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확(安廓)
(1884~?) 국학자. 호 자산(自山). 서울 출신. 일본의 니혼(日本) 대학 졸업.
「청년연합회잡지」, 「신천지」등의 잡지사 주간 역임.
저서에 「조선문학사」, 「수정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시조시학(時調詩學)」, 「조선문명사」등이 있음.
1
금일 성악계에서 본악(本樂)이라 하여 가장 숭상하는 것은 소위 가곡이라 하는 것이다.
이 가곡에 대하여 그 작곡상의 성질을 문(問)하면 왈 평조(平調; 羽調)요, 왈 계면조(界面調;우조)라 하는 것이니 이 2조를 악리(樂理)에 상조하여 강토(講討)하면 평조는 보통 우조라 하나 기실은 치성(徵聲)을 위본(爲本)한 치조(徵調)요, 계면조는 보통 애음(哀音)이라 하나 기실은 우성(羽聲)을 위한 장쾌한 우조이다. 그런데 2조로 작성한 가곡은 반드시 2종이 각이(各異)하여 별물로 나눔이 가하거늘 가인(歌人)들은 그 2조를 연창하여 1곡으로 합치하니 이것이 뜻에 이상하다.
이를 터득키 위하여 여러 종 악서와 악보를 조사하면 조선의 본악은 본래부터 평·우 2조를 위주하여 이로써 선풍협기(宣風協氣)의 정률(正律)을 삼았던 것이다. 금일 가곡이 2조로 되고 또 이를 연창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즉 본악의 특질인 보람이요 또 그 특질을 유지코자 한 일종 도의를 유(有)함이다.
다시 진(進)하여 본악이 어찌하여 2조로 된 것인가 한 이유를 査考치 아니할 수 없으매 이로부터 시(時)를 역하여 고악(古樂)을 소급하여 보면 삼국시대에 있어서 적(笛)에는 7조가 있고 비파에는 3조가 있었으나 현금(玄琴)에는 특히 2조가 있었으니 「삼국사기」 악지(樂志) 현금조(玄琴條)에 이른바
“현금으로써 스스로 업을 삼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지만, 지은 바 악곡은 둘이 있으니 하나가 평조이고 둘이 우조이다.” (편집자 역)라 함에 빙(憑)하면 본악이란 2조는 고대 현금에서 유전된 것이 판명된다.
이럼으로써 현금이란 것이 조선 음악의 본체물이 되었던 것을 알 것이요, 인하여 그 주체인 현금의 나온 바를 물으면 이는 곧 왕산악 공이 창조한 것이라 함을 말하게 되고 동시에 공의 전기를 살핌에 나가는 것이다.
2
왕산악 공은 고구려인이다. 일찍기 환로(宦路)에 출하여 관이 재상에 위(位)하니 그 인격은 음양을 이(理)하고 임우(霖雨)를 작(作)하는 역량이 있음을 알 것이다.
1)환로(宦路): 벼슬길.
그러나 그의 진정한 생활은 조정병축(調鼎秉軸)하는 정치활동에 있지 않고 실사회를 초월하여 별세계를 개설한 奇特의 지개(志槪)가 있었다.
2)조정병축(調鼎秉軸): 정권을 잡기 위해 애씀.
관(觀)컨대 공이 출세한 당시는 고국원왕 때로부터 장수왕 초년까지의 대개 90년간인 것을 알겠는데 그 90년간의 세태는 고구려의 극성시기이다.
대학도 그때에 창설하여 교화가 방흥(方興)하고 중국의 문화도 이때에 수입되어 일반 문화의 양식이 新面目을 연 때이며 광개토, 장수 같은 영주 걸왕(英主傑王)이 계기하여 판도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한 때라. 고로 이때는 문으로나 무로나 내치외사(內治外事)에 상하가 안비(眼鼻)를 막개(莫開)하던 시절이니 그 당시에 좌(坐)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고후(顧後)의 여가가 없거늘 하물며 일국의 주석(柱石)이 된 국상으로서야 연구국궁(捐軀鞠躬)에 면식(眠食)이 하안(何安)이랴.
3)안비막개(眼鼻莫開):일이 바빠서 눈코뜰 새가 없음.
