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史記 (124)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田儋列傳은 초한전쟁시 齊의 田氏 일가의 合傳이다. 齊 狄縣 출신인 田儋은 옛 齊의 왕족으로 齊가 秦에 의해 패망한 후 사촌동생 田榮, 田橫과 狄縣으로 이주하여 강성한 종족을 거느리며 세력을 형성하였ek. 田儋이 齊의 왕위에 오른 후 章邯이 魏王 魏咎를 공격하여 臨濟를 포위하자, 田儋과 楚王의 군대가 魏를 구원하러 출진하였으나 장한의 야습에 패배해 田儋은 임제에서 죽고 말았다. 이 편에서는 田儋과 그의 사촌 동생 田榮, 田橫이 차례로 왕이 되었다가 패망하는 과정이 실려 있다. 1.田儋 田儋者,狄人也,故齊王田氏族也。 田儋은 狄縣 출신으로 옛 齊王족 田氏 一族이다. 儋從弟田榮,榮弟田橫,皆豪,宗彊,能得人。 田儋의 從弟 田榮과 田榮의 동생 田橫은 모두 호걸이었고 종족이 강성하여 민심을 얻었다. 陳涉之初起王楚也,..

韓信盧綰列傳은 韓王 韓信과 盧綰, 陳豨 세 사람의 合傳이다. 세 사람은 각각 흉노와 연합하여 漢에 반란을 일으킨 공통점이 있다. 韓王 韓信은 史記 권92 淮陰侯列傳에서의 淮陰侯 韓信과 同名異人으로 같은 시기에 살았으므로 혼동되고 있어 회음후 韓信과 구별하기 위하여 韓王 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韓王 韓信은 秦 말기에서 漢 초기 사이의 인물로 성은 姬, 씨는 韓, 이름은 信이다. 전국시대 韓襄王의 후손으로, 漢의 高祖 유방에 의해 韓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 화친하려고 함에 오해를 받자,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漢의 변경을 쳐들어갔다. 韓信은 기원전 196년 봄에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參合을 점령하였으나, 柴武가 이끄는 漢軍에 패하고 붙잡혀 참수되었다. 1.韓信 韓王信者,故韓襄王孽孫也,長八尺五寸。 韓王 ..

韓信( ? ~ 기원전 196년)은 前漢의 장군이자 제후이다. 회음현 출신으로 유방의 부하로 있을 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漢初三傑 중 하나로 꼽히며, 蕭何가 國士無雙이라고 일컬은 명장이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項羽에게 漢王으로 봉해지자 漢中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서 韓信은 漢王에게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툴 것을 건의하였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면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왕에 이어 초왕이 되었으나 반란을 꾀하다가 회음후로 격하되었다가 여태후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족되었다. 회음후열전에서 나오는 一飯千金, 胯下之辱, 兎死狗烹 등이 유명한 고사성어이다. 淮陰侯韓信者,淮陰人也。 淮陰侯 韓信은 淮陰 사람이다. 始為布衣時,貧無行,不得推擇為吏,又不能治生商賈,常從人..

黥布는 본명이 英布(미상 ~ BC 195년)이며, 前漢 六安 六縣 사람으로 법을 어겨 黥刑을 당해 黥布로 불렸다. 劉邦을 도와 전한을 세운 장군이다. 秦 말 陳勝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이끌고 番君에 귀의했다가 후에 項梁에게 의탁했으며, 項梁이 죽자 項羽에게 귀속하였다. 전투 때마다 항상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 항우를 따라 入關한 뒤 九江王에 봉해졌으며, 항우의 명령에 따라 衡山王 吳芮와 함께 楚懷王 義帝를 죽였다. 楚漢 전쟁 중에 漢이 그를 설득하자 漢으로 귀순하였다. 淮南王에 봉해졌고, 유방을 따라 垓下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였다. 漢이 선 뒤 韓信과 彭越 등 개국 공신들이 하나하나 피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강남으로 달아났다가 長沙王에게 유인되어 誅殺되었다. 黥布者,六人也,姓..

魏豹彭越列傳은 魏豹와 彭越의 합전이다. 魏豹(?~B.C. 204)는 魏王실의 일족으로 魏咎의 사촌 동생인데 陳勝의 반란 이후 周市과 함께 형 위구를 魏王으로 옹립하였다. 이후 章邯의 공격을 받아 형 위구가 죽자 楚로 도망가서 楚懷王에게 군사를 빌려 魏 영토를 회복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항우가 大梁의 땅을 탐내어 西魏王에 봉했으나 항우를 배반하고 劉邦에게로 귀순하였다. 기원전 205년 유방에 의해 대원수로 임명되어 6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와 彭城 대전을 치렀으나 漢이 항우에게 크게 패하고 魏豹 역시 중상을 입었다. 그 후에 본국 魏로 돌아가 유방을 배신하고 유방이 보낸 사신 酈食其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다가, 韓信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여 滎陽으로 끌려갔다. 형양에서 유방의 명령으로 楚軍 방어하고 ..

