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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조선-이순신(李舜臣) 본문

한글 文章/조선명인전

74.조선-이순신(李舜臣)

구글서생 2023. 5. 16.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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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순신(李舜臣)

 

이훈구(李勳求)
1896∼1961, 교육자충남 생동경대 농학과 수료미국 위스콘신대학 철학 박사남경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평양숭실전문대학 교수단국대 학장성균관대 총장조선일보사 주필 겸 부사장 등을 역임.
저서에 「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만주와 조선인」 등이 있음.

 

동양의 넬슨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요 명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汝該)다. 이조 인종 원년(1545) 경성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영상(英爽)하고도 箝制1)를 좇지 아니하며 동무 아이들과 유희를 할 때에도 반드시 전진(戰陣)의 흉을 내고 뭇 아이들의 장수가 되어서 호령을 하였다.

1)箝制:자유를 구속함.

:족집게 겸

 

동리에 틀리는 일이 생기면 장군이 나서서 억지 떼를 쓰고 경위를 따지는 까닭에 동리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었다. 장정이 되매 뜻을 문필에 두지 않고 기사(騎射)를 연습하여 발군의 기능을 나타내었다.

 

장군의 3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초출사를 하였고 누전(累轉)하여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고 42세 때에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로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고 다시 녹도 둔전사의(鹿島屯田事宜)를 겸관(兼管)하였었는데 절도사 이일(李益)에게 미움을 받아 해직 종군을 특허되었다가 그후 군공(軍功)으로 방환되어서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珖)에게 벽(辟)한 바가 되어 전라조방장(全羅助防將)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와서 선전관이 되었다.

당시 재상 유성룡(柳成龍)은 장군의 재능을 잘 알므로 주청하여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에 임명하였고 얼마 안 되어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가 다시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니 때는 정히 장군이 47세 되던 해요, 임진병역의 전년으로 동양의 풍운이 험악하여졌던 것으로 장군의 활동무대는 전개되었다.

 

임진병역 중 장군의 초군발류(超群拔類)의 공적과 무훈은 「충무공전서」 및 「충무공실기」에 상술되어 있으므로 일체 생략하거니와 당시 소위 ‘천장(天將)’으로 교만 무례하기 짝이 없던 명의 수사제독 진린(陳璘)이

“이순신은 천지를 경영할 재주와 하늘을 도와 해를 닦을 만한 공이 있다”

라고 절찬한 것만 보아도 장군이 무장으로서 얼마나 비범하였던가를 상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장군의 창안으로 된 귀선(龜船)은 금일 잠항정(潛航艇)과 철갑함의 비조(鼻祖)로 잠항정의 역사를 쓰는 사람은 장군을 필두에 안 내세우면 안 되게 되었다.

 

장군은 54세 되던 해 노량해협에서 조선수군 통제사로 최후의 대승을 박(博)하고 유환(流丸)에 맞아 선조 31년 무술 11월 19일에 운명하였다.

장군의 사보(死報)가 조정에 달하매 관을 파송하여 조제(弔祭)하고 특히 우의정을 증(贈)하였다.

후에 좌의정을 가증하고 선무공신호(宣武功臣號)호를 하사하여 덕풍군(德風君)을 봉하고 충무라고 시를 내리고 閭를 정(旌)하여 충신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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