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서양사람은 동물을 사람처럼 사랑한다지만, 우리 한국사람처럼 나무나 씨앗까지도 시집보낼 만큼 식물을 사람처럼 사랑하지는 못했다.
사멸되고 없는 우리 정초 민속으로 도색주술(桃色呪術)을 들 수 있다. 정월 초사흗날 복숭아나 대추, 살구, 밤나무에 베푸는 가수(嫁樹), 곧 나무 시집보내는 민속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무설날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들의 Y자형 가지에다 갸름한 돌을 끼워줌으로써 많은 결실을 기원했던 것이다.
자손의 번창은 남녀의 혼인에서 비롯되듯이 과수(果樹)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수단을 쓰면 될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에서 이렇게 나무를 시집보냈던 것이다. 암나무 수나무가 따로 있어 멀리 두고 애만 태우는 은행나무에도 이 같은 인간적 배려를 등한히 하지 않았다. 은행의 암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꼭 들어맞는 수나무토막을 끼워 주는 사랑의 작업을 대보름에 이르는 홀수날에 베풀었다.
‘나경(裸耕)’이라 하여 건장한 머슴으로 하여금 하체를 벌거벗겨 밭을 가는 도색 주술도 이 정초 보름 동안에 베풀었다. 대지는 생식력을 가진 어머니요, 그 대지가 생식할 수 있도록 교합(交合)을 유감(類感)시킨 것이 나경이다. 이 나경한 땅에 씨앗을 뿌릴 때는 상스럽고 음탕한 욕말을 중얼거려 도색무드를 조성하며 파종하게 돼 있다. 이 역시 도색 주술인 것이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도덕군자가 나경 끝에 씨앗을 뿌리는데, 차마 상스런 욕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 “부부지도 인지상정(夫婦之道人之常情)이라.” 하며 뿌렸단다. 한데 씨뿌리는 중에 손님이 찾아와서 아들놈이 대신 뿌리게 됐다. 그런데 역시 도덕군자의 아들인지라 “대인(大人)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만 되풀이하더라는 것이다. 부자간에 이 지경이라면 뿌려진 씨앗도 신날 리가 없고 싹틀 리도 없었겠다.
파종에 있어서의 도색 주술은 그 밖에도 다양했다. 참깨씨를 뿌릴 때는 반드시 부부가 더불어 뿌려야 풍작이 든다고 알았다. 그래서 '홀아비 참깨씨앗 뿌리기' 하면 하나마나한 일을 빗대는 속담이 되고 있다.
난초를 ‘대녀(待女)'라고도 한다. 난초 씨앗을 뿌리거나 이식을 할 때면 반드시 지나가는 여인을 기다렸다가 더불어 뿌리고 이식해야만이 향이 좋다 해서 얻은 이명(異名)인 것이다.
못자리에 볍씨를 뿌릴 때는 아들딸 많이 낳은 부인의 품을 사서 뿌리는데, 그 품삯을 우대하여 다산(多産)만큼 곱으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이를테면 여덟 자녀면 여덟 곱, 열 자녀면 열 곱이다. 씨앗 뿌릴 때 아이 못 낳는 석녀(石女)는 논밭 근처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금속의 풍속도 모두 도색 주술에서 이해될 수 있다. 흔히들 서양 사람은 동물을 사람처럼 사랑한다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나무나 씨앗까지도 시집보낼 만큼 식물을 사람처럼 사랑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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