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124

列傳권124-遊俠列傳(유협열전)

이 편은 漢 때 저명한 俠客인 朱家, 劇孟, 郭解 등에 관한 전기이다. 사마천은 遊俠은 믿음이 있고 결정에 과감하며 약속에 성실하고 남을 위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나 공덕을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협객을 鄕谷之俠, 布衣之俠, 閭巷之俠으로 분류하여 논하였으며, 협객으로 漢의 朱家, 田仲, 王公, 劇孟, 郭解 등을 소개하면서 사마천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郭解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기록하였다. 韓子曰: 「儒以文亂法,而俠以武犯禁。」 韓非가 말하였다. “유학자들은 유가경전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유협들은 무력으로 禁令을 범한다.” 二者皆譏,而學士多稱於世云。 둘 모두를 비웃었지만, 儒生에는 세상에서 칭찬받음이 많다. 至如以術取宰相卿大夫,輔翼其世主,功名俱著於春秋,固無可言者。 권모술수로 재상..

史記/列傳 2023.10.18

列傳권123-大宛列傳(大宛열전)

이 편은 西域 여러 나라의 역사적 기록이다. 大宛(:dà yuān)은 일반적으로 파미르 고원 바로 서쪽에 위치한 Ferghana 지방을 지칭한다. 張騫은 漢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으로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편에서는 張騫이 서역을 탐험하여 서역으로 가는 도로를 개척한 내용을 위주로 서역의 여러 나라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1. 張騫 大宛之跡,見自張騫。 大宛의 形蹟은 張騫에 의하여 드러났다. 張騫,漢中人。建元中為郎。 張騫은 漢中 사람으로 建元 年間에 郎官이 되었다. 是時天子問匈奴降者,皆言匈奴破月氏王,以其頭為飲器,月氏遁逃而常怨仇匈奴,無與共擊之。 당시 天子가 흉노의 투항를 심문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匈奴가 月氏를 격파하고 月氏왕의 두개골로 술잔으로 사용하였고, 月氏의 ..

史記/列傳 2023.10.16

列傳권122-酷吏列傳(혹리열전)

酷吏列傳은 西漢 전기에 가혹한 형벌과 준엄한 법률을 통치 도구로 삼았던 포악한 관리 10명의 전기이며, 혹리로 열거한 사람은 郅都, 寧成, 周陽由, 趙禹, 張湯, 義縱, 王溫舒, 尹齊, 減宣, 杜周 등이다. 사마천은 말하였다. “여기에서 열거한 열 사람 중에 청렴결백한 자들은 족히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하고, 탐관오리는 족히 사람들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 그들이 세운 계획과 책략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간교함과 사악함을 금지하게 만들고, 일체의 행위가 모두 점잖고 예의가 바르며 교화와 형벌을 더불어 베풀었다. 법을 집행함에 비록 잔혹했어도 그 직무에 걸맞은 것이었다.” 孔子曰: 「導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 導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 孔子가 말하였다.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 잡으면, 백성..

史記/列傳 2023.10.14

列傳권121-儒林列傳(유림열전)

본 篇은 前漢 儒學의 발전과정과 다수의 儒學者에 대한 전기이다. 儒林은 ‘孔子를 숭상하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漢武帝가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五經博士‧博士祭酒를 신설하여 유학자들을 우대함으로써 유학이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유학을 발전시킨 인물로 사마천은 申公, 王臧, 趙綰, 轅固生, 韓嬰, 伏生, 董仲舒, 胡毋生를 꼽았다. 儒學의 발전과정.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余讀功令,至於廣厲學官之路,未嘗不廢書而嘆也。曰: 嗟乎!夫周室衰而關雎作,幽厲微而禮樂壞,諸侯恣行,政由彊國。 “내가 학관의 법규를 읽다가 學官의 진로를 넓히고 격려함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아! 周나라 왕실이 쇠약해지자 關雎를 지었고, 주나라 幽王·厲王의 통치가 쇠락하자 禮樂이 파괴되었고, 제후가 ..

史記/列傳 2023.10.10

列傳권120-汲鄭列傳(급정열전)

본 편은 汲黯과 鄭當時의 合傳이다. 두 사람은 漢武帝 때 九卿을 지냈으며, 모두 청렴하고 直諫을 잘하여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평하였다. “정장과 급암이 처음으로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 청렴하고 집안에서의 행실이 결백하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중도에 파직됨에, 그들의 집이 청빈했기에 빈객들은 점차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모두 한 郡을 다스렸으나, 죽은 뒤에 집안에 남긴 재산이라곤 없었다.” 1. 汲黯 汲黯은 前漢의 관료로 자는 長儒이며 濮陽縣 사람이다. 漢의 景帝와 武帝 때 太子洗馬와 主爵都尉 등을 지냈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黃老之道와 무위의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양태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汲黯字長孺,濮陽人也。 汲黯의 字는 ..

