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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

구글서생 2023. 4. 27.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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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8.을지문덕(乙支文德)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그의 규모 및 영향, 의의에 있어 동양사상에 일찍이 보지 못하던 큰 싸움이라 할 것이다. 예로부터 한족과 타족(他族)과의 충돌에 있어 저명한 싸움으로는 살수전 이외에 5호 16국시대의 전진(前秦)과 동진(東晋) 사이에 일어난 비수전과, 금(金)과 남송(南宋) 간에 일어난 채석전(采石戰)과, 근세에 이르러 후금(청)과 명(明)의 살이호역(사르후 전투 - 만주어: ᠰᠠᡵᡥᡡ sarhū, 중국어: 薩爾滸之戰)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수전은 비록 氐人과 한족의 싸움이라고는 하나 마찬가지 지나 국내의 남북 충돌에 불과한 것이며, 채석전은 여진과 남방 한인과의 싸움으로서 저명한 것이기는 하나 역시 일시적 충돌로서 양국의 흥망이 결정된 것은 아니며, 살이호역은 만·한(滿漢) 양족의 이수에 관한 것이라고는 하나 양국의 운명을 결(決)한 것으로는 보기 어려우며 또 규모에 있어서도 그다지 크지는 못한 것이다.

이수:수송수단이 약해짐

 

그러나, 살수대전은 당시 남북조를 통일하여 지나 천지는 물론 몽고 서역에까지 세력을 휩쓸던 수(隋)와 만주·조선반도의 반분(半分)에 연해주까지 차지하고 동아(東亞)에서 호시탐탐하던 고구려와의 싸움으로서 건곤일척에 운명을 걸게 된 용양호박(龍攘虎搏)의 대혈전이었으며 이 대전의 결과 급격히 발흥된 세계적 대제국인 수가 일패도지로 거꾸러지고 지나대륙에는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는 등 기다(幾多)의 변화가 동양사상에 권기(捲起)케 된 것이다.

용양호박(龍攘虎搏):용처럼 날뛰고 범처럼 친다는 뜻으로, 장수들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모양의 비유.

이러한 살수대첩의 주인공은 실로 을지문덕이거니와 오인은 그의 웅위(雄偉)한 전적을 들기 전에 살수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경위를 들추어 그의 유래와 의의를 밝혀 볼까 한다.

 

동가강(압록강의 지류) 유역을 본거로 하여 굴기(堀起)한 고구려는 직접 한족의 곁에서 발전하게 된 만큼 처음부터 한족과의 충돌은 가위 숙명적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으로 뻗어 든 한의 세력을 점차 驅逐하면서 발전의 일로를 밟던 고구려는 제15대 미천왕 때에 이르는 동안에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을 완전히 회수하여 한족의 세력을 동방으로부터 구축하였고, 제19대 광개토왕에 이르러는 경역(境域)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어 서로는 요하(遼河) 유역에 세력을 펴고 동남으로는 나·제 양국을 눌러 남양만안(南陽灣岸)을 거두어 엄연한 일대 강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발전된 데에는 본래 전투국가의 국민인 고구려인의 유다른 무용적(武勇的) 정신이 지대한 관계를 가졌다 할 것이나 외부적으로 보면 그의 발전기는 마침 지나의 분열 혼란시대(육조시대)에 당한 것이 또 한 가지 조건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동안에 있어서는 양방의 작은 충돌은 끊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다지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수 문제(文帝)가 남북조를 아울러 지나를 통일함에 이에 동아에서 양대 세력 즉 고구려와 수의 대립형태가 벌어지고 이러한 대립관계는 바로 충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제25대 평원왕 32년(590)에 수 문제가 진(陳;남조)을 평정하여 지나를 통일하게 되매 고구려에서는 이미 수와의 충돌을 각오하고 군비를 굳게 하여 군량을 쌓아 거수(守)의 체세(體勢)를 취함에 이르렀다. 다음 영양왕 9년(598) 2월에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진격하매 이에서 양국의 정면충돌이 시작되었다. 수 문제는 고구려의 진공(進攻)에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하여 수(수군총관은 주나후)·육 30만으로써 고구려 원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수의 육군은 유성(柳城; 요서군)까지 진출하였다가 임로(霖遼)로 인하여 행군이 곤란한 위에 양향(糧餉)의 운반이 계속되지 못하여 군량이 결핍되고 또 역병이 겸행(兼行)하여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며 주나후가 인솔한 수군은 산동의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에 향하다가 바람으로 선척(船隻)이 많이 표몰(漂沒)하였다.

