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79.조선-송시열(宋時烈) 본문
홍승구(洪承耉)
1. 서인(緖引)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매우 조심하고 두렵게 임하는 녹리의 공이 있다. 좁은 집에 끼이면서도 호연지기를 얻으니 가히 우주를 채울 만하다. 중임을 맡음에 이르러서도 일신을 소홀히 여겨 높은 영화를 거부하였다. 나아가서는 제왕을 가르치기 위해 암랑(巖廊)을 두어 게으름을 보지 못하며 물러나서는 언덕 구덩이에서 죽과 술장으로 친구들과 벗하며 지내나 그 궁색함을 볼 수 없다. 우뚝 솟음이여, 홍하(洪河)에 있는 지주(砥柱)1)와 같구나. 늠름하구나, 한 겨울소나무가 꼿꼿함과 같구나. 진실로 억세 이래로 이와 같은 7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오. 일찌기 300년 동안 기상의 정기가 뭉치어 된 바임을 알겠노라.”(편집자 역)
1) 지주(砥柱):난세에 있으면서 절도를 지키는 것. 황하 가운데에 있는 산으로 격류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데서 나온 말.
이것은 농암(農巖)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본편의 주인공인 우암(尤庵) 송선생의 유상(遺像)에 제(題)한 찬사의 전문이다. 농암은 우암과 사세교호(四世交好)의 의(誼)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문하에 출입하여 비록 사제의 명분은 없으나 20년간의 오랜 연월에 긍(旦)하여 우암으로부터 가장 권애(眷愛)와 기허(期許)받은 유수한 후진이므로 당론 휴우2)하던 옛 시대에서는 혹자 두 선생의 관계로 미루어 과찬을 의심하였을지 모르나 그러나 농암의 간항고결(簡亢高潔)하던 그 일생의 인격으로 보든지 또는 그의 학자로서의 예민백직(銳敏白直)한 비평적 양심으로 보든지 이 최대급의 찬사가 결코 일구(一句)라도 아호(阿好)의 곡필(曲筆) 아닌 것을 심신(深信)하려 하며 따라서 이 수구(數句)의 찬사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우암 선생의 기상, 자품(姿稟)과 학문 포부며 출처 사업이 얼마나 위대하던 것을 想察함에 유여할 것이다.
2) 휴우:분명치 않음. 또는 소박함.
승조(勝朝)3) 무(武) 불(佛)의 폐(弊)에 감징(鑑懲)이 많으신 이조의 태조, 태종이 그 창업 입규(立規)에 제(際)하여 유치(儒治)와 문교(文敎)를 상(尙)한 것은 자연 필지의 이세(理勢)라 할 것이다. 그래서 주·공·정·주(周孔程朱)의 학도 이른바 사류들의 사도(斯道)와 사문(斯文)에 공헌하여 이 나라의 문운(文運)을 융창(隆昌)케 하고 명교(名敎)를 부식(扶植)하던 그 기여한 공덕의 위대한 것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승조(勝朝): 전조(前朝). 여기서는 고려를 가리킴.
다른 것은 그만두고 이조 일대에 승무에 종사(從祠)된 유현(儒賢)의 수가 14위에 이른 것으로 그 일반을 알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중엽 이래로 당쟁이 생겨서 사류가 궤열각립(潰裂角立)하면서부터 정교(政敎)의 보잘것없이 된 것은 물론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천량(天良)5)까지 상실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악성적 풍습이 다시 구할 수 없이 되었다.
4) 陞廡: 文廟庭間에 오름
5) 천량(天良): 타고난 선심. 양심.
그러므로 동일한 유현(儒賢)이로되 정암과 퇴계는 당론 이전의 인물이므로 전국이 함께 존경하고 율곡과 우암은 당쟁의 와중에 권입(捲入)되었던 관계로 예자(譽者)와 훼자(者)가 상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언행이 이미 당세에 가득하여 그 공과를 엄닉(掩匿)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자는 유(有) 중에 무(無)를 구하면 훼자는 무 중에 유를 탐(探)하여 그 엄호와 취멱(吹覓)6)이 함께 비열을 극(極)하였다. 그래서 일방의 성현이 타방의 간흉이 되어 일인의 인격을 양 극단으로 나누게 되니 이 얼마나 개탄할 일이랴. 그러나 이것은 훼예가 모두 공정치 못한 당인의 허물이요 그들에게야 毫末이나 손익될 것이 무엇이 있으랴.
6) 취멱(吹覓): 들추어 냄.
우리의 우암 송선생은 이 극단의 훼예 중에서 80여 세의 일생을 보내면서 살신의 화도 부르고 개세(蓋世)의 이름도 박(博)하신 분이다. 그의 화도 컸으려니와 그의 수립(樹立)도 갸륵하였다. 요컨대 그의 엄엄(嚴嚴)한 존재는 다만 조선의 선유(先儒) 중에 있어 걸연괴출(傑然魁出)7)할 뿐 아니라 그 인물 역량이 역사상의 다른 위인에 비하여 별로 손색이 없을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로부터 본기(本紀)에 들어가겠다.
7)걸연괴출(傑然魁出):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짐.
▶陞廡儒賢 18인
설총, 최치원(2)
안유, 정몽주(2)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14)
▶廡: 행랑 무
2. 초기(初紀)
송시열 선생의 자(字)는 영보(英甫), 우암(尤庵)은 그의 만년 자호요 학자들은 우재(尤齋)선생이라 일컬었다. 은진인(恩津人) 을사명현(乙巳名賢)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족손(族孫)으로 그 고(考)는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 비(妣)는 곽씨(郭氏).
