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살리고 싶은 버릇 93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3. 수놓는 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인고수를 보고 며느리가 그 어떤 일로 어느 만큼 마음을 아파했는지를 알았으며, 그 아픔을 참아가는 과정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한다. 우리의 옛 부도(婦道)에 사군자(四君子) 수(繡)를 한 벌 다 놓고 난 다음에야 인생을 알기 시작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매(梅)·국(菊)·난(蘭)·죽(竹)을 병풍 크기로 놓은 수를 사군자수라 한다. 왜 자수(刺繡)가 인생의 터득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참을 '인(忍)'자를 곰곰이 뜯어 보면 뜻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칼[刃] 이 마음[心]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회의문자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위로 솟으려 하거나 옆으로 빠져나가려 하거나 하면 날카로운 칼날에 당장 베일 것만 같은, 그래서 당장 마음이 피라도 흘릴 것 같은 형상이..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2.한국적 화풀이

아내가 선별해서 그릇을 깨는 행위나 남편이 소화장치를 해놓고 제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울화의 자학적 처리라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이며, 큰 손실이 나지 않게끔 하는 점에서 경제적이다. 옛날 부녀자들은 사기그릇이나 오지 뚝배기 · 바가지 · 요강 따위에 금이 가거나 이가 빠져 못 쓰게 돼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근검절약해서가 아니고, 앞으로 있을 그것들의 쓸모를 위해 찬장이나 선반 위나 마루 밑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편과 싸울 일이 생긴다. 아무리 정당한 사연이라도 육체적으로 힘도 세고 가족제도적으로도 권위가 센 남편에게 약세일 수밖에 없어 얻어맞거나 내쫓기게 마련이다. 바로 이때다.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금 간 요강을 꺼내어 마당의 섬돌에 내동댕이치고, 부엌에 들어가 이 빠진 사..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1.왈츠와 칠태도

바흐의 나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을 들릴 듯 말듯 그 실험실에 들려주면 그 망상과 착란이 진통제로 통증이 사라지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감각 차단 실험이라는 게 있다. 빛과 소리만을 차단시키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감각인 시(視) · 청(聽) · 미(味) · (嗅) · 촉각(觸覺)을 완벽하게 차단시킨 방에 사람을 들여놓고 일정 시간이 지난다음의 반응을 보는 실험이다. 처음에는 시름시름 졸다가 환각이 발동, 환시 · 환청이 생겨나 착란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드는 피해망상, 자신이 누군가를 해쳤을 것이라는 가해망상 등 정신병의 초기증상이 드러나기도 하고. 이런 때 바흐의 나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을 들릴 듯 말 듯 그 실험실에 들려주면 그 망상과 착란이 진통제 통증에 사라지듯 사라져..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0.인간 저울

문명비평가요, 경영학자인 드러커는 집단에 있어 능률을 저하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인사에 따른 불만이라고 말한다. 어느 한 기업체가 '우리 회사에 필요 없는 사람 두 명과 필요한 사람 두 명의 이름을 적어내라' 하여 필요 없는 사람 23명을 일시에 해고하여 말썽이 된 일이 있었다. 인민재판 같은 무모한 근무 평정이 아닐 수 없다. 비단 해고뿐 아니라 승진을 시키는 데 있어서도 우리나라 기업체들은 일정한 규정이 없어 그것이 윗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기에 항상 불평불만이 팽배돼 있게 마련이다. 이같은 인민재판식의 기발한 평가방법이 나오게 된 것도 일정한 규정이 없기에 생겨난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미국 기업체들은 1년에 한 번 내지 두 번 종업원에 대한 근무평정(performance evalu..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9.여자의 성(姓)

시집을 가도 성은 시집 성을 따르지 않으며 이성(異姓)의 데릴사위도 처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심지어 내시가 이성의 양자를 들여도 그 가성(家姓)을 따르지 않았다. '하느님은 아담으로부터 肋骨 하나를 떼어 내어 그것으로 이브를 만들었다. 이제 그 늑골은 아담에게 돌려줄 때다.' 근대 부인해방운동은 이같이 아담의 늑골 반환에서 시작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의 일이었다. 이 '아담의 늑골'은 여자가 시집가면 의당 따르게 마련인 남편의 성(姓)을 의미하였다. 그 남편의 성을 돌려주고 떳떳이 내 본래의 성(maiden name)을 되찾는 것으로 남성우위 사회에서 여권의 초석을 닦으려 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미국의 맹렬 여성들이 맨 앞에 내세웠던 구호도 바로 '성(性)의 해방, 성(姓)의 해방'이었다.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8. 깜부기 아이펜슬

