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 문학박사. 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 생. 경성제대 조선문학과졸업. 서울대, 청구대, 영남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 역임. 진단학회(震檀學會)결성에참여. 국문학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의 초석을 놓고 나아가 민족사관의 학풍을 확립.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등이 있음.
정철은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라 하였다. 중종 30년에 한양에서 나서 인종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니 백형 정랑(正郞公)은 피체장류(被逮杖流)하여 죽고, 부 판관공(判官公)은 정평(定平), 영일(迎日) 등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여기에 공은 벌써 그 유년시대에 있어 사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또 인하여 누년실학(厦年失學)을 부득이하였더니 명종 6년에야 판관공이 방석(放釋)되매 공은 그 부를 따라 남락(南落)하여 김하서(金河西)의 문(門)에 수학하고 뒤에 기고봉(高峰)을 좇아 배웠으며 성우계(成牛溪), 이율곡(李栗谷)과는 일찍부터 정교(定交)하여 가히 평생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었었다.
문과에 급제한 것은 명종 17년 공의 27세 때였으나 성균관 전적(典籍)을 초직(初職)으로 사헌부 지평에 승진하여, 당시에 마침 명종의 종형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모탈(謀奪)하여 그 처남을 유살(誘殺)한 사건이 발각되자 공이 이를 처결하게 될 때 명종께서 공에 사주하여 관대(寬貸)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으나 끝까지 좇지 않고 법대로 집행하여 마침내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일생을 내다볼 때 결코 큰 사건이라 할 수도 없겠지마는 그러나 여기에 그의 강직개결한 성격은 여실히 나타나서 거의 그 일생을 운영하는 촛점을 발견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하겠다.
앞으로 동서 양론이 분당되어 동론서박(東論西駁) 그 당론이 자못 치열하게 될 때 공으로 하여금 서인(西人)의 투사가 되게 하고 정면에 서서 동인에 충돌하게 한 것은 전혀 그의 그러한 성격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더우기 경양군옥결 (景陽君獄決)은 공의 사환(仕宦)출발에 있어 일어난 일이라 곧 일부 인사 간에 주목을 끌어 비록 공의 성칭(聲稱)이 애울(靄蔚)1)하였지마는 오랫동안 청선(淸選)2)에 들지 못하고 형(刑), 예(禮), 공(工), 병(兵) 4조좌랑(四曹佐郞), 공, 예, 형 3조정랑에서 명종 21년에 수어사(守禦使)로 북관(北關)에 봉명하고 돌아와서 옥당에 선입(選入)하여 부수찬이 되고 또 수찬에 승진하여 율곡과 같이 호당(湖堂)이 되었다.
1) 애울(靄蔚): 초목이 무성함.
2) 청선(淸選): 청관·청반 등 한림원과 같이 지위가 귀하고 한가한 벼슬자리에 뽑힘.
선조 원년에는 전랑(銓郞)이 되었으나 그때는 김개(金鎧), 홍담(洪曇) 등이 사류(士類)를 기질(忌嫉)하는 색채가 점점 농후하여 퇴계도 또한 그 침모(侵悔)를 받고 경석(經席)에서는 기묘의 사습(士習)을 추구(追咎)3)하여 그로 인해 지금 사류를 재억(裁抑)치 않으면 안된다 논하였다. 여기에 공은 입시진계(入侍進啓)하여 김개는 상청(上聽)을 형혹(熒惑)4)하고 화를 사림에 전가하니 성명(聖明)은 불가불찰(不可不察)이니라 하였다.
3) 추구(追咎) : 이미 지나간 일을 책잡음.
4) 형혹(熒感): 재화·병란의 조짐을 보인다는 별이름. 화성(火星)을 이름인데 여기서는 아주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뜻.
이것을 들으시던 선조는 소리를 높이 하여
“정철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김개가 어찌하여 그렇단 말인가”
하셨다.
공은 말하기를
“뇌정(雷)이 비록 진동할지라도 신언(臣言)은 불가부진(不可不盡)하겠읍니다.”
하고
김개 등이 사류를 기질하는 전후 사상(事狀)을 극진(極陳)하였다.