거금 333년 전인 선조대왕 40년 정미생으로 충청도 옥천군 이원(伊院) 구룡촌(九龍村) 외씨가에서 산성(産聲)을 울렸다. 선생이 출생되기 앞서 수일 전부터 촌전(村前)의 적등강(赤登江)이 무고히 자건(自乾)하여 3일 무수(無水)의 적지(赤地)를 이루어 명실상부의 적등강이 되었다가 산후에야 별안간에 본래의 거류(巨流)가 도도히 흐르는 기적이 있으며 그 임산(臨産)의 밤에는 마침 근지(近地)에 외출하여 타숙(他宿)하던 그 부친 경헌공이 일몽을 얻으니 선성공자(先聖孔子)가 여러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 집에 내임하시므로 배영치경(拜迎致敬)하였더니 공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을 불러 내어 경헌에게 “내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대 집의 아들을 삼게 하노니 잘 양육하라.” 부탁하셨다. 경각(驚覺)한 뒤에 너무도 역력한 몽사를 괴히 여겨 가중(家中)에 치귀(馳歸)한 즉 부인이 이미 하목해구(河目海口)로 두각억억(頭角嶷嶷)9)한 기린아(麒麟兒)를 순만하였다. 이에 ‘성뇌(聖賚)’로 소명(小名)을 지어 이몽(異夢)을 기념하며 그 장래에 깊이 촉망하여 교양에 힘썼다. 경헌이 원래 기절과 식조 있는 선비로 일찌기 과시에 부(赴)하여 진사에 참방(參榜)되었었다.
8) 하목해구(河目海口): 현자(賢者)의 상(相).
9) 두각억억(頭角嶷嶷): 아이가 뛰어나고 영리함.
때에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어 위욕(危辱)을 비상(備嘗)10)하시나 소대염연(小大恬然)11)하여 묻는 자가 없었다. 그가 홀로 개한(慨恨)하여 서궁에 부하여 모후께 소과(小科)의 사은을 겸하여 문안의 예를 수(修)하였으므로 인조반정 후에 대비는 항상 이 일을 칭도(稱道)하시며
“서궁 10년에 내게 대하여 신자(臣子)의 직(職)을 지킨 사람은 오직 송모(宋某)라.”
하셨다.
10) 비상(備嘗): 여러 가지 일을 골고루 맛보아 겪음.
11) 소대염연(小大恬然):크거나 작은 일에도 마음에 거리끼지 않음.
이 아버지의 이 아들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우암은 해제시대(孩提時代)12)를 면하면서부터 총영(聰穎)이 절인(絶人)하고 식견이 초범하여 엄연(儼然)하기가 성인과 같은 위에 천성이 엄의강직(嚴毅剛直)하며 작사(作事)가 정대공명하여 비만13)의 용(容)을 설(設)치 않으며 비례(非禮)의 말을 입으로 옮기지 않았다. 사람의 사곡(邪曲)과 패악한 것을 보면 여지없이 질오하여 구적(仇敵)으로 대하면서도 일선(一善)과 일장(一長)을 보면 장후하기를 자기 일처럼 하였다.
12) 해제시대 (孩提時代):어린 시절.
13) 비만 업신여김.
우암이 자라나서 학업을 닦게 되면서 현사우(賢師友)를 만났으니 즉 율곡 이선생의 적통 제자되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과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의 부자가 연산(連山)에 퇴와(退臥)하여 임천(林泉)에서 양도강학(養道講學)할새 일세가 존모(尊慕)하는 말을 듣고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부급왕배(負笈往拜)14)하여 사(沙)·신(愼) 문하의 쌍벽을 이루었다.
14) 부급 왕배(負笈往拜):책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가르침을 받음.
사계로서 우암의 사(師) 중 사라 하게 되면 동춘은 그의 우(友) 중 우로서 일컬을 것이다. 즉 우암과 동춘의 이른바 양송(兩宋)은 하남 정씨의 명도(明道), 이천(伊川)처럼 의비(擬比)15)하던 사이다.
15) 의비(擬比):비교함.
그들은 동족 숙질의 의에 겸하여 인척 형제의 호(好)가 있고 연기(年紀)는 동춘이 한 살 교장(較長)되나 그 외는 동학, 동지, 동출처, 동거취로 제명병구(齊名竝驅)하여 거의 50년 교호를 지속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우암은 학덕 높은 당대 유종(儒宗)의 부자에게 순정한 정주(程朱)의 학문을 배워 문로(門路)를 바로 얻고 동춘 초려(草廬;李唯泰)와 노서(魯西) 형제(尹宣擧, 文擧의 형제) 같은 사·신 문하의 군영(群英)16)과도 탁마하여 높고 후하게 받든 천분을 양대로 확충하게 되었다.
16) 군영(群英):군웅(群雄).
농암의 이른바 전긍임리(戰兢臨履)17)의 공은 실로 이같이 하여 순유(醇儒)로부터 전수되고 군영과 함께 수득(修得)한 것이다.
17) 전긍임리(戰兢臨履):전전긍긍하면서 뒤를 쫓음.
그러는 중에도 자명(自命)과 자기(自期)가 절대, 초륜(超倫)하던 우암은 공자에 버금가는 주자를 독신하고 의리와 사업의 모든 표준을 주자에서 구하게 되었으므로 자타가 함께 주자의 재세(再世)로 기허(期許)하게 되었다.
3. 중기(中紀)
“학식이 뛰어나면 벼슬을 한다(學優則仕)”는 사자(士子)의 본원(本願)이라.
학을 이룬 우암은 인조대왕 8년 경오에 생원시에 응하였다.
주시(主試)는 대제학 최명길(遲川)로 「주역」의 “음양을 일컬어 도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로 출제하여 천인의 도리(道理) 본체를 물으니 공령(功令)과 詞賦에 힘쓰던 거자(擧子)의 태반은 상고당시(相顧瞠視)18)하여 각필예백(擱筆曳白)19)하는 진광경을 현출하였다.
