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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詞論(單語論) 1. 字와 詞의 구별 (1) 字 :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 音形 최소단위(不可分析) (2) 詞 : 언어를 운용하는 최소의 단위 音義 意味 단위1) 1자 : 山. 木. 人.2) 2자 : 蟋蟀. 螳螂.3) 4자 : 民主主義. (3) 詞組(句) : 둘 혹은 둘 이상의 詞가 결합된 것이지만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는 못한다. 合成詞는 결구가 긴밀하고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데 반해 詞組는 일반적으로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다. 2. 詞의 結合單位 字 → 詞 → 詞組(短語) → 文章(單文) 3. 詞의 結合方式 (1)單純詞(衍聲複詞) 1) 雙聲詞 : 두 글자의 음절의 聲母가 서로 같은 것 ― 蟋蟀 · 鴛鴦 등 2) 疊韻詞 : 두 글자의 음절의 韻母가 서로 같은 것 ― 窈窕 · 螳螂 등 3) 非雙..
지은이에 관하여 서거정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字)는 강중(剛中), 호는 四佳亭 혹은 亭亭亭인데 흔히는 四佳라고 한다. 본관은 達城이고, 태어난 곳은 대구이며, 牧使 彌性의 아들이자 陽村 權近의 외손자이다. 당대 제일의 관료적 문인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문학을 수행하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조선 전기문학을 집대성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연결해 이해할 때, 조선 건국의 이념을 문학적으로 충실히 뒷받침하고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전기에 관료적 문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영예를 누린 것이 서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5세 되던 해인 세종 26년(1444) 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집현전 박사・부수찬・응교 등을 역임했다. 세..
해설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은 서거정[徐居正, 세종 2년(1420~ 성종 19년(1148)]이 지은 笑話集이다. 지었다고 했지만 오늘날의 창작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이런저런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억나는 대로 기록한 것이다. 국문학사상 현전하는 최초의 대규모 순수 설화자료집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 서문에서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 “일찍이 일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을 때 글을 쓰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이에 일찍이 친구들과 우스갯소리 했던 바를 써서 ≪골계전(滑稽傳)≫이라 불렀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기록한 이 책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에게 변명하는 형식으로, 창작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대의 말씀이 옳도다...
寧食魚頭 公山有吏兒 嘗從州牧兒 讀書.公山에 衙前의 아들이 있었는데, 일찍이 州의 牧使 아들을 따라 글을 읽었다.▶ 牧使: 고려 중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관찰사 아래에서 지방의 각 목(牧)을 다스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 벼슬이다. 여기서는 공주목사를 말한 것이다. 牧兒得熊掌而食 與吏兒魚頭曰何不食熊足 목사의 아들이 곰 발바닥을 얻어서 먹는데, 아전 아들에게 생선 대가리를 주면서 말하였다.“왜 곰의 발을 먹지 않느냐?”▶ 熊掌: 곰의 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로, 매우 진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진미 가운데 하나다. 맹자> 고자장구 상>에 이에 관한 대목이 있다. 맹자집주 고자장구 상 제10장孟子曰: 孟子가 말하였다. 「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魚物은 내가 원하는 ..
騎牛之辯 有一達官未達時 常騎牛出郊.어떤 높은 관리가 아직 출세하지 못했을 때, 언제나 소를 타고 郊外로 나갔다. 人譏之曰何不騎馬而牛乎 사람들이 그것을 기롱하였다.“왜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십니까?” 答曰馬者午也 縮頭爲午 出頭爲牛 此吾出頭象也 그가 대답하였다.“말은 午이니, 머리를 움츠리면 午이고, 머리를 내면 牛가 된다. 이것은 내가 머리를 드러내는 象이다."▶ 支干으로 午는 馬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午가 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은 말띠고, 午가 붙은 날은 말날이다.▶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내가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는 까닭은'이라는 뜻이다. 人皆奇之 後脫麻至達顯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더니, 뒷날 麻衣에서 벗어나 높은 관리에 이르렀다.▶ 脫麻: 벼슬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몸..
寃哉牛乎 李孝權夢牛則吉 孔頎夢牛則凶.李孝權이 소 꿈을 꾸면 吉하고, 孔頎가 소 꿈을 꾸면 凶했다.▶ 李孝權: 이 이야기에 선비로 되어 있으나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二人將赴會圍 李熟睡 孔假寐 忽有牛大如巨岳 暫過於庭 向孔吼曰子欲不見 我來見子 두 사람이 장차 會試에 응시하려고 할 제, 이(李)는 깊이 잠들고, 공(孔)은 살풋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큰 산 같은 소가 잠깐 마당을 지나가면서, 孔을 보고 울고는 말하였다."그대가 보지 않으려 하므로 내가 그대를 보러 왔다."▶ 會試: 文武科의 初試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과거 시험을 말한다. 覆試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합격하면 다시 殿試를 보게 되어 있었다. 會圍: 회시(會試)를 보는 시험장. 孔蹴李曰子亦見之乎 曰不見 孔이 李를 툭툭 차면서 말하기..