이에 김개는 삭출(削黜)되고 홍담은 피면(被免)하여 버렸으나 그러나 김개 일파의 사류를 무해(誣害)코자 하는 마음은 더욱 심하여져 갔다. 그래서 공이 하루는 율곡을 찾아서 사류가 마땅히 먼저 그들의 기선을 칠 것이니 만일 앉아서 망하게 되면 누가 그를 논척(論斥)하겠느냐 하였다.
여기 대하여 율곡은 그럴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시 탐비(貪鄙)하는 소인이 아닐 뿐 아니라 또 질선(嫉善)한 흔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상하가 다 그 죄악을 모르는데 지금 급거(急遽)히 치면 도리어 여계(厲階)5)가 될 것이니 오늘의 사세는 선발자(先發者)가 흉(凶)할 것이라 하여 말렸다.
5) 여계(厲階): 재앙을 가져오는 일.
그뒤 선조 3년에는 판관공, 선조 6년에는 모부인(母夫人)의 친상(親喪)을 만나 고양신원(高陽新院)에서 여막(廬幕) 3년을 살고 선조 8년에 복궐하여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사성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으나 그때는 벌써 동서(東西)의 색목(色目)이 점점 현저하여 동인의 기오(忌惡)가 자못 혹심하였으므로 일단 해직하고 향리에 돌아가고 말았다.
원래 동서 양론이라 하는 것은 당시의 전후배(前後輩)간에 일어난 충돌인데 일찌기 김효원이 영상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본 심의겸은 심히 마음으로 그 인격을 비루하게 여겼었다. 그 후 김효원이 괴과(魁科)에 올라 재명(才名)이 있어 전랑에 천(薦)하려 할 때 심의겸은 전사(前事)를 생각한 바가 있어 찬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효원은 오랫동안 청선에 오르지 못하고 7년간이나 낭료(郎僚)에 있게 되었다. 여기에 김효원은 자연 심의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여 전랑이 되었을 때는 의겸은 거칠고 어리석어 병용(柄用)할수 없다 하게 되었으므로 전배사류(前輩士類)간에는 김효원에 함원(含怨) 보복할 뜻이 있음을 의심하게 되고 김효원 제배(儕輩) 또한 의겸은 해정지인(害正之人)이라 질기(嫉忌)하여 사림 전후배간에 서로 협조하지를 못하고 조론(朝論)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소위 동서 양론의 시초라 할 것이나 세인은 효원 제배를 동인이라 이르고 의겸 제배를 서인이라 불러 동인에는 많이 후배들이 모이고 서인에는 당시의 전배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던 것인데 정송강은 그중 후자에 속하여 공연히 나타나서 김효원을 소인이라 거척(拒斥)하였다.
그런데 이율곡은 늘 그 중간에 서서 협조를 꾀하여 하루는 송강이 율곡을 찾아 김효원을 논척하고자 할 때 율곡은 피등(彼等)의 죄상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데 만약 침척(沈斥)한다면 도리어 紛紜을 크게 하여 조정을 상할 것이라 하여 듣지 않았다. 여기에 공은 개탄하고 돌아가고 말았으나 이와 같이 심·김(沈金)이 각립(角立)하여 논의가 분운하였으므로 율곡은 사류의 분붕(分朋)이 장차 조정을 화(禍)할까 두려워하여 좌상(左相) 노수신(盧守愼)과 논의하고 심·김 양인을 외관에 내어 부의(浮議)를 진정하기를 상계하였다. 그리하여 김효원은 부령부사(富寧府使), 심의겸은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당론은 그로 하여 용이히 지식(止息)되지 않았다.
선조 10년에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승하하여 공이 궐하에 부곡(赴哭)하고 다시 입조(立朝)하였을 때는 도리어 당론은 치열하여 공은 이발(李潑) 등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처음에 율곡은 공에 대하여 이발과 논의화협하고 동심조제(同心調劑)하면 사림이 가히 무사할 것이니 아(我)를 굽혀 협조하라 간원하였다.
