대군(세종의 제2자)이 가장 괴걸(魁傑)하여 왕위에 야심을 품고 미리부터 권남(權擥), 한명회 등 낙척(落拓)하여 울울한 뜻을 품고 있는 무리와 사귀어 세인의 이목을 피해 가며 비밀히 획책하는 바가 있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세도(世道)가 변함이 있을 때에는 문인은 무용(無用)한 것이니 무사와 맺어야 한다.”
고 권하여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유수(柳洙) 등 30여의 무사를 천(薦)하고 날로 활을 쏘며 주식(酒食)을 먹여 무사들과 교결(交結)하여 후일의 쓰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음모를 획책하던 수양대군은 일면에 있어 김종서, 황보인 일파를 점점 꺼리고 또한 경계하였던 것이니 단종 즉위 초년 10월에 수양대군이 사절로 명(明)에 건너갈새 후고(後顧)의 염려가 있으므로 황보인의 아들 석(錫)과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를 반행(伴行)하여 그들을 견제한 일도 있었다. 익년 10월에 들어서는 그의 음모가 차차 탄로되려 함에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남으로 더불어 대사(大事)에 착수키로 하고 10월 10일을 기하여 무사들을 수양대군 저(邸)에 모아 부서를 정하여 후방의 처치(處置)를 배비(配備)하고 그들은 김종서만 제거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족히 하잘 것이 없다 하여 가장 꺼려하고 무서워하던 김종서를 먼저 살해키로 하였다.
수양대군은 대담하게도 박모(薄暮)6)를 타 가동(家僮) 임예(林藝; 또는 於乙)를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찾아가서 그를 문 앞에 불러내어 가지고 그 자리에서 임예를 시켜 철퇴로 쳐 거꾸러뜨렸다.
6)박모(薄暮):땅거미.
수양대군은 빨리 돌아와 대기하고 있던 무부(武夫) 역사(力士)와 순졸을 풀어 시재소(時在所;당시 단종은 계동의 문종 부마 寧陽尉 정종의 집에 있었음)를 둘러싸고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에 당부(黨附)하여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李澄玉) 등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하므로 수괴 김종서를 먼저 죽였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붙여 유주(幼主) 단종을 공동(恐動)케 하고 왕실의 우익을 모조리 전거(剪去)할 양으로 한명회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소위 생살부(生殺簿)를 쥐고 문 안에 앉아 명패로써 여러 대신을 소입(召入)하여 이름이 사부(死簿)에 적힌 자는 역사(力士)를 시켜 들어오는 대로 문안에서 추살(椎殺)하였다. 그리하여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이 순식간에 거꾸러졌으며 다시 각 지방에 손을 펴 민신(閔伸), 이징옥 등을 살해하고 안평대군(수양대군의 아우)을 강화에 유배시켰다가 뒤이어 사사(賜死)를 하였다.
김종서, 황보인 일파를 일망타진으로 제거한 다음에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이·병조(吏兵曹)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가 되어 정권과 군권(軍權)을 걷어쥐고 그의 일당으로써 군정 요직에 채우니 수양대군의 천하가 졸지간에 출현케 되었다. 그리하여 단종은 빈 이름만 옹유(擁有)할 뿐 아니라 깊이 궁중에 처하여 군신과의 접견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동년 11월(14일)에 성삼문(좌사간)이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어리신 주상께서 궁중에 심거 (深居)하시어 군신과 한번도 접견치 아니하시므로 인심이 정(定)치 못하오니 매월 1일과 16일에 군신의 조참(朝參)을 받으시어 군신이 용안을 뵙게 되면 인심이 저으기 정(定)하리이다.”
라고 상소를 올려 수양대군 일파에 눌려 있던 조정의 침묵한 공기를 깨뜨리고 그의 유주에 대한 궁금한 적성(赤誠)을 피력하였으며, 그의 동지 하위지도 일찌기 수양대군의 전횡에 불안을 느껴
“원컨대 영상은 문종의 자자손손을 마음을 다하여 도우소서.”