史記/列傳 2023.10.08

列傳권119-循吏列傳(순리열전)

이 편은 춘추전국시대의 선량한 관리 다섯 명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循吏란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관리를 말하며 다섯 명 중 네 명은 재상이며 한 명은 법관이다. 사마천은 “孫叔敖는 한마디의 말로써 郢都의 시장 질서를 회복시켰다. 鄭子産이 병으로 죽자 鄭 백성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公儀休는 집안에서 좋은 베를 짜는 것을 보고 베 짜는 아낙네를 내쫓았다. 石奢는 자기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결함으로써 楚昭王의 대의명분을 세워주었다. 李離는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이자 칼로 자결함으로써 晋文公이 국법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1. 司馬遷의 序論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法令所以導民也,刑罰所以禁姦也。 “법령이란 백성을 善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고, 형벌이란 사악한 행위를 금하기 ..

史記/列傳 2023.10.06

列傳권118-淮南衡山列傳(회남형산열전)

​ 본 편은 회남 淮南 厲王 劉長과 그의 아들인 淮南王 劉安, 衡山王 劉賜의 合傳이다. 이들이 劉氏의 제후왕으로 世家에 기록되어야 하지만 吳王濞列傳과 마찬가지로 열전에 기록된 것은 반역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1. 淮南 厲王 劉長 회남 여왕 유장은 高祖의 서얼 막내였으며, 漢文帝와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高帝 11년(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고, 유장은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 유장은 장성하여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문제가 즉위한 후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가장 친밀한 황족임을 들먹여 교만해지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회남 여왕 23년(기원전 174년), 유장은 柴奇 등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는데, 文帝는 유장의 목숨을 살려..

史記/列傳 2023.10.06

列傳권117-司馬相如列傳(사마상여열전)

司馬相如列傳은 前漢의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의 전기이다.사마상여(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의 字는 長卿이며 四川省 成都 출신이다.전국시대의 명재상인 藺相如를 흠모하여 相如로 이름을 바꿨다.어렸을 때 독서와 擊劍을 좋아하였으며 이십 여세 때 漢景帝의 경위인 武騎常侍가 되었다. 임공현의 부자인 卓王孫의 딸 文君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되었다.‘子虛賦’로 무제의 칭송을 받고 부름을 받아 중랑장이 되어 愼과 夜郎에 부임하여 서남의 蠻夷 땅에서 공적을 올렸다. 이 편에서는 사마상여의 작품 중 〈子虛賦〉, 〈上林賦〉, 〈大人賦〉 등을 소개하였다.사마천은 평하기를, 사마상여의 글은 비록 공허한 문자와 함부로 하는 말이 많으나 그 취지는 절약과 검소에 귀착된다. 이것이 의 諷諫과 무엇이 차이가 있겠는가? 라고 하..

史記/列傳 2023.10.03

列傳권116-西南夷列傳(서남이열전)

西南夷列傳은 중국의 서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 민족인 西南夷의 위치와 풍속 등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며, 漢武帝에 이르러 이들을 평정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비교적 큰 것이 夜郞·滇이었다. 이들 민족의 발전은 다 같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滇이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발달되었다. 이들은 남월과 인도로 왕래하고 있었는데, 무제 때 唐蒙을 야랑에 파견하자 야랑은 漢에 예속되어 이곳에 군을 두게 되었다. 또 司馬相如를 보내 이곳을 漢의 촉군에 편입시켜 서남 지방이 모두 漢의 수중에 들어왔다. 사마천은 漢이 西南夷를 정벌하여 많은 나라가 멸망당하였는데 오직 滇만이 다시 漢王의 총애를 받았다고 평하였다. 西南夷君長以什數,夜郎最大; 其西靡莫之屬以什數,滇最大; 自滇以北君長以什數,邛都最大: 此皆魋結,..

史記/列傳 2023.09.30

列傳권115-朝鮮列傳(조선열전)

朝鮮列傳은 西漢 前期의 衛滿朝鮮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燕 출신의 위만이 漢高祖 말기에 古朝鮮으로 도망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漢惠帝 3년(기원전 193년) 漢이 이를 승인하였으며, 漢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가 古朝鮮軍에 살해됨을 빌미로 漢이 대대적으로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漢과의 1년간의 전쟁 끝에 내분이 발생, 위만의 손자이자 古朝鮮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 살해되고, 성기가 주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그 땅에 낙랑, 현토, 진번, 임둔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우리나라가 보는 역사적 관점에 異見이 있으나 이 편은 사기의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朝鮮王滿者,故燕人也。 朝鮮의 왕 衛滿은 옛 燕의 사람이다.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史記/列傳 2023.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