임로(霖潦) : 큰 장마로 인하여 흙탕물이 넘침.

이리하여 수군은 요수도 건너보지 못하고 9월에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으니 당시 수군의 사자(死者)는 10의 8, 9에 달하였다. 유현(劉炫)이 고구려를 치지 못할 나라라 하여 무이론(撫夷論)을 지어 무마책을 고조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廣)는 호탕한 바탕에 허영심을 겸한 터로서 남방의 임읍(林邑)과 적사(赤士;暹羅)를 위복(威服)하고 북의 돌궐(突厥)을 회유하며 서로 토곡혼(吐谷渾) 고창(高昌)을 입공(入貢)케 하고 다시 서역 제국(諸國)을 불러 호시(互市)를 여는 등 그들의 소위 백이내왕(百夷來王)이라는 정치적 허세를 펴기에 분주하였다.

호시(互市): 외국과의 교역.

그러나 홀로 동방의 고구려만이 테 밖에 서서 그를 비예(脾睨)하고 있으며 때로는 돌궐과 통하여 무엇인지 획책하는 기미조차 보였다(양제가 일찌기 돌궐의 啓民可汗에 갔다가 그곳에 와서 머무는 고구려 사자를 발견한 일이 있음).

비예(脾睨): 흘겨봄.

그 위에 문제의 실패는 씻지 못할 치욕인 동시에 숙적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한 그는 고침(高枕)의 안(安)을 누릴 수도 없었던 것으로서 드디어 거국의 역량을 있는 대로 기울여 고구려 정벌에 종사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정벌은 그의 최대의 희망이며 최대의 사업이니만큼 준비공작도 실은 후인을 경탄케 하는 바가 있었으니 유명한 대운하의 개착(開鑿)이 곧 이것이다. 이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같이 지나의 2대 공사의 하나로서 세계 제일의 운하이다(북은 천진 부근으로부터 남으로 杭州灣을 연결하는 것으로서 재래 부분적으로 개착되었던 것을 연락 연장시킨 것이니 길이 약 3,500리라 함). 이와 같이 최대최난의 공사를 행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그중에도 고구려 원정의 준비라는 것이 가장 큰 의의를 가진 것이다. 당시 황해 일대는 고구려 수군의 행동범위에 있으므로 타일(他日) 원정을 행하게 되면 남중부(南中部)로부터의 군정 물자(軍丁物資)의 해상 수송이 불가능케 되므로 내륙에 그와 같은 운하를 개착하여 수송의 안전을 꾀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동원에 운수능력을 증가케 하려던 것이다. 양제는 벌써 그의 대업 6년(610)에 천하의 부민(富民)들에게 출자를 엄명하여 10만의 군마를 보충하고 다시 병구기장(兵具器仗)을 점검하여 일률로 개비정신(改備精新)케 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준비를 정돈한 다음에 그 익년 2월에 강도(江都)로부터 대운하를 거슬러 탁군(하북성 탁현)에 이르러 고구려 원정의 조서를 발(發)하고 인하여 동원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홍사(元弘嗣)를 동래(山東) 해구에 보내어 병선 300艄를 새로 조성할새 주야로 수중에서 종사하던 공인들은 허리로부터 하체에 구더기가 생겨 죽는 자가 10에 3, 4였다.