하여 뒤를 다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 일파의 끊임없는 脅威(협위)에 견디지 못하여 단종은 그의 3년 윤6월 11일에 드디어 위(位)를 수양대군에게 내어 맡김에 이르렀다. 그 때에 대보(大寶;국새)를 드리라 재촉이 내리매 동부승지(同副承旨 ; 단종 2년 8월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예조참의에 배하였음) 성삼문이 어명이라 할 수 없이 상서원(尙瑞院)에 가 국새를 꺼내어 환관 전균(田鈞)에게 주어 위에 올리게 하였다. 이때 성삼문은 국새를 안고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으며 박팽년이 또한 경회루 못가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려 하였다. 성삼문이
“신기(神器)가 비록 수양에게 옮아갔으나 주상이 상왕으로 계실 터이니 우리들은 복위(復位)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성사치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는 않다.”
하고 굳이 말렸던 것이니 후일의 단종 복위계획은 벌써 이 날에 성삼문의 흉중에 세워졌었다.
그해 겨울부터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무관)가 중심이 되어 성승(成勝 ; 성삼문의 父), 박중림(朴仲林 ; 박팽년의 父), 권자신(權自愼;단종의 외숙), 윤영손(尹鈴孫;권자신의 매서), 김질 등 다수의 동지로 더불어 단종 복위를 비밀히 꾀하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익년(병자)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단종)을 모시고 중신을 모아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명사(明使) 윤봉(尹鳳)을 초대할새 성삼문 등은 이 기회를 타 일거에 세조 일당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케 하려 하였다. 이 연회에 도총관(都摠管) 성승, 유응부, 박쟁이 별운검(別雲劍; 어전할 때에 무반 2품 2인이 검을 차고 좌우에 입시하는 것)으로 연석(宴席)에 들어가 거사하기로 하고 특히 세조와 세자는 유응부가 맡고 한명회, 권남, 정인지, 신숙주 등 세조의 심복은 나머지 사람들이 처치할 것과 후방 계획의 부서를 정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저편에서는 한명회가 광연전이 협소하고 날이 염증(炎蒸)하다 하여 세조에게 주청하여 세자를 참가치 않게 하고 운검도 들이지 말게 하였다. 성승은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였으나 한명회가 막는지라, 성승이 물러섰다가 명회를 격살(擊殺)하려 하매 성삼문이 세자가 오지 아니하였으니 명회를 죽인다 하여도 무익한 일이라 하여 만류하였으며 유웅부도 덮어놓고 입격(入擊)하려 하였으나 성삼문, 박팽년이
“세자가 본궁에 있고 운검도 들이지 아니하니 이 역시 운이다. 만일 이곳에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으로부터 기병(起兵)하면 성패를 가히 알지 못할지니 다른 날 수양의 부자가 한 곳에 있을 때를 엿보아 거사함만 같지 못하다.”
고 굳이 말리며 후일 관가(觀稼)의 의(儀)7)가 있을 때 노상에서 도모하자고 하매 유응부는
“일은 신속하여야 한다. 만일 타일(他日)로 미루면 설설(洩泄)8)될 염려가 있으며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다 하나 모신적자(謀臣賊子)는 모두 수양을 좇아 이곳에 모였으니 지금 이 무리들을 베고 상왕을 복위한 다음에 무사를 호령하여 일대병(一隊兵)을 거느리고 경복에 들어가면 세자가 어디로 갈 것인가. 비록 지혜 있는 자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일시(千載一時)니 기회를 잃지 말자.”
고 주장하였다.
7)관가(觀稼)의 의(儀):궁을 옮기는 의식.
8)설설(浅泄):누설.
그러나 성삼문, 박팽년 등은 만전의 책이 아니라 하여 발(發)치 못하게 하였다.
일이 이와 같이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본 김질은 동지를 팔아 미래의 영화를 사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의 처부(妻父) 정창손(鄭昌孫)과 꾀하고 그 익일에 관내에 달려가 성삼문 등의 계획을 밀고하였으니 이에서 비절참절(悲絶慘絶)한 비극의 막이 열렸다.
세조는 즉시 편전에 나와 숙위군(宿衛軍)을 소집하고 승지 등을 부르매 좌부승지 성삼문도 입시하였다. 내금위(內禁衛)를 명하여 성삼문을 끌어내려 꿇어앉히고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하였는고.”
하고 물으니
성삼문은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대질을 청하였다. 김질을 명하여 내용을 말하게 하니 성삼문은 그것을 듣다가 ‘그만두라’하고 웃으면서
“김질의 말이 옳도다. 상왕께서 춘추가 젊으신데 손위(遜位)를 하셨으니 다시 복위를 시켜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마땅히 할 바이거늘 무엇을 다시 묻나니이까.”
하였다.