우리 옛 전통 화장품으로 꽃분이 있었다. 맨드라미나 봉숭아처럼 그다지 예쁘지 않고 밤에만 피는 분꽃 열매속에 들어있는 가루다. 요즘 화장품회사 사이에 한방(漢方)바람이 회오리치고 있다 한다. 우리 옛 부녀자들이 써왔던 한방미용이 복고되고 있으며, 한방화장품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치고는 좋은 바람이다.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피부 빛깔이 다르며, 피부의 성질이 유전적으로 다르기에 화장술은 나라마다 개성을 갖고 발달하게 마련인데, 서양 것이면 무턱대고 다 좋다는 맹신 때문에 서양 화장품이 판쳐온 터에 한방 바람은 문화회귀 현상으로서 주목을 끌게 한다. 우리 옛 전통 화장품으로 꽃분이 있었다. 맨드라미나 봉선화처럼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밤에만 피는 분꽃 열매 속에 들어있는 가루다. 피부가 희어진다 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7. 창포(菖蒲)

단오날 창포 화분을 방에 들여놓고 글을 읽으면 눈이 밝아지고 총명해지며, 단오날 밤 창포잎에 맺힌 밤이슬을 받아 눈을 닦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 했다. 추석하면 송편, 동지하면 팥죽이 연상되듯이 단오하면 창포(菖蒲)가 연상된다. 창포는 진흙 속에 피니 도(道)가 있고, 뿌리에 아홉개 마디가 있으니 절(節)이 있고, 잎이 칼날 같으니 무(武)가 있고, 그 잎을 말려 글을 썼으니 문(文)이 있다. 향(香)이 그윽하니 덕(德)이 있고, 물것이 물지 않으니 결(潔)이 있으며, 달여 먹으면 총명해지니 지(知)가 있다. 그래서 창포가 만발하는 단오날은 창포 뿌리로 창포술, 창포떡, 창포김치를 담가 먹었다. 먹고서 백일 후면 안색에 광채가 나고 수족에 기운이 생기며, 이목(耳目)이 밝아지고 백발이 검어지며 빠진 이..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6. 가수(嫁樹)

흔히들 서양사람은 동물을 사람처럼 사랑한다지만, 우리 한국사람처럼 나무나 씨앗까지도 시집보낼 만큼 식물을 사람처럼 사랑하지는 못했다. 사멸되고 없는 우리 정초 민속으로 도색주술(桃色呪術)을 들 수 있다. 정월 초사흗날 복숭아나 대추, 살구, 밤나무에 베푸는 가수(嫁樹), 곧 나무 시집보내는 민속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무설날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들의 Y자형 가지에다 갸름한 돌을 끼워줌으로써 많은 결실을 기원했던 것이다. 자손의 번창은 남녀의 혼인에서 비롯되듯이 과수(果樹)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수단을 쓰면 될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에서 이렇게 나무를 시집보냈던 것이다. 암나무 수나무가 따로 있어 멀리 두고 애만 태우는 은행나무에도 이 같은 인간적 배려를 등한히 하지 않았다. 은행..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5. 쌈·치마·보자기·포장 문화

한국사람은 본심일수록 남들에게 감추려 든다. 본심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주 같은 본능충족을 위한 동작일수록 남들로부터 은폐하려 든다. ■ 입는 옷이 아닌 감싸는 옷 어떤 동사(動詞)에는 그 동사가 갖는 뜻 말고도 그 동사로 연상되는 다른 뭣이 있다. 이를테면 감싼다[包]라는 말을 들으면 대뜸 여자답다는 감각이 촉발되고 연상이 된다. 감싼다는 동사가 여자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내 또래 나이의 연대 감각인지는 모른다. 달리 말하면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감싼다는 동사에서 여자답다라는 감각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감싼다는 것은 내향적인데 요즈음 젊은 여자들은 온통 외향적이기 때문이요, 또 입고 다니는 옷만 해도 옛날 여자 옷은 온통 감싸는 옷인데, 요즈음 옷은 집어 꿰는 옷이기에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4.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는 어떤 희망이나 의지 같은 것은 전혀 갖지 않고 그저 주어진 운명만을 감수하게끔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상머슴처럼 새경을 두 몫 받는 건장한 장정이 되어 주길 나에게 바랐고 아버지는 이 고을의 군수가 되길 바랐다. 한데 어머니는 나에게 뭣이 돼 달라고 말한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어떤 희망이나 의지 같은 것은 전혀 갖지 않고 그저 주어진 운명만을 감수하게끔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평생 동안 어머니가 잠든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잠든 훨씬 늦게까지 일하고, 내가 잠깨기 전 훨씬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일하기 때문이었다. 뭣이 돼 주길 꾸준히 바라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식을 위해 일만 해주는 우리 어머니가 훨씬 아늑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