別安東妓 有一朝官姓金者 別安東妓於豊山郡 痛哭移時 行四五里 見路傍古墳 下馬拜哭.성이 김씨(金氏)인 朝官이 豊山郡에서 安東 기생을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떠날 때, 한참을 지나 네댓 마장을 가서는 길가의 오래된 무덤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곡했다.▶ 豊山郡: 여기서는 郡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縣이었고, 풍산현은 安東府에 속해 있었다.▶ 安東: 안동부, 安東人都護府. 경상도에 속했던 지명으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안동이다. 有老奴曰郎君何哭之哀也.늙은 종이 말하였다."서방님께서는 어찌해서 곡을 하며 슬퍼하십니까?" 郎君曰此吾先祖墳也 餘二十年 今來過謁 是以哭之.郎君이 말하였다"이것은 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무덤이다. 20여 년 만에 지나다가 뵙게 되었기에 곡하였다." 奴曰郎君與娘氏相別 痛哭之後 涕淚盈睫 餘哀未盡.老..
此老屈强 趙石磵爲司諫 被臺官所劾.趙石磵이 司諫일 때 臺官의 탄핵을 받았다.▶ 趙石磵: 趙云仡.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조선 태종 4년(1404). 문신으로, 石磵은 그의 호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 司諫: 조선시대 사간원의 종삼품 벼슬 이름이다. 본래는 知院事였는데 세조 12년에 이 이름으로 고쳤다. 臺官以公緘劾問 石磵不答 但書一絶曰一杯酒 一杯酒 大諫醉倒春風前 不願富 不願貴 但願無事終天年.대관이 公緘劾問했더니, 石磵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한 絶句를 써서 일렀다.“한 잔술 또 한잔 술로 大諫은 봄바람에 취해 쓰러졌네. 부유하기도 바라지 않고 귀하기도 바라지 않고 단지 아무 일 없이 타고난 나이를 마치기를 바라네.”▶ 公緘: 공사(公事)에 관하여 주고 받는 글월.公緘劾問: 서신으로 죄상을 따..
被罪室人 有文武官妻同里閈 文官과 武官의 아내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閈(한) : 이문, 마을, 담 武官能制室人 常加毆打 文官受制室人 常被毆打 隣里常稱 武官爲丈夫 文官爲非丈夫무관은 능히 아내를 제압해 항상 아내를 때렸으나, 문관은 아내에게 제압당해 항상 맞으니, 동네 이웃들이 항상 무관을 장부(丈夫)라고 칭찬하고, 문관은 장부가 못 된다고 했다. 南政丞智曰男子之被毆打婦人 聞之懦弱 思之則非惡德.男子之加手於婦人 聞之則嚴斷 思之則非美德也.정승인 南智가 말하였다."남자가 아내에게 맞았다는 말을 들으면, 나약하다는 소문이 나고 악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면, 엄하게 단속한다고 소문이 나고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南智: 문신으로 자는 智叔, 본관은 宜寧이다. 영의정 在의 손자..
做工三上 洪先生日休 喜作詩 柳先生太初曰子於何地做工洪日休 선생이 시 짓기를 즐겼는데, 柳太初 선생이 물었다.“그대는 어디서 짓는 것이 가장 공교로운가?”▶ 洪日休: 이름은 逸童, 자는 日休, 호는 麻川子, 본관은 南陽이다. 조선 초의 문신이다.▶ 유태초: 유성원[柳誠源, ?~세조 2년(1456)]. 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태초(太初), 호는 琅玕,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舍人 士根의 아들이다. 日休曰古人所謂三上也.日休가 말하였다.“옛날 사람이 이른바 삼상(三上)이라는 곳이다.”▶ 三上: 시문을 지을 때 가장 착상이 잘 떠오르는 세 곳을 말하는데, 곧 마상(馬上: 말 위)・침상(枕上: 베개 위)・측상(上: 화장실 위)이다. 중국 시인 구양수의 ≪歸田錄≫에 나온 말이다. 柳曰見子之詩 馬上枕上廁上 吾可一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