18) 당시(瞠視):눈을 휘둥그레 뜨고 봄.
19) 각필예백(擱筆曳白):붓을 꺾고 백지 답안지를 내놓음. 당의 장석(張奭)이 무식하여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볼 때 종일토록 한 자도 짓지 못하고 백지만 제출하여 이를 예백이라 함.
그때 겨우 24세의 청년 학도인 우암은 득의의 박학으로 굉사(宏肆)한 거편을 일휘에 성취하였다.
최명길이 글장을 보고 격슬탄상(擊膝嘆賞)20)왈
“曠古의 거유(巨儒)가 생겼으니 공맹(孔孟)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
하면서 장원으로 뽑았다.
20) 격슬탄상(擊膝嘆賞):무릎을 치며 감탄하여 마지 않음.
지천의 조감(藻鑑)21)도 정명(精明)하거니와 이 소시(小試)가 우암에게는 비록 우도할계(牛刀割鷄)22)의 감이 있는 바로되 그 연기에 있어서 그만한 성취와 포부 있는 것이 또한 갸륵치 않으리오.
21) 조감(藻鑑):사람을 외형만 바라보고도 그 지닌 인격까지도 알아보는 견식.
22) 우도할계(牛刀割鷄):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뜻으로 조그만 일을 처리하는데 지나치게 대단한 준비를 하는 것을 빗댄 말.
이로부터 우암의 성명은 상청(上聽)에 달하여 수년 후에는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부터 왕자 봉림대군의 사부관(師傅官)을 제수하시니 봉림은 실로 다른 날 효종대왕으로 봉운어수(鳳雲魚水)의 제회(際會)와 계우(契遇)가 이미 이 시대에 결합되었던 것이다. 병자란에는 남한(南漢)에 호가(扈駕)하였다가 정축 하성(下城) 후에 곧 귀향하여 두문 독서하고 세로(世路)에 염단(念斷)하여 그대로 종신할 듯하였으나 제갈진췌(諸葛盡瘁)를 사모하는 우암은 항상 세변(世變)을 생각하고 중야차탄(中夜嗟嘆)하여 중류격즙(中流擊楫)23)의 장지(壯志)를 갖게 되었다.
23) 중류격즙(中流擊楫): 중도를 유지함.
그러나 때가 아님을 알고 있는 우암이므로 조정에서 지평, 장령 등의 대각 요직으로 여러 번 징소하였으나 사사불취(辭謝不就)하여 십수 년의 산림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에 작위가 있었다 하면 그것은 동지의 사우(士友)와 강학하는 일이요, 출입이 있었다 하면 친척 지구(知舊)의 조하방문(弔賀訪問) 이외에 역내의 가산수(佳山水)를 유력(遊歷)하여 부시사회(賦詩寫懷)하는 것이다.
그의 금강산에서 지은 일절에
“산에는 온통 하이얀 구름뿐
구름이 덮힌 산은 모양을 알 수 없네
구름이 걷히고 산이 우뚝 서 있으니
일만 이천 봉이더라” (편집자 역)24)
이란 것이었다.
24) “雲與山俱白 雲山不辨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
주자의 “만고의 청산은 지금도 푸르고나(萬古靑山只應靑)”를 연상케 한다. 갑신 3월에 마적이 북경을 범하여 숭정제(崇禎帝)가 사직에 순(殉)하고 오삼계(吳三桂)의 항청개관(降淸開關)으로써 청 세조 복림(福臨)이 중원에 대주(代主)하여 명(明)이 망하며 남경(南京)에 일어났던 홍광제(弘光帝)는 일 년 만에 부로(俘虜)가 되고 당왕(唐王) 계왕(桂王)이 서남으로 유리(流離)하여 융무(隆武), 영력(永曆)의 위호(位號)가 형화(螢火)처럼 섬멸되는 것을 보고 춘추의리(春秋義理)의 사도로 자임(自任)하는 우암은 이에 크게 감분불평(感憤不平)하여 더욱더욱 주자의 ‘우역25)의관(禹域衣冠)이 성조26)에 피오(被汚)됨’을 차탄(嗟嘆)하던 일을 생각하고 의리강명(義理講明)으로써 일생의 업을 삼게 되었다.
25) 우역(禹域): 중국을 달리 이르는 말. 우왕이 홍수를 다스려 9주의 경계를 정해 놓은 데서 온 말.
26) 성조 : 상스럽고 더러움.
이때에 인조가 승하하시고 효종(孝宗)이 새로 嗣位하여 설치의 대지를 품으시고
“내 10만 병사로 멀리 나가고자 했으나
가을바람이 구련성27)을 웅장히 가라앉히네
큰 소리로 부르며 천교자28)를 밟고 차니
노래와 춤이 백옥경29)으로 되돌아왔구나!”(편집자 역)30)
라는 술회의 어제(御製)와 원로 이경여(李敬輿; 白江)에게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으나, 날이 저물면 서서히 물러가는구나(편집자 역)”라는 밀비(密批)를 내리시는 등 심상치 않으신 의사를 암시하시고 산림유일(山林遺逸)의 선비들을 정초(旌招)하실새 우암은 물론 그중의 필두로 피소(被召)되었다.
27) 구련성(九連城):압록강 기슭에 쌓은 고려의 국경.
28) 천교자(天驕子):주로 흉노를 일컬음.
29) 백옥경(白玉京): 천상 세계에 있다는 옥경.