이로부터 옥사(獄事)가 벌어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그의 동지가 모조리 나포되었다. 세조는 그들에 대하여
“너희들이 어째서 반()하느냐.”
고 물으매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구주(舊主)를 복위코자 할 따름이니 천하에 그 임금을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있으리오. 어째 叛(반)하였다고 말을 하오. 내 마음은 국인(國人)이 다 아는 바외다. 나으리(進賜)는 국가를 도취(盜取)하였거니와 삼문은 인신이 되어 차마 군부(君父)가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요, 나으리는 평일에 얼핏하면 주공(周公)의 예를 들더니 주공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나요. 하늘에 두 해가 없는 것과 같이 인민에게 두 임금이 없는 까닭에 이 일을 한 것이외다.”
하였다.
▶進賜(나아리) : 사극 등에서 보이는 '나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본래 한자 음독은 '진사'이지만, 옛날에는 한자의 음훈독을 차용한 '이두'로 이 글자를 '나리.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를 높이어 부르는 말.'이란 뜻으로 '나아리'라 읽었다고 합니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수선(受禪)9)할 때에는 어찌 막지 못하고 이제야 배반하느냐.”
고 하니
성삼문은
“세(勢)가 능치 못하는지라, 나아가서 금하지 못할진대 물러가 일사(一死)가 있음을 나는 알았으나 한갓 죽어도 무익한 고로 참고 이제까지 이른 것은 후효(後效)를 도모코자 함이외다.”
하였다.
9) 수선(受禪):왕위를 물려받음.
“네가 신(臣)이라고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나의 녹(祿)을 먹지 아니하였으냐. 녹을 먹고 배반함은 반복(反覆)하는 것이로다.”
라는 세조의 말에 그는
“상왕이 계시니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로 하리오. 또 나으리의 녹은 먹지 아니하였으니 믿기지 않거든 적가(籍家)10)를 하여 보오(그를 죽인 뒤에 적가를 해 보니 올해 이후에 받은 녹봉은 一室에 별치하고 모월의 녹이라는 부찰을 붙였으며 집에는 남은 살림이 없고 침방에는 다만 이부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한다).
10) 적가(籍家):가산을 몰수함.
또 나으리의 말은 모두가 허망하니 가히 취할 것이 없소이다.”
하였다.
세조는 크게 노하여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구어 그의 다리를 꿰며 팔을 끊되(일설에는 철편을 달구어 배꼽에 넣으니 油火가 끓어올랐다고 함) 성삼문은 안색을 변치 아니하고 쇠가 식는 것을 기다려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의 형벌이 慘(참)하구나.”
하였다.
때에 신숙주가 세조의 앞에 앉은 것을 보고
“전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할 제 영릉(英陵;세종)께서 원손(元孫; 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거니시며 과인이 죽은 뒤에 너희들은 모름지기이 아이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오히려 귀에 있는 듯하거늘 네가 어찌 잊었느냐.
너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뜻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꾸짖으니 세조도 민망히 생각하여 숙주를 전후(殿後)로 피하게 하였다 한다.
세조는 다시 유응부를 문초하니 그는
“연회 날에 일척검(一隻劒)으로써 족하(足下)11)를 폐하고 고주(故主)를 복위하려 하였을 따름이다. 불행히 간인(奸人)이 발고(發告)하였으니 다시 어찌하리오. 족하는 속히 나를 죽일지이다.”
하매 세조는 더욱 노하여 무사를 시켜 살을 깎으며 물었다.
11) 족하(足下):같은 나이 또래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에서는 세조를 낮추어 부르는 말.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서생(書生)과는 일을 꾀하지 못할 것이라더니 과연이로다. 이번 연회 날에 칼을 시(試)하려 하였더니 너희들은 만전의 계(計)가 아니라 하여 굳이 말려 금일의 화를 받는구나. 너희들은 사람으로서 꾀가 없으니 어찌 축생과 다르랴. 만일 정외(情外)의 일을 묻고자 하거든 저 수유에게 물으라.”
하고 입을 다물고 대답치 않는다. 그리하여 모진 작형(炸刑)을 고루 받으나 유응부는 안색도 변함이 없이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은 악형으로 그들을 모조리 국문한 다음에 세조는 다시 성삼문에게 연루자를 물었다.
성삼문은 박팽년 등과 그의 부친을 들고
“내 아버지도 숨기지 않거늘 하물며 타인이랴.”
