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76.조선-허난설헌(許蘭雪軒) 본문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창작」, 「국문학개론」 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음.
난설헌은 절륜한 천자(天姿)로 거족 명문에 태어났다. 그 아버지며 형제가 모두 재화(才華)와 학식이 겸비한 거장들이고 또는 조야에 명망이 높은 이들이다. 난설헌은 그 속에서 마(麻) 중의 봉(蓬)과 금상(錦上)의꽃처럼 자라고 피어나며 그 천분을 발휘하고 영예를 드날리었다.
그 아버지 허엽(許曄)은 호를 초당(草堂)이라 하고 이번(李番), 서경덕선생에게 배우고 명종, 선조의 양조를 섬기고 현요(顯要)한 지위에 있으며 30년 동안을 진췌하였으되 문정(門庭)은 소연하여 위포(韋布)1) 때와 다름이 없고 스스로 학문이 있다고 자랑하였으며
그 큰 오라버니 허성(許箴)은 호를 악록(岳麓)이라고 하고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6경을 학의 본체로 삼아 벼슬은 판서까지 하였으며 학문과 도덕으로 당대(선조조) 사림의 촉망이 있고 성문(聲聞)이 크게 드날리었으며
그 다음 오라버니 허봉은 호를 하곡(荷谷)이라 하였으며 선조조에 등과하여 청요(淸要)를 역양(歷揚)하고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 옥경민(玉敬民)이 올 때 종사관으로 마중을 나가서 그 두 조사를 문장으로 탄복케 하였고 상차(上箚)하여 국사를 의논하다가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3년 만에 풀려 돌아와서는 산수간으로 방랑생활을 하며 그 전아한 문장과 호준한 시법(詩法)으로 저서를 많이 하였다.
1) 위포(韋布):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삶.
그 아우 허균(許筠)은 호를 교산(蛟山)이라 하며 성품이 이상하여 속(俗)을 거스르고 일을 꾀하기 좋아하다 모역이라는 죄로 복주(伏誅)까지 당하고 경박무행(輕薄無行)하다는 평을 듣기는 하였으나 문장이 한때 독보였고 시를 잘하고 그 식감(識鑑)이 놀라왔으며 「홍길동전」 같은 소설을 짓고 그 외에도 시와 문의 많은 저작이 있었다.
허균이 지은 「학산초담(鶴山樵談)」을 보면 허봉과 난설헌도
“임영(臨瀛 ; 강릉)의 정기를 품었다.” (편집자 역)
고 하였으니 과연 인걸은 지령(地靈)이라는 말과 같이 강릉의 산천 정기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강릉은 자고로 명현, 문장을 많이 낳았는바 명원(名媛), 숙녀로도 연화부인, 홍장(紅粧) 또는 사임당 같은 이가 있다.
난설헌은 이와 같이 생장하여 덕보다도 재(才), 의지보다도 정감이 승하고 침선보다는 시문을 더 숭상하여 독서와 습작으로 일을 삼고 그 준매(俊邁)한 천재로써 용공(用功)은 적고도 성취는 컸었으며 그 이상과 조예는 벌써 남다른 놀라운 경지에 들어 여간한 이로써는 그의 형안에 넘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은 교리 김첨(金瞻)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는 하였으되 홍문저작(弘文著作)에 그치고 말았다. 이가 난설헌의 남편이었다.
김성립이 한번은 강사(江舍)에 가서 독서를 하고 있을 때다.
난설헌이 그를 생각다가
“추녀를 차지하고 쌍쌍이 드나는 제비
고운 날개 맞부딪치며 꽃잎 마구 떨구오
골방서는 눈빠지오 애태는 마음
강남에 풀 푸른데 소식 없고녀” (편집자 역)
라 하는 시를 지어 보냈고
또 한번은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여러 동무와 동접(同接)을 하고 거업(擧業)을 공부하던바 한 동무가 우정 장난으로 김이 기생방에 놀러 다닌다고 말을 하였더니 그 집 하인이 듣고는 난설헌에게 밀고하였다. 난설헌은 안주를 장만하고 술을 큰 백병(白甁)에 넣고 그 병의 배에는
“낭군께서는 무심한 분이구료
동접의 누가 반간(反間)을 놓더이다” (편집자 역)
라는 일구를 써 보내었다 한다.
이런 것으로 보면 그 남편을 믿고 정다히 지내던 것 같으나 다른 기록과 전설에 의하면 금슬이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호를 난설헌 외에 또 경번(景樊)이라 하여 당의 번부인(劉綱의처)이 그 부부가 함께 신선이 된 것을 부러워하였고 「고금가곡」, 기타 가사책에 난설헌 작으로 전하는 〈규원가(閨怨歌 ; 일명 원부가)〉는 그 시집에 적힌 5언고시 <소년행>을 증연(增衍)한 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말한 것을 보면 그 남편과의 불만이 있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난설헌은 그 형제들 사이 우애도 있으려니와 그 중형 하곡과는 더욱 유난하였다. 그의 시집에는 하곡에게 기송(寄送)·차운(次韻) 등의 시가 종종 보인다.
