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124

列傳권104-田叔列傳(전숙열전)

田叔列傳은 前漢의 정치가인 田叔에 대한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田仁과 전인의 친구인 任安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임안에 대한 기록은 전한의 사학자 褚小孫이 덧붙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田叔 田叔은 趙 陘城縣 사람으로 齊 王族의 후손이다. 趙王 張敖를 섬겨 낭중이 되었으며, 장오의 모반 사건으로 趙王이 체포되고 孟舒 등과 함께 漢에 자발적으로 압송되었으나, 高祖 유방이 趙王의 신하들을 높이 평가하여 전숙을 漢中郡守로 기용하였다. 文帝 때 면직되었으며 景帝 때 梁孝王 劉武가 袁盎을 암살한 사건의 조사관이 되었고, 경제가 이 사건의 조언을 현명하게 여겨 魯 승상으로 삼았다. 魯共王에게 직언하며 보좌하다가 승상 재임 중에 죽었다. 田叔者,趙陘城人也。 田叔은 趙 陘城 사람이다. 其先,齊田氏苗裔也。 그..

史記/列傳 2023.09.09

列傳권103-萬石張叔列傳(만석장숙열전)

萬石張叔列傳은 萬石君 石奮, 衛綰, 直不疑, 周文, 張叔의 合傳이다. 이 편의 인물들은 前漢 때 신중하고 성실한 품행을 갖춘 인물들이다. 1.石奮 石奮은 前漢의 관료로 河内郡 溫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본래 趙 사람인데, 趙 멸망 후 온현으로 이주하였다. 석분은 열다섯 살의 나이로 말단 벼슬아치가 되어 高祖 유방을 섬겼다. 이후 공로를 쌓아 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景帝 때에는 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석분은 공손하고 신중한 면에서는 견줄 이가 없었으며 그의 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가져 모두 2천 석의 녹봉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이에 景帝가 석분을 萬石君이라 호칭하여 萬石君 石奮으로 불리게 되었다. 萬石君名奮,其父趙人也,姓石氏。 萬石君의 이름은 奮이며, 그의 부친은 趙 사람으로 성은 石氏이..

史記/列傳 2023.09.09

列傳권102-張釋之馮唐列傳(장석지풍당열전)

張釋之馮唐列傳은 漢 초기의 관료로 직간하였던 장석지와 풍당의 합전이다. 1. 張釋之 張釋之는 南陽 堵陽 사람으로 자는 季이며, 文帝 때 騎郞이었다가 후에 謁者와 謁者僕射, 公車令을 지냈다. 태자가 梁王과 함께 수레를 타고 입조하였는데 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자 두 사람이 탄 수레를 정지시키고 불경함을 탄핵하였다. 문제가 이 일로 기특하게 보아 中大夫에 임명하였다. 나중에 廷尉가 되었는데, 형벌의 집행이 공정하고 후덕하다는 평을 들었다. 사마천은 장석지를 큰 인물이라 한 것은 법 집행이 엄격하여 황제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張廷尉釋之者,堵陽人也,字季。 廷尉 張釋之는 堵陽 사람으로 字는 季이다. 有兄仲同居。 둘째 형과 함께 살았다. 以訾為騎郎,事孝文帝,十歲不得調,無所知名。 재물로써 騎郎이 되..

史記/列傳 2023.09.06

列傳권101-袁盎鼂錯列傳(원앙조조열전)

袁盎鼂錯列傳은 前漢의 관료인 袁盎과 鼂錯(:晁錯)에 대한 合傳이다. 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자 조조와 평소 원수지간이었던 袁盎이 참소하여 鼂錯를 장안 저잣거리에서 참수하게 하였다. 1.袁盎 원앙은 楚 사람으로 자는 絲이다. 西漢 시대의 대신으로 개성이 강직하고 재간과 담력이 있었다. 呂後 집정 시에 呂祿의 家臣이었지만 漢文帝가 즉위한 후에 그의 형 袁噲가 천거하여 中郎이 되었다. 그는 조정에서 儒家의 禮治思想으로 통치할 것을 강조하였고, 서슴없이 直諫하여 漢文帝의 노여움을 사서 隴西都尉, 吳相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漢景帝가 즉위한 후에 吳楚七國의 반란이 일어나자 晁錯를 주살할 것을 간청하여 제후의 원망을 잠재웠다. 그 공으로 太常이 되고, 吳에 사신으로 가서 반란을 평정한 후에 楚相이 되었다. 그 후 梁..

史記/列傳 2023.09.05

列傳권100-季布欒布列傳(계포난포열전)

季布欒布列傳은 西漢 초기의 名臣 季布와 欒布의 합전이다. 계포와 난포의 행적 외에 季心과 丁公의 행적도 기술하였다. 1.季布 季布는 楚 사람으로 項羽의 武將으로 있으면서 漢의 高祖 유방과 싸울 때 많은 전공을 올렸지만 項羽가 패하자 유방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하였다. 추적의 손길이 뻗치자 스스로 노예가 되어 魯의 朱家에게 팔려갔다. 주가도 이 노예가 계포임을 알아보고 滕公 夏侯嬰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간언케 하매, 高祖 유방이 사면하여 郎中이 되었으며, 惠帝 때에는 中郞將이 되었다. 계포는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신의를 지키는 任俠으로 알려져, 한번 허락한 이상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楚 사람들은 이런 그를 두고 “황금 백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일낙을 얻는 것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