30)“我欲長驅十萬兵 秋風雄鎭九連城 大呼踏蹴天驕子 歌舞歸來白玉京”
그래서 우암은 이 영주(英主)의 대계를 역찬(力贊)하여 평생의 회포를 전포(展布)하려고 북으로 한강을 건너 경성에 이르러 어사대(御史臺)에 올라 악헌(惡憲;사헌부 執義)에 취하게 되었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은사 일출(隱士一出)에 화기(禍機)가 수발(隨發)할 것을……
4. 후기(後紀)
그것은 이른바 김자점(金自點)의 매국사건(賣國事件)으로 그때 수상 이경석(李景奭)이 정신인책(挺身引責)하여 성충(誠忠)을 다하던 일과 또 효종께서 청조(淸朝)의 섭정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으로 더불어 숙호(夙好)31)의 사이가 아니더면 중대한 위기를 일발에서 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31) 숙호(夙好): 공경하고 좋아함.
김자점은 본래 정사원훈(靖社元勳)32)으로 인조의 신임 깊던 사람이다.
32) 정사원훈(靖社元勳): 인조 반정 때 공을 세운 사람.
그는 재지(才智)는 있으나 불학무술(不學無術)한 까닭으로 시공교자(侍功驕恣)33)하여 탐폭의 행위가 많고 따라서 국인이 측목(側目)함이 오래더니 인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 손자 세룡(世龍)이 상(上)의 총희 조귀인(趙貴人) 소출의 옹주 부마된 것을 계기로 삼아 궁금(宮禁)에 결탁하여 내외에서 교선(交煽)한 결과로 세상에서 이르는 병술강옥(丙戌姜獄; 소현세자의 빈궁 강씨가 저주사건에 몰리던 일)도 여기서 생겼다 지목하게 되었고, 따라서 효종은 동궁시대부터 이미 이 사람을 염오하셨으므로 즉위 후에 곧 罷斥하여 버리시니 자점이 실지원대(失志怨懟)34)하는 나머지에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사주하여 청국에 잠소(潛訴)하기를, 본국의 신군(新君)이 산림(山林)35)의 사(士)를 소용(召用)하여 장차 반청(叛淸)의 기도가 있노라 하고 이어 2,3 음사(陰事)를 증알36)하였던 것이다.
33) 시공교자(侍功驕恣):공로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함.
34) 원대(怨懟): 원망,
35) 산림(山林): 은사(隱士).
36) 증알: 들춰내어 증언함.
그래서 청정(淸廷)의 의노(疑怒)를 불러 6인의 사사(査使)가 일시 동래(東來)하여 통갈37)과 추문(追問)의 갖은 시위를 행하였다.
37) 통갈: 협박하여 흘러냄.
그때 화색(禍色)이 황황하여 이수상(李首相) 같은 이는 그 가인(家人)이 필사(必死)로 생각하고 사관(使館) 밖에 관을 등대(等待)하던 정도이다. 이 풍파 중에 우암을 비롯한 징사(徵士)의 일동은 사관귀향(辭官歸鄕)하게 되고 사사의 입(口)으로부터 자점의 간상(奸狀)이 현로(現露)되어 그 일미(一味)는 모두 저법(抵法)되었다.
이같이 산림 등용은 비록 대파란을 권기(捲起)하였으나 원래 견고하신 효종의 결의는 이런 정도의 고장으로 좌절 퇴전(退轉)하실 바가 아닌 위에 그후 미기(未旣)에 다이곤이 병사하고 세조는 아직도 유충(幼沖)하여 청실(淸室)에 사람 없음을 익히 아시는 효종께서는 그때에 와서 더욱 초지관철의 일념이 심절(深切)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양송(宋) 및 윤문거, 선거, 권시, 허목, 윤휴 등을 다시 징소(徵召)하시는 일방으로 정태화, 이시백(李時白), 김육 등을 삼공(三公)으로, 원두표, 이시방, 홍명하, 이후원(李厚源), 구인후(具仁堂), 이완(李浣), 홍중보(洪重普), 유혁연(柳赫然) 등의 문무재추(文武宰樞)로 하여금 연병(練兵), 치부(治賦)의 중임을 분담시키고 신민일(申敏一)은 양사(養士)의 임(任)에, 임의백(任義伯), 유철, 홍위 등은 선화(宣化)의 직에 기용하시고 대각에는 민정중(閔鼎重), 오두인(吳斗寅) 등이며 경악(經幄)에는 김수항(金壽恒), 이단상(李端相) 등이 있어 군신이 일석(日夕)으로 자자(孜孜)하였다. 징사 중에는 우리의 우암 선생이 어느 점으로든지 제일인자가 되어 빈사(賓師)의 필두로 한 소열(漢昭烈)의 와룡(臥龍)같은 지위를 점하였다.
이때 우암은 오순(五旬) 전후의 연기(年紀)로 학부역장(學富力壯)하고 위권(位權)과 성망(聲望)이 참으로 개세의 융현(隆顯)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불차(不次)로 탁용(擢用)되어 수년 사이에 이조판서, 좌찬성의 요직에 오르고 그의 배상(拜相)은 시일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암은 실로 태공(太公)과 유후격(留侯格)의 신임과 예우를 받아 언청계종(言聽計從)되던 시대라 관작의 고하와 유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우암에게 초구일습(貂裘一襲)38)을 특사(特賜)하셨더니 우암이 상소 고사하거늘 상이 수찰(手札)로써 密諭하시어 왈
“경은 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도다. 요계(遼薊) 땅의 풍설을 장차 함께 달리고자 함이다.” (편집자 역)
하니 우암은 감읍배수(感泣拜受)하였다 한다.
38) 초구일습(貂裘一襲):담비 갖옷 한 벌.
이때에 우암은 평생 소학(所學)을 다하여 계옥(啓沃)의 책(責)을 담당하므로 그의 창언(昌言)39)과 가모(嘉謨)40)가 내수(內修), 외양(外攘)에 섭(涉)하여 고다(固多)하지만 특히 군덕(君德) 함양과 윤상부식(倫常扶植)에 힘쓴 것이 많다.
39) 창언(昌言): 적절하고도 훌륭한 말.
