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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by 耽古書生胡廣補闕- 胡廣은 빠진 것을 채우며 황제를 보좌하였다 後漢胡廣字伯始 南郡華容人. 後漢때 胡廣의 字는 伯始이니, 南郡 華容 사람이다.察孝廉 試章奏. 효렴에 뽑혀,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맡았다.安帝以廣爲天下第一. 安帝는 호광을 천하의 일인자로 여겼다.累爲三公. 여러 번 三公이 되었다.年已八十而心力克壯. 나이가 이미 80세였으나 마음과 힘이 아직도 씩씩했다.性溫柔謹素 常遜言恭色.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삼가고 소박하여, 항상 겸손한 말과 공손한 빛으로 대하였다.達練事體 明解朝章. 일의 대체에 통달하고 익숙했으며, 조정의 법에 밝았다.雖無謇直之風 屢有補闕之益. 비록 강직한 풍도는 없어도, 여러 번 빠진 것을 보충하는 도움이 있었다.故京師諺曰 萬事不理問伯始 天下中庸有胡公. 그런 까닭에 도읍의 속담..

by 耽古書生袁安倚賴- 袁安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였다. 後漢袁安字邵公 汝南汝陽人. 後漢 袁安의 字는 邵公이니, 汝南 汝陽의 사람이다.嚴重有威. 見敬於州里. 엄중하고 위엄이 있어서, 고을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肅宗末爲司空 遷司徒 和帝時薨. 肅宗 말년에 司空이 되었다가 司徒가 되었고 和帝 때에 죽었다.初安以天子幼弱 外戚擅權 每朝會‧進見及與公卿言國家事 未嘗不噫鳴流涕. 처음에 袁安은 천자가 어려서 약하고, 외척이 擅權하기 때문에, 매번의 朝會와 進見 그리고 공경들과 함께 국가의 일을 말할 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自天子及大臣皆倚賴之. 及薨 朝廷痛惜焉.천자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가 죽자 朝廷이 매우 애석해하였다.初安父沒 訪求葬地 道逢三書生. 처음에 원안의..

by 耽古書生黃覇政殊- 黃覇의 政事는 남달랐다. 前漢黃覇字次公 淮陽陽夏人.전한 황패의 자는 차공이니, 회양 양하의 사람이다.武帝末以待詔入錢賞官 補侍郞謁者.무제 말년에 待詔로서 錢賞官으로 들어가서 侍郞謁者에 임명되었다.▲錢賞官: 官名,汉代实行买爵制,进纳一定数量的钱,朝廷则赐以相应的官爵。(돈을 바쳐 받는 관직))後復入穀 補左馮翊二百石卒史.그 후 다시 곡식을 바치고, 左馮翊(도읍 동쪽을 다스리는 관청)에서 2백 석을 받는 卒史로 임명되었다.馮翊以覇入財爲官 不署右職 使領郡錢穀計.풍익은 그가 재물을 바치고 벼슬하였다 하여 고위직을 주지 않고, 郡의 금전과 곡물을 계산함을 다스리게 하였다.簿書正 以廉稱.장부가 정확하여 청렴하기로 일컬어졌다.宣帝時擢揚州刺史 以賢良高第爲穎川太守.宣帝 때에 揚州刺史로 발탁되었고, 賢良科..

by 耽古書生梁習治最- 梁習의 정치는 가장 뛰어났다 魏志에 일렀다梁習字子虞 陳郡柘人.梁習의 자는 子虞이니 陳郡 柘縣사람이다.以別部司馬 領幷州刺史.別部司馬로서, 幷州刺史를 겸하였다.承高幹荒亂之餘 胡狄在界張雄跋扈.高幹이 황폐시켜 놓은 나머지를 이었고, 胡狄이 경계에 있고 張雄이 跋扈하였다.吏民亡叛入其部落 兵家擁衆 作爲寇害 更相扇動 往往棊跱.관리와 백성들이 도망하고 배반하여 胡狄의 부락으로 들어가고, 군대는 무리 지어 침입하여 백성들을 해치고, 게다가 서로 선동하며 가끔 여럿이 마주 버티고 있었다.►棊跱: 谓处相持之势,如弈棋之交互对峙。習到官 誘喩招納 皆禮召其豪右 稍相薦擧 使詣幕府.양습이 到任한 후, 달래어 깨우치고 불러서 받아들이고, 모두 예의로 호족을 부르고, 조금씩 천거하여 幕府로 나가게 하였다.►到官:..

by 耽古書生墨子悲絲- 墨子는 練絲를 보고 슬퍼하였다 淮南子曰 楊子見逵路而哭之.에 말하였다.“楊子는 갈림길을 보면 슬퍼하였다”爲其可以南可以北.갈림길은 남으로도 가고 북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墨子見練絲而泣之.(또 말하였다.)“묵자는 표백한 실을 보면 슬퍼하였다.”爲其可以黃可以黑.누렇게도 할 수 있고 검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高誘曰憫其本同而末異.高誘가 말하였다.“그 근본은 같으나 결과가 다름을 근심한 것이다.” [註解]▶淮南子- 책 이름. 前漢 때 회남왕 劉安이 학자들을 모아 함께 지었다는 책. 여러 학설이 들어있는데 老莊의 색채가 가장 두드러진다. 〈說林訓篇〉에 이 내용이 들어있다. ▶ 楊子- 이름은 朱. 전국시대의 개인주의자. ▶ 高誘- 後漢 때 사람. 《회남자》 주석서를 썼다.

