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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천왕(天王)이 하양(河陽)을 순수한 설(說)說 : ‘說’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에는 ‘癸丑’이 있다.天王狩河陽: 春秋시대에 晉文公이 강성할 시기에, 河陽이란 곳에 제후를 모아 회의를 하면서, 周襄王을 불러오게 했다. 天子인 양왕으로서도 진나라의 세력이 두려워 불려 왔는데, 이 일을 공자는 《春秋》에서, “천자가 하양을 巡狩하였다.[天王狩于河陽]”라고 썼다. 《春秋 穀梁傳 僖公 28年》 讀春秋者。秪知春秋之嚴。而不知春秋之厚。未可也。《春秋》를 읽는 사람이 다만 《춘추》의 嚴正함을 알고 《춘추》의 厚함을 알지 못한다면 옳지 않다. 夫史之正法。在乎直。不直則事皆無實。而不足信於後世。史官의 바른 필법은 곧음에 있으니, 곧지 못하면 事迹이 모두 실속이 없어 후세에 미덥지 못하게 된다. 故如董狐氏者。以嚴聞於天下。而孔子..
사양서실기(泗陽書室記)記 :‘記’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에는 ‘丙辰’이 더 있다 山淸健齋子所居泗陽書室。卽其先人正言公之遺廬也。山淸 健齋子가 거처하는 泗陽書室은 곧 그 先親 正言公이 물려준 집이다. 泗陽者。其地有一大溪。名曰泗水。故正言公。以之推想乎孔子所居洙泗之間。而志之云。泗陽이란 그곳에 큰 냇물이 있어 泗水라 무르기 때문에, 정언공이 孔子가 살던 곳이 수사(洙泗) 지방임을 추상하여 뜻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嗚呼。于斯之世。雜敎之與孔子爲敵者。李耳。如來之外。又不可勝數。슬프다. 지금 세상에는 雜敎로서 공자를 적대하는 것으로 李耳(:老子)ㆍ如來(:釋迦牟尼) 말고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故見今中國。以民而主天下之議論者。大抵多雜敎之人。或以爲。孔子之道專制而非共和。或以爲。待孔子宜與他敎等而不可獨尊。或以爲。孔子之道哲學而非宗敎..
방산서료기(方山書寮記) 記 : ‘記’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과 《滄江稿》에는 ‘庚寅’이 있다韶 풍류 이름 소濩 삶을 확, 퍼질 호韶濩: 중국(中國) 은나라(殷--) 탕왕(湯王) 때의 음악(音樂). 平山之南。有山自綿阿山來者。曰德山。평산(平山) 남쪽으로 산이 있는데 면아산(綿阿山)에서 온 줄기를 덕산(德山)이라 한다. 山之西。岡岸相引。形如方字。故名之曰。方洞。此禹君鍾學方山書寮之所在也。산의 서편 산등성이와 언덕이 서로 잡아당기는 지형이 모방(方) 자와 같아서 방동(方洞)이라 부르는데, 여기가 바로 禹鍾學군의 方山書寮가 있는 곳이다.寮(료)동관(同官: 같은 관청의 같은 계급의 관리)벼슬아치(작은)창(窓) 禹氏世居是地。科籍不絶。家又饒裕。善接人客。禹氏는 대대로 이 땅에 살면서 科擧 급제가 끊이질 않았고 가세도 ..
남폭정기(攬瀑亭記)記 : ‘記’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과 《滄江稿》에는 ‘甲申’이 있다. 天磨山之北。朴淵瀑布。聞天下。천마산(天磨山) 북쪽의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천하에 유명하다. 北流合衆小水。至五六屈折。而聚而抔飮者。二十餘家。是維古德山之村。물이 북으로 흘러 여러 작은 물길과 합쳐져 대여섯 차례 굽이도는 곳에 이르러 취락(聚落)을 이루어 그 물을 떠먹고 사는 집이 20여 호인데, 이곳이 바로 고덕산촌(古德山村)이다. 盖大盖之山。南爲天磨。而不及天磨。反馳而西北者。至古德而盡。대개산(大蓋山)의 남쪽이 천마산이고, 천마산에 못 미쳐서 반대쪽인 西北으로 치달아 고덕산(古德山)에 이르러 끝난다. 低展爲圓野。平曠淸明。南向而居。나지막하게 둥그런 들판이 펼쳐지는데, 평평하고 너르고 깨끗한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則適與瀑布相..
장계자시록 서(張季子詩錄序) 序: ‘序’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에는 ‘甲寅’이 있다 澤榮。東韓之窾民也。何足以知張嗇菴先生。나는 동한(東韓)의 보잘것없는 인민인데 어떻게 張嗇菴(張謇) 선생을 알 수 있겠는가? 窾 빌 관 雖然。獲交先生三十年之中。爲邦運所迫。而來依於南通者。十年矣。비록 그러하나, 선생과 30년간 사귀었고, 나라의 국운이 절박해지자 망명해 와서 南通에 의지한 지 於焉間 10년이다. 論說之與久。耳目之與邇。其一二所知。寧敢獨後於天下之士大夫也。논설을 함께한 지 오래되었고 이목을 함께하기가 가까울진대, 한두 가지 아는 바가 어찌 유독 천하의 사대부에게 뒤지겠는가? 則題其詩錄之卷首。曰그래서 선생의 시록(詩錄) 책 머리에 題하니 이러하다. 古之所謂大人天民者。其氣也龎。其心也正。其志也大而憂。其發於文章也平而實..