40) 가모(嘉謨): 나라일에 관하여 임금께 권하거나 아뢰는 좋은 의견.
기해 5월 효종대왕의 돌여(突如)하신 승하는 우암에게 있어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이었다. 그때에 상은 뇌종을 환(患)하시어 의치(醫治)중에 계셨으나 그래도 오히려 경연을 폐치 않으시고 일석으로 제신(諸臣)을 와내(臥內)에까지 인접하시며 자자도치(孜孜圖治)하셨다.
대고(大故)가 나시던 날에도 우암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함께 빈청(賓廳)에 있어 명소(命召)를 기다리더니 갑자기 유명(遺命)을 배(拜)하도록 입시하라는 전지(傳旨)를 듣고 창황히 추입(趨入)한 즉 이미 기절되셨던 뒤다.
우암의 일생은 물론이요, 이조사상에 있어 효종 대고와 같은, 바야흐로 역사의 획기적 대변화를 보이려 하던 즈음에 만사가 수포에 돌아가 대돈좌(大頓挫) 대퇴전(大退轉)을 보인 때가 없을 것이다.
가사(假使) 효종의 치세가 오래 계속되어 북벌의 대계획이 실현되었다할지라도 방흥신예(方興新銳)의 청실(淸室)에 겸하여 중원의 부(富)와 8기(八旗)의 강(强)을 옹(擁)하였으므로 그 성패이둔(成敗利鈍)은 역도(逆睹)하기 어렵다 하기보다도 정녕 싸우기 전에 요연(瞭然)치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국난에 대한 신민(臣民) 적개의 마음을 환기하여 일치 결속으로 거험자보(拒險自保)41)하면서 더욱 내정을 닦아 부강을 책(策)하게 된다면 적어도 상하투타(上下偸惰)42)하여 부유발호(腐儒跋扈)하며 당쟁에 송월(送月)하던 폐해라도 소멸되었을 것이다.
41) 거험자보(拒險自保):위험을 막고 스스로 보호함.
42) 투타(偸惰):경박하고 게으름.
그리고 이 대고가 우암에 취하여 운명적으로 몰락의 계단에 입(入)한 것은 다언(多言)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要하면 정치가의 재산 목록에 군주의 신임을 제한다면 여잉(餘剩)있을 사람이 고래로 희유(稀有)하거늘 하물며 우암으로서는 이른바 지업(志業)을 관철하려는 위에 있어 효종의 신임 그것뿐이 천상천하에 유일 재산이었음이리오.
사위하신 현종신왕(顯宗新王)께서도 선조에 내리지 않으시게 예경(禮敬)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예경이요 신임은 아니셨다. 작일(昨日)까지는 효종께 눌리어서 우암에게 만강불평(滿腔不平)을 가지고도 감노불감언(敢怒不敢言)하던 그의 정적들도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공격의 도시(刀矢)를 향하게 되었다. 사면수풍(四面受風)하는 광야에서 엄호 잃은 독수(獨樹)같이 된 우암의 당년 정세는 효종 상사에 이르러 별다른 의미에서 怙恃 잃은 영아의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창천고지 통읍불체(痛泣不逮)43) 이것이 우암의 그때 심사일 것이다.
43) 창천고지 통읍불체(痛泣不逮):하늘을 치고 땅을 두드리며 울어도 미치지 못함.
5. 말기(末紀)
이로부터 우암의 차질시대가 왔다.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제 헌의(服制獻議) 때에 고례 기년설(古禮朞年說)을 창(倡)하고 하마터면 대화(大禍)를 초인(招引)할 것을 정수상(鄭首相)의 주의에 의하여 시왕 전례(時王典禮)의 ‘불문장중(不問長衆)의 기년제’를 인(引)하여 국면을 일시 수습하였으나 익년 경자에 이르러 장령 허목의 예송상소(禮訟上疏)에 대항하여
“효종승적(孝宗承嫡)은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한다.”
하고 또
“서는 진실로 뭇 서인의 지칭으로 오로지 첩의 자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효종이 인조대왕의 서자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편집자 역)
는 수구(數句)에 질려 윤선도와 윤휴 등으로부터 폄군난통(貶君亂統)의 지목을 받아 죄명이 낭자하게 되었다. 다행으로 국제(國制)에 거(據)하였다는 변백(辨白)이 있어 봉기하는 정적들을 찬축, 폐고하여 일시 소강을 보(保)하였으나 남인들과의 수원(讐怨)이 일심(日深)하게 된 위에 애제자이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부상(父喪)에 제하여 윤휴의 제전(祭奠)받은 일로부터 발단하여 노서(魯西) 윤선거 (명재의 父로 우암의 동문친우)의 남인해구(南人解救)하는 의서(擬書)가 나오게 되매 우암은
“노서가 일찌기 자기에 향하여 윤휴로서 소인으로 명척(明斥)하던 것이 그의 기설(岐舌)44)이라.”
인(認)하게 되어 생전 교의가 사후에 그치게 되며 그 갈등이 진전하여 필경 사제의 의를 보(保)치 못하고 다른 날 회니대쟁(懷尼大爭)45)이 생겨 서인이 노·소 2당으로 분열되어 가지고 극렬한 黨禍가 백년에 이르도록 해소되지 못한 불상(不祥)의 계기를 양출(釀出)하였다.
44) 기설(岐舌):둘로 갈라놓은 말.
45) 회니대쟁(懷尼大爭): 윤증과 송시열의 노·소론에 관한 쟁론. 송이 회덕군(懷德郡), 윤이 니성군(尼城郡)에 살았기 때문에 유래됨.