공은 율곡의 성의에 감심하여 이발과 정교(定交)하고 힘써 진정(鎭定)할 논(論)을 하였으나 동인배들은 끝끝내 서인을 격거코자 하였으므로 강직한 공은 참다 못하여 시배(時輩)의 교무(巧誣)를 통격하고 누차 사기(辭氣)6)를 나타내어 취후(醉後)에 사배의 단점을 여지없이 폭로하여 버렸다.
6) 사기(辭氣): 말과 얼굴빛.
또 하루는 이발과 같이 술을 먹고 쟁론하다가 그 낯에 침을 뱉고 일어났다. 이로부터 교도(交道)는 다시 끊어져 동서의 상합(相合)은 전연 희망이 없어졌다. 여기에 공은 분개하여 장차 퇴귀(退歸)코자 하였더니 그해 11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하였으므로 공은 율곡에 대하여 그 거취를 논의하였다.
율곡은 말하기를
“시배가 공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 시배의 과실이지만 또 공의 언어를 불신(不愼)한 탓도 없지 않아 있으니 전혀 시배만을 허물할 것은 아니다. 지금 만약 취직하지 않는다면 의저(疑阻)가 더욱 심하고 부언(浮言)은 더욱 선연(煽然)하여 마침내 화합할 수 없으니 공은 모름지기 직에 나아가 화평을 지론하여 시필(時筆)의 의심을 푸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공은 율곡의 뜻을 받아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진도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가 윤두수(尹斗壽)에 뇌미(賂米)7)하였다는 일이 폭로되자 공이 수옥(銖獄)을 억원(抑寃)타 하다가 피핵체직(被劾遞職)8)되어 대사성에 제수되고 다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
7) 뇌미(賂米):뇌물로서 보낸 쌀.
8) 피핵체직(被劾遞職):죄상을 인책하여 직을 옮김.
그랬더니 선조 12년에는 헌부에서 들고 일어나 동서사정(東西邪正)을 분변하고 의겸을 거척하였으며 다시 공을 비방하여 사당(邪黨)이라 일렀다.
이것을 들은 율곡은 분연하여 동서 2자(二字)는 반드시 망국의 화태(禍胎)가 될 것이라 극론하여 사류가 보합(保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 가운데 전일 헌부의 소(疏)는 비로소 감히 의겸을 현척(顯斥)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사당이라 한 것은 논의의 격(激)이 이에 극하였다. 의겸은 또 모르겠지마는 정철에 이르러서는 충청강개(忠淸剛介)하여 한갓 국가를 우려하고 그 기절(氣節)을 논할진댄 실로 일악의 비(比)9)인데 이에 사당의 이름을 가하여 조열(朝列)에 접적(接跡)하지 못하게 한 것은 가석한 일이라 하였다.
9) 일악의 비(比): 맹금이 날카롭게 보는 일을 비유함.
여기에 부의는 분연하여 허진(許晋) 같은 이는
“이이(李珥)의 소는 사심에서 나온 데 지나지 못한다. 의겸은 그 족당이고 정철은 그 집우(執友)이니 어찌 그 말이 옳겠느냐”
고 하여 율곡을 박론하고 또 따라서 송응형(宋應洞)이 탄핵하여 시론은 더욱더욱 복잡하여져 갔다.
이때 송강은 간장(諫長)을 체직한 이후 대사성, 병조참지, 형조참의에 제배(除拜)10)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다가 그 익년 선조 13년 정월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0) 제배(除拜): 제수(除受)됨.
이것은 공의 외관생활의 최초였으나 재임 1년여 개월에 노산군묘(魯山君墓)의 수축과 기타 목민관으로의 많은 치적을 남기고 병조참지에 환배(還拜)하였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세상은 더욱 험악하여 조정에 있을 뜻이 없어 그해 8월에 관을 버리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때 율곡은 헌장(憲長)으로서 국세를 부지하여 세도를 회복코자 하였으나 시배는 도리어 율곡을 억동부서(抑東扶西)한다 의심하고 이발, 정인홍 등은 의겸을 질기함이 나날이 심하여 공을 또한 의겸의 당이라 몰았다.