하고 세조의 다시 묻는 말을 막았다 한다(이것을 세간에는 성삼문의 말로 전하나 「세조실록」에는 박팽년의 말로 되어 있음). 그 자리에 강희안도 연루자의 혐의로 고문을 받으며 불복하고 있거늘 세조가 또 성삼문에게 강의 관계를 물었다.
그는
“나으리가 선조(先朝)의 명사를 다 죽이고 홀로 이 사람이 남은 셈이로되 우리의 계획에는 참여치 아니하였으니 아직 머물러 써 보오. 실로 어진사람이니.”
하고 그들과 관계 없음을 말하였으므로 강희안은 위기일발에서 구해지게 된 것이다.
국문을 마치고 끌려나갈 때에 성삼문은 좌우의 옛 동료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현주를 도와 태평을 누리라. 삼문은 돌아가서 고주(故主)를 지하에 뵈이리라.”
는 말을 남겼다.
같은 달 8일에 그는 수레에 실려 형장에 나아갈 때에
“북소리가 울리며 명 재촉하니
내 목숨은 서쪽 바람에 기울어진 해일세
황천 길에는 집이 없으니
오늘 밤에는 어디에서 쉬어 갈꼬” (편집자 역)12)
라는 시를 지어 읊었으며 그의 5·6세의 작은 딸이 수레를 따라오며 울고 몸부림을 치니 그가 돌아다보며
“사내 자식은 모두 죽을 것이로되 너는 살리라.”
고 애끓는 말을 하였다.
12)“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그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그것을 마시고
“남들이 먹는 밥을 먹고 입으며
한평생 남을 거스린 일이 없었던바
한번 죽어 진실로 충의의 있음을 알리라
현릉(문종의 능)의 송백들은 꿈속에서도 의연하네” (편집자 역)13)
라 읊었다.
13)“食人之食衣人衣 所一平生莫有違 一死固知忠義在 顯陵松柏夢依依”
성삼문은 드디어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동지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같이 차열(車裂)의 극형14) 아래에서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박팽년은 이미 옥중에서 죽고 유성원은 집에서 자살하였음).
14) 차열(車裂)의 극형:죄인의 다리를 두 개의 수레에 각각 묶어 수레를 움직여 몸을 찢어 죽이던 형벌.
그리고 그들의 일당과 3족은 모조리 연좌케 되었던 것으로서 성삼문의 아비 성승은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시에 극형을 받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등 성삼문의 아우와 맹첨, 맹년(孟年), 맹종(孟終), 동년생(同年生;幼子) 등 그의 네 아들은 모두 연좌로 피살되었으며 다만 그의 외손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단종도 또한 그들과 같은 운명을 밟음에 이르렀으니 여기에는 정인지, 신숙주 등의 간책이 많이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그 익년(정축) 6월 21일에 상왕(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그 익일에 바로 영월로 내침을 받았다가 동년 10월 21일에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고주를 위하여는 3족의 운명과 부월(斧鉞)이 목에 내려짐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최후까지 뜻을 지켜 비참한 운명을 달게 받은 그들의 정충대절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바이거니와 그들 가운데에도 성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복위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므로 이들 6인을 사육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육신의 충절은 길이 후인으로 하여금 추모케 하는 바가 있거니와 세조 이후 역대의 군주는 모두 그의 자손이므로 추장(追獎)15)의 거(擧)를 행하지 못하였다.
15) 추장(追獎):죽은 뒤에 표창하는 것.
그러나 숙종시대에 이르러는 긴 시일이 이미 경과한지라, 물의(物議)에 움직여 단종의 복위(24년)와 6신 추장의 전(典)을 거행함에 이르렀다. 숙종 2년에 홍주 노은동 성삼문의 구택(舊宅) 옆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6사묘가 있는 노량강(노량진) 남안에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노능(魯陵) 곁에 창절서원(彰節書院),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의 팔현서원(八賢書院) 등을 세워 6신을 병향(竝享)하였으며 동 17년에 복관(復官)이 되고 영조 34년에 이르러는 성삼문에게 이조판서의 직을 증(贈)하고 충문(忠文)의 시(諡)를 사하였다. 그리고 성삼문의 무덤은 한강 남안 노량진 북록(北麓)에 속칭 육신묘 가운데에 있으니(恩津에도 성삼문 묘가 있다 하나 이것은 당시 지방의 순시하던 그의 一肢를 묻은 것이라 함) 6신이 참화를 받을 때 그들의 가족은 모두 산멸되고 또 그들의 시체는 이른바 당부(堂斧)가 상착(相錯)하여 갑을(甲乙)을 분별키 어려울 만큼 되었으며 법을 무릅쓰고 감히 유해를 거두기도 어려웠다 한다.