4)연구국궁(捐軀鞠躬): 의(義)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침.
더욱 왕상공으로는 보곤섭리(補袞燮理)가 소원이 아니요, 황각속화(黃閣束華)가 희망이 아니라.
5)황각속화(黃閣束華):높은 벼슬에 올라 영화를 누림.
고로 공은 안연(晏然)히 진상(塵想)을 씻고 청계(淸界)를 別開하여 좌기태식(坐忌胎息)으로써 함영희음(咸英希音)에 현학(玄鶴)을 벗함이 그의 원정(原情)이던 것이다.
6) 안연(晏然)히:태연히.
현금이란 악기는 즉 공의 그 이상에서 작출(作出)된 자니, 공의 이상이 그렇듯 심원한 고로 고구려는 그 명도(命塗)가 旣絶하였으나, 공의 혼은 시러곰 현금에 반(伴)하여 수천년 후까지 전하여 온 것이다.
3
그런데 공이 어떠한 동기 또는 무슨 의장(意匠)으로써 현금을 창조한 것인가 물으면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당시의 지적 활동과 외문화(外文化)를 이용하던 방법 그것으로써 함이라 할 것이다.
이에 문화정책은 본(本)이 외국 문물을 수입하여 채장보단(採長補短)으로 그것을 이용코자 함이 일대 방침이라. 고로 고국원왕 6년부터 중국과 교섭을 친절히 하였으며, 동시에 중국인은 아(我)의 호의를 영(迎)하여 희희(熙熙)한 내용을 작(作)하며 또는 아의 혜택을 감(感)하여 내화(內化) 입적한 자도 많으니, 최필(崔芯), 고무(高撫) 등이 그런 자라.
7)희희(熙熙):화목한 모양.
때맞추어 지금 남경에 수도를 정한 동진(東晋)과는 호혜자(互惠者) 국교가 빈번함에 반(半)하여 피차의 方物을 예송(禮送)함도 불소(不少)하더니, 한번은 진국에서 7현금(七絃琴)을 내헌(來獻)하는 자가 있었다.
정부는 이를 許納하였으되 초견(初見)의 물(物)이라, 그 音階의 구조와 彈奏의 방법을 부지(不知)하여 후상(厚賞)을 약(約)한 하에서 해음자(解音者)를 구하니 이것이 왕상공의 현금을 창조한 동기이다.
정부가 이 해음자를 구하는 명령의 이유는 제1 자국물로 사용코자 한 의사요, 제2 음악상의 지식 있는 자를 발양(發揚)코자 함이요, 제3은 외국물에 대하여 격물상(格物上)의 국가적 체면을 보(保)코자 함이라.
고로 이 발령의 이면에는 중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해답하는 자가 없을뿐더러 유식자 또는 재상자(在上者)의 설두(設頭)가 아니면 이 문제를 해득키 불능한 경위이던 것이다.
이에 왕상공이 출반하여 그 책임을 자담(自擔)하고 이를 窮覓하여 해탁(解度)하는 동시에 그를 개량하여서 본국물로서 화작(化作)한 것이다.
9)窮覓: 끝까지 구함.
그 개량체는 7현금의 본양(本樣)을 의존하되 중간의 3현은 차제(次第)로 낮은 부동주(不動柱) 16개를 세운 위에 안치하여서 음역을 증(增)한 바 모두 52음을 發케 하니 즉 조율능(調律能)을 풍부하게 하여 일반 악곡에 광용(廣用)케 한 것이다.
공이 그렇듯 조율능을 풍부케 하도록 조출한 것은 공의 혜두(慧竇)에 천재적 한 음악상 지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는 타국보다 유별히 음악이 발달하였던 바, 공의 지낭(智囊)에는 그 발달하여 온 경험이 다유(多有)하였던 것이다.
10) 혜두(琴竇):슬기가 우러나오는 구멍. 슬기로운 사람.
11) 지낭(智囊):슬기 주머니. 지혜가 많은 사람.
