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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구려-평강공주(平岡公主)

구글서생 2023. 4. 27.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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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6.평강공주(平岡公主)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號는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1. 공주의 성애(聖愛)

 

금전옥루(金殿玉樓)의 부귀영화를 일조(一朝)에 내던지고 다만 그의 동경하는 이상적 연인을 찾으려 하여 장안성 달 아래와 낙랑구(樂浪丘) 꽃사이로 헤매던, 공작같이 영롱한 미모를 가진 평강공주는 고구려의 황금시대를 거룩한 애(愛)로써 수놓았다.

 

알지 못하여라. 공주의 연인은 어느 명문 화주(華胄)인가, 혹은 풍신이 수려한 미남자나 체모가 괴걸(魁傑)한 위장부(偉丈夫)인가.

1)화주(華胄): 왕족이나 귀족의 자손.

 

모두 아니라. 이들은 공주의 우습게 여기는 바다. 그러면 어떤 이를 연인으로 골랐는가?

놀라지 말라. 그는 오직 외양이 못나고 가세가 어려워 걸식하여 봉친(奉親)하는 바보 온달(溫達)이라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단다.

 

대저 일국 공주의 고귀한 신분으로 자진해서 걸인의 아내가 됨은 누구나 곧이듣지 않을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공주는 거룩한 애로써 그 남편 바보온달을 격려하여 마침내 일국 충신이 되게 하였으니, 세상에 꿈보다 아름다운 현실이 있고 소설보다 기이한 사실이 있다면 평강공주의 염절장절(艶絶壯絶)한 일대 행적이 그것이 될 것이다.

 

 

2. 부귀를 초월

 

사전(史傳)을 보면 공주는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의 사랑하는 따님이니,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여 너무 시끄럽게 굴므로 아버님 평강왕께서 매양 달래는 말로, 우는 아기는 크더라도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은즉 바보온달에게나 주겠다 하였다.

온달은 못나고 가난하며 해진 옷에다 헌 신짝을 끌고 여기저기 다니며 밥을 빌어서 늙은 맹모(盲母)를 봉양할새, 바보라는 별호까지 얻은 우스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겉은 못생겼으나 속은 아주 훌륭하였다.

 

공주의 방년이 16세가 되매 종반(宗班)인 상부 고씨(上部高氏)와 통혼의 말이 있었다. 이때 공주가 평강왕께 조용히 여짜오되,

“대왕께서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로 주겠다 하시더니 이제 왜 變改하십니까?

필부도 두 말을 못 하거든 하물며 지존(至尊)이오리까.”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이없어 잠잠하고 계시더니 필경 입을 열어 공주더러 이르시되,

“일시 희언(戱言)으로 그리 한 것을 너는 참말로 알았더냐.

너의 마음대로 하려거든 아예 내 눈에 보이지 말라 "하고 크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信義를 존중하는 공주는 이미 굳게 결심한 바 있어 부왕의 책망함을 不顧하고 보석 팔찌 수십 매를 몸에 지니고 슬그머니 九重宮門 밖을 나왔다.

 

 

3. 이상적 연인

 

궁문 밖을 나온 공주는 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온달의 오막살이를 찾았다.

그러나 온달은 없고 그의 늙은 맹모만이 있으므로 맹모께 절하고 온달의 간 곳을 물어 가지고 다시 찾아갔다.

이때 온달은 주린 배를 보듬고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지고 돌아오는 길이라, 공주와 온달이 산기슭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공주는 그가 온달임을 알고 반가이 말하나 온달은 도리어 공주를 의심하여 하는 말이,

“이런 幽僻한 곳에 처녀가 혼자 오다니 너는 사람이 아니고 필시 여우의 홀림인즉 내게 가까이 말라.”

하고 소리를 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다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공주가 이런 괄시를 당하기는 생전 처음이다. 괄시를 받으나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고 또다시 온달의 뒤를 따라 그 집에까지 이르렀다.

 

그렇지만 온달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므로 부득이 싸리문짝 밑에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침에 겨우 방안에 들어감을 허락하여 공주의 일장 설명을 듣고서야 온달의 의심이 비로소 풀렸다.

의심은 적이 풀렸으나 아직도 온달은 어리둥절하고 있으며, 그의 늙은 맹모는 공주의 의상에서 뿜는 향기를 맡으며 그 명주 고름같이 연하고 부드러운 옥수(玉手)를 만지면서 語窮하여 공주더러 말하되,

“당신은 귀인이라. 내 집은 빈궁할 뿐더러 내 아들은 못났으니 어찌 귀인의 짝이 되리오.”

공주가 입술에 미소를 띠며 아주 온순한 어조로 삼가 대답하기를,

“일척포(一尺布)를 꿰매 입고 일두속(一斗粟)을 찧어 먹어도 사랑만 있으면 낙이지요 하필 부귀오리까.”

공주가 가지고 온 약간 경보(輕寶)를 팔아 조그만 전택(田宅)을 사고 노비우마(奴婢牛馬)와 기타 일용기구를 장만한 후 온달로 더불어 新家庭을 이루니 이로부터 두 사람은 낮에는 달콤한 애(愛)를 속삭이고 밤에는 아름다운 꿈을 맺을 뿐이다.

 

 

4. 온달의 출세

 

이만하면 의식문제는 얼마만큼 해결을 지었으니 청빈하나마 살아갈 수 있으므로, 공주는 다시 온달을 권도(勸導)하여 무예를 배워서 나라에 충신이 되어, 그 이름이 영구히 청사상(靑史上)에 번쩍이게 하였다.