이에 대하여 율곡은 끝까지 공을 변호하여 연전에 시배들이 논의가 과격한 고로 정철이 과연 불평한 말이 있었지마는 그것은 의견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든지 정철은 개사(介士)11)다. 만약 그로써 의겸과 체결하여 성세(聲勢)를 조성한다 하면 그것은 원왕(寃枉)12)이 너무나 지극하다 하였다.
11) 개사(介士): 원래 갑옷 입은 무인을 뜻함인데 여기서는 기개가 있는 인사를 말함.
12) 원왕(免枉): 원죄, 원통한 죄.
그 후 공은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여 선조 16년에 예조참판에 환배하고 곧 예조판서에 특성(特陞)하였다. 그러나 헌부는 그 승탁(陞擢)13)을 탄핵하고 시배는 율곡을 오국지소인(誤國之小人)이라 공척(攻斥)하였으며, 박순은 송웅개, 허봉 등의 협원구함(狹怨搆陷)하는 실상을 언론하였다.
13) 승탁(陞擢): 뽑아 올림.
그러더니 또 응개 등의 송강, 율곡, 박순에 대한 질기는 폭발하여 절패(絶悖)한 계사(啓辭)가 나오고 양사(兩司) 또 이에 사부(私附)하여 무훼(誣毁)가 유심(愈甚)하였다.
여기에 자못 조의(朝議)는 수습하기 어렵게 되어 선조대왕은 2품 이상을 선정전(宣政殿)에 인견하여 근일 조정이 부정(不靖)한 것은 전혀 심의겸, 김효원으로 인함이니 이 양인을 遠竄14)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였다. 모였던 좌우가 분당은 본시 심·김 양인에 의하였지마는 지금은 다 보외(補外)되어 있어 조론에 관여됨이 없다 답하였다.
14) 원찬(遠竄): 멀리 귀양보냄.
또 선조는 그러면 송응개, 허봉 등은 내가 그 간악한 것을 아니 찬하는 것이 어떤가 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모두 救解코자 하였는데 공이 홀로 차인(此人) 등은 불가불 그 죄를 명시하여 시비를 정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이 일언에 송응개 등은 변지(邊地)에 원찬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 김우옹은 다시 공을 탄핵하여 공은 선화(煽禍)를 교구(交搆)15)하고 그 직이 난계(亂階)하니 파거(罷去)하기를 청하였다.
15) 교구(交捲): 서로 끌어당김.
그러나 상(上)은 말하기를
“정철은 위인이 그 심(心)은 정(正)하고 그 행(行)은 방(方)한데 오직 그 설(舌)이 곧은 고로 시배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에 미움을 받을 따름이다. 직에 당하여는 그 진췌(盡膵)하는 충(忠)과 맑은 절의(節義)는 초목도 또한 그 이름을 알 것이니 이야말로 원반16)의 일악이요 전상(殿上)의 맹호이다. 만약 정철을 죄한다면 이는 곧 주운(朱雲)을 참하는 것.”
이라 하였다.
16) 원반 : 봉황의 한 가지라는 원추새 무리.
선조 17년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의 지기요 유일의 조화자(調和者)인 율곡은 기몰(旣沒)하고 우계 또한 퇴조(退朝)하였다. 조(朝)에는 비록 박순이 있다 하지만 이발, 김우옹 등의 기홀17)은 심하여졌으므로 공은 점점 조정에 불안을 느끼게 되어 동퇴(同退)하려 하였더니 정여립이 나와 율곡, 우계와 공을 극저(極詆)18)하고 양사 또한 박순과 공 및 율곡, 우계 양 선생이며 박응남(朴應男), 윤두수 등을 의겸의 당이라 몰고 이발 또 따라서 홍성민(洪聖民), 구봉령(具鳳齡) 등을 추계(追啓)하여 의겸의 당이라 하니 조정은 벌써 동인의 천지라 가히 그 세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
17) 기홀: 서로 시새워서 미워함.
18) 극저(極詆): 심하게 꾸짖음.
그래서 의겸의 관작은 삭탈되고 조당(朝堂)에 그 죄명을 방(膀)하니 공과 율곡, 우계도 당인이라 그에 열서(列書)되었다. 때문에 사림은 기를 잃고 조야는 해악(駭愕)19)하였으나 여기에 공은 드디어 고양에 퇴우(退寓)하고 뒤에 창평(昌平) 향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 駭愕: 몹시 놀램.