그러나 현종조 15년간은 의연히 빈사의 지위가 아울러서 구일(舊日)의 면목을 보(保)하며 9년 무신에는 62세의 우암이 좌의정에 진배되어 위(位)가 인신(人臣)을 극함에 이르렀다. 그럴수록 정적의 측목이 충일층 심각하여지고 우암도 또한 시사(時事)의 일비(日非)에 감개하여 향곡(鄕曲)에 퇴와(退臥)하고 중대한 명소(命召)가 없이는 도문(都門)에 출입치 않기를 또한 십수 년에 이르렀다.
현종 갑인 7월에 그해 2월 인선왕후(효종의 비) 승하 당시 장렬대비 복제에 처음 마련되었던 국제 장자부기년복(國制長子婦朞年服)을 예조로부터 고례 중자부대공복(古禮衆子婦大功服)으로 개정 부표(改定付標)를 계청(啓請)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경자 예송이 재연되었다. 현종께서는 빈청 회계(賓廳回啓)의 ‘체이부정’이라는 문구에 크게 發怒하셔 대신의 찬축과 예관의 나문(拿問)을 행하시며 고례의
“장자가 죽으면, 정실 부인의 소생으로 두 번째 장자를 세워 장자로 명한다.”
라는 소설(疏說)에 거하여 상례(喪禮)의 추정(追正)을 명하셨다.
우암이 황공 대죄하는 사이에 현종이 아연 승하하시고 사군(嗣君) 숙종이 14세 충령(沖齡)으로 천조(踐祚)하셨다.
이때는 근종(近宗)과 척리(戚里)에 반부(攀附)하여 남인이 이미 현요(顯要)에 포열(布列)하고 전일 예송에 좌하여 폐고되었던 사람이 불차(不次)로 진용(進用)되었다.
국면이 일변하게 된즉 우암의 신변에는 결정적으로 불행이 찾아왔다. 이에 청주 유생 곽세건의 일편 상소로써 사조유로(四朝遺老)로 일세가 종사(宗師)하던 우암 선생이 비상한 죄명을 무릅쓰고 북적남찬(北謫南竄)의 전패(顚沛) 생활이 시작되었다. 즉 숙종 원년 을묘 2월에 우암은 처음 덕원부(德源府)에 정배되고 익년에는 장기에 이(移)하여 가극(加棘)46)하였다가 다시 거제에 절도위치(絶島圍置)의 전(典)을 받았으며 그 위에 상례이정(喪禮釐正)47)과 아울러 선생의 죄를 종묘에 고하자는 준의(峻議)가 수발(隨發)하였으며 강도괴옥(江都怪獄;서인이 소현세자의 遺孫을 추대한다는 익명의 괴문서)이 생김에 이르러 우암의 난통예론(亂統禮論)이 역변(逆變)의 장본이라는 이유로 안율정형(按律正刑)48)의 대계(臺啓)가 57차나 연상(連上)되었다.
46) 가극(加棘): 죄가 중한 경우에 행하는 형벌의 하나로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집의 담이나 울타리에 가시나무를 밖으로 둘러치는 일.
47) 이정(釐正):문서나 글을 다시 정리하여 바로잡아 고침.
48) 안율정형(按律正刑): 율을 상고하여 합당한 형벌을 내림.
이때는 우암의 생명이 풍전의 등화처럼 조석을 막보(莫保)할 뿐 아니라 서인 전체의 화색(禍色)이 박미(迫眉)하여 사람마다 췌췌전율(惴惴戰慄)49)하였다. 이 동안이 약 6개년이었다.
49) 췌췌전율(惴惴戰慄):몸이 떨릴 정도로 몹시 무서움.
해도수위(海島囚圍) 중에서 수년 대사(待死)하던 우암의 위업한 생명이 경신(숙종 6년) 4월에 이르러 비로소 안전의 보증을 얻었다. 즉 허견(許堅)의 역옥(逆獄)이 생기며 정국이 다시 일변하여 허적(許積), 윤휴 등 남당의 거두가 죄사(罪死)되고 김수항(金壽恒), 김석주(金錫胄), 민정중(閔鼎重) 등이 기용되어 서인의 천하를 이룬 까닭이다. 그래서 우암도 청풍부(淸風府)에 양이(量移)되어 위극(圍棘)를 벗어나서 천일(天日)을 다시 보고 미구에 해배(解配), 복관(復官), 서용(敍用), 영중추부사의 특수(特授), 명소(命召), 돈유(敦諭) 등 융은(隆恩)이 첩강(疊降)하여 해도수인은 다시 왕자의 빈사, 조정의 원로로 묘당에 불리게 된 것이다.
경연에 오른 우암은 숙종의 회한하시는 은유(恩諭)를 받으며 효종의 지사(志事)를 진술하여 ‘고통을 참고 원을 품었으니 핍박받음이 부득이하다(忍痛含寃迫不得已)’의 8자 대의(大義)로써 면계(勉戒)하고 이어 인년 걸퇴(引年乞退)를 간청하니 그때 우암은 이미 75세의 고령이던 까닭이다.
상이 허하지 않으시고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가 또한 언찰(諺札)로써 면류(勉留)하여 대로(大老)의 거국(去國)을 만지(挽止)하셨다.
이때에 우암이 수립한 것으로는 국초 방석(芳碩)의 난에 말미암아 300년 폐봉되었던 태조계비(太祖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정릉(貞陵)을 수복한 것이요, 또 하나는 효종대왕의 공덕을 송하여 세실부조50)의 예를 올린 것이요 공정왕(恭正王;정종)께 일례로 묘호(廟號)를 추상(追上)한 것과 원경후(元敬后 ; 태종비 민씨) 신주에 왕태후로 쓰인 위례(違禮)를 개서(改書)한 것과 최후에 태조대왕의 위화회군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소명(昭明)하신 위업이라 하여 ‘소의정륜(昭義正倫)’등자로 휘호(徽號)51)를 추상(追上)한 것 등이다.
50) 世室부조: 종묘의 신실(神室)에서 영구히 제사지내게 하는 특전.