그러나 세사를 냉소하고 불계에 몸을 던진 낭승(浪僧) 김시습(생육신의 한 사람)이 인목(人目)을 피해 가며 몸소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그곳에 묻은 것이라고 전한다(하위지의 묘는 善山에 있고 유성원의 묘는 소재가 불명한 것으로서 지금은 육신묘라고는 하나 실은 4신의 무덤이 있을 뿐임).
끝으로 성삼문의 성격과 지조 또는 그의 재화(才華)에 관하여 단편적이나마 몇 가지 재료를 들어 참고에 공(供)하고자 한다.
성삼문은 회해(詼諧)16)를 좋아하며 좌와(坐臥)에도 그리 절차를 보지 아니하여 성격이 자못 방랑한 듯하나 의지가 견확(堅確)하여 빼앗지 못할 지개(志槪)를 가졌다 한다.
16) 회해(詼諧):농담함. 희롱으로 말함.
그의 호 매죽헌은 실로 이러한 성격과 지조를 표시한 것으로서 그의 〈매죽헌부(賦)〉에
“이미 정절은 변하지 않고 역시 외로운 향내는 아직도 남아 있도다.”(편집자 역)
라 한 것은 대나무의 정절과 매화의 고방(孤芳)을 취한 것이며
“바라건대 청백은 바뀌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군자의 행하여야 할 바를 삼는다.”(편집자 역)
는 대나무의 청(淸)과 매화의 백(白)을 취하여 청백함을 상징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과 취상(趣尙)은
“소나무와 대나무는 정절과 곧음이 있고 정절과 곧음은 군자가 공경하는 바다. 달과 눈은 밝고도 순결하니 밝고 순결함은 군자의 기쁨이다.” (〈松竹雪月頌〉)(편집자 역)
라 한 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거니와,
특히 절의에 관하여는 본래 유아독존(惟我獨尊)의 개(慨)를 보이던 것이니 일찌기 명(明)에 건너가는 길에 낙하의 이제묘(夷齊廟)를 지나면서
“말고삐를 붙들고 그르다고 말하네
큰 충성 일월과 같이 당당하구나
초목도 주나라 땅에서 자랐는데
그대여 그 고사리를 먹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편집자 역)17)
17)“當年叩馬敢言非 大義堂堂日月輝 草木亦濡周雨露 愧君猶食首陽薇
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다.
그의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망정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의 것인들 그 뉘 따에 났더니”
라는 노래도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거니와 만고의사(萬古義士)라는 백이·숙제에 대하여도 그는 오히려 수양산에 들어가 채미한 것을 나무랐으며
다시 그의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는 노래는 가장 그의 인품을 표현한 바이다.
그리고 그가 연경에 건너갔을 때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백로도(白鷺圖)의 제시(題詩)를 청하였다. 그는 서슴지 않고
“흰 날개로 의상을 하고 옥 같은 발톱의 백로여
물가에서 고기를 엿본 지 얼마던가” (편집자 역)18)
18) “雪作衣裳玉作趾 窺魚蘆渚幾多時”
의 구(句)를 불렀더니 그림을 펴 보매 수묵도(水墨圖)인지라, 다시 윗구를 받아
“우연히 날개를 펴고 날아가다가
잘못하여 왕희지의 벼룻물에 떨어졌네”(편집자 역)19)
19)“偶然飛過山陰縣 誤落羲之洗硯池”
라 보족하여 중국인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니 이것으로도 그의 재화가 또한 비범하며 시상이 기발함을 알 수가 있는 바이다.
(참고 서목: 단종실록, 세조실록, 국조보감, 장릉지, 성근보선생집, 필원잡기, 동각잡기, 추강집, 용재총화, 해동야언, 야언별집, 단종사보)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59.조선-안견(安堅) (1) | 2023.05.11 |
---|---|
58.조선-이용(李瑢) (1) | 2023.05.11 |
56.조선-장영실(蔣英實) (1) | 2023.05.09 |
55.조선-세종대왕(世宗大王) (1) | 2023.05.09 |
54.조선-양성지(梁誠之) (0) | 2023.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