by 耽古書生楊朱泣岐- 楊朱는 갈림길을 보고 슬퍼하였다. 淮南子曰 楊子見逵路而哭之.에 말하였다.“楊子는 갈림길을 보면 슬퍼하였다”爲其可以南可以北.갈림길은 남으로도 가고 북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墨子見練絲而泣之.(또 말하였다.)“묵자는 표백한 실을 보면 슬퍼하였다.”爲其可以黃可以黑.누렇게도 할 수 있고 검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高誘曰憫其本同而末異.高誘가 말하였다.“그 근본은 같으나 결과가 다름을 근심함이다.”

by 耽古書生朱博烏集- 朱博의 집에 까마귀가 모였다. 前漢朱博字子元 杜陵人.전한 朱博의 자는 子元이니, 杜陵의 사람이다.哀帝時 御史府吏舍百餘區 井水皆竭.哀帝 때 御史府의 吏舍 백여 채의 우물물이 모두 말라 버렸다.又其府中列柏樹 常有野烏數千 棲宿其上 晨去暮來. 號曰朝夕烏.또 그 府中에 늘어선 잣나무에는 항상 들 까마귀 수천 마리가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데, 새벽에 갔다가 저물어야 돌아오기 때문에, 이름하여 朝夕烏라고 하였다.烏去不來者數月 長老異之.까마귀들이 가고 돌아오지 않은 지 수개월이 되자, 마을 노인들이 이상하게 여겼다.後二歲餘 博爲大司空.그 후 2년여에 朱博이 大司空이 되었다.奏言高皇帝置御史大夫 位次丞相.今中二千石 未更御史大夫而爲丞相 權輕.非所以重國政也.臣以爲大司空官可罷.復置御史大夫 遵奉舊制.臣..

by 耽古書生蕭芝雉隨- 蕭芝를 꿩이 따랐다. 蕭廣濟孝子傳蕭廣濟의 에 일렀다.蕭芝至孝.蕭芝는 지극히 효성스러웠다.除尙書郞.尙書郞에 임명되었다.有雉數千頭 飮啄宿止.꿩 수천 마리가 물을 마시고 먹이를 쪼면서 자고 쉬었다.當上直 送至岐路 及下直 入門飛鳴車前.관청에 출근하는 上直을 당하면 갈림길까지 따라오고, 관청에서 퇴근하는 下直에 이르러서는 문으로 들어와서 수레 앞에서 날며 울었다. [註解]▶蕭芝- 前漢 때 사람. 字는 英髦이다.▶上直- 관청에 출근하는 일.▶下直- 일이 끝나서 퇴근하는 것.

by 耽古書生杜后生齒- 杜后의 이가 나다 晉書에 일렀다.成恭杜皇后諱陵陽 鎭南將軍預曾孫.成恭 杜皇后의 諱는 陵陽이니, 鎭南將軍 杜預의 曾孫이다.▲成恭: 두황후의 시호后少有姿色.후는 젊어서 姿色이 있었다.然長猶無齒.장성한 뒤에도 이가 나지 않았다.有來求婚者 輒中止.혼인을 청하는 자가 있다가도, 문득 중지하곤 하였다.及帝納采之日 一夜齒盡生.皇帝가 혼인을 청하는 날이 되자 하룻밤에 이가 모두 났다.▲納采:육례(六禮) 중 하나로 남자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혼례의식.在位六年無子.황후의 자리에 있은 지 6년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다.先是三吳女子相與簪白花 望之如素柰.먼저 세 吳氏의 딸이 서로 흰 꽃을 꽂았는데, 바라보면 흰 오얏과 같았다.傳言天公織女死. 爲之著服. 至是而后..

by 耽古書生靈王出髭- 靈王은 윗수염이 있었다. 左氏傳에 일렀다.王子朝曰王子 朝가 말하였다.定王六年 秦人降妖曰周其有髭王 亦克能修其職 諸侯服享 二世供職.王室其有閒王位 諸侯不圖 而受其亂災.至于靈王 生而有髭.王甚神聖 無惡於諸侯 靈王‧景王 克終其世.“周 定王 6년에, 秦나라 사람이 요망한 말을 퍼뜨렸다.‘周나라에 윗수염이 난 임금이 있어서, 또한 능히 그 직책을 수행하네. 諸侯들이 복종하여 二世에 걸쳐 직책을 지키네.王室에 왕의 자리를 빼앗는 자가 있어, 제후들은 뜻밖에 그 난리의 재앙을 받네.’(정왕의 손자인) 靈王에 이르러, 나면서부터 윗수염이 있었다.왕은 몹시 神聖하여 제후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靈王과 景王은 능히 그 세대를 마쳤다.” [註解]▶左氏傳- 정확하게는 《春秋左氏傳》, 약하여《좌씨전》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