史記/列傳 2023.09.04

列傳권99-劉敬叔孫通列傳(유경숙손통열전)

이篇은 漢의 초엽에 주요 관료였던 劉敬과 叔孫通의 合傳이다. 1. 劉敬 劉敬은 前漢 때 齊 사람으로 본래의 姓은 婁였는데, 漢高祖 때 長安으로 도읍을 정할 것을 주장하여 高祖가 이를 받아들이고 劉氏 성을 하사하여 劉敬이라 불리고 奉春君에 봉해졌다. 나중에 關內侯에 봉해졌고, 建信侯란 호를 받았다. 高祖가 白登에서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한 뒤 북방의 변란 때문에 괴로워할 때 화친정책을 제안하고 사신으로 가서 조약을 매듭지었다. 劉敬者,齊人也。 劉敬은 齊 사람이다. 漢五年,戍隴西,過洛陽,高帝在焉。 漢高帝 5년(기원전 202년), 隴西로 수자리를 가면서 낙양에 들렀는데, 高帝도 그곳에 있었다. 婁敬脫輓輅,衣其羊裘,見齊人虞將軍曰: 「臣願見上言便事。」 婁敬은 몰고 가던 수레의 횡목을 풀어 놓고 양가죽 갖옷을 입고..

史記/列傳 2023.09.04

列傳권98-傅靳蒯成列傳(부근괴성열전)

이篇은 秦 말기 陳勝·吳廣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高祖 유방의 近衛侍從官員이었던 傅寬, 靳歙, 蒯成侯 周緤에 대한 合傳이다. 1.傅寬 傅寬(? ~ 기원전 190년)은 前漢의 개국 공신이며 魏 五大夫 기병대장이었다가 유방에게 귀순하여 秦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경의 작위를 받았다. 韓信, 조참 등이 이끄는 齊 정복 전쟁에 참여하여 공적을 세워 식읍이 늘었고, 齊가 완전히 평정되자 漢王 6년(기원전 201년)에 陽陵侯에 봉해졌다. 高帝 11년 곧 齊 도혜왕 5년(기원전 196년), 齊의 相國이 되었다. 4월에 周勃에 속하여 진희의 난 진압에 나섰고, 1월에는 代의 相國으로 전임하였다. 孝惠帝 5년( 기원전 190년) 노환으로 죽었다. 시호는 景侯이다. 陽陵侯傅寬,以魏五大夫騎將從,為舍人,起橫陽。 陽陵侯 傅寬은 ..

史記/列傳 2023.09.03

列傳권97-酈生陸賈列傳(역생육가열전)

이篇은 酈生 酈食其, 陸生 陸賈, 平原君 朱建 세 사람의 합전이다. 세 사람은 秦 말기 및 전한 초기의 達辯家임이 공통점이다. 酈生의 이름은 食其이며, 陳留 高陽 출신이다. 秦 말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설득하여 참모이자 說客이 되었으며, 漢高祖를 도와 제후를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齊王 田廣에게 漢에 복속하라고 설득하기 위하여 齊에 머물다가, 공을 탐한 韓信이 齊를 침공하자 역이기에게 속았다고 분노한 齊王에게 烹殺되었다. 이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酈生과 高祖 유방이 만나는 모습을 재차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 酈食其 酈生食其者,陳留高陽人也。 酈生 食其는 陳留 高陽 사람이다. 好讀書,家貧落魄,無以為衣食業,為里監門吏。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한 ..

史記/列傳 2023.09.02

列傳권96-張丞相列傳(장승상열전)

張丞相列傳은 西漢 초의 대신 張蒼, 周昌, 任敖, 申屠嘉 네 명에 대한 合傳이다. 사마천이 서한의 사학가였으므로 서한의 재상들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후반부에는 魏相, 邴吉, 黃霸, 匡衡에 대하여 추가로 실려 있다. 이것은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고, 나중에 褚小孫이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征和(漢武帝의 열 번째 年號) 시기 이후의 기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태사공 사마천은 張蒼은 문학·음률·역법에 뛰어난 漢의 명재상이었으며, 周昌은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任敖는 옛날의 은덕으로 인해 등용되었으며, 申屠嘉는 강직해 절조를 지켰다고 하였다. 1.張蒼 張丞相蒼者,陽武人也。 승상 張蒼은 陽武 사람이다. 好書律歷。 圖書·音律·曆法을 좋아하였다. 秦時為御史,主柱下方書。 秦 때 御史가 되어 황궁..

史記/列傳 2023.09.01

列傳권95-樊酈滕灌列傳(번역등관열전)

樊酈滕灌列傳은 樊噲, 酈商, 滕公 夏侯嬰, 灌嬰 네 사람의 合傳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유방의 휘하에서 武功을 세운 장수들이며, 미천한 신분이었다가 秦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영웅이 됨이 공통점이다. 이편에서는 주로 네 사람의 공적을 기술하고 있다. 樊噲는 沛縣 출신으로 원래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劉邦이 군사를 일으킬 때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웠다. 유방과 項羽의 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이 項羽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皇帝로 즉위한 뒤 左丞相, 相國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舞陽侯에 봉해졌다. 1.樊噲 舞陽侯樊噲者,沛人也。 舞陽候 樊噲는 沛縣 사람이다. 以屠狗為事,與高祖俱隱。 개 도살을 생업으로 하면서 高祖와 함께 은둔하고 있었다. ..

史記/列傳 202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