○신라 악기 11종
금(琴) 쟁(箏) 공후(空侯) 우(牛) 생(笙) 적(笛) 호 도피(桃皮) 피리 각(角) 고(鼓)
○ 백제 악기 11종
현금(玄琴) 가야금(伽倻琴) 향비파(鄕琵琶) 적 대금(大今) 중금(中今) 소금(小今) 가 각(角) 백판(柏板) 대고(大鼓)
○ 고구려 악기 23종
오현금(五絃琴) 비파(琵琶) 사피비파(蛇皮琵琶) 와공후(臥空侯) 수공후(竪空侯) 봉수공후(鳳首空侯) 쟁 소(簫) 약 생 적 횡취(橫吹) 의취적(義嘴笛) 대피리 소피리 도피피리 호로생(胡蘆笙) 소엽(嘯葉) 패(唄) 요고(腰鼓) 제고(齊鼓) 담고(擔鼓) 철백판(銕柏板)
위의 악기 수를 비교하면 고구려물은 타방(他邦)보다 배가 초(超)하며, 「통전(通典)」에 보면 수·당에서는 고구려악을 특설하여 최후까지 25곡을 상주(常奏)하였다 하고, 「당서(唐書)」 양재사전(楊再思傳)에 보면 양은 시 재상으로서 고구려 춤을 추었다고 하니, 이런 문적에 의하면 고구려음악이 널리 광전(廣傳)하여 외국에 유행됨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그 음악 정도는 이상하게 발달하였음을 알 것이다.
12) 통전(通典):중국 역대의 여러 제도의 연혁을 통관한 서적으로 약 200권쯤 된다.
이 발달은 왕상공 이후의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그만한 발달이 있던 그 전면에는 본래의 음악적 소질이 없지 않고는 불능이니, 왕상공도 그 천부한 특수성의 소질이 있던 것을 확지(確知)할 것이다. 그 소질의 발동이 즉 현금을 조출한 것이니라.
4
공이 현금을 신조하고 겸하여 곡조 100여 譜를 제하였다.
그를 친히 탄주함에 이르러는 금성(金聲)이요, 옥진(玉軫)이라. 그 묘음이 유량함에 종(從)하여 현학이 스스로 운(雲)을 천(穿)하고 내무(來舞)하니 이것이야말로 신기함을 송(頌)치 아니치 못할새, 그를 기념하여 명(名)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니 현금은 즉 현학금의 약칭으로 거문고라 한 것이다.
현금이 신라에 전하여는 그 풍격을 모(慕)하여 성풍(盛豊)한 유행을 정(呈)할새 유명한 옥보고, 청장 등 대가가 계출(出)하여 극종에 이르고, 극종 이후에는 자업자(自業者)가 운기(雲起)한 지라.
왕산악(王山岳) -옥고보(玉寶高) -명득(命得) -귀금(貴金) - 안장(安長)
└ 청장(淸長) - 극상(克相)
└ 극종(克宗)
대가의 종기(蹤起)에 따라 곡조도 다생(多生)하나 주율(主律)은 불실(不失)하여, 평조·우조의 2조로 통일되고 그중에 명곡으로서 고려까지 전한 것은 187곡이 있고, 그 주율의 2조는 조선 음악의 근본이 되니, 금일까지 보존한 가곡의 2조가 즉 그것일새, 그 2조의 음계는 아래와 같다.
평조 즉 치조의 음계
궁 | ○ | ○ | 우 | ○ | 치 | ○ | 각 | ○ | ○ | 상 | ○ | 궁 |
계면조 즉 우조의 음계
궁 | ○ | 우 | ○ | ○ | 치 | ○ | 각 | ○ | 상 | ○ | ○ | 궁 |
2조를 합하면 즉 7음계
궁 | ○ | 계우 | 우 | ○ | 치 | ○ | 각 | ○ | 계상 | 상 | ○ | 궁 |
이것을 오늘날 음향학상의 공식으로 계산하면 본 5음의 8도 6.00, 5도 3.51로서 6도 우음 4.53을 얻고 이 우음수를 기본하여 다시 2조 음계를 따져 보면
궁 4․53(우)-4.53=0
상 5.55(변궁)-4.53=1.02
계상 6.00(宮의 8도)-4.53=1.47
각 1.02(궁)+6.00(8도)-4.53=2.49
치 2.04(각)+6.00(8도)-4.53=3.51
우 3.06(변치)+6.00(8도)-4.53=4.53
계우 3.51(치)+6.00(8도)-4.53=4.98
또 각 음간의 비(比)와 치(値)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각 음간의 음정 | 치 | 9/8 | 256/243 | 9/8 | 9/8 | 9/8 | 256/243 | 9/8 | |
비 | 1.02 | 0.45 | 1.02 | 1.02 | 1.02 | 0.45 | 1.02 | ||
궁으로 된 음정 | 치 | 1 | 9/8 | 32/27 | 4/3 | 3/2 | 27/16 | 9/8 | 2 |
비 | 0 | 1.02 | 1.47 | 2.49 | 3.51 | 4.53 | 4.98 | 6.00 | |
7음 | 궁 | 상 | 계상 | 각 | 치 | 우 | 계우 | 궁 |
이것이 현금 음계의 이치인 동시에 조선 음악의 본 음계 수라.