51) 휘호(徽號):제후의 존호(尊號) 위에 덧붙이는 칭호.
이상의 모든 일이 전례상 당연한 일이로되 우암의 기폐입조(起廢立朝)를 보고 국정상에 가모, 창언이 있기를 기대하던 상하의 마음은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태조 휘호 추상문제에 대하여 유신 박세채(朴世采;玄石)는
“제왕의 대공(大功)은 개국 수통(開國垂統)에서 큰 것이 없나니 어찌 잠룡52)시대(潛龍時代)의 일을 추제(追提)할 것이며 또 당초 태조의 화가위국(化家爲國)이 어찌 대의만을 전위(專爲)함이리오.”
하여 입이인거(立異引去)하는 데 이르렀다.
52) 잠룡(潛龍): 잠저(潛邸). 아직 왕위를 잠시 피하고 있는 임금, 또는 아직 때를 못 만난 영웅호걸.
그 위에 신유, 임술 간의 3대국옥(三大鞫獄;試場에 익명 呈券으로써 남인 모모의 모반을 고변하는 자가 있어 당국한 김석주가 상명으로 詗治할새 어영대장 김익훈으로 하여금 주로 기찰에 임케 하였더니 1, 2인 외에는 거의 전부가 무실의 무고이므로 연소한 대간들이 익훈의 貪功凱賞을 논죄하던 일)에 관하여 우암이 김익훈(金益勳)의 유공 무죄를 주장한 것이 소배(少輩)의 반감을 사서 조의(朝議)가 궤열(潰裂)하여 경상(景象)이 불가(不佳)하게 되므로 우암은 더욱 재조(在朝)에 불안하여 드디어 해골을 연걸(連乞)하여 계해년에 이르러 치사의 윤허를 받고 봉조하(奉朝賀)53)의 몸으로 회덕 향제에 귀와(歸臥)하였다.
53) 봉조하(奉朝賀):조선조 때에 전직 관원을 대우하여 특별히 준 벼슬. 실제 사무는 보지 않으며 다만 의식이 있을 때만 참여하고 종신토록 녹봉을 받음.
걸해 후의 우암은 회니분쟁에 관하여 수차 변소(辨疏)를 올리던 외에 전연히 정치권 외에 물러 있어 연래 箚記54)하여 오던 「주자전서」의 산적된 箚疑를 정리하기에 전력할 뿐이더니 숙종 15년 초춘(初春)에 상이 중궁 민씨의 춘추방성(春秋方盛)함을 불고하시고 후궁 장씨(張氏)의 신생 왕자로 생후 반년이 되시는 분으로 원자의 명호를 주어 대신과 제신의 상조설(尙早說)을 노척(怒斥)하시고 국본(國本)을 건립하셨다.
54) 차기(箚記): 글을 읽고 필요한 곳을 적어 두는 일.
이를 들은 우암은 송조(宋朝) 철종(哲宗)의 고사를 뒤하여 제신의 상조론에 과서하였더니 상이 진노하시어 엄지(嚴旨)를 내리시되
“명호(名號) 미정지시(未定之時)라면 모르되 원자의 위호가 이정(已定)되어 국본이 확립된 후에 송모(宋某)가 원로지신으로 있으며 감히 투소자의(投疏疵議)하니 이는 종사(宗社)의 죄인이라.”
하여 제주도에 안치를 명하시고 서인의 재조자(在朝者)를 일병 찬출(一併竄黜)하신 뒤에 남인을 전부 다시 수용하셨다.
그리고 4월에는 중전을 폐하여 사제(私第)에 유출(幽黜)하시고 장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으시며 간신을 엄형하여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은 이로써 도사(途死)하였으며 경신구안(庚申舊案)을 번(翻)하여 그때 당로(當路), 안옥(按獄)하던 서인에게 사자는 추탈(追奪), 생자는 형살(刑殺)과 유배의 전(典)을 시하셨다. 이에 대신과 삼사는 우암의 10죄를 여열55)하여 궁흉극악(窮凶極惡)의 죄명을 씌우고 나국정형(拿鞫正刑)을 청하였다. 그래서 우암은 해도로부터 피나부경(被拿赴京)하다가 정읍(井邑) 도중에서 후명(後命)을 받으니 향년 83세로 파란 많은 그 일생의 막을 내렸다.
55) 臚列(여열): 진열. 기록하여 벌여 놓음.
부인은 한산(韓山) 이씨로 유녀무자(有女無子)하여 종질 기태(基泰)로 승사(承嗣)하고 5남을 거하였다.
후 6년 갑술에 숙종은 크게 추회(追悔)하고서 중전의 복위를 행하시고 남인을 재출(再黜)하여 서인을 기용하시며 기사피죄인(己巳被罪人)을 추신(追伸)하실새 우암이 수선(首先)으로 복관, 사제(賜祭)와 문정공(文正公)의 증시(贈諡)가 되었으며 또 그 후 62년 영조 병자에는 경향 유생의 소청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문묘종향(文廟從享)을 명하시고 정조 병신에 효종묘정(孝宗廟庭)에 배향케 하셨다. 추모하는 사림에 의하여 건설된 각지의 서원은 전사(專祀)와 병향(併享)을 통하여 무려 백으로 계산하므로 이에서 약한다.
그리고 우암의 임종에 제하여 문인 권상하(權尙夏;遂菴)에게 탁(託)하여 청주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지어 명(明)의 의종을 사(祀)케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우암의 지업(志業)은 일응 청산된 것이다.
유집 100여 권이 있어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이름으로 세상에 전하는바, 다만 웅혼연박(雄渾淵博)한 문장뿐으로도 우암은 조선에서 위대한 존재이던 것을 증(證)할 것이다.