“ 머나먼 갑산으로 귀양가는 손
함경도로 가는 형색 오죽하시료
신하인 오라버니 가태부(賈太傅)지만
임금님이야 어찌 초 회왕이겠소
가을이라 강물은 언덕에 치렁치렁
석양이라 변방 구름 서산에 뉘엿뉘엿
서릿바람 차갑다 기러기 떼 날아가는데
그 행렬에 동강이 나서 끊어졌네요”(편집자역)
이 시는 하곡이 갑산으로 귀양가 있을 때 지어 보낸 것인바 그 결구의
“서릿바람 차갑다 기러기 떼 날아가는데 그 행렬에 동강이 나서 끊어졌네요”라 한 것이 그 형제의 정을 몹시 처절하게 말했다.
자녀는 두지를 못하였다 하였으나 그의 〈곡자(哭子)〉라는 시를 보면 남매를 낳았다가 참상을 당한 듯도 하다.
“지난해에는 귀여운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스런 아들까지 잃었네
서럽고 서러워라 광릉 고장에
두 무덤 나란히 만들어졌네
백약나무 쓸쓸타 바람이 일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소나무에 비추이누나
지전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
무덤에다 맹물 한잔 부어 놓는다
알고말고 너희들 형제의 넋이
밤마다 서로서로 따라 노닒을
아무리 뱃속에 아이 있다만
그 어찌 장성하길 바라겠느냐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자니
비통한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편집자 역)
그는 한송이 백련화처럼 초연히 홀로 서서 효란(淆亂)2) 탁오(濁汚)한 이 진계(塵界)를 벗어나 청정 한적한 선경을 몽상하고 그날 그날을 지우며 간간 끄적여 놓은 시문이 한 간은 채울 만하였으나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모두 소화하여 버렸다.
2) 효란(淆亂): 뒤섞여 어지러움.
그는 명종 18년 계해에 나서 선조 23년 경인에 돌아갔다. 돌아가던 그 전해 어느날 꿈에
“푸른 바다 요지(瑤海)에 번지어 가고
파란 난새는 오색 난새에 어울려 있네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三九)송이
분홍꽃 떨어지고 서릿달은 싸늘하이” (편집자 역)
라는 시를 지었던바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三九) 송이’의 3·9는 27로써 그 향년의 수와 같다. 과연 영절스러운 시참(詩讖)이었다.
지금 전하는 「난설헌시집」은 그 친정의 건연(巾衍)에 있는 약간의 유고인바 그가 돌아간 뒤 18년 되던 해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 양유년(梁有年) 등이 이 유고를 얻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개간(開刊) 성행하였고 선조 때 역인(譯人) 홍순이 중국 금릉에 들어가 명녀를 얻어 1녀를 낳은바 재예가 탁월하여 7, 8세 때부터 시문을 능히 하다가 그 부모를 다 여의고 그 외조 사씨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커서도 시집도 안 가고 항상 이 동토(東土)를 그리워하더니 「난설헌시집」을 얻어 보고는 퍽 흠모하여 화속시(和續詩)를 짓고 자기의 호를 경란(景蘭) 또는 소설(少雪)이라고까지 하였다.
「난설헌시집」은 그 뒤 조선서도 수차 중간하였으며 이 근래 경란 시와도 합하여 인행한 것이 있다.
난설헌 시에는 더러 당인이나 원·명인의 싯구를 따다 쓰기도 하고 그 아우 교산이 지어준 것이 있기도 하다고 운운하는 이도 있었으나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은
“허하곡은 연소하여부터 경박하고 조급하여 한번 배척하여 떨치지 못하였으니 유주(柳州)의 흐름과 같다. 하지만 시는 아주 아름다왔고 또 옛 법도를 알아서 그 격조는 허균보다 높았다.
난설헌의 시를 혹자는 허균이 스스로 지어서 거짓으로 칭해서 세상을 속였다고 하나 격조는 하곡보다도 높으니 허균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편집자 역)
라 하였고 서포 김만중은
“난설헌 허씨의 시는 손곡 이달(李達)과 그의 작은 오라버니인 하곡으로부터 나왔다. 공부는 옥봉(玉峰) 등 여러 공자들에게 미치지는 못했으나 지혜와 성품은 그들을 뛰어넘음이 있었다. 해동의 규수 중에 이 여인이 제일이다. ” (편집자 역)
라 하였고 하곡 허봉은
“경번의 재주는 배우지 않고도 능함이 있었으니 대도(大都) 태백(太白) 장길(長吉)의 유음(遺音)이었다.” (편집자 역)
라 하였고 교산 허균은
“누이의 시문은 모두 하늘에서 낸 것이다. 유선시(游仙詩)를 즐겨 지었으며 시어는 맑고 찼다. 이는 불을 때어 밥을 지어 먹고 사는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동방의 부인네들 중에 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무니 오직 술 담그고 밥짓는 것을 본분으로 하여 외부의 문화에 감당하지 못했다. …근래에는 자못 있으니 경번은 신선의 재주가 있고 옥봉은 대가라도 또한 감히 논할 수 없는 정도이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그 시문에 대하여 종래 이런 평들이 있었으려니와 그는 그때 성행하던 당시체를 배워 재분을 드러내었으며 그 작풍은 표일(飄逸) 향염(香艶)하고 그중 유선시 같은 것은 가장 그의 절조(絶調)이었다.
〈규원가〉 같은 것도 비록 한문의 고사 숙어를 많이 쓰긴 하였으나 애원(哀怨)하면서도 온아한 맛이 있어 보통 항간에 돌아다니는 가사와는 더불어 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소장(所長)은 이런 노래보다도 한문으로 지은 그 시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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