 

양제는 계성(薊城;하북성 계현)에서 단을 쌓아 황천후토(皇天后土)와 그의 父 문제(文帝)며 마조(馬祖)에게 제고(祭告)하고 친히 군산 대오의 편제와 군의 기호 복색 등을 마련한 다음에 영양왕 23년(수 대업 8년) 정월에 이르러 대군을 탁군에 집중하고 출사의 명을 내렸다. 전군을 좌우 각 12군 합 24군에 나누었으니 좌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도(道)로, 우 12군은 점선,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 숙신, 갈석(碣石), 동이, 대방, 양평(襄平) 등 도로 각각 진출하여 평양에 총집중케 하니 병수(兵數)는 무룻 1,133,800명에 200만이라 호(號)하고 군수 운반에 종사하는 자의 수는 이에 배(倍)하였다. 그리하여 “돌아보면 산악이 무너지고 소리지르면 풍운이 등등하다”(편집자 역)는 기세로 24로(路)의 군이 움직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24군이 각각 분담한 도의 명칭은 한(漢)시대 4군 군현의 명칭을 그대로 붙인 것으로서, 군현의 위치에 따라 이같이 배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24군의 진출하는 노순(路順)을 구지명(舊地名)으로써 충당한 것에 불과하다.

 

진군에 당하여 양제는 친히 절도를 주어 40리를 상거(相距)로 하여 1일에 1군씩을 진발(進發)케 하니 출발하기에만 40일을 비(費)하였다. 수미가 서로 맞닿고 鼓角이 서로 들려 旌旗가 960리에 뻗쳤다. 양제가 총군을 절제하여 殿後가 되어 따르니 어영(御營)의 대성위군(臺省衛軍)이 다시 80리에 연긍(連旦)하여 출사의 성장(盛壯)함이 전고에 없던 것이며 그 외에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는 강회(江淮)의 수군을 인솔하고 산동으로부터 평양을 향하여 건너오니 축로(舶蘊)가 수백 리에 뻗쳤다 한다.

축로(釉臚):배의 이물과 고물.

 

3월에 수양제가 대군을 끌고 요수 서안(遼水西岸)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건너지 못하였다. 수주(隋主)는 공부상서 우문개(于文愷)를 명하여 3조의 부교를 가설케 하여 거의 완성되려 할 때 고구려군의 역습을 받아 수의 맹장 이철장(李鐵杖),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이하 다수의 전사자를 내고 가교 작업이 실패에 돌아갔다. 그 다음 소부감(少府監) 하주(何稠)가 가교에 성공하여 수의 대군은 드디어 요하를 건너 격전 끝에 진로를 얻어 요동성(지금 遼陽)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요동성군은 고성(孤城)을 굳게 지켜 교묘히 방어하는 동시에 틈을 엿보아 반격을 가하였으며 수군(隋軍)의 공격을 받은 여러 성도 굳게 지켜 수군을 괴롭혔다.

 

이와 같이 수군의 일부는 요동 일대에 달라붙어 고구려군과 상지(相持)하는 동안에 다른 9군, 즉 좌익위대장군 우문술(于文述)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荆元恒)은 요동도로,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우어위장군 장근(張瑾)은 양평도로,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는 간석도로, 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로, 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로 각각 나와 고구려의 도성 평양을 목표로 하고 압록강 서안에 모였다. 그리고 우문술 등이 노하(濾河)·회원(懷遠) 양진을 출발할 때에 인마에 각각 100일 양식과 의자(衣資), 융구(戎具), 화막(火幕) 등을 배급하였으나 병졸들은 무거운 짐에 견디지 못하여 땅속에 묻어 버리므로 중도에서 벌써 식량이 결핍케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는 을지(을지는 複姓이니 지나측 기록에는 尉支로 쓴 데도 있음)문덕(평양 石多 사람이라고도 전하니 석다산은 증산에 있음)이 침의(沈毅)한 자질과 웅위(雄偉)한 지략을 겸하여 대신으로서 군국의 대사를 담당하고 있어 그의 영명(英名)은 일찍부터 내외에 떨쳤었다. 을지문덕은 백만의 대적을 앞에 두고 태연한 가운데에서 승산을 운주(運籌)하던 것이니, 먼저 요동지방의 제성(諸城)으로 하여금 방어를 엄히 하도록 하고 도성으로 향하여 오는 적은 자신이 당하기로 하였다.

운주(運籌): 주판을 놓듯이 이리저리 궁리하고 계획함.

적에 당하여 필승을 기하려면 먼저 그의 허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을지문덕은 짐짓 항(降)하는 체하고 멀리 수군의 총지휘인 우중문의 진영에 들어가 실황을 관찰하여 수군이 과연 遠路와 飢餓에 시달려 극도로 피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중문은 미리부터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보면 반드시 붙들라.”

