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2.고구려-유유(紐由) 본문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국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고구려의 발전기에 있어 한족과의 충돌은 면할 수 없는 바이다.
적군의 공격을 받아 국도(國都)가 무너지고 적의 급습으로 국왕까지 위험에 빠져 국가의 명맥이 조석에 달린 때에, 죽음을 달게 여기고 감연히 적군 중에 뛰어들어 3촌(寸)의 혀로써 적을 달래며, 한 뼘의 비수로 적장을 거꾸러뜨려 백척간두에서 조국의 위세를 만회한 것이 실로 유유이었다.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대에 대륙에는 위(魏), 촉한(蜀漢), 오(吳)의 소위 3국이 정립하여 공쟁(攻爭)을 일삼았고, 요동 일대에는 공손연(公孫淵)이 半獨立的으로 세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와 같은 여러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遠近攻)의 책으로써 서로 견제시키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왕 12년(238)에 위장(魏將)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멸할 때에 고구려에서는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어 수천 병으로써 위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이에 양국 사이에 介在하였던 세력이 붕괴됨으로 인하여 양국 세력의 충돌은 또한 면치 못하게 되었으며 그 위에 위는 요동 일대를 점거하여 동방 經略에 진출케 되었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에서는 동왕 16년에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파(襲破)하였던 것으로서, 양국의 충돌은 드디어 정면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위장 관구검(毋丘儉)과 먼저 비류수(동가강 상류인 듯) 상류에서 격전이 있었고, 다시 동 20년(위서 관구전에는 正始 6년 즉 동천왕 19년으로 되어 있음) 8월에 관구검이 대군으로써 내침하거늘 왕이 보기(步騎) 2만으로 비류수 상류에서 요격하여 3천여 급을 무찌르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엄격(掩擊)하여 3천여 급을 참획하였다. 승리를 거듭한 동천왕은 자못 의기가 헌(軒昂)하여,
“위의 대군이 도리어 우리의 소군만 같지 못하며 관구검은 위의 명장이거늘 그의 목숨은 이제 나의 장악 가운데에 있구나.”하고 심히 적을 경멸히 생각하였다.
1) 헌앙(軒昂): 헌거(軒擧). 풍채가 좋고 당당하며 너그러움.
그리하여 왕은 먼저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다시 진격을 가하더니 이에 실패를 거듭하던 관구검은 방진(方陣)으로 진형(陣形)을 고쳐 결사적으로 반격에 출(出)하였다. 아군은 드디어 크게 무너져 1만 8천여 명의 사자(死者)를 내었고 왕은 1천여 기로써 압록원(鴨綠原;압록강 상류인 듯)으로 패주하였다.
동년 10월에 관구검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공함(攻陷)하여 殺掠을 마음껏 하고 그는 다시 왕간을 시켜 왕을 추격하게 하였다.
왕은 남옥저의 죽령(竹嶺;함경북도 연안의 南境?)까지 쫓겨왔으나 사졸이 거의 흩어져 형세가 매우 급박한지라, 이에 밀우(密友)가 결사의 사(士)를 이끌고 적과 격전을 하며 왕을 멀리 탈주케 하였으나 적의 추격은 멈추지를 아니하였다.
왕은 드디어 힘이 다하고 꾀가 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동부(東部 ; 고려 5부 중의 하나이니 이 5부의 部는 처음에는 부족의 성질의 것이었으나 국가의 발전을 따라 행정구획으로 변천된 듯하다. 동부는 혹 左部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전의 順奴를 가리킨 것임) 사람 유유가 나아가 왕께 아뢰되,
“형세가 심히 위박하니 거저 죽을 줄이야 있사오리까? 신이 우계(愚計)를 생각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을 호궤(稿饋)하는 체하고 틈을 엿보아 적장을 척살하리이다.
만일 신의 계책이 성취되면 왕께옵서는 분격을 가하사 승(勝)을 결(決)하소서.”하고,
그는 위군 중에 들어가 사항(詐降)하며,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지어 해빈(海濱)에 도망하여 왔으나 몸을 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진전(陣前)에서 請降코자 하여 먼저 소신을 보내어 종자(從者)의 羞로서 약소한 물건을 드리나이다.”하였다.
2)호궤(稿饋):음식물을 베풀어 군사를 위로함.
3)해빈(海濱):해변.
위장이 그것을 곧이듣고 降을 받으려 할 즈음에 유유는 앞에 나아가며 식기 중에 감추었던 칼을 빼어 위장의 가슴을 찔러 거꾸러뜨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죽음을 같이하였다(유유가 죽인 위장은 왕간이 아니고 그의 선봉장이었던 듯함).
이에 위군이 크게 혼란케 되매 동천왕은 3도에 군을 나누어 급히 공격하여 낙랑 방면으로 궤주(潰走)시켰다.
이와 같이 유유의 자발적 희생은 국가 재조(再造)의 아름다운 결과를 나타낸 것이니 동천왕은 나라를 회복한 다음에 유유를 9사자(九使者)에 추봉하고 그의 아들 다우(多慶)를 대사자(大使者)에 임하여 그의 기공대절(奇功大節)을 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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