5
공이 현금을 창조한 동기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격물상 또는 이용의 사상이라 할지나, 그 주심(主心)에는 본래부터 정치생활보다 예술생활에 대한 向念이 충만하였다.
고로 현금을 조성하여도 길이 업을 작곡에 이(移)할새 전력을 안보(按譜)에 경주하여 드디어 100여 종의 수다한 곡조를 작출하니 이 수다한 작곡을 성(成)함에는 세월도 비(費)하고 苦心도 용(用)하여 전생활을 여기에 기(寄)하던 것이라.
더욱 신곡을 탄(彈)함에 현학이 감동하여 來舞라 하는 전설에는 공의 작곡이 신운교묘(神韻巧妙)함을 극하여 淸雅高尙한 성역에 이름을 가히 추지(推知)할 것이라.
그렇듯 현금에는 공의 淸淨高潔한 풍도가 반(伴)하였으므로 후인은 현금을 선단물(仙壇物)로 간주하여 비상히 고상한 것으로 치의(置意)하였다.
고로 자래인사(自來人士)는 악단에 출(出)함을 전혀 야비(野鄙)에 귀(歸)하였으나 현금에 이르러서는 고상히 애(愛)하여 학자 및 재상들도 많이 이것을 숭상하여 온 것이다.
내 지금 왕공의 전기를 서(書)함에 있어 可考의 재료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있는
"일찌기 진나라 사람이 7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 성음 및 치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그 음을 알아서 칠 수 있는 사람은 후한 상을 줄 것이라고 하면서 구했다. 이때에 제2상(第二相)인 왕산악이 그 본래 모양은 남기고 자못 그 법제를 고쳤으며 겸하여 100여 곡을 작곡하여 연주했다. 이에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니 드디어 이름을 현학금이라 했는데 후대에는 단지 현금이라고만 한다.”(편집자역)
80자의 단편 문구에 불과한 것이라 이 공소(空疎)한 문적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장황히 포서(鋪敍)함에는 혹시 독자에게 誇張評을 수(受)할지 모르나, 내 과장은 새로이 오히려 지수(紙數)에 한하여 중략한 것이다. 본래 고구려의 문학사상은 낭만적 주의가 있어, 기절적(奇絶的) 神秘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명석(明哲)을 기(忌)하고 朦朧에 경(傾)하는 일이 많으니, 고구려의 역사가 간략함도 그의 이유다.
그러나 그 간략한 이면에는 비상히 유완미(幽婉味)가 잠재하여 연구가의 흥미를 야기하니 왕공에 대한 기록도 역시 그의 필법으로 나온 것이다. 고로 문구는 단(短)하나 그 내면은 深幽하여 연구할수록 그 양을 증(增)하게 되니 원컨대 후일의 학자는 이를 참작하여 완미(味)를 가하여 이 이상의 사실을 많이 발견하기 바라노라.
“찬미하여 말하기를 고구려 문화가 천년을 두고 전하는 것은 오직 현금뿐이라, 공(왕산악)은 그 문화의 유전에 헌신한 충신이 아니리까.
안보(按譜)가 일치하여 그 묘음이 양양하여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니 공은 악기를 타는 방법을 달성한 성인일지니.
2조가 이룩되어 율강이 천하 어디든 없는 곳 없이 골고루 의전을 노래로 엮어 나가니 음악의 도를 처음 연 신조(神祖)가 아니리까." (편집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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