는 수주(隋主)의 밀지를 받았으므로 이에 을지문덕을 잡으려 하매 무위사(撫慰使)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말리는지라 우중문도 고집하지 않고 그의 돌아가는 것을 방임하고 말았다. 이윽고 우중문은 심히 후회하여 사람을 달려 보내어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와달라.”

고 을지문덕을 꾀었으나 그는 돌아도 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게 되었다.

수장들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내심에 불안을 느껴 어찌할 줄을 모르던 나머지 우중문은 급히 추격코자 하였다. 우문술은 식량이 결핍한 것을 들어 불가함을 말하였으나 우중문은

“10만의 중(衆)으로써 소적을 파(破)치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제(帝)를 대하랴.”

하고, 제장(諸將)으로 더불어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피로한 적군을 더욱 깊이 끌어들이려 짐짓 싸우다가 패하는 체하고 물러온다.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퇴거하여 적을 평양 부근 30리 지점까지 끌어들였다. 을지문덕은 자기의 책략에 끌려 들어온 수군을 안타까와하는 듯이 우중문에게

“귀신 같은 책략은 천문을 궁구하고

신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다했다.

싸움에 이간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편집자 역)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既高 知足願云止”

라 하여 조롱하는 시를 지어 보내었으니, 그의 개세(蓋世)의 기개와 100만의 적을 누를 만한 박력은 이 20자의 싯구 가운데에 역력히 나타나 보이는 바이다.

 

어리석은 우중문은 예의 회유(誨諭)하는 뜻으로 대응하매 을지문덕은 다시 우중문에게 사자를 보내어

“귀병이 만일 철퇴(撤退)한다면 왕을 받들고 조현(朝見)하리라.”

라고 꾀었다.

 

수장들은 사졸이 극도로 피폐하여 다시 싸울 수도 없고 또 평양성이 험고(險固)하여 容易히 뺏지 못할 것을 아는지라, 어찌할 수 없어 못 이기는 체하고 총퇴각을 행하였다.

 

미리 沿路 요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사면으로 초격(抄擊)하매 수군은 싸우며 달아나며 하여 7월 임인에 살수(청천강)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은 수군이 반쯤 건너기를 기다려 후면으로부터 맹습을 가한 결과 신세웅이 거꾸러지매 이에 수의 제군이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던 것으로서 혹은 물에 빠지고 혹은 화살과 병인(兵刀)에 거꾸러지고 혹은 서로 짓밟혀 궤주(潰走)하기 하루 낮 하루 밤에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이르렀다.

 

처음에 수의 9군이 요동을 지날 때는 30만 5천이었던 것이나, 살수에서 궤멸되어 요동지방에 돌아간 것은 겨우 2,700인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대동강으로부터 평양 부근에 침입한 내호아도 고구려의 복병을 만나 섬멸적 타격을 입고 해안지대에서 逗留하며 형세를 관망하다가 살수의 패보를 듣고는 또한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逗留: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음.

 

이리하여 수주는 미증유의 수륙 대군으로써 고구려 원정을 행하였으나, 요수 서안의 무려라(武厲羅; 요수를 건너는 자를 검찰키 위해 설치한 고구려의 巡軍營임)를 빼앗았을 뿐으로서 전군 복멸(全軍覆滅)의 참패를 입고 본국으로 둔주(遁走)하였다.

이 살수대첩은 무용(武勇) 고구려인의 정력이 발휘된 것으로서 오합의 중(衆)인 백만 수군의 당치 못할 바이며 환고탕자(紈袴蕩子)인 수양제는 원래 문무가 쌍전(雙全)하고 지용(智勇)이 겸비한 을지문덕의 적수가 되지 못하나니 이로 보면 살수대첩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환고탕자(袴蕩子): 귀한 집안의 방탕한 사내.