6. 일사(逸事)
정릉 수복이 우암의 진청에 의하여 시행된 것은 본기에 약급(略及)하였거니와 태종조부터 폐능된 이래 280여 년 만에 초목(樵牧)에 임하여 돌아보지 않던 이 능이 비로소 일신하게 되었다. 복릉되던 날 정릉 일대에 아연히 대우(大雨)가 취지(驟至)하여 경각간에 계류가 창일하여 진예(塵穢)를 일세(一洗)하고 이어 쾌청되니 사람마다 신기하게 여겨 '세원우(洗寃雨)’라고 일컬었다.
기사 6월 모야(某夜)에 이르러 정릉참봉 모(某)가 직소(直所)에서 일몽을 얻으니 왕후의 소명이 있는지라. 정중에 입복(入伏)하고 전상(殿上)을 앙첨(仰瞻)한즉 적의56)를 입으신 의용단장(儀容端莊)하신 후비(后妃)한 분이 하교하여 가로되
“내가 이 능의 주인으로 함원(含寃) 300년에 수복을 말하는 자가 1인이 없더니 회덕대유(懷德大儒)의 공으로 말미암아 유왕 필신(畢伸))을 하였음에 불구하고 이제 그 사람이 대화(大禍)에 걸려 비명에 죽는 것을 내 능히 구하지 못하니 참한(慙恨)됨이 많다. 그러나 5, 6년을 불출(不出)하여 시비가 대정(大定)될 것이요, 금일 대유를 해한 자가 소인의 악명과 함께 견벌(譴罰)을 받을 것이니 네 이 말을 명증(銘證)하였다가 대유의 자손에게 전하라.'
하시고 곧이어 명퇴(命退)하셨다.
56) 적의(翟衣) : 옛날 왕비가 입으시던 옷.
모가 각몽(覺夢) 후에 매우 이상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날 밤에 우암의 수화(受禍)한 것을 알고 신명(神明)의 실재에 다시금 놀랐다 한다.
효종조 때 우암이 이조판서로 제수되어 호중(湖中)으로부터 승소입경(承召入京)할새 예에 의하여 처사의 건복(巾服)으로 일마일동(一馬一童)의 소조(蕭條)한 행색이 누구의 보는 바에도 향곡의 노학구(老學究) 이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수원 땅 모 촌점(村店)에서 오취휴게(午炊休憩)하더니 모 혹관(或官)이 충청수사(忠淸水使)가 되어 신부(新赴)하는 도중에 또한 동점(同店)을 찾아들었다. 수사가 방에 입하여 선객인 우암을 보고 노질(怒叱)왈
“하물(何物) 노조대(老措大)가 절도사의 입래(入來)를 보고도 회피치 않느냐.”
한다.
우암은 유유손사(唯唯遜謝)할 뿐으로 그 초양57)을 받고 있었다.
57) 초양(誚讓) : 꾸짖어 나무람.
수사의 수리(隨吏)에 영리한 자가 있어 소동에게 물어 그가 누구인 것을 알고 대경하여 수사에게 밀통한즉 수사도 악연색저(愕然色沮)58)하였으나 업이도차(業已到此)에 선후(善後)가 무방하게 되었다.
58) 악연색저(愕然色沮):놀라서 낯빛이 변함
이에 우암에게 서회(徐回) 왈
“그대는 하지인(何地人)으로 성명은 운수(云誰)오.”
‘회덕 송생원'으로 대한즉
“그러면 우암 선생과 동족인 듯하니 촌속(寸屬)은 어떠하며 또 선생의 기거가 안녕하시며 어느 날 상경하신다더냐.”
하니 우암이 미소하며 우암은 별인(別人) 아닌 자기인 것을 말하였다.
수사가 성노 일갈(盛怒一喝) 왈
“차인(此人)이 과시 병풍자(病瘋者)로다. 내 비록 무인이나 일찍 선생 문하에 출입하여 지교(指敎)받은 사람이거늘 선생을 잘 아는 내 앞에서 이같이 대현의 성명을 모위(冒僞)하여 무탄(無憚)이 막심하니 죄당태달(罪當笞撻)이로되 선생과 동족 동향이라 하기에 관서십분(寬恕十分)하는 것이요, 또 생각하니 군과 같은 풍광인은 오근피지(吾謹避之)하는 것이 다른 날 선생께 뵈어도 꾸중을 듣지 않으리라.”
고 이졸(吏卒)을 불러 일력(日力)이 상조(尙早)한즉 10리쯤 더 가서 오취하자 하고 유유하게 등정하였다.
우암은 그의 급지(急智)에 감심(感心)하고 그의 비위 좋은 데 일경(一驚)하였다. 그래서 그 무관은 미구에 통제사로 추천되었다.
우암이 장기에 위극되었을 때에 안율대계(按律臺啓)가 50여 차에 이르니 사람마다 우암의 필사를 인(認)하고 재상 모씨는 술 못 자시는 우암에게 사탕을 괴하여 말없는 최후의 전별을 고하였다. 얼마 뒤에 모재(某宰) 안상(案上)에는
“이때의 사람들이 나에게 쓴 것을 먹게 하려는데 공은 나에게 사탕을 주어 나에게 단 음식을 먹이고자 하니 그 노함이 더 크구나.”(편집자 역)
라는 우암의 답서가 왔다.
모재는 감탄하여 가로되
“死生의 제(際)에 해학할 여유가 있으니 뉘 우옹(尤翁)으로서 협량인(狹量人)이라 하느냐.”
하였다.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조선-박세당(朴世堂) (2) | 2023.05.16 |
---|---|
80.조선-유형원(柳馨遠) (7) | 2023.05.16 |
78.조선-허목(許穆) (2) | 2023.05.16 |
77.조선-윤선도(尹善道) (2) | 2023.05.16 |
76.조선-허난설헌(許蘭雪軒) (1) | 202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