무예를 배울 준비로 먼저 준마를 구할새, 공주의 지시를 따라 나라에서 파는 수척한 병마(病馬)를 廉價로 사다가 공주가 손수 먹여 살찌운 뒤 그것을 타고 기사(騎射)를 익혀 마침내 백발백중하는 명궁(名弓)이 되었다.

 

실력 있는 이에게는 기회도 오는 것이니 낙랑구의 사냥과 예산벌(隷山野)의 싸움은 온달로 하여금 그 선사(善射)와 무용을 크게 드러내게 하는 일대 찬스이었다.

 

고구려 국속(國俗)에 해마다 3월 3일에 낙랑구에 모여 사냥할새, 산돼지와 사슴을 잡아 천지 산천의 신을 제(祭)하며 이날은 임금이 나오시고 群臣과 5부 병사가 온통 떨쳐서 일어났다. 온달은 선사를 자랑하려 하여 그 손때 묻은 활을 메고 공주가 먹여 기른 준마를 타고 낙랑구에 달려가 병사 사이에 섞여 사냥하였다. 온달의 말은 남보다 항상 앞서 다니며 짐승을 남보다 많이 잡았으므로 왕의 눈에 띄어, 어전에 부름을 입어 성명까지 묻고 참말 善射라고 경탄함에 이르렀으니 온달에게 무상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로써 자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후주(後周)의 날카로운 칼날이 고구려를 내범(來犯)하여 온 나라가 진공(震恐)하며 왕이 친히 예산벌에 나가 적을 막을새, 온달이 그 풍운대지(風雲大志)를 이룰 때가 왔다 하여 스스로 앞장서서 적병을 무찌르니 이로 해서 사기가 크게 떨쳐 마침내 강구(强寇)를 물리쳤다.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온달이 일등이 되어 나라에서 대형(大兄) 벼슬을 주고 개선할 때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평강왕이 가탄(嘉歎)하시어 “참 내 사위다”하고 등을 어루만졌다.

一躍하여 용장이 된 온달은 임금의 총애가 날로 더하고 위권(威權)이 날로 성하니 보통사람 같으면 교긍(驕務)하기 쉬우나 충의로 자임하는 그는 고구려를 반태(磐泰) 위에 두기 전에는 안심하지 못하였다.

 

 

5. 영예로운 최후

 

그때에 평강왕이 돌아가고 아드님 영양왕이 새로 서니 왕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경륜을 가진 일대 영주(英主)이다.

수(隨)제국과 패권을 다툼에는 먼저 신라를 제압할 필요가 있으므로 온달이 하루는 영양왕께 여쭈오되,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 땅을 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나, 백성이 지금까지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아니하오니 원컨대 신에게 군사를 주어 고강(故疆)을 회복할 지이다.”

 

그는 일거에 국제적 현안을 해결하려는 의기를 보이며 언사가 자못 강개하니 영양왕이 그 뜻을 좇아 온달에게 신라 출정을 명하였다.

대명을 받은 온달은 출정하는 날에 비장한 말로 맹서하기를,

“마현(麻峴)과 죽령 이서(以西)를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아니하겠다.”

하고 군대를 끌고 국경을 넘어 전전전승(轉戰戰勝)하여 적지에 상당히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 아차성(阿且城) 격전에 온달장군이 흐르는 화살에 맞아 중상이 되어 필경 이로 해서 진몰(陣歿)하고 마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공주는 이상적 연인을 잃고 고구려는 모범적 충신을 잃었다.

 

거지로서 일조(一朝)에 부마가 되고, 바보로 일조에 충신이 된 그는 연애에다 공명(功名)을 수놓았으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죽은들 무슨 유한이 있으랴.

그러나 웬 까닭인지 그의 관곽(棺槨)이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멀리 분상(奔喪)하여 관곽을 어루만지며 이르되,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땅에서 떨어져 장례를 지냈다.

2)분상(奔喪) : 먼 곳에서 친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급히 돌아감.

 

이로써 우스운 바보온달의 극적 일생이 종막을 닫았다. 공주의 거룩한 애를 통하여 온달은 역사상의 한 기적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6. 小評

 

평강공주의 사적은 「삼국사기」 온달전 중에 적혀 있다.

공주가 온달의 아내가 됨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으니, 하나는 부왕의 신의를 존중하고 하나는 온달의 효성에 공명함이다.

공주가 온달을 보지 못했으나 말로 듣고, 그의 걸식 봉친하는 효성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가졌던 듯하며, 이것이 어느덧 일전하여 정신적 연모가 된 것 같다.

궁문을 나올 때 부왕께 신의로써 극간(極諫)한 그 말에 의하여 공주도 진정한 의미에서 효녀임을 알 것이다.

 

이로 보면 효녀 공주가 효자 온달을 찾아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반드시 놀랄 바가 아니다.

다만 벌열(閥閱)을 전상(專尙)하던 그 당시에 있어, 부귀를 버리고 빈천을 취함과 같은 파격적 행동은 참말 어려운 일이니, 이 때문에 공주의 성애(聖愛)가 더욱더 천추(千秋)에 빛나게 되었다.

3) 벌열(閥閱):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 또는 그 집안.

 

그러나 바보온달이라는 이름을 임금께서 아시게 된 것으로 추찰하면, 혹은 그가 영락한 어느 명가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소시에 한신(韓信)처럼 너무 빈궁하여 세인의 소병(笑柄)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4)소병(笑柄): 웃음거리.

 

그러다가 공주를 만난 후 공주의 권도로 해서 효자이던 온달이 다시 나가 국난을 막고 마침내 국가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일대 충신이 됨에 이르렀으니, 말하자면 그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이상하던 충효 쌍전(忠孝雙全)의 인물이었다.

 

이 점에서 공주 곧 온달전은 고구려에 있는 사실을 가지고 일층 더 미화 또는 소설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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