 

110여만 군과 막대한 군자기장(軍資器仗)으로써 일패도지한 수주(隋主)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그의 국세는 드디어 피폐하여 도탄에 든 인민은 동요되기 시작하였으며, 국본은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주는 기울어지는 국운을 만회하고 천인(千仞)의 구렁에 추락된 그의 위신을 회복키 위하여, 궁여의 일책으로 또다시 만난을 불고하고 투기적으로 고구려 원정이라는 최대 모험을 행케 되었으니, 허영과 만포(慢暴)에 사로잡힌 수양제로는 있을 법한 일이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안 될 사정이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익년 정월에 다시 천하의 군병을 탁군에 모으고, 내호아로 수군을 일으키게 할새 민정(民丁)을 모취(募聚)하여 효과(驍果)라 일컬어 군액(軍額)을 보충하며, 인민을 징발하여 운수에 당케 하매, 천하의 인민은 생업을 잃게 되어 도적은 사방에서 봉기하고 도로는 격절(隔絶)케 되었다.

수주는 굳이 원정을 단행하여 대군을 이끌고 동년 4월에 요수를 건넜으나 요동성 공격에 또다시 실패하여 큰 손해를 입고 허둥지둥하던 차에 6월에 들어 여양(黎陽)에서 군수(軍需)의 수운(輸運)을 감독하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보(反報)가 이르매 군자 기계 등을 산더미같이 내버리고 군을 몰아 창황히 돌아감에 이르렀다.

당시 그의 진영은 자못 괴란(壞亂)하였던 것으로서, 병부시랑 곡사정 (斛斯政)은 고구려에 귀항하였으며,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고구려군은 퇴귀(退歸)하는 수군을 추격하여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수의 천하는 드디어 부스러져 유적(流賊)은 국내에 충일하고 군웅은 각지에서 튀어나매 수주는

“천하에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많으면 적이 되니 다 죽이지 않으면 뒤에 가르쳐 보여 줄 것이 없다." (편집자 역)

라고 하여 학살을 자행하였으나, 10의 9분이 도적으로 화한지라 손을 대어 수습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그의 미몽(迷夢)은 아직까지 깨어지지 아니하여 국내 형세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익년(영양왕 25년)에도 턱없는 고구려 원정을 행하려 하여 병졸을 소취(召聚)하였으나, 그때에는 이미 국내의 동란으로 통로도 막혀 징소된 군정(軍丁)이 실기하는 자가 많았다. 수주는 드디어 회원진까지 출동하였으나 당시 국내의 급박한 사정은 이를 불허하였으므로 수주는 마침내 종천(終天)의 한을 품은 채로 고구려 정벌을 단념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주는 살수에서 대패한 뒤에 고구려 문제로 허둥지둥하는 동안에 관중(關中)에서 일어난 이연(李淵; 후일의 당 고조) 부자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강도(江都)에서 두류하다가 드디어 그의 신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시(被弑)되고 말았다.

살수의 일전은 그 전쟁 자체가 역사상 희유의 대규모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은 가위 비류(比類)가 없을 만큼 큰 것으로서 지나 또는 동양사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로 보면 고대 우리 역사에 있어 동양 전국(全局)에 일대 전환을 일으킨 이로는 누구보다도 을지문덕을 첫손가락으로 들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附言

 

을지문덕에 관한 사료는 「수서(隋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한토사적(漢土史籍) 이외에 우리의 기록은 거의 인멸되어 전하는 것이 적음은 실로 유감이다. 「삼국사기」의 을지문덕 기사도 전혀 「수서」 등에 의거한 것이나, 다만 「삼국유사」에 이에 관한 「고려고기(高麗古記)」의 기사 일단이 인용되어 있으니

“고려 왕이 표(表)를 올려 항복하기를 빌었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몰래 작은 활을 품에 지니고 표를 지닌 사신을 좇아 양제가 타고 있는 배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를 들어 읽으려 하자 활을 쏘아 양제의 가슴에 적중시켰다.

양제가 선사(旋師)로 하여금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친히 작은 나라를 정벌하다가 이루지 못하니 만대에 비웃음을 사는 바가 되겠구나' 운운.”(편집자 역)

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고려라고 표기된 것은 통상적으로 고구려를 지칭한다.

수양제가 과연 화살에 맞았는지 아닌지는 별문제로 하고라도 당시 고구려인의 수에 대한 적개심이 어떠하였으며 고구려 친정에 실패한 수양제의 분한이 어떠하였던 것만은 이 기사에 잘 반영되어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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