이후 4년간 공은 정계에 뜻을 얻지 못하고 고양 신원과 창평에 은거하여 세상을 비관하고 일종의 가은자(假隱者)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선조 22년에는 정여립의 모반이 발각되어 상하가 진경(震驚)하고 조야가 용구(聳懼)20)하였다.
20) 聳懼: 두려워함.
공은 이 변을 향리에서 들었으나 지구(知舊)의 말림도 듣지 않고 역적이 군부(君父)를 모해하는데 중신이 밖에 있어 어찌 의(義)로써 나아가지 않겠느냐 하고 상경하였다.
이 때에 여립은 탈신(脫身)하여 망명코자 하다가 관군을 만나 自刃하여 죽고 유생 양천회(梁千會)는 상소하여 정언신(鄭彦信), 이발 등이 역적으로 교친(交親)하여 국문(鞠問)이 부실하다 폭로하였다.
이에 공은 우상(右相)에 제수되어 치옥(治獄)하게 되었는데 정언신, 이발 등은 적초(賊招)에 나와 상이 친히 국문하니 천위진혁(天威震赫)21)하였다.
21) 천위진혁(天威震赫): 제왕의 위엄이 눈부심.
공이 나아가 계하기를
“조신이 역적에 교친하는 것은 그 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어찌 천하에 두 여립이 있으리오.”
하니 그제야 선조의 노(怒)가 조금 풀려 언신 등을 원찬하였다. 그랬더니 그후 유생 양형이 상소하여 당초 언신이 고자(告者)를 참한다 하였다 하므로 상이 더욱 노하여 다시 언신을 국문하고 사(死)를 사(賜)하였다.
이때 타상(他相)은 감히 일언을 발하지 못하는데 공이 홀로 나가 아조(我朝) 200년에 아직 일찌기 한 대신을 죽인 일이 없다고 계하여 감사(減死)하고 원배(遠配)하였다. 이발 등에 대하여도 역시 역모를 듣지 못하였다하고 논구(論求)하다가 전조의 노를 입어 위관지임(委官之任)을 사(辭)하였다.
이때 최영경(崔永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찌기 조남명(曺南冥)의 문(門)에 놀아 頗히22) 청명(淸名)이 있어 우계, 율곡도 칭허(稱許)하였더니 그뒤 점점 정인홍, 정여립 등의 사의(邪議)에 염오되어 도리어 양선생과 공을 詆毁하였다. 그런데 정여립의 옥(獄)이 일어나자 제적(諸賊)이 길삼봉(吉三峯)을 謀主라 이르고 혹은 길삼봉은 진주의 최영경이라 하였다.
22) 頗히:자못.
그래서 전라감사가 밀계(啓)하여 영남감사와 병사(兵使)에 이문(移文)하고 체포하니 영경은 적과 내통이 없다 공술(供述)하였다. 이때에도 공은 영경사(永慶事)에 그 단서가 없고 또 그는 본시 효우(孝友)로 이름이 있으니 黨逆할 리가 없으리라 하여 그를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여립의 옥이 끝나고 그 익년 즉 선조 23년에는 공은 좌상(左相)에 승하여 광국평난이훈(光國平亂二勳)에 책(策)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하니 이로부터 서인의 세력이 다시 조정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편의 세력이 대두하면 그만큼 또 반대파의 기질이 심하여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과연 선조 24년에 건저(建儲)23)의 일로써 이산해(李山海)와 충돌하게 되었다.
23) 건저(建儲):제왕의 계승자로 황태자나 왕세자를 세우는 일.
원래 건저는 김빈(金嬪) 소생 신성군(信城君)이 왕의 기애(奇愛)를 입고 있었던 것인데 공은 다른 데서 저사(儲嗣)를 세우려 하다가 왕의 진노를 입게 되고, 또 동인에 탄핵의 기회를 준 셈이 되어 헌부, 간원이 들고 일어나 정철은 본시 성(性)이 강퍅한 데다가 또 행검(行檢)24)함이 없어 상위(相位)에 있으면서도 계신(戒愼)함이 없어 사당을 광식(廣植)하여 조강(朝綱)을 천농(擅弄)한다 논핵하였다.
