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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義士의 快擧와 讚詩

耽古樓主 2025. 2. 13. 03:17

安重根 義士의 快擧와 讚詩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평생을 애쓰던 바 이제야 마쳤구려. 죽을 곳에서 삶을 도모함은 장부의 취할 바가 아니고 말고.

몸은 삼한에 있으나 이름은 만방에 떨쳤으니, 살아서 백 년이 어려운데 죽어서 천년을 사는구려.

 

▷平:평평할평 生:날생 營:경영할영 事:일사 只:다만지 今:이제금 畢:마칠필

死:죽을사 地:땅지 圖:그릴도 生:날생 非:아닐비 丈:어른장 夫:지아비부

身:몸신 在:있을재 三:석삼 韓:나라한 名:이름명 萬:일만만 國:나라국

生:날생 無:없을무 百:일백백 歲:해세 死:죽을사 千:일천천 秋:가을추

 

감상

 

이 詩는 안중근 의사의 쾌거에 붙인 중화민국 袁世凱 총통의 讚詩이다.

중국의 辛亥革命을 주도했던 孫文도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기리는 아래와 같은 禮訟詩를 지었고, 蔣介石도 안의사의 장례에 輓章을 써서 보냈다.

功蓋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弱國罪人强國相 縱然易地亦藤候.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나,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고 보면 이등 역시 같도다.

 

安重根 義士에 관하여

 

 

개략

 

안중근(1879. 9. 2~1910. 3. 26)은 황해도 海州府 縣監 안인수의 손자이자 進士 안태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학교에서 가톨릭신부에게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 후 안 의사는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된 것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 의사는 부친의 遺志를 따라 育英事業을 통해 國權 회복에 나서고자 평안남도 鎭南浦로 이주하여 三興學校를 세우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인재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沿海州로 건너가 義兵에 가담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손가락을 끊어 죽음으로써 救國鬪爭을 벌일 것을 맹세한 후, 그 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안 의사는 旅順 감옥에 갇혀 단 일주일에 걸친 6회의 공판을 끝으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處刑되었다.

 

어머니의 민족혼

 

안중근 의사의 애국적 삶의 裏面에는 아들만큼이나 毅然하고 애국심이 투철했던 어머니의 위대한 民族魂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1907년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을 때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

라고 격려했으며, 같은 해 나라의 主權 회복을 위해 벌였던 전국적인 國債報償運動에 자신과 안 의사 가족의 모든 패물을 獻納했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에는 아래와 같은 決然한 편지와 함께 明紬 壽衣를 보냈고, 안 의사는 그 수의를 입고 의연하게 순국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公憤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抗訴를 한다면, 그건 日帝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再會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天父의 아들이 돼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아들의 순국 후 조 마리아 여사는 上海에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 마리아 여사에게 建國勳章 愛族章을 追敍했다. 안 의사는 자식의 죽음을 目前에 두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大義를 받들어 男兒답게 용감히 죽음을 맞으라”

라며 수의를 지어준 어머니의 民族魂을 이어받아 민족의 영웅으로 당당히 살다 간 것이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나는 반만년의 우리 조국과 2천만 우리 동포를 위해 東邦大國의 평화를 교란하는 간악한 적을 죽였으니, 나의 목적은 이와 같이 바르고 크다.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일이니 아무 恨이 없다. 나의 念願은 오직 조국 대한의 독립뿐이다.”

라고 一喝했으며, 사형선고를 받은 후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안 지 이미 오래다. 내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으니 상고를 포기한다.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라며 당당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10일 감옥으로 면회를 간 두 동생에게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시체는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 返葬하지 말고 하얼빈 공원 부근에 매장하여 세계 亡國民들의 戒鑑이 되게 하라. 우리 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독립과 자유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大韓獨立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처형을 앞두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도 남겼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東洋平和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風餐露宿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實業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遺恨이 없겠노라.”

 

역사적 평가

 

안중근 의사는 日帝에 奮然히 맞서 목숨을 草芥와 같이 바친 愛國志士일 뿐 아니라, 교육자이자 동양평화를 主唱한 思想家였다. 출중한 필체로 많은 遺墨을 남기기도 한 안 의사는 중국 旅順 형무소에서 한ㆍ중ㆍ일 3국간 동양평화회의 설치,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공동평화군 창설 등 현재의 유럽연합(EU)과 유사한 진취적 구상을 담은 ‘東洋平和論’을 집필하던 중에 처형당했다. ‘爲國獻身軍人本分'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안 의사의 義擧는 독립투쟁 이상의 우리 민족의 民族魂이자 우리 국민의 愛國魂의 상징이다.

 

韓日合倂 막바지로 치닫던 政局에 이토 히로부미 被擊으로 궁지에 몰린 이완용을 위시한 매국친일파들은 日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울 장춘단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각 차원의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안 의사의 義擧를 불의로 규정하고 일제에 사죄했고, 太皇帝 高宗도 統監官邸로 가서 자신의 왕위를 박탈한 者의 죽음을 애도했다. 안 의사 순국 5개월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强壓으로 체결한 “合倂條約”을 公布하여 大韓帝國을 일제에 편입시켰다(庚戌國恥). 이로써 안 의사의 애국거사는 불의로 규정된 채 일제 强占 36년을 거치며 그 意義는 역사의 뒤편으로 묻혔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정연한 논리와 당당한 태도로 조목조목 진술함으로써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歎服시켰다. 그의 진술에 感服한 일본인 관선변호인은

“그 범죄의 동기는 지식 결핍과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고 변론했다.

旅順 형무소에서 안의사를 경호·감시했던 看守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그의 고결한 인품과 식견에 감복하여 일본으로 귀국 후 안 의사가 써준 遺墨 “爲國獻身軍人本分”과 안의사 사진을 걸어 놓고 부부가 평생 동안 안의사를 기리며 合掌했고, 치바 도시치 사후에는 안의사 유묵을 그대로 새겨 넣은 묘비가 세워졌다. 그가 보관했던 안 의사 유묵 원본은 유족을 통해 그의 고향 미야기현(宮城縣)의 다이린사(大林寺)에 보존되어 있다가 198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이린사 庭園에는 안 의사 유묵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그를 보고 ‘테러리스트’라니?

 

2021년 중국은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에 ‘安重根义士纪念館’을 개관했다. 항일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안의사의 義擧를 기념하고자 기념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안 의사를 "일본의 初代總理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며 중국측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안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다니, 일본이 ‘테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테러’란 이념적 · 종족적 · 종교적 · 정치적 盲信者나 盲從者들이나 그들에게 고용된 자들이 나름대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無故한 대중을 상대로 조직적 · 집단적으로 자행하는 파괴 · 살상 · 폭행 등의 蠻行을 말한다. 안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大韓義軍 參謀中將으로서 나라를 侵奪한 敵國의 魁首를 處斷한 愛國義擧이다.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貶下하는 일본의 망언은 자신들의 역사적 만행을 부정, 은폐하고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狂氣의 한 단면일 뿐이다.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의 좌편향 논란으로 소란스런 요즘의 우리 상황이 대변하듯, 잘못된 역사교육이 이 나라 正體性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나라의 정체성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 사회에서

“안중근 의사가 어느 병원 무슨 科 醫師냐?”

라는 농담마저 떠돌고 있으니, 이 나라의 미래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가? 嗚呼痛哉라!

 

▷이 글은 이철영 객원논설위원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전 경희대 객원교수>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耽古樓主 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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