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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求(몽구)31-黃覇政殊(황패정수) 본문

蒙求(몽구)

蒙求(몽구)31-黃覇政殊(황패정수)

구글서생 2023. 4. 16. 15:54

蒙求(몽구) 黃覇政殊(황패정수)

by 耽古書生

黃覇政殊- 黃覇의 政事는 남달랐다. 

 

前漢黃覇字次公 淮陽陽夏人.
전한 황패의 자는 차공이니, 회양 양하의 사람이다.

武帝末以待詔入錢賞官 補侍郞謁者.
무제 말년에 待詔로서 錢賞官으로 들어가서 侍郞謁者에 임명되었다.
錢賞官: 官名汉代实行买爵制进纳一定数量的钱朝廷则赐以相应的官爵(돈을 바쳐 받는 관직))


後復入穀 補左馮翊二百石卒史.
그 후 다시 곡식을 바치고, 左馮翊(도읍 동쪽을 다스리는 관청)에서 2백 석을 받는 卒史로 임명되었다.

馮翊以覇入財爲官 不署右職 使領郡錢穀計.
풍익은 그가 재물을 바치고 벼슬하였다 하여 고위직을 주지 않고, 郡의 금전과 곡물을 계산함을 다스리게 하였다.

簿書正 以廉稱.
장부가 정확하여 청렴하기로 일컬어졌다.

宣帝時擢揚州刺史 以賢良高第爲穎川太守.
宣帝 때에 揚州刺史로 발탁되었고, 賢良科의 우등으로 穎川太守가 되었다.

力行敎化 而後誅罰.
힘써 교화를 행하고 誅罰은 뒤로 미루었다.

外寬內明 得吏民心 戶口歲增 治爲天下第一.
밖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밝아서 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얻으니, 戶口가 해마다 늘어나서 다스림이 천하제일이었다.

徵守京兆尹.
京兆尹으로 불렀다.

坐貶秩歸穎川.
좌천되어 穎川으로 돌아왔다.

前後八年 郡中愈治.
전후 8년에 郡이 더욱 잘 다스려졌다.

是時鳳凰神爵數集郡國 穎川尤多.
이때 봉황과 神爵이 郡國에 자주 나타났는데, 穎川에 더욱 많았다.
神爵: 即神雀瑞鸟

郡國: 諸侯國. 한나라는 처음에 13개의 주, 36개의 군, 군 및에 현을 두는 주군현과 제후국을 두었다.


天子以覇治行終長者 下詔稱揚 賜爵關內侯黃金百斤秩中二千石.
천자는 황패가 정치와 행동이 長者에 걸맞다고 여겨 조서를 내려 칭송하고, 벼슬을 내려 關內侯를 삼고 황금1백 근과 녹봉 2천 석을 내렸다.
: 相当 [equal]

秩中: 汉代的俸禄有秩中秩真秩比这种级其中秩中的真是满的意思
汉制三公号称万石其俸月各三百五十斛其称中二千石者月各百八十斛二千石者百二十斛比二千石者百斛千石者九十斛比千石者八十斛六百石者七十斛比六百石者六十斛四百石者五十斛比四百石者四十五斛三百石者四十斛比三百石者三十七斛二百石者三十斛比二百石者二十七斛一百石者十六斛。(一斛即是一石
汉代从一品的三公到五品的太守都是秩两千石但是秩比两千石的太守肯定会比秩中两千石的三公少一些一石大概相当于120


後爲丞相.
뒤에 丞相이 되었다.

覇材長於治民.
황패는 재목이 백성을 다스림에 능하였다.

及爲相總綱紀號令 風采不及丙于定國. 功名於治郡.
정승이 되자 綱紀와 號令을 도맡아 시행하였는데, 그의 풍채는 丙吉·魏相·于定國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功名은 고을 다스리기에는 아까웠다.

 

[註解]

前漢- 한서》〈循吏傳 19의 기사

待詔- 재주와 기술로 부름을 받았으나 아직 정당한 벼슬을 얻지 못한 자.

錢賞官- 돈을 바치고 얻은 벼슬.

綱紀 -국가의 큰 법과 사회의 도덕.

京兆尹 -도읍 長安을 다스리는데, 左馮翊·右扶風·京兆 3구역으로 나누었었다. 이것을 三輔라고 한다. 좌풍익의 좌()는 도읍 좌측으로서 동쪽,  ,  라는 뜻에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丙魏-병길(丙吉)과 위상(魏相)은 모두 전한(前漢)의 정승.

于定國(우정국)-전한(前漢)의 정승.

功名(공명)-공적과 명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