24) 행검(行檢): 품행이 방정함.
여기에 공의 죄상이 조당에 방시(膀示)되었으나 홍여순(洪汝諄)이 다시 죄중벌경(罪重罰輕)을 창언(倡言)하고 또 양사가 공의 무상행사(誣上行私)하는 죄는 족히 원찬에 당하다 갱론하여 드디어 공은 명천(明川)으로 유배되고 뒤에 진주, 강계로 이배(移配)되어 圍籬25)를 가하였다.
25) 위리(圍籬): 유배인이 사는 배소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는 일.
이때 공의 당여(黨與)라 하여 혹찬(或竄) 혹출(或黜)한 이가 전후 20여 인에 미쳐 일시의 명경현사(名卿賢士)가 거의 척축되었다.
그러자 그 익년 곧 선조 25년에는 전고(前古)에도 미증유한 임진란이 일어났다. 선조대왕은 난을 피하여 북행을 하시는데 어가가 송경을 지날 때 왕이 남문에 출어하셔서 군민을 위유(慰諭)하시고 각기 소회(所懷)를 진달(陳達)케 하니 군민이 일제히 공의 석방을 원하였으므로 곧 하교하여 공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장려하고 행재(行在)로 향발하라 명하셨다. 공은 소지(召旨)를 배소에서 받고 평양에서 어가를 맞아 박천, 의주로 수가(隨駕)하고 다시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가 되어 남하하였다. 그리하여 분골쇄신 국가를 위하여 최후로 진력하다가 미처 난도 그치지 못하였는데 불행히 강화 우사(江華寓舍)에서 작고하니 향년 58에 송강은 일생을 마쳤다.
이상은 송강의 일생을 대강 연차(年次)에 따라 개관하여 보았거니와 거의 일생을 당론에 시작하여 당론에 마친 듯한 느낌을 준다. 사후에도 그 익년에 권유(權愉), 김우옹 등이 양으로는 求解하는 듯하나 기실 음으로는 擠陷26)하여 최영경을 죽였다 追論하여 공의 관작이 삭탈되고 그후 또 정인홍이 박성, 문경호(文景虎) 등을 사주하여 최영경의 사를 構捏27)한 자는 정철의 지주자(指嗾者) 성혼(成渾)이라 투소(投疏)하자 대사헌 기자헌(奇自獻) 등이 그 논을 고선(鼓扇)하고 삼사가 제발(齊發)하여 우계의 관작이 삭탈되고 공에는 그 화가 천양(泉壤)에 미칠 뻔하였으나 마침 정인홍의 체직으로 화를 면하였다.
26) 擠陷:사람을 모함하여 죄나 곤경에 빠뜨림,
27) 構捏 : 거짓으로 얽어맴.
이후 오랫동안 신원(伸寃)이 되지 못하고 간적(奸賊) 소인이라 지목되어 진신의 사이에서도 사실대로 말하기를 諱忌하였더니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비로소 김장생이 그 관직을 돌리기를 청하고 또 공의 제자(諸子)가 송원(訟寃)을 상서하며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윤방, 우의정 신흠(申欽) 등이 雪冤을 청하여 공의 관작이 복환되고 뒤에 문청(文淸)이라 賜諡하였다.
공의 위인은 율곡이 그 소론(所論) 가운데 공을 평하여
“정모는 충청 강개하여 한갓 나라를 근심하고 비록 양협견편(量狹見偏)28)하여 집체(執滯)하는 병은 있지마는 그 기절(氣節)을 논하면 실로 일악의 비(比)라.”
28) 양협견편(量狹見偏):도량이 좁고 편견이 심함.
한 말이 있고 일상 공을 부르기를 개사(介士)라 하였으며
우암은 그 신도비문(神道碑文)중에서
“공은 흉금이 낭철(郎澈)하고 절대로 휴진29)이 없어 무릇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만 하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비록 친우권귀(親友權貴)라도 조금도 용서함이 없어 필경 그로써 화를 산같이 입었다 하며 그 강정지기(剛正之氣)는 늙어 더욱 심하였다.”