張耳陳餘列傳은 刎頸之交를 맺은 張耳와 陳餘의 合傳이다. 張耳와 陳餘는 전국 시대 말기 魏의 大梁 사람이다. 장이는 陳餘와 함께 刎頸之交를 맺었으며, 秦 2세 황제 호해 원년에 陳涉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여와 함께 校尉가 되어 武臣을 따라 趙 땅을 정벌하였다. 무신이 趙王이 되자 장이는 右丞相에 올랐고, 진여는 大將軍이 되었다. 그 후 장이와 진여는 사이가 벌어져 진여가 장이를 공격하자 장이는 劉邦에게 투항했고, 진여는 趙王 헐을 도와 趙王으로 세웠으나 漢의 장수 한신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楚漢戰爭 : 기원전 206년 秦의 멸망 후 서쪽의 楚霸王 항우와 漢王 유방과의 5년에 걸친 전쟁. 秦의 급격한 통일 정책과 농민에 대한 과중한 賦役으로 기원전 210년 시황제의 죽음 이후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蒙恬은 전국시대 秦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秦將 蒙武의 아들이자 蒙毅의 형으로, 전국통일 이후에 북쪽의 흉노를 몰아내고 만리장성의 건축 및 북방의 수비를 감독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始皇의 신임을 얻고 그의 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렸으나, 진시황제 사후에 조고 등에게 모함을 당하여 태자 부소가 자살한 후 2세 황제 胡亥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였다. 蒙恬者,其先齊人也。 蒙恬의 선조는 齊 사람이다. 恬大父蒙驁,自齊事秦昭王,官至上卿。 몽염의 할아버지 蒙驁는 齊에서 秦으로 와서 秦昭王을 섬기며 관직이 上卿에 이르렀다. 秦莊襄王元年,蒙驁為秦將,伐韓,取成皋、滎陽,作置三川郡。 秦莊襄王 원년(기원전249년), 몽오가 秦將이 되어 韓를 침공하여 成皋와 滎陽을 빼앗고 三川郡을 설치하였다. 二年,蒙驁攻趙,取三十七城。 장양왕2..

李斯는 楚의 上蔡출신으로 秦 法家流의 정치가(? ~ BC 208)이다. 荀子에게 배우고 秦으로 가서 丞相 呂不韋에게 발탁되어 客卿이 되었다. 鄭國渠라는 운하를 완성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에는 봉건제에 반대하고 郡縣制를 진언하여 丞相이 되었으며, 焚書坑儒를 단행하게 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趙高와 공모하여 막내아들 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시황제의 장자 扶蘇와 장군 蒙恬을 자살하게 하였는데, 조고의 참소로 투옥되어 그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三族이 몰살되었다. 李斯者,楚上蔡人也。 李斯는 楚 上蔡사람이다. 年少時,為郡小吏,見吏舍廁中鼠食不絜,近人犬,數驚恐之。 젊은 시절에는 郡의 하급관리였는데 吏舍의 변소의 쥐가 불결한 것을 먹다가도 사람이나 개에 가까워지면 자주 놀라고 두..

刺客列傳에서는 魯의 曹沫, 吳의 專諸, 晉의 豫讓, 韓의 聶政, 燕의 荊軻 다섯 명의 刺客을 다루었다. 司馬遷은 “조말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자객은 그 의행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뚜렷하였으며 자신의 뜻을 욕되게 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이름을 후세에 전함이 어찌 망령되겠는가!”라고 평하였다. 曹沫은 曹劌, 曹翽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魯 大夫로 지략과 의리가 뛰어났다고 하며 魯의 莊公을 섬긴 장군이다. 魯와 인접하여 있던 강국 齊는 번번이 노를 침략했고, 조말은 노의 장군으로 이를 막았으나 세 번이나 패하고 노는 영토를 잃게 되었다. 제환공 5년에 불리해진 魯는 遂邑을 바치는 조건으로 齊와 회맹을 맺게 되었는데, 맹약하는 자리에서 장공이 바치는 수읍을 헌상한다는..

呂不韋(기원전292~기원전235년)는 趙의 商人 출신으로 秦의 정치가이다. 莊襄王 때 승상이 되었으며,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政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이에 여불위는 相國을 지냈으며,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呂氏春秋를 3000여 명의 빈객들의 학식을 모아 편찬하였다. 최고의 相國이 되어 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太后와 밀통관계를 유지하였다. 여불위는 이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를 태후에게 보내어 정을 통하게 하였다. 태자 정이 성장하여 이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여불위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되어 촉 땅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여불위는 점점 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