《중편연암집(重編燕巖集)》 서(序) 序 : ‘序’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에는 ‘甲寅’이 있다. 在朱明氏以下之世。而爲之文者。吾知之矣。명(明)나라 이후의 시대에, 문장을 하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有曰吾爲先秦者矣。徐而察之。則非也。苦焉已。‘나는 先秦의 문장을 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입이 쓸 뿐이다. 先秦者 : 한나라 이전의 《春秋左傳》ㆍ《莊子》와 같은 散文을 말한다. 有曰吾爲司馬遷者矣。徐而察之。則非也。狂焉已。‘나는 司馬遷의 문장을 짓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뜻만 높을 뿐이다. 有曰吾爲韓愈者矣。徐而察之。則非也。拗焉已。‘나는 한유(韓愈)의 문장을 짓는다.’라는 사람도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고 억지로..
《유학경위(儒學經緯)》 서(序) 金澤榮: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또는 소호당(韶濩堂)이며, 화개인(花開人)이다. 太上皇(高宗皇帝를 가리킴) 신묘년(1891, 고종28)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벼슬은 중추원 참서관에 이르렀다.序 : ‘序’ 아래에 《韶濩堂文集定本》과 《滄江稿》에는 ‘丙申’이 있다. 古昔聖人之用慮與立言。其可知矣。當慮而慮。所不必慮者不慮也。當言而言。所不必言者不言也。옛 성인이 생각하고 말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생각해야 하면 생각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며, 말해야 하면 말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면 말하지 않는다. 惟其慮與言之間。能以至簡。而御天下之至煩 以至易。而御天下之至難。簡易而天下之能事畢。생각하고 말함에 있어서, 지극히 간단함으로써 천하의 지극히 번다함을..
이행서 묘지명(李杏西墓誌銘) 君姓李。諱德言。字文擧。杏西其自號也。군의 성은 李이고, 휘는 德言, 자는 文擧이며 杏西는 그의 自號이다. 考曰悌源。余旣爲表其墓。序其世矣。아비는 李悌源인데, 내가 그의 墓表를 지어 그 世系를 서술했었다. 君再授室。生男燮英,燮膺,燮敬。孫男愈珪,惠珪,必珪,恩珪,憲珪,念珪。군은 두 번 장가를 들어, 아들 이섭영(李燮英)ㆍ이섭응(李燮膺)ㆍ이섭경(李燮敬)과 손자 이유규(李愈珪)ㆍ이혜규(李惠珪)ㆍ이필규(李必珪)ㆍ이은규(李恩珪)ㆍ이헌규(李憲珪)ㆍ이염규(李念珪)를 두었다. 今以狀來請銘者。燮膺也。지금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한 자는 이섭응이다. 君少治儒業。棄去。武擧不得官。以老資至嘉善階。군은 젊어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포기해 버리고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벼슬은 얻지 못하고..
유수 묘지명(兪叟墓誌銘) 歲干支仲秋之月。其日癸未。織屨兪叟君業。以疾終于江華下道尹汝化之隟舍。때는 모년(歲干支) 8월 계미일, 신발을 삼는 유군엽(兪君業) 노인이 질병으로 江華下道 尹汝化의 빈집에서 숨을 거두었다.江華下道: 조선 시대 기록에서 "강화부 하도면(江華府下道面)"과 같이 행정 구역 명칭으로 언급된 사례가 있습니다.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에는 하도리(下道里)라는 행정 구역이 남아 있으며, 이는 옛 하도 지역의 명맥을 잇는 이름입니다.隟(극): 隙(극)의 고자(古字). 壽七十。無子。나이 70세였고 자식은 없었다. 厥明。里三老集于汝化。謀所以送叟者。다음날 마을의 장로(長老)가 윤여화의 집에 모여 유노인을 장례 지낼 절차를 의논하였다. 汝化來告余。余予之以弗茹之地。俾瘞之。且爲之誌。有字無名。無譜無..
열녀 한씨 정문명(烈女韓氏旌門銘) 嗚呼。臣而死於君。婦而死於夫。皆所以自盡也。非必有益於君與夫。而後死也。아, 신하로서 임금을 위해서 죽고, 부인으로서 남편을 위하여 죽음은 다 스스로 진력하는 방법이나, 항상 임금과 남편에게 유익한 연후에 죽은 것은 아니다. 苟謂必有益於君與夫。而後死也。則其必有當死而不死者。故曰殺身以成仁。而不曰殺身以成事。반드시 임금과 남편에게 유익한 뒤에 죽어야 한다고 말하나,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죽지 않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터이매, 殺身成仁이라 말하지 殺身成事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然自古以來。忠臣烈女。多出於亡國喪家。而死而有益者常少。其無益者常多。그리하여 예부터 충신과 열녀는 망하는 나라와 집안에서 많이 나오되, 죽어서 유익한 경우는 늘 적고, 무익한 경우가 늘 많았다. 於是世俗之論。往往以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