한다.
29) 휴진 : 일정한 규율.
공의 성격은 가히 이 양 선생의 評言으로 진(盡)하였다 하겠으나 다시 공을 극히 단적으로 표명한다면 언제 공의 선생인 고기봉이 수석청절(水石淸絶)한 곳을 만나 누가 세간 인품에도 이에 비할 자가 있느냐 물으니 정철 같은 사람일진저 한 말과, 퇴계 선생이 공은 옛날 쟁신(諍臣)30)의 풍이 있다 한 말을 인용할 수 있을 듯하다.
30) 諍臣: 간하는 신하.
요컨대 공은 위인이 극히 강직 개결하여 그로 하여금 당론의 와중에 서게 하고 또 당세의 비방을 일신에 위집(蝟集)31)하여 결국은 원찬을 당함도 부득이하였거니와 공은 또 성(性)이 총민절인(聰敏絶人)하여 어떠한 글이라도 불과 수편(數篇)에 성송(成誦)하는 데도 정근(精勤)하여 우환전패(憂患顚沛)32)의 중이라도 과독(課讀)을 불철(不綴)하였다 하며, 강계(江界)에 있을 때는 「대학(大學)」 일부를 소주병(小註竝)하여 위리의 주목(柱木)에 써두고 조석으로 우목(寓目)33)하였다 하니 가히 여지구학34)한 것을 알 수 있다.
31) 위집(蝟集): 일시에 많이 모임.
32) 전패(顚沛): 엎어지고 자빠짐.
33) 우목(寓目): 주의해서 봄.
34) 여지구학(與之俱學): 그것과 더불어 함께 공부함. (맹자 고자장구상 제9장 참조 )
그러나 공에는 또 그 반면에 호탕한 방면도 있었는 듯하니 본시 술을 좋아하였거니와 월사(月沙)는 언제 공을 신선중인(神仙中人)이라 한 말이 있고
상촌(象村)은 그 전(傳) 중에
“그 풍조는 상쾌하고 자성은 청랑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 겸손하되 간격이 없으며 물욕에 청렴하고 벗을 믿으며 집에 있으면 효제하고 조정에 서면 결백하니 응당 옛사람에서나 구할 만하다.
술을 들 때에도 반 잔만 하고 입으로는 손수 지은 장단가(長短歌)를 읊으며 벗을 사귐에도 부드러운 말로 둥글리어 곧 친밀해지고 지나간 자취들은 모두 잊고 상쾌히 상대하니 무릎이 앞으로 감을 깨닫지 못하는 바다. 내가 본 사람들은 많으나 이러한 격운(格韻)은 아직 맛보지 못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이러한 일면은 또 공으로 하여금 단순히 정치가에 두지 않고 시인으로의 활약을 겸하게 하였으니 다음에 그의 시가 방면의 활약 내지는 그의 시가에 대하여 일언(一言)하겠다.
송강에게는 물론 한시(漢詩)도 있었다. 그 시문은 청고준일(淸高俊逸)하여 더우기 산영(散詠)에 장(長)이 있다는 평도 있지마는 만약 우리가 시인으로의 송강을 본다면 도리어 조선 시가에서 볼 수 있는데, 공은 다른 어느 이 방면 작가와도 마찬가지로 학자이고 또 정치가이지 순전한 시가 작가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일반 조선 시가 작가는 몇몇 예외를 내놓고는 모두 일시 잘못된 도락적 작가이지마는 송강만은 비교적 성의를 가지고 가작(歌作)을 하고 또 적으나마 「송강가사」라는 일책가집(一冊歌集)을 내었다.
이 점에 있어 송강은 확실히 작가라 할 수 있거니와 오늘날 그의 작품으로 남은 것은 거의 전부 「송강가사」에 습재(拾載)되어 있는데 장가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가 있고 단가에는 〈훈민가(訓民歌)〉를 합하여 77수가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모두 그 저작연대가 분명치 못하지마는 장가에 〈관동별곡〉은 관동의 풍경을 역거 설진(歷擧說盡)한 것으로 아마도 공이 강원도 관찰사로 내려갔을 때의 저작인 듯하고, 〈사미인곡〉과 그 속곡(續曲)은 멀리 천외(天外)에 있어 미인을 사모하는 노래이고 〈성산별곡〉은 창평에 있는 성산의 풍경을 영향한 것인데 이들은 그의 50 당시에 양사의 논척을 받아 서명천명(書名天命)하고 고양에 퇴우하여 이래 4년간 고양 신원, 창평양지에 왕래하며 세사에 불평을 품고 가은자(假隱者)가 되어 세상을 둔피하려던 때의 저작인 듯하다.
끝으로 〈장진주사〉는 전연 그 저작 연대를 상상할 길이 없으나 이상으로 대강 장가 수편은 45세에서 54세에 이르는 10년간의 저작이라 볼 수 있다.
또 단가에도 <훈민가> 16수는 경민편(警民編)에 바로
“정철이 강원도 감사가 됐을 때의 작품”
이라 하였으니 역시 이 시대의 작이라 하겠는데 송강의 가작은 벌써 30당년 관북봉사(關北奉使) 때에 보이지마는 그의 작가적 생활의 가장 고조에 달한 때는 암만하여도 45세 이후 10년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이 시대는 그의 생애 중 정치가로서는 비참한 시대라면 비참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사생활로는 가장 우한(優閑)한 시대라면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어느 편이라 하든 저작 심리를 많이 자극한 시대라 하겠다.
더우기 그가 선조 18년에 퇴조 이후 4년간은 정론(政論)의 경외(境外)에서 충분히 자연을 완상할 수도 있었고 자유로 이상과 환상을 비치(飛馳)하여 유유히 저작에 탐(耽)할 수도 있었던 때다.
다음 공의 작품은 일반이 단가에보다 장가에 특장(特長)이 있었다. 이조 중엽 이래 특히 장가에도 가사문학이 대성하여 몇몇 작가를 내고 작품을 산출하였으나 이것은 송강에 이르러 대성한 느낌이 있어, 그 작품은 어느 것이나 다른 작가가 가히 미치지 못할 것으로 아마도 고래 가사문학의 제일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대 비평가도 대체로 이에 대하여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동국악보(東國樂譜)」에는
〈관동별곡〉을 악보의 절조(絶調)라 하고
<사미인곡>은 영35) 중의 백설(白雪)이며
<속사미인곡>은 어익공(語益工)하고 의익절(意益切)하여 가히 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백중할 것이라 하였다.
35) 영 : 춘추전국 시대의 초나라 서울을 영이라 했음.
또 서포 선생은 〈관동별곡〉과 〈전후 미인곡>을 아동지이소(我東之離騷)36)라 하였을 뿐 아니라 자고로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 오직 이 3편 뿐이나, 그중에도 〈후미인곡>이 우고(尤高)라 하였으며,
북헌선생도 〈전후 미인곡>을 극찬하여 그 심(心)은 충(忠)하고 그 지(志)는 결(潔)하고 그 절(節)은 정(貞)하고 그 사(辭)는 아이곡(雅而曲)하며 그 조(調)는 비이정(悲而正)하여 굴평(屈平)의 이소에 추배(追配)할 것으로 가히 일월(日月)로 더불어 쟁광(爭光)할 것이라 하였다.
36) 아동지이소(我東之離騷): 우리나라의 이소. 이소란 초나라 굴원이 지은 사부(辭賦). 참소에 의하여 초나라의 조정에서 쫓겨나 실의에 찬 나머지 멱라수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무한한 시름을 적은 장시.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엮은 초사 중에서 제1로 뽑힘.
이러한 찬사를 들면 한이 없으나 청음(淸陰) 같은 이도 이 노래를 듣기를 극호(劇好)하여 가비(家婢)에게 가르쳐 가끔 불리어 들었다 하며, 또 자신이 <관동별곡>을 한시로 번역도 하였다.
이로써 나의 허술한 평을 기다리지 않고도 능히 저절로 그 가치가 정해질 듯싶으나 내가 한 가지 더 말하여 두고자 하는 것은 공에게는 <송강가사〉라는 가집을 우리 문학사상에 남겨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감히 송강을